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4월13일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37,21ㄴ-28
복음 요한 복음 11,45-56
◈ [서울] 사순 제5주간 토요일
2019년 다해 4월1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지난 강원도의 화재는 신속한 대처와 군인, 공무원, 소방대원의 긴밀한
협조로 더 큰 피해 없이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환갑 기념으로
제주 여행을 갔던 속초 시장이 늦게 온 것을 문제 삼는 정당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서 늦게 온 거라고 합니다. 국가
안보실장을 국회에서 오래 붙잡았다고 문제 삼는 정당이 있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몰라서 그랬다고 합니다. 서로를 감싸주기보다는
상대의 허물을 들춰내려는 모습입니다. 마치 오늘 가야파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화재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아름다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펜션을 운영하는 분이 펜션을 대피소로
개방했다고 합니다. 어린 아기를 보듬고 온 사람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펜션으로 온 사람을 위해서 빵과 음료수를 준비해
주었다고 합니다. 펜션에 머물던 사람들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청소도 깨끗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펜션을 잠자리로 내주고,
빵과 음료를 마련해 준 분은 이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화재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린 분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화재의 상황을 검색하였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자신의 능력을 나누어
준 따뜻한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정보를
알려준 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들춰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남이 나에게 해 주기 원하는 일을 먼저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파수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등대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거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선배 신부님들과 남미 여행을 갑니다.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합니다. 묵상은 남미 여정이 끝나는 5월 12일부터 나누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감정에 솔직해야 하는 이유
2019년 다해 4월1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감정에 솔직해야 하는 이유>
복음: 요한 11,45-56
‘레온 페스팅거’란 학자는 1950년대 초에 신문에서 이상한 기사를 보게
됩니다. 어느 사이비 교주가 조만간 큰 홍수가 일어날 것이란 예언을
하고 오로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만 비행접시가 나타나
구원해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를 믿은 사람들은 전재산을 교주에게
맡기고 철야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이 왔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기는커녕 날씨만 화창하였습니다. 교주는 다시 신도들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세상을 구했습니다!”
교인들은 더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더 열심히 교주를 믿었습니다.
교주는 누가 봐도 사기꾼입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수만
명이 교주를 믿을 수 있을까요? 페스팅거 교수는 이런 상황을 ‘인지
부조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인지 부조화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편한 감정을 달래기 위해 생각과 행동으로 평화를 찾아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합리화는 진정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과는 다른 새로운 자신을 만들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솝우화에서 여우가 맛있게 보이는 포도송이를 보고 먹고 싶어 여러
번 시도를 해 보다 손이 닿지 않자 ‘저 포도는 분명히 신 포도일거야!’
라고 생각하고 가버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렇게 불만족한 자신의
마음을 자기합리화로 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자기합리화를 통해
사이비종교도 믿게 되고 심지어 살인도 하게 됩니다. 여우는 그 포도를
먹지 못해 안타깝고 화가 나는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았어야 합니다.
오늘 유다인들이 모여 이런 행동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 적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결정을 내렸습니다. 마음에서 올라오는
질투와 시기심, 화 등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감정을
덮어버리기 위해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드는 것처럼 보이면 로마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이유를
찾아냅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핑계들은 다 맞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속일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을 속이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 – 생각 – 말, 이 셋 중 가장 솔직한 것이 무엇일까요? 가장 깊숙한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일 것입니다. 생각은 머리로 하고 말은 입으로
합니다. 인간은 ‘심장 – 머리 – 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간에게서
심장이 가장 깊은 부분입니다. 그러니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나의 모습과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이 감정이 생각을 거치면
퇴색되고 말과 행동으로 나오면 전혀 다르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말과 행동, 혹은 생각만 바라보면 나를 아주 딴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속일 수 없습니다. 가장 솔직한 것은 마음입니다. 나의
시선을 말이나 생각에 두기보다는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 욕구에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솔직할 수 있고 자기 합리화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에 솔직하라는 말은 나의 감정을 내가 보란 말입니다. 감정대로
하다가는 인간관계가 다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표현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게 정직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나는
표현되는 내가 아니라 그런 감정이 일게 만드는 나입니다.
솔직해지라는 말은 그 감정을 나라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유다인들의 감정은 질투였습니다. 질투하는 자신들을 생각과 말로
숨겼습니다. 그리고 애국자가 되어 하느님까지 살해하게 됩니다.
질투가 일어나는데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 지경까지 간
것입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내가 참 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진짜 나는 나의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감정에
솔직해지십시오. 그래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5주간 토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11,45-56: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죽은 라자로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소문이 퍼져나가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요.”(47-48절). 그들은 세상의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주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정말 성전과 백성을 걱정해서 이런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염려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이 만일에
민중봉기라도 하게 되면 로마의 진압을 받게 되고, 성전은 파괴되며,
유다민족은 완전히 지배를 당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생각을 하였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사람들이
보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예수님을 견제하기 위해,
그 사태를 수습하려고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이때에 대사제 가야파가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49-50절)하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뿐 아니라, 흩어져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예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위로써의 의미를 갖는다. 이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하여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이해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성찰해 보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안전과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는 예수라는 존재를
없애야 한다는 결정이 나도록 당시의 상황을 몰고 갔던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죽일 방법만 찾았고 이제는 그렇게 하기로 결의하고,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진위를 가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명예나 안위에
우선을 두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기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살고 있는 다른 무죄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하며,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 되도록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 53)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 53)
빛을 그토록 갈망하지만 한줄기 빛마저 우리는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내면을 비추듯 우리의 마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는 구원의 빛입니다.
