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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과 희년의 축복
레 25:8-22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13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14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 각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
15 그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서 살 것이요 그도 소출을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16 연수가 많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많이 매기고 연수가 적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적게 매길지니 곧 그가 소출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
17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18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19 땅은 그것의 열매를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20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22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에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
레 25:8-22 / [희년]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가면 49년이 지나가는 것이다. 9) 이렇게 지나고 나서 그 이듬해 일곱째 달 십일이 되면 이날은 나 여호와가 너희의 모든 허물을 벗겨 주는 날이다. 이날 뿔나팔을 불어 온 누리에 그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여라. 10) 그 50년째 되는 해를 다른 해와 구별되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한해는 그야말로 기쁨이 넘치는 해, 곧 희년이다. 이 해는 빚 때문에 땅을 팔았던 사람이 그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해이며 빚 때문에 자기 몸을 노예로 팔아 넘겼던 사람도 다시 자기 지파로 되돌아갈 수 있는 해방의 해이다. 11) 너희는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으로 삼아라. 이 한해 동안에는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저절로 자라난 곡식이나 포도 송이를 거두어 들이지 말아라. 12) 이 해는 기쁨이 넘치는 희년이니 여느해와는 다르게 보내라. 이 한해 동안에는 밭에서 거두어 둔 소출만을 먹고 살아라. 13) 희년은 팔아 넘겼던 모든 땅이 본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해이다. 14 그러므로 너희가 같은 겨레에게 땅을 팔 때나 살 때에 서로 속지 말아라. 15) 땅을 살 때 그 다음 희년까지 몇 해가 남았는지 계산하여 사들이고 파는 사람은 앞으로 희년이 돌아올 때까지 거두어들일 수 있는 소출의 양을 환산하여 땅값을 매겨라. 16) 곧 남아 있는 햇수가 많으면 그 땅값을 많이 치르고 남아 있는 햇수가 적으면 그 땅값을 적게 치러라. 17) 같은 겨레 이스라엘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말아라.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18) [안식년에 내리시는 복] 너희는 내가 내려 준 규정과 법을 잘 지켜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리하여야 그 땅에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19) 땅은 열매를 낼 것이며 너희는 그 소출을 배불리 먹으며 편안히 살 것이다. 20) `일곱째 해가 돌아오면 땅에 씨도 뿌리지 않을 텐데 그럼 무얼 먹고 사나!'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21) 내가 이미 명을 내려 두었으니 여섯째 해가 되면 땅이 복을 받아 3년을 먹고도 남을 만큼 소출을 내리라. 22) 여덟째 해가 되어 너희가 땅에 씨를 뿌려도 너희는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다. 너희는 아홉째 해에 소출을 거둘 때까지 묵은 곡식을 먹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안식년과 희년(Jubilee)을 잘 지키면 특별하게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8-12)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그 이듬해 곧 오십 년째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한 후 매 칠 년이 되는 해는 안식년으로 지키고,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그 이듬해는 희년으로 지키게 됩니다. 평상시 속죄일에는 나팔을 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희년이 시작될 때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shofar)을 크게 불어 희년을 알렸습니다. 희년에는 종이 되었던 자가 해방되고 잃었던 기업을 다시 찾고, 자기의 기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희년의 두 가지 의미는 안식과 자유입니다. 그때에는 안식년처럼 씨를 뿌리거나 경작하지 않고 추수하지 않을지라도 먹을 만큼만 먹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희년에는(13-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분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희년 제도를 통해 만일 자신의 땅을 잃어버렸을지라도 영구히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희년에는 본래의 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이 되면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갔습니다. 토지의 가격은 사고파는 그 시점으로부터 희년까지의 기간에 따라 값이 정해졌습니다. 희년을 기준으로 땅값을 정하는 이유는 그 땅이 희년이 되면 본래의 소유주에게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토지 거래 제도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본래의 기업은 받은 자에게 항상 속해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18-22) 이는 안식년과 희년의 특별한 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안식년과 희년에 아무것도 심거나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해 농사를 쉬면 그 다음 해에 아무것도 거둘 수 없습니다. 희년이 오면 연이어 2년 동안 농사를 쉬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사느냐고 걱정할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년이나 희년에는 농사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제6년에는 3년 동안 쓰기에 부족하지 않도록 축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즉 안식년이나 희년은 주의 백성들을 훈련하시는 기간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는 기간입니다.
적용: 당신은 안식년과 희년을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뛰면 걷고 싶고, 걸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마음속에 탐욕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참된 만족은 절제와 인내에서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절제와 인내에 특화된 인간이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 본성이 우리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사는 자가 되면 현재의 상황을 기쁘게 여길 것입니다.
< 설 교 >
가난한 자를 해방하시는 예수
레 25:8-14, 엡 2:11-18, 눅 4:16-19 / 인명진 목사
지난 수요일이 8.15 해방 73주년이었습니다. 8.15 해방은 우리나라 역사 상 가장 뜻 깊은 날이요, 가장 기쁜 날이요, 가장 큰 국가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나라의 울타리가 든든할 때에는 울타리의 중요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잃어버리고 난 후에, 무너지고 난 후에 나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때 이름뿐인 대한제국의 백성들은 주인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 하면서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집단이주 했습니다.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끌려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특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8천 명 정도가 이민을 갔는데 하루에 16시간씩 일했습니다. 말이 이민이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생존권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지요.
이뿐 아닙니다. 이 땅에 살던 우리 할아버지들도 남의 나라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끌려가 사할린에서, 남양군도에서, 미얀마에서, 이름 모를 전쟁터에서 수십만 명이 죽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일본 놈들의 성노리개로 전쟁터마다 끌려 다니면서 짐승보다 더 못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인간들이 일으킨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식민지 여성을 이렇게 학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또한 우리 말, 우리글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조상대대로 사용하던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강제개명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는 일본의 천황을 숭배하라고 신사까지 지어서 일본의 잡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신앙적인 강요까지 받았습니다. 전쟁 막바지에는 군수물자가 모자라자 교회의 종을 빼앗아 일본으로 싣고 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문경에서 섬기던 교회는 일제 말엽에 교회 종을 빼앗겼습니다. 일본으로 싣고 가기 위해 면사무소에 모아놓았지만 일본으로 싣고 가지도 못하고 일본이 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해서 살아남은 정권과 독재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2003년 그 교회 100주년 기념예배 때에 일제에게 징발 당했던 그 종을 복원하여 타종식을 가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새벽마다 종을 쳤습니다. 저 종소리가 이 민족을 깨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을 받다가 해방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해방이었습니까? 그러나 8.15는 억압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8.15를 기점으로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쪽은 미국이 신탁통치 하고, 북쪽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결국은 강대국의 이권 다툼에 조국의 허리가 잘려졌습니다.
