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시인
1946년 강원 양양군 출생
1976년 심상지 시 '겨울추상화' 발표 데뮈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강원민족예술상.
시집: 『동해별곡』 『우리는 읍으로 간다. 』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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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
큰눈 온 날 아침
부러져 나간 소나무들 보면 눈부시다
그들은 밤새 뭔가와 맞서다가
무참하게 꺾였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공손하게 몸을 내맡겼던 게 아닐까
조금씩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빛나는 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
나도 때로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꽃
노래하면 몸이 아파
그러한 그리움으로 한 서른 해 앓다 일어
피는 꽃을 보면 눈물 나네
노래로는 노래에 이르지 못해
먼 강 푸른 기슭에서 만났다 헤어지던 바람은
흐린 날 서쪽으로만 가고
작고 작은 말을 타고 삶의 거리를 가며
아름다운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알기까진
나는 너무 많이 울었네
한 서른 해 아픔으로도
사랑 하나 깨우지 못하여
그러한 그리움으로
마당귀 피는 꽃을 보면 눈물나네
봄날 옛집에 가서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고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샛령을 넘으며
영을 넘는다
동해 어염 지고
인제 원통 바꿈이 다니던 사람들의
길은 지워지고
고래등처럼 푸른 영만 남았는데
이렇게 험한 곳에서도
나무들은 문중을 이뤘구나
북설악 한여름에 무슨 잔치가 있었는지
골짝 물마다 얼굴이 벌건 가재들이 어슬렁거리고
벙치매미도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비탈이 험한 곳일수록 꼿꼿한 나무들이
그들 말로
오늘은 꽤 지저분한 짐승 하나가
지나간다고 하는 것 같은데
물소리가 얼른 지우며 간다
실내 포장마차
마차는 달린다
흙먼지 속에 채찍을 휘두르며 밤새 달린다
누우런 알전구에 제 그림자를 비추며
덜컹덜컹 역전 같은 데를 달리는데
울퉁불퉁 변두리만 달리는데
말이 쓰러졌는데 마차만 남아서
계속 달리다가 배고파서
우동이나 말아 먹이며 달리다가
주꾸미에 소주나 마시며 달리다가
아무리 달려 봤자 개척할 땅도 없고
네비게이션도 없고 딱지만 떼이니까
마침내 우리 동네 아파트 앞 가게 한 칸을 얻어들고는
대머리 인디언 같은 주인은
그래도 갈 길이 멀다고
제 몸에다 밤새 채찍질을 해대는데……
첫댓글 지척에 사시는 선생님의 시가 있어 더욱 반가움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