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의 마조히즘 ............................ 마광수
자허 마조흐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의 마조히즘은 진정한 마조히즘이 아니다.
마조히즘의 어원은 자허 마조흐의 자전적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유래되었다. 이
소설은 예전부터 부(富)와 권력을 상징하는 모피에 대한 페티시즘과, 무언가에 구속되고
속박되면서 숭배의 대상으로부터 가해지는 육체적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성 취향인
마조히즘을 맛보기 원하는 작가의 성적(性的)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진정한 마조히즘을 위해서는 그를 지배하는 사디스트가 필요하다. 자허 마조호는 이 소설
속에서 반다라는 여성을 등장시켜 주인공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하게 하는데, 반다라는 여
성의 심리가 주목할만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완전히 사디즘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다만 성
에 대해서 개방적이면서, 기존의 성윤리와 성도덕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주
인공의 요구를 들어줌에 따라 차츰 그녀 안에 내재돼 있던 사디즘적 요소가 발현된다. 이
에 대한 반다의 마음 속 갈등 묘사는 이 소설에서 큰 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남주인공의 희망과는 달리 결국 반다는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하며 돌봐줄 주인이
면서 사디스트인 다른 남자한테로 떠나간다. 떠나가는 과정에서 그녀는 그녀의 새 남자에
게 모피코트를 입히고 남주인공에게 채찍을 휘두르게 한다. 그 과정에서 남주인공는 분노
와 자괴감을 느끼고. 결국 여자는 남자의 적(敵)일 뿐이라는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처럼 남주인공은 자신을 지배해줄 사디스트를 찾지 못한채 소설은 끝나게 된다.
과연 이러한 모습에서 진정한 마조히스트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을까? 그런 의문점을 풀
려면 남주인공과 반다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처음에 남주인공은 반다의
모피코트를 입은 모습에 이끌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페티시즘 취향에 의해서이
다. 소설에서 기술하는 것 같이, 남주인공은 처음엔 그녀에게 자기와의 결혼을 요구한다.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소유하고자, 결혼이라는 사회적 구속력을 통해서 그녀를 얻고싶어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다는 이에 대한 확답을 안 하면서 1 년간의 교제만을 허락하고, 그 기간 동안 그
녀가 그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게 되면 그와의 결혼을 승낙하겠다고 말한다. 그녀도 그의
시적(詩的) 감수성과 풍부한 지식에 어느 정도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주인공
은 그녀와 당장 결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녀의 노예가 되겠다고 말한다. 즉 그의 마조
히즘적 쾌락의 시작은 본래부터 <결혼을 할 수 없다면>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진실된 사랑을 원한데 반하여, 그는 오직 그가 사랑하는 여인으
로부터 지배받고 싶은 충동이 더 강했다. 애초부터 마조히즘적 사랑의 대상이 잘못된 것이
었던 것이다. 또한 남주인공 스스로도 결혼을 못하면 노예가 되겠다는 식의 이분법적 생각
을 가지고 있었으며, 완전히 그를 그녀에게 노예상태로 맡기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녀와의
계약에서 두 가지 조항을 설정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녀는 그 조약에 대해 애매한
동의를 하고 있고, 결국 그는 그녀의 다른 남자 애인에 의해서 원치 않는 채찍질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반다와 그녀의 새 애인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계속 주인공을 괴롭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남주인공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가 진정한 마조히스트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새 애인을 통해서 대리적으로 가해지는 고통도, 그에게는 짜릿한
쾌락을 선사해주었을 것이다.
작가는 본인의 마조히즘적 취향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부인 때문에 성적 불만족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사실 혼자만의 마조히즘은 완전하지가 않다. 그를 지배하는 사디스트가
필요한 것이다. 동양에서 음(陰)과 양(陽)이 공존해야만 조화롭게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처
럼. 이 소설 속 남주인공의 마조히즘같이 어느 한쪽만의 성 취향이 강하고 그 대상이 없다
면, 그 사람은 마조히즘을 맛볼 수 없다. 자기파괴적인 마조히스트와 가학적인 사디스트
간의 만남은 그래서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일방적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상호조화의 관계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소설에 나타
난 마조히즘은 남녀 서로가 성적(性的) 쿵짝이 맞아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사도마조히즘이
아니라 단지 한쪽만의 일방적인 마조히즘이라는 점에서, 꺼림칙한 뒷맛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