똑같은 전범국가인 독일처럼 일본을 두 동강 내어 신탁통치를 해야 마땅한데 왜 남의 나라 허리를 잘라야 했는가? 오랫동안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제야 어렴풋하게 깨달아지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도 우리나라 땅을 일본 땅이라고 생각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나라도 이 한반도를 대한민국의 땅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족과 나라가 강대국의 횡포 앞에서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은 부동항을 확보하고,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지도 놓고 금 그은 것이지요.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전범국가요, 패전국인 일본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직까지 분단으로 그 아픔을 토해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주권이 없기 때문에 남의 나라 땅을 자기 마음대로 나누는데도 털 깎이는 양처럼 눈만 껌뻑이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대대로 잊지 않고 기억하는 힘입니다. 아픔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을 통해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인 동시에 하늘나라 시민입니다. 땅에 살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가르쳐 주는 교훈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더 큰 해방의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아픔만 기억하면 역사가 주는 교훈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의식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역사 앞에서 가져야 하는 영적인 의식은 무엇입니까? 구한말 우리나라 주권이 빼앗기기 전에 복음이 들어와 일제 강점기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흑암 중에 있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습니다.” 나라는 잃었지만 무지와 어둠에서 눈을 떴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어둠의 역사 한 가운데 복음이 들어온 것이 너무도 크나 큰 은총이었습니다.
또한 해방 후에 이 민족의 격동기, 건국과 6.25 전쟁, 경제개발과 민주화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이렇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까지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고백하는 영적인 인식입니다. 저는 오늘 갈릴리 성도들과 한걸음 더 나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어둠의 권세로부터 해방 받았듯이 우리 주변의 가난한 나라와 이웃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우리의 아픔을 하나님이 들으셨고,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과거 우리처럼 해방을 기다리는 이웃 나라와 이웃 사람의 멍에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해방이요, 해방자 예수를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 ‘제사장 나라’라는 아주 독특한 호칭, 붙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픔을 치유해주시고 축복해 주신 것처럼 너희도 이 세상의 가난한 나라와 이웃에게 구원을 손길을 뻗치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를 씻어주는 역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웃을 축복해 주는 역할입니다. 목사의 역할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허물을 씻어주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시기를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가난한 나라와 이웃의 죄를 씻어주고 복을 나누어주기 위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 거민이 제사장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저 옛날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우리 대한민국을 제사장 나라로 삼았습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에서 초대교회를 제외하고 한국교회만큼 축복해 주신 적은 전무합니다. 앞으로 대한민국과 같이 영적으로 복을 부어주시는 나라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대단한 은총을 덧입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가장 많이 발달한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만 잘 먹고 살라고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제사장 나라로 삼고 받은 복과 은혜를 나누어주기 위해 이렇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역사의 아픔을 겪었던 민족의 눈물을 씻겨주고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거민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나라의 사명입니다.
지난 8월 15일에 파키스탄 공동체가 4층 친교실에서 파키스탄 독립기념 축하예배를 드렸습니다.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이 땅에 나그네로 온 파키스탄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이 주신 해방과 자유를 노래하는 것이 참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제 이웃 나라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치유해주고, 해방과 자유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 나라의 멍에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어둠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평생을 몸 바쳐 사셨고, 결국 이것을 이루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구원을 이웃에게 증거하고 선포하며 죄와 어둠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서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해방시켜야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메시야 취임사라고 말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서 하는 연설은 임기 동안 행해 나갈 일들과 통치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셔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메시야 취임사입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한 곳 찾아서 읽으셨습니다. 바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입니다. 흔히 제 3 이사야라고 불리는데 남의 나라에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속박되어 있던 바벨론 포로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메시야가 오면 포로 된 사람과 눌린 사람을 자유케 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폭정과 질병과 죄악에 억눌려 슬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속히 메시야가 오셔서 이런 약속을 이루어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한 바로 그 분이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펼쳐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사렛 회당에서 이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낭떠러지 끝으로 몰고 가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또한 고향 사람들 어느 누구도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메시야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떻게 사셨습니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어떤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까?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에서는 영적인 억압과 육체적인 억압 이분법으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주신 영적인 해방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영적인 해방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 또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영혼과 육체를 아우르는 해방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전인적인 해방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심지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말라.” 전형적인 영적인 해방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에 사로잡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을 때 하나님을 바르게 알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모와 모함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면서 저들이 하나님 바로 알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자를 영적으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보가 여기에서만 그쳤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종교지도자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병이 한 인간의 건강한 삶을 억압할 때 그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때로는 맹인을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또한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민중의 배고픔을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육체와 삶을 억압하는 짐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과 육체를 아우르는 전인적인 해방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은 한 인격 안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해방되어야 하고, 육체적인 억압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는 메시야 취임사가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유독 누가만 메시야 취임사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누구보다 가난한 자와 여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누가는 이 연장선에서 메시야 취임사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는 이 희년을 은혜의 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61장 말씀을 인용하셨지만 오늘 구약의 말씀 희년의 말씀까지 올라갑니다. 희년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8.15 기념 주일에 희년과 함께 고향, 조국,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네 가지 단어가 함께 떠오릅니다. 이 네 가지 단어는 평생을 가슴에 묻고 인생이 힘들 때마다 아련하게 떠올리며 힘을 얻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만 해도 힘이 생기는 단어입니다. 근원을 생각하는 단어입니다.