어둠을 선택하고 어둠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우리의
모순이며 우리의 무자비한 이중성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주님을 외면할 만큼 망가져 있음을 깨닫게됩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또한 어둠을 뚫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며 죽일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우리 내면을 돌아보는
은총의 사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의 빛이시여 이중적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수도회] 꽃이 피는 것도 아름답지만 지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2019년 다해 4월1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꽃이 피는 것도 아름답지만 지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우리 나라의 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 한껏 자태를 자랑하니, 원없이 눈요기를 할 수 있습니다. 샛노란
개나리며 화사한 벚꽃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청춘이 짧듯이 꿈결같은 봄날 역시 짧습니다.
한쪽에서는 벌써 작별 인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니, 할머니 손을 꼭 잡고 하교하는 손녀의 얼굴 위로 새하얀
꽃잎들이 하염없이 흩날리며 떨어집니다. 할머니의 얼굴에도, 손녀의
얼굴에도 새하얀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꽃이 피는 것도 눈물겹도록 아름답지만, 꽃이 지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눈물겹고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소멸되는 것, 사라지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존재와 소멸 사이의 경계에 서서 끝없는 갈등과 방황을
거듭합니다. 관건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해서 충만히, 열정을 지니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이미 소멸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무의미한 삶, 열정이 사라진 삶, 이미 비존재로
전락해서 허깨비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보시고,
진정으로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지상생활은 불과 33년뿐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준비기간
30년을 빼면 불과 3년 간의 공생활 기간 뿐이었습니다. 이 시기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참 삶을 사셨습니다. 가치와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 삶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걸맞는 삶, 다시
말해서 아버지께 철저히 순명하는 삶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존재와 소멸 사이의 경계에 서계십니다.
살기등등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이란 존재를 소멸시키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존재와 소멸 사이의 경계를 허무신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잇단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으시며 당당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은 물론 죽음조차 정복하신
메시아시기 때문입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사흘간의 수난과 죽음의 시기, 잠시 이 땅
위에서 소멸되시지만, 언제 그랬냐는듯이 즉시 소멸에서 존재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광스런 부활로 죽을 운명인 우리, 완전히 소멸될
운명의 우리들에게도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은총에로
초대하십니다. 감사하며 찬미드리며 마지못해 사는 하루가 아니라
열정으로 충만한 하루를 살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전주] 사순 제5주간 토요일|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에제키엘의 메시아 예언은 바빌론에 유배당한 히브리 백성이 장차
이루게 될 일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솔로몬이 죽은 뒤 갈라진 두 왕국, 곧 유다와 이스라엘처럼
갈라놓지 않고 한 민족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대리자, 미래의 다윗인 한 목자 아래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공동체를 만들 것을 제시합니다. 그 목자는 당신 백성과
새롭고 영원한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심하게 증오를 받는
표적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인 라자로의 부활은 의회에서 그분을 죽이기로
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백성에게 불러일으키는 종교적 상황과 그에 따른 정치적
불안에 의회는 대처할 수 없습니다.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공적으로
결정합니다.
그렇지만 죄인들을 속량하는 그분의 죽음은 민족주의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유다 민족만이 아니라
죄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를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새 가정인 교회는 소속된 인종에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둡니다. 교회는 한 목자, 곧 예수님 아래 하나로
모인 양 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셨듯이,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목적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 광주 가톨릭 대학교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모으는 일에 동참해야한다
2019년 다해 4월1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요한 11,46-56)
하나로 모으기 위한 일에 동참해야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카야파는 의회의 결의를 독려하고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사람은
카야파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 가운데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게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실 죽어야
할 사람이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굿은 일에는 나이고 생색나는 일에는 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신 주님처럼’ 우리도
모으기 위한 노력에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신속하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미루지 않는 사랑,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4월 13일 (토) - 스펀지 물 젖듯
오늘은 ‘스펀지에 물 젖듯’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 말씀에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몸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떡은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는 자신의 피라
말하며 예수께서 죽으시고 난 다음에 오늘 같이 식사했던 것을
기념하고 늘 예수님이 우리의 몸에서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상징적인
의식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성찬식을 하면서 지난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다시 한 번 멀어졌던 예수님을 내 마음으로
모셔드리고 동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한 달에 한번 씩 월 첫 째 주에 성찬식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권사님이 “일 년에 한 두 번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매달 하니 참 번거롭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그동안에 생각 없이 성찬을 할
때도 있었고 딴 생각을 하면서 성찬을 할 때도 있었다는 것인데 참으로
우리가 성찬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겨야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새삼
마음에 정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성찬은 지나가는 차 정거장처럼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겠노라는 절절한 스펀지에 물 젖듯이
주님을 사모하는 참 의식의 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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