“아…”라는 긴 탄식과 함께 “답답하다. 저도 정말 답답해요”라는 말이 이어졌다.
인사수석이 ‘검증’ 책임지지 않으면
결국 대통령에 모든 책임 돌아가
참모에 맡겨야 자신감 갖고 하는데
문 대통령은 착하기만 하고 전권 안줘
노무현 정부의 인사를 담당했던 정찬용(71) 전 청와대 인사수석은 29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부동산 투기와 거짓해명 논란 끝에 경질된 김기표 전 반부패비서관에 대한 말을 꺼내자 이같이 말했다.
이철희(왼쪽) 정무수석이 김외숙 인사수석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 전 수석은 처음엔 “내가 비판하면 듣는 분(문재인 대통령)도 불편하실 것”이라며 김 전 비서관을 비롯해 부실검증 논란의 중심에 선 김외숙 인사수석 관련 언급을 한사코 마다했다. 그러다 “청와대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자 “그럼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인사수석이 책임 지지 않으면 문재인 대통령이 책임 지란 말이냐”며 김 수석을 직접 겨냥한 말을 이어갔다.
그는 2005년 1월 이기준 교육부총리에 대한 인사실패 사례부터 언급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서울대 총장이던 이 전 부총리를 임명했지만, 그는 재산형성 과정의 의혹, 아들의 병역기피와 특례입학 의혹 등으로 임명 사흘만에 낙마했다.
문재인(오른쪽)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의 시민사회수석 시절, 정찬용 당시 인사수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정 전 수석은 노 전 대통령에게 “이럴 때는 인사수석의 목을 쳐야한다. 참모의 목은 이럴 때 잘라내라고 달려 있는 것”이라며 즉각 사표를 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이 “정 수석이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목을 치느냐”며 망설이자, 정 전 수석은 “유비가 잘못하면 유비가 죽느냐. 누군가를 참(斬)해야 산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 수석도 참 웃기는 사람”이라며 사의를 수용했다.
당시 참모 중에는 정 전 수석 등 6명이 함께 사표를 냈다. 당시 시민사회수석이던 문 대통령도 포함됐다. 노 전 대통령은 이중 ‘인사라인’의 핵심인 정 전 수석과 박정규 민정수석을 경질했다. 두 사람은 노 전 대통령의 ‘평생의 동지’로 불리는 최측근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결과를 발표하며 “국민들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한 문책이다. 잘못은 대통령이 한 것”이라고 사과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 당시 박정규 당시 민정수석과 나란히 앉아 있다. 박 전 수석은 문 대통령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소개해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앙포토
정 전 수석은 당시 인사에 대해 “이해찬 국무총리의 강력한 요구로 이뤄진 인사였다”고 설명했다. 검증과 무관하게 사실상 ‘무조건 임명’이란 결론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제청권자인 이 전 총리가 책임져야 했던 것 아닌가.
이해찬이 자기가 추천해놓고 문제가 되니까 동남아인가로 출장을 가버렸다. 신문에서 난리가 나서 대통령이 ‘아이고 걱정이다’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정 전 수석은 이 전 총리의 서울대 선배다.)
참모가 물러나 대통령이 부담을 덜었다.
인사는 기본적으로 인사의 1심, 민정의 2심, 대통령의 3심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그걸 ‘3심제 검증’이라고 불렀다. 사고가 나면 당연히 1ㆍ2심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한다. 거기서 책임지지 않으면 결국 대통령이 책임지라는 뜻이 돼 버린다.
문 대통령은 김외숙 수석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30년 인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문 대통령이 너무 선한 분이다. 사나이다웠던 노 전 대통령은 그냥 ‘정 수석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내가 엎어 먹건 돌려 먹건 상관하지 않았다. 전권을 위임하니 자신감을 가지고 했는데, 문 대통령은 착하기만하고 전권 위임을 못한다. 그래도 대통령 좀 잘 좀 챙겨달라.
정 전 수석이 이 전 부총리 때의 사례를 언급하며 인사수석의 전권을 강조한 이유는 문 대통령의 인사 실패가 인사수석에게 전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외숙 청와대 인사수석의 대표적 인사로 꼽히는 조국·추미애·박범계 등 전현 법무부 장관.연합뉴스
정 전 수석은 과거 “노 전 대통령이 ‘흙속에 있는 진주를 캐오라’고 당부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새 인물을 찾는 것이 인사수석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2019년 5월 임명된 김외숙 수석의 인사는 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김 수석은 조국ㆍ추미애ㆍ박범계로 이어진 법무부장관 인사를 주도했다. 문 대통령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항마로 내세웠던 인물들이다. 윤 전 총장 징계 국면에서 ‘우리법연구회’ 출신 이용구 법무부 전 차관이 임명됐을 때도 “검찰개혁을 위한 주문 인사”라는 말이 나왔다. 부동산 실패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을 때는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급 전문가’라는 변창흠 전 LH사장의 국토부 장관 임명이 강행됐다. 변 전 장관은 이후 LH직원들의 투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정치권에선 김기표 전 비서관 역시 대통령의 ‘하명 인사’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여권의 고위 인사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검찰과 소통하던 신현수 민정수석이 박범계 장관과의 갈등 끝에 물러나면서 검찰 출신인 김 전 비서관이 급하게 발탁됐을 수 있다”며 “청문회도 필요없는 인사였기 때문에 결함을 무시한 임명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번 사태는 절대 인사라인의 잘못이 아니다. 특히 김 수석에 대한 경질 가능성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도 ‘책임소재’를 묻는 말에는 하나같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투기 의혹을 받고 있는 김기표 전 반부패비서관이 소요한 경기도 광주의 맹지.
이명박 정부 때 홍보수석을 지낸 이동관 전 수석은 “인사의 궁극적 책임은 당연히 인사권자인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대통령에게 욕을 먹으면서 결격자에 대한 임명을 반대하고, 인사가 잘못 되면 먼저 책임을 지는 것이 참모의 역할”이라며 “김 수석처럼 자신의 잘못까지 대통령에게 떠넘기며 자리를 지키는 것은 불충을 넘은 역사적 대역죄로 기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