죄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인생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욕심의 종에서 벗어나고, 이웃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며 누리는 안식과 평화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셨고, 많은 사람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상실했던 땅, 첫 번째 아담이 상실했던 생명, 첫 번째 아담이 상실했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요, 하나님 나라요, 희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희년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죄의 종노릇 하며 마귀의 저주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와 은혜를 누리게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희년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실천 되는 현장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희년공동체로 살았습니다. 구체적인 나눔과 섬김을 교회 안에서 실천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웃의 억압과 멍에를 벗겨주고 해방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바로 그곳에 성령이 함께 하셔서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평화와 안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갈릴리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양각나팔소리가 온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야 합니다. 가난과 어둠과 무지에 빠져 있는 이웃 나라를 향해 해방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웃 나라 나그네와 힘없는 사람과 가난한 이웃이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 너무도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5천년의 역사 가운데 지금만큼 잘 살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 작은 나라가 세계 11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제는 더 잘 먹고 더 잘 누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연약하여 물질적인 어려움에 억눌린 이웃 나라와 이웃을 돕는 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나누면서도 우리 마음은 무겁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형편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한편으로는 경제대국이 되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교회도 나라의 기운과 마찬가지로 그 영향력을 자꾸만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때에 우리는 저 옛날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았던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나라와 이웃을 해방시키고 축복하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과 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국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신 것 같이 우리도 이주 노동자나 가난한 자들이 억압받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만큼 귀한 사명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사회적으로 고통에 억눌리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해방자요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방자요 구원자인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이웃을 도우려면 우리 자신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를 해방시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도 개인적인 욕심이나 교회적인 욕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희생하면 손해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에는 절대 손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희생하고 헌신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상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축복을 받는 최상의 길은 우리가 받은 복으로 이웃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받은 축복을 움켜쥐고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지는 않으면서 더 달라고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주시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주신 것을 하나님 뜻대로 잘 사용하는 사람에게 더 주시는 분입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을 맡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73년 전에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고 나라를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를 지독한 가난과 고통과 죄에서 해방시켜주시고 오늘날 이렇게 잘 살게 해주셨습니다. 또 늘 돌봐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힘과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보다 약한 사람을 해방시켜 주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뿐 아니라 이웃의 멍에를 벗겨주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우리에게 더 큰 은총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가난한 억눌리는 나라와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희년을 선포하셨고, 우리를 제국주의 그늘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해방자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누군가를 해방시키면서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처럼 이 땅에 억눌린 나라와 이웃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
희년의 복음
레위기 25:8-12 / 피영민 목사
서 론
성경에는 의미 있는 숫자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숫자들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수(數)신학’이라고 합니다. 숫자가 지닌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성경에 많은 숫자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복된 숫자는 ‘7’입니다. 우선 7은 창조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도 6일 동안 일했다면 하루는 쉬어야 합니다. 쉼과 복의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날을 구별하여 지키도록 십계명 중에 제4계명을 넣어두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숫자는 거의 7인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인의 절기가 7가지이고, 무교절이 7일 동안 지켜졌으며, 오순절도 안식일이 7번 지난 후 그 이튿날에 지킵니다. 안식일도 7일째 되는 날이고, 안식년도 7년째 되는 해에 지킵니다.
또 7월 10일은 대속죄일인데, 대제사장이 숫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립니다. 그리고 지성소에서 나와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에 피를 또 뿌립니다. 몇 번 뿌렸을까요? 7번씩 뿌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년이 7번 반복 되고 그 이듬해인 50년이 되는 해, 즉 ‘희년’(Jubilee)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희년은 49년째도 안식년이고, 50년째도 안식년이기 때문에 두 해를 계속해서 안식하게 됩니다. 오늘은 다섯 가지 주제로 희년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Ⅰ. 희년 제도의 기본은 ‘안식년 제도’에 있다.
희년은 특별한 안식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식년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23장 10~11절에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년 동안은 씨를 심고 열매도 거둬 먹고 살지만 7년째 안식년이 되면 씨를 뿌리지도 않고 열매도 거두지 않음으로 일절 농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농사를 짓지 않고 무엇을 먹고 살겠습니까? 물론 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과실이 있었지만, 그런 열매는 자기 땅에서 난 것이라고 해서 저장의 목적으로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에 하나님이 주시는 곡식들은 특정 주인이 없는 것이고,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는 절도죄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식년에 하나님이 저절로 주시는 양곡들은 공동소유가 됩니다. 아무나 먹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심지어 짐승들까지 돌봐야 한다는 것이 안식년의 첫 번째 정신입니다.
신명기 15장 1~2절에는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년을 ‘면제년’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돈을 빌려줬다면 안식년 끝에 형제가 돈을 갚지 못해도 빚을 탕감해 주라는 것입니다. 7년째가 될 때까지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년이 되면 면제해 주도록 했습니다. 빚을 졌는데, 면제 받은 사람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식년은 가난한 사람이나 빚진 사람에게 엄청나게 좋은 해입니다.
또 신명기 15장 12절에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년이 아니라 할지라도 형제가 종이 되었다면 7년째에는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지 블레셋, 암몬, 모압과 같은 이방 백성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줬다면 끝까지 가서 받아야 하고, 이방인들을 종으로 삼았으면 안식년이 되어도 자유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년은 이스라엘 백성과 형제들에게 국한되어 이뤄지는 제도입니다. 안식년이 되면 토지도 쉬고 사람도 쉬고 빚도 면제해 주고 노예로 삼은 형제가 있으면 풀어 자유를 주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제도입니까?
안식년을 주신 목적은 다섯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땅을 등기해서 가지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땅의 궁극적인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살아있는 동안 인간이 빌려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반납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데, 땅의 주인은 국가가 아닙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는 동안 땅을 소유하고 살아도, 근본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안식년을 주신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나 땅이나 6년 정도 일하고 사용했다면, 1년은 쉬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1년간의 휴작을 통해서 땅의 생산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고, 산성화를 막을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은 국토가 넓기도 하지만 1년 정도 땅을 쉬게 합니다. 우리나라도 6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면 가급적 1년은 쉬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소출을 늘리고, 토지의 산성화를 막아 양질의 양곡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양곡을 먹는 사람들이 건강해 집니다. 토지를 쉬게 하지 않으면 좋은 양곡을 얻을 수 없고, 사람의 몸도 산성화되기 때문에 아토피나 각종 피부질환들이 생기게 됩니다. 안식년은 토지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토지도 쉬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인간도 쉬어야 합니다. 인간도 무한정 계속해서 일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쉬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영적인 생활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일하면서 소홀했던 기도, 말씀, 예배 등 영적 생활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이 농사를 계속하다 보면 재물을 쌓는 재미에 탐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년을 통해서 탐욕을 버리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과 동물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법도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나 하나만 잘 먹고 잘 살고 보자가 아니라 타인의 삶도 고려하며 살라 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해 6년을 투자했다면 1년은 타인을 생각하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이든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면 결국 부유한 사람들도 피해를 받게 됩니다.
다섯째, 안식년은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이 천국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 천국의 안식을 누리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천국 사모하는 신앙을 갖도록 하시기 위해 안식년 제도를 세우셨습니다.
Ⅱ. 희년의 기본정신은 ‘자유를 공포하는 것’이다.
희년이 되면 자유를 공포해야 합니다. 10절에 “제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런 자유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해방된 날입니다. 그 날 온 국민이 자유를 경험하였습니다. 저는 광복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연세가 80이 넘은 어르신들은 그 느낌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시 일본으로부터 얻은 자유가 얼마나 귀중합니까?
그런데 그 자유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다시 빼앗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북한의 김정은이 핵을 만들고 미사일을 쏘면서 미국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차후 남한을 공격하게 되면 미국으로 하여금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미국 본토까지 이른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서 테러하는 방법을 실전으로 훈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 테러가 발생하면 이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겠습니까?
우리 국민들도 정신을 차리고 국가 안보에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길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희년은 온 백성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50년째를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희년의 자유는 ‘R’로 시작되는 세 단어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Return’(돌아가다)입니다. 13절에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업’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2지파별로 배분해 준 땅을 일컫습니다. 이 땅은 대대로 팔 수 없는 땅(기업)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지자 그 땅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 기업을 50년째, 즉 희년이 되면 도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잃어버렸던 자기 땅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너의 기업으로 돌아가라!”(Return to your inheritance). 이것이 희년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희년이 오기 전이라도 친척이 그 땅을 무르면, 기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기업 무를 자’(Kinsman-Redeemer)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기업 무르는 사람을 히브리어로 ‘고엘’이라 했습니다. 혹시 고엘이 없다고 할지라도 50년이 되면 모든 사람이 원래 땅으로 돌아가고 기업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46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는 ‘희년’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땅을 되돌리는 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둘째, ‘Release’(풀어 놓다)입니다.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에게 빚을 져 종이 되었다면 6년 동안 일하고 안식년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년이라도 도중에 희년이 찾아오면 무조건 자유를 베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 39~41절에 “네 동족이 반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우거하는 자 같이 너와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 때에는 그와 그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 본족에게로 돌아가서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희년까지 섬기게 하라”는 것은 안식년이 되기 전이라도 희년이 오면 자유를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을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사야 61장 2절에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금일부로 모두 석방이라고 한다면 죄수들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보통 날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셋째, ‘Rejoice’(크게 기뻐하다)입니다. 희년은 기쁨을 되찾는 해입니다. 자유를 되찾은 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감정은 ‘기쁨’입니다. 잃었던 땅과 자유를 되찾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을 수밖에 없죠. 희년을 히브리어로 ‘요벨’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서 ‘희년’을 뜻하는 ‘Jubilee’와 ‘환희, 큰 기쁨’이라는 의미의 ‘Jubilation’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벨은 ‘양각 나팔’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희년이 되면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은으로 만든 나팔이 있었는데, 희년에 부는 나팔은 은 나팔이 아니라 양의 뿔을 잘라 만든 양각 나팔이었습니다. 희년이 오면 전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양각 나팔을 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난 후 학교에서 이런 노래를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가지요.” ‘어린 음악대’라는 이 노래 가사 속에는 주먹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불면서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희년에는 양각 나팔을 붑니다. 자유를 공포하여, 땅과 자유를 되찾고, 기쁨과 회복을 누리는 복된 해인 것입니다.
Ⅲ. 진정한 희년이 도래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있다.
9절에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희년의 시작이 7월 10일 속죄일(욤 키푸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년은 속죄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제사장이 속죄함으로 희년이 1년 동안 지속되고 이듬 해 7월 9일까지 계속됩니다. 속죄일은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날인데, 다섯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겸비의 날’(Day of Humiliation)입니다. 대제사장의 화려한 의복을 벗어 놓고, 일반 제사장 복장으로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낮추는 날입니다.
둘째, ‘죄를 전가하는 날’(Day of Imputation)입니다. 대제사장은 속죄일이 되면 염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그 중 한 마리는 ‘아사셀’이라 해서 그 머리에 안수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1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전가하여 광야로 내 보내 죽게 합니다. 백성들의 모든 죄를 염소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셋째, ‘대표로 속죄하는 날’(Day of Representation)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대표해서 지성소에 들어가 나머지 한 마리의 염소를 죽여, 그 피를 가지고 속죄소 위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러면 백성들의 죄가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넷째, ‘죄 사함의 날’(Day of Purification)입니다. 속죄일은 백성들이 지난 1년 동안 지은 모든 죄에 대해 정결함을 받는 날입니다.
다섯째, ‘통회하는 날’(Day of Contrition)입니다. 속죄일은 백성들이 스스로 괴롭게 하고 회개하는 날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겸비하시고, 택하신 백성의 죗값을 자기에게 전가하셔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모든 죗값을 갚아주신 ‘속죄’(Redemption)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스스로 통회하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기쁨의 해, 즉 희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저는 28살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는데, 그 전에는 매일 음주가무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보니 세상의 그 어떤 일을 해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을 찾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하늘의 기쁨이 제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속죄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죄가 없이는 희년도 없습니다.
Ⅳ.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믿음을 보일 기회이다.
희년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초신자들은 가끔 “어떻게 주일을 쉴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이 있는 성도는 6일 동안 일하면 주일에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주일에 돈 벌이를 하지 않고 오직 영적인 생활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때론 어리석은 짓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 사는 사람은 돈을 벌어도 정작 써야 할 때가 되면 돌아가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부자로 살기는 좋아도 부자로 죽기는 억울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죽을 때는 돈이 아무 소용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성도는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는 무조건 쉬어야 합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복을 주신다는데 왜 일을 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복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도 믿음이 요구되지만, 49년째부터 50년째까지 계속되는 희년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욱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안식일 하루를 일하지 않고 지키는 것도 힘든 일인데, 2년 동안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49년째부터 2년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48년째 되는 해는 3년 먹을 양식을 거둬야 합니다.
20절에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내가 명하여 제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 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향해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내년부터 희년이 시작되는 것 알고 있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3년치 소출을 내야 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향해 명령을 내리시면 땅이 순종하고, 풍랑 이는 바다를 향해 명령하셔도 곧 잔잔해 집니다. 바다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향해 3년치 소산물을 내라 하시면 순종하여 풍성하게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업이나 장사를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셔야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사업과 가정에 하나님의 복된 명령이 하달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복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희년을 지킨다는 것은 보통 믿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앞으로 3년 동안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 자만 희년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일종의 믿음 테스트입니다.
Ⅴ.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년을 잘 지켰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탐욕 때문에 하지 못했습니다. 희년은 차치해 두고 안식년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490년 동안 70년이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70년의 안식년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댓가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 함으로써, 그 땅은 70년의 안식년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역대하 36장 21절에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년 지키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다 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보응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떼어 먹은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모두 계수하셨다가 찾아가십니다. 도둑과 사기꾼들이 앗아가고, 병원에서 가져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것을 모두 회수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70년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70년 안식년을 모두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식년, 희년 모두 지키지 않았습니다.
한 유대인 랍비의 문헌을 보니, 이들은 지금도 희년을 지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희년은 가나안 땅에 12지파가 모두 있었을 때 지켜야 하는 규례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12지파가 없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유대교를 믿으려면 똑바로 믿어야지 제대로 지키지도 않으면서 유대인의 특권만 주장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년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는 것이 희년의 가치를 손상시키지는 않습니다. 누가복음 4장 17~19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 설교에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온 목적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나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의 은혜의 해가 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희년이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신약시대가 바로 희년입니다. 우리는 지금 희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으면 죄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잃어버린 천국의 땅을 되찾게 되는 희년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약시대가 바로 희년의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결 론
어떤 사람은 희년 제도를 문자 그대로 실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키지 못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십계명에 희년 지킬 것을 계명으로 넣지 않으시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만 넣으신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그러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어떤 사람은 희년을 지키고 토지공개념을 해서 토지를 각 가정에 나눠주고, 빚도 다 탕감해주고, 죄수도 다 풀어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라가 엉망이 됩니다. 이런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희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희년은 누구든지 영적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늘의 참 기쁨을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희년의 자유를 누리십니까?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고 사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가까운 미래가 아니라 영원까지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희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희년의 나팔을 불고, 희년의 자유와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 3·1절 희년기도회
레 25:8-12 / 조남신 목사
Ⅰ. 대구의 아픔
>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가 지하철 참사로 온통 통곡의 도시로 변해버렸습니다. 대학 입학을 앞둔 푸른 청춘, 첫 출근을 하던 직장 새내기, 아침 희망을 안고 달리던 수많은 이들의 귀한 목숨이 어처구니없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순식간에 참담한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1995년 상인동 지하철건설현장 가스폭발로 101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번에도 중앙로 역에서 이런 참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신장애인의 돌출행각이 이런 대 참사로 이어졌다는 것이 너무나 우리를 어이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모든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그런가 하면, 이 대참사는 또 다시 여러 면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 여러분들은 방송에서 이런 저런 슬픈 사연들을 전해들어서 모두들 잘 알고 계실줄 압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화마(火魔)와 연기와 독한 가스가 덮쳐오는 상황에서!! 딸과 엄마가 통화하는 내용도 들었고, ...."엄마 숨을 못 쉬겠어!" "숨이 차서 더 이상 통화를 못하겠어. 엄마 그만 전화해..." "영아야, 제발 엄마 얼굴을 떠올려 봐..." "엄마 사랑해......." 그리고 그밖에도 "사랑해..." "미안해..." "용서해줘..." "여보 사랑해요...." 이렇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 국민일보에는 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더군요. "성경을 품에 안고 하늘로 간 남편". ... 이 기사는 대구 남산동 서부교회(남태섭목사)의 장립집사였던 고 김창제집사님에 관해 보도하고 있었어요. 교회 기도모임에 참석하려고 가시다가 이런 참변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이때 집사님은 아내와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 상황을 알렸는데, 아내에게 전하는 마지막 작별인사는 "여보 나 하늘나라로 먼저 올라가네. 할렐루야 아멘" 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책을 허리띠 안에 꼭 끼운 채 엎드린 채로 질식사했는데, 성경책 속의 주보를 보고 교회에 연락이 와서 신원이 빨리 파악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이번 희생자들의 처절한 죽음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들은 고속성장, 성장신화, 안전불감증의 시대 속에서 오늘도 질주해야 하는 이 시대, 이 문화, 이 풍토의 순교자이며 희생제물이라고 말입니다. .대구시는 오늘 23일까지를 시민애도기간으로 정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기도 드렸고, 수요예배 때에는 잠깐 침묵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어제는 설교를 쓰고 있는데,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어서 하늘도 우리의 슬픔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 오늘 오전 10시 대구시내 모든 종교단체는 타종을 하고, 대구 시청은 사이렌을 울리며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또한 차량 운전자들도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이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저도 이 행사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대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대구가 슬픔을 딛고 다시 굳세게 일어나게 해 주옵소서!"
> Ⅱ. 3. 1절 기념주일
> 그 다음 오늘은 3.1절 기념주일이지요. 84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대구에서는 2. 28이 있었고, 그랬습니다마는, 특별히 지하철 참사를 겪으면서 맞이해야 하는 우리 민족의 3. 1절은 또한 어떠해야하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다음 올해가 기장이 출범한지 50년이 되는 희년의 해입니다. 무던히도 기장이 이 민족과 함께 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아픔도 많이 겪어야 했던 그런 교단이었습니다마는, 이제 50년 희년을 맞이하면서 기장은 이제 이 민족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서야하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해입니다.
> 먼저 3. 1절은 우리 민족에게 무엇이었나? 물어보고 싶습니다. 3. 1절은 일제치하에서 자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해 온 백성이 피 뿌리며 항거했던 날이지요. 3. 1운동의 기본정신은 선포되었던 독립선언문에 뚜렷하게 명시되고 있는데, ① 그것을 한 마디로 "자유의 선포"였습니다. 선언문에는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하는 터이니라"라고 말하고 있고, "우리가 본디 타고난 자유의 권리를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 위하여 이 선언을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② 그 다음 3. 1운동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소망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역시 독립선언문에 보면, 이런 문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요.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새 문명의 서광이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새 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도다."
> 이런 자유의 선포, 소망의 선포가 있었는데, - 이것은 곧 예수가 한반도에서 일으킨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3. 1운동과 독립선언문 서명에 기독교인이 많이 참여한 것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오늘 누가복음 본문 4:18,19에는 예수님의 공생애사역의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시고 난 후의 일인데, 그 어느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시는데, 바로 이 본문이었어요. 이 본문은 바로 이사야서 61:1-2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을 읽고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
> 자유와 해방!! 그것은 예수님의 평생사역이었습니다. ①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사귀고, 노동자들을 제자로 삼음으로써 계급을 없애는 자유평등의 해방자가 되셨습니다. 사회치유이지요. 사회치유!! ... ② 예수님은 마음의 변화와 거듭나는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율법의 틀에 매어있는 자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③ 그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시기와 증오의 굴레 속에 갇혀있는 인간들을 사랑의 세계로 해방시켰습니다. ④ 그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 시대의 포문을 여셨습니다. ⑤ 그는 죽음을 깨고 부활하심으로써, 무덤에서 해방하여 영원을 살게 하셨습니다.
> 이런 예수바람이 동북아시아 한 모퉁이에 있는 한반도에 불어왔던 것이고, 그 시대의 살아있는 정신역할, 소금과 빛의 역할의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쇄국주의를 타파하고,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일으켰습니다. 성경, 찬송, 사경회를 통해 대중에게 한글을 보급시키고, 신식교육기관을 세우고, 신지식을 가르쳤습니다. 수 천년의 미신 무속을 타파하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신문 잡지 등 언론을 창달하고 새로운 의학과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광혜원을 위시한 기독교 병원들은 계급 차별 없이 거지로부터 국왕까지를 똑같이 치료했다고 합니다.
> 그러나 이렇게 역사 속에서 일으킨 예수바람도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하면서 점 점 더 그 기능과 의미, 역할이 점점 더 퇴색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남과 북이 갈리고, 동과 서가 갈리고,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신구간의 갈등이 존재하고.... 그런 가운데서 교회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와 사회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얼마나 잘 해결해 나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 III. 희년기도회
> 기장총회는 올해 새 역사 희년을 맞이하여 "약속의 새 땅에서 하나되어"라는 주제로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첫발로 2월 10일(월)에 제주 성내 교회와 성산 일출봉에서 "새 역사 희년 한라산 선포식"을 가졌습니다. 마치 구약의 희년법처럼 희년의 나팔(요벨)을 불며 희년을 거룩하게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듯이.... 그리고 그 이후부터 "새 역사 희년맞이 120일 연속기도회"를 각 노회 시찰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속한 수성시찰회에선 4월 23일(수) 기도회를 갖습니다. 과연 예수바람, 새바람, 참바람, 바람직한 바람이 남녘에서부터 한반도 전체로 참신하게 불어왔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기도회를 위해서 교단 총회에선 7가지 기도제목을 특별히 정해 주었는데, 여러분도 그런 차원에서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① 파괴된 자연을 하나님 창조질서로 회복해 이 땅이 생명공동체가 되도록, 정의와 평화를 구현한다.
② 물신숭배와 폭력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전환시킨다.
③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일구어낸다.
④ 분열된 교회를 '하나의 교회'로 고백하여 일치를 이룬다.
⑤ 교회를 갱신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룬다.
⑥ 남녀간의 평등과 세대간의 화합을 도모한다.
⑦ 이웃사랑 정신으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한다.
우리 모두가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또한 이루어 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 국민이 소모적인 정쟁을 중지하고 모두가 하나되어 지혜를 모으라는 거겠지요. 이번 대구 참사를 계기로 지역과 세대, 이념과 계층에 따라 갈라졌던 우리들의 마음을 한데 아우르고, 한층 성숙한 나라와 국민으로 거듭나는 것이 희생자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하며, 아울러 부상자들이 조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그 다음 이 사회, 이 나라가 참된 자유와 소망으로 거듭나며, 그래서 영원한 은혜의 해, 희년의 해를 선포하며 누릴 수 있는 그런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희망을 선포하는 교회
레 25:8-12 / 김동호 목사
지난 추석 기간 동안 저는 의료선교 팀을 따라 베트남을 다녀왔습니다. 비행기로 5시간 그리고 다시 버스로 4시간 정도를 가야만 하는 빈농이라는 곳엘 다녀왔는데 빈농은 우리 교회가 건축한 사랑의 집과 숭의백스빌리지가 있는 곳입니다.
2001년 10월 첫 주일 우리 교회가 처음 개척되었을 때 첫 성탄 헌금으로 베트남에 어려운 이웃들에게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10채를 목표로 하였는데 헌금이 많이 나와서 10채를 더 지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가 참전하여 전쟁을 한 나라이고 때문에 서로 전쟁의 상처가 있는 나라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에 빚 같은 것을 느끼게 하던 나라이었습니다.
마침 한아봉사회라는 선교단체에서 베트남에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한다고 하여 첫 성탄 헌금을 그곳에 보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와 같은 모습을 좋게 보신 숭의학원의 이사장 가족이 10만 불을 헌금하여 그곳에 숭의백스빌리지라는 건물을 신축하였고 그곳은 현재 유치원과 양로원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의료선교회는 3년 전부터 추석 때마다 연휴를 이용하여 베트남 빈농에서 의료선교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약 60명이 팀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틀 동안에 약 2,000여명을 진료하였습니다. 이번 의료선교에 참여한 의사가 약 13명 정도였는데 내과, 치과, 안과, 외과, 산부인과, 한방과를 운영하였습니다. 이틀 동안에 몰려오는 수 많은 사람들을 진료하느라고 둘째 날은 점심시간에도 쉬지 못하고 짬짬이 돌아가면서 급히 밥만 먹으면서 진료를 하였습니다.
우리 의료팀은 진료수준으로만 보아도 정말 드림팀이었습니다. 치과만 해도 이동장비가 있어서 이를 갈고 때우고 뽑고 하는 일반 치과에서의 모든 시술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산부인과는 이동식 초음파기계 까지 가지고 가서 진단을 해 주었습니다. 안과에서는 800개가 넘는 돋보기를 준비하여 노인들에게 안경까지 맞추어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형외과와 성형외과 의사들은 웬만한 수술도 그 자리에서 아주 꼼꼼히 해 주었습니다. 마치 종합병원 같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실력 있는 의사들이 그것도 아주 헌신적으로 진료하는 훌륭한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것이 소문이 벌써 나서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그 수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곳에 부탁하여 2 천 명을 미리 선정하게 하고 저들에게 표를 나누어 드리고 저들만 진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 값 만해도 천 만 원이 훨씬 넘는다고 하였는데 모두가 다 좋은 약을 준비하였습니다. 약국이 제일 바빴습니다. 환자들이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처방전을 끊어 오면 그 처방에 따라 약사들이 정신없이 약을 포장하여 나누어 주었습니다. 약만 드린 것이 아니라 베트남어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문귀가 인쇄된 타월과 종합 비타민 그리고 회충약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베트남은 아직도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와 같은 선교 문구를 인쇄하여 선물로 줄 수가 없는 나라인데 우리가 저들을 섬기는 규모와 진심 때문에 조금씩 그와 같은 벽들이 자연스럽게 무너져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교육 팀도 있어서 그곳에 부모를 따라 온 어린 아이들에게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솜사탕 기계를 사가지고 가서 오는 아이들에게 솜사탕을 만들어주고, 풍선도 불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빔프로잭트로 영화도 보여주고 아이들과 함께 놀이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빈농과 동탄이라고 하는 두 곳의 초등학교 어린이 600명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게 하였고 아이들에게 추석 선물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행복해 하였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미용실 열어 세 명의 미용사들이 손에 쥐가 나리만큼 열심히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깍아 주었습니다. 단순히 머리를 깍아 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얼굴에 맞게 머리를 커트해 주어서 얼마나 사람들이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제일 기억에 남는 일 중에 하나는 13살 난 여자 아이의 육손을 수술해 준 것이었습니다. 오른 쪽 엄지손가락에 손가락이 하나 더 있는 아이의 손가락 하나를 수술해서 떼어 주었습니다. 수술은 대학병원의 성형외과 교수로 있는 집사님이 해 주셨고 수술 보조는 역시 대학병원의 심장외과 교수로 있는 집사님이 해 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육손이라고 하는 기형 때문에 많은 마음의 상처가 있는 듯 하였습니다. 아주 예쁘게 생긴 아이였는데 얼굴에 전혀 웃음이 없고 어두웠습니다. 저는 그 모습에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수술은 정말 제가 봐도 완벽했습니다. 성형외과 교수의 수술이라 거의 흉터도 남지 않으리만큼 꼼꼼했습니다. 수술 보조(?)를 하였던 심장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집사님에 의하면 자기라면 한 세 바늘 정도 꿰맬 것을 60바늘이나 꿰맨다고 흉을 보리만큼 정말 꼼꼼한 수술이었습니다.
수술을 받은 아이는 다음 날 하루 종일 끝날 때까지 우리가 봉사하는 곳에서 서성거렸습니다. 아이의 얼굴이 밝아진 것을 보며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평생을 그렇게 밝은 얼굴로 살 것을 생각하니 정말 보람이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언청이 수술을 해 주었고, 올해도 발에 탁구공만한 혹이 있는 할머니를 수술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오래 동안 미국과 전쟁을 한 나라입니다. 미국과 전쟁을 할 때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이 되어 베트남과 싸웠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의 밑바탕에는 미국과 프랑스와 한국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이 본능적으로 깔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프랑스는 카토릭 국가이고, 미국은 개신교 국가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베트남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한국과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베트남에 해마다가서 그와 같은 순수하고도 헌신적인 봉사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고, 유치원과 양로원도 지어 주고, 해마다 추석이면 엄청난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을 치료해 주고 아이들을 섬겨주는 것을 통하여 우리 한국과 특히 우리 기독교에 대한 감정이 없어지고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의료선교를 위하여 쓴 비용을 돈으로만 대략 계산하면 거의 1억 원에 가깝습니다. 회원들이 평균 100만 원 정도의 회비를 내고 참여하여 하였습니다. 베트남 사람들도 다 압니다. 자기들을 돕고 섬기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그렇게 엄청난 경비를 드리면서 온다는 사실을 저들도 다 압니다.
저들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저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을 자기들에게 베푸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며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한 10년을 해마다 한결 같이 섬긴다면 최소한 베트남 빈농과 통탄 지역은 영적인 뿌리가 뽑히는 성공적인 선교가 이루어지는 지역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에는 부부와 아이들 4명이 함께 참여한 가정이 두 가정이나 되었습니다. 회갑 잔치를 대신하여 참여한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상에 남는 일 하나가 더 있습니다. 지난 주일날 예배가 끝난 후 아까 말씀을 드린 심장외과 교수이신 집사님이 중국대사관에 누구 아는 사람이 없느냐고 아주 다급한 표정으로 제게 물으셨습니다.
이번 베트남을 다녀오자마자 중국의 병원의 초청을 받아 심장수술 기술과 기법을 전수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중국 비자를 위하여 여권을 맡겼더니 일이 늦어져서 여권이 아직 나오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추석연휴가 되어 대사관이 아예 문을 닫고 직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번에 집사님은 이번에 함께 가시지 못 하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좀 의아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좀 아쉽지만 ‘이번엔 베트남에 못 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 끝인데 집사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여권을 빼내어 베트남을 가려고 한다는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결국 그 집사님이 여권을 빼내어(?) 이번 선교여행에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중국 본토에 까지 줄을 대어(?) 중국에서 대사관으로 연락을 하여 대사관 전 직원이 단체로 산행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을 빼내어 무사히 베트남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 죽을 고생을 하고 베트남에 와서 그 집사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하면 성형외과 집사님이 수술을 할 때 간호사처럼 시중드는 일을 한 것입니다.
수술을 하시던 집사님 말씀에 의하면 심장수술을 하는 의사들은 자기들처럼 성형수술을 하는 의사들의 수술을 수술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심장외과 교수가 성형외과 수술 보조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일인데 그 일을 하려고 중국 본토까지 줄을 대어 단체로 산행까지 간 대사관의 문을 열어 여권을 찾고 100만원이나 되는 돈을 내고 왔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생각이고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한 의사 집사님 중에는 싱가폴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자마자 베트남으로 오신 집사님도 계셨고, 또 어떤 집사님은 이와 같은 일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연세대 교수를 사임하고 뜻이 맞는 의사와 동업으로 병원을 개원하여 일만 있으면 일년에도 몇 번씩 의료봉사를 나가는 분도 계셨습니다.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약사 그리고 미용사를 제외한 사람들은 가서 이틀 동안 정말 허드렛 일을 합니다. 어떤 청년은 이틀 동안 치과에서 손전등으로 환자의 입속을 비추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떤 청년은 미용실에서 빗자루를 들고 이틀 동안 청소를 하였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수실에서 접수를 하거나 접수를 마친 환자들을 내과 외과 산부인과 약국 주사실 등으로 안내하는 일을 하루 종일 하였습니다. 저도 그 일을 주로 하였고 선물로 드릴 수건을 하나, 하나 비닐 봉투에 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하찮아 보이는 일을 하려고 추석 명절의 시간을 내고 작지 않은 돈까지 내고 참여한다는 것, 그런데도 60명이나 참여했고 중국 본토까지 줄을 대면서 참여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호치민 공항에 내리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3시경이었습니다. 숙소를 배정받고 대충 씻고 급히 잠자리에 들었을 때가 새벽 3시였습니다. 한 방에 네 명씩 들어간 분들은 아마 새벽 4시에나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일어나 경건회를 가졌는데 제가 보기에 한 사람도 피곤해 않았습니다. 저도 피곤한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수백 명의 환자들과 전쟁을 하듯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에는 아침 6시에 경건회를 하였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음 날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점심도 교대로 먹으면서 쉬지 않고 진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힘들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베트남 의료선교가 세 번 째인데 해마다 이 여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저는 이 일에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섬김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재미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재미는 세상적인 재미와 쾌락과는 달리 삶의 의미와 보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작은 일에 충성하기 위하여 많은 희생과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늘과 다음 주일 좀 더 길어지면 몇 주일에 걸쳐서 희년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여행을 다녀오면서 이와 같은 여행이 바로 희년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상처받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와 희망을 선포하고 저들을 얽어매고 있는 이런 저런 사슬들을 끊어주고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것이 바로 희년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해 전 베트남에 평화와 자유 그리고 희망을 선포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전쟁도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 효율이 나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전장에서 죽었고, 그 때문에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한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돈이 전쟁의 비용으로 낭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불과 5년 정도 베트남에 관심과 애정을 쏟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한 채에 겨우 500불 정도하는 사랑의 집 몇 채 그리고 10 만 불 정도를 들여 건축한 유치원과 양로원 그리고 한 번에 1 억원도 들지 않는 의료선교 세 번 정도를 하였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로서는 작은 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땅에 있었던 전쟁의 비용과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돈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돈입니다.
그러나 효과와 효율은 전쟁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베트남에는 라이 따이한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인과 베트남인의 혼혈입니다. 저들은 자기들과 전쟁을 한 원수 나라인 한국의 피를 받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혼혈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제 빈농에서는 라이 따이한이 그와 같은 대접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 몇 년이 지나면, 그 동안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들을 사랑하고 섬긴다면 라이 따이한은 빈농지역에서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겁니다.
희년에 대하여는 다음 주일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레위기 25장 18절과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희년을 선포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신 목적이 나옵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땅은 그것의 열매를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하게 거주하 리라.>
희년의 정신으로 우리가 섬긴 베트남 빈농 지역은 앞으로 전쟁의 상처로 원수의 수치스러운 핏줄로 삶의 안정과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던 라이 따이한과 같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땅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바뀌어 지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그 곳은 교회와 목사라는 이름이 수치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올해부터 그곳 사람들은 저와 선교사를 목사라고 호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작년에는 우리가 지원하였던 한아봉사회가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과 같은 상을 받았고 올해는 우리와 함께 사역한 선교사가 같은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몇 넌이 가지 않아 교회와 목사라는 호칭은 그곳에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이름이 될 것입니다.
지난 주 저는 설교를 통하여 교회는 나라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라도 못할 일을 어떻게 교회가 할 수 있느냐고 말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는 나라보다 큽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하고 강한 미국보다 교회가 큽니다. 저는 그것을 이번 베트남 빈농을 다녀오면서 더욱 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 교인들과 함께 베트남 선교여행을 다녀오면서 제가 높은 뜻 숭의교회 목사라는 것이 너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우리 교회는 베트남 빈농에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자유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교회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가난한 이웃들과 탈북자들에게 희망과 평화와 사랑과 자유와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로 쓰임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장을 서면 우리와 함께 많은 교회들이 나서게 될 것입니다. 앞장을 서는 것은 좀 부담스럽고 힘이 들지만 그러나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한국과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세상에 희망과 자유와 사랑과 정의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도록 앞장서서 이 모든 교회를 이끄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될 수 있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일은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동의와 헌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주부터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농담처럼 이러다가 교인들 다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설교 중에 얼핏 하기도 하였습니다.
교인 한 분이 제 상담실에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지난 주 설교를 듣고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 길 거리에 나가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고 하는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올해 만 5년이 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5년 동안 보통 교회의 10배가 넘는 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10배나 더 충성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희년은 본래 50년 만에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배나 복을 받은 교회이니 다른 교회보다 10배 빨리 희년을 지켜야 합니다.
희년은 우리의 것을 빼앗으시려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희년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땅에서 안전하게 그리고 배불리 먹고 살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희년을 실생활에서 선포함으로 어둡고 부정적이며 공격적인 이 세상에 평화와 자유와 사랑과 희망을 선포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광복과 희년
레 25:8-13 / 이필재 목사
광복절 기념주일 아침에 피랍자 가운데 2명이 조건 없이 풀려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광복절이 있는 이 주간에 모두에게 광복이 이루어져서 모두 풀려날 수 있기를 계속 기도합시다.
민족의 운명을 슬퍼하던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 백성된 우리 민족의 모습을 암시적으로 많이 표현해 울분을 달랬던 역사를 우리들은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가요 속에 민족 설움을 조명했고 어떤 사람은 시를 써서, 어떤 사람은 동화집을 만들어서 민족의 슬픔을 노래했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 떠나랴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옛 조선 시대 김상헌이 남긴 한편의 시조입니다. 그 시절에는 일본 정부가 우리 대중가요를 금지곡으로 많이 설정했습니다. “이것이 민족 설움을 노래하는 것이니까 금지시켜야 한다.” 그래서 고복수가 부른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세어보니 고향 떠난 10여년에 청춘만 늙었다.” 이것도 금지곡이었고, 백년설이 부른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이애리가 부른 “황성 옛터에 밤이 되면 월색만 고요해.” 그 당시 모두 금지곡이었던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래들은 더욱 확산되어 우리 민족의 설움을 달랬습니다. 그 당시 일본이 9년 동안에 걸친 토지 조사 사업은, 사실상 이것은 한반도 국토의 13퍼센트를 일본 총독부 땅으로 만드는 작업이었고, 84퍼센트의 해당하는 토지의 세금 인상을 위한 목적으로 한 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하나씩, 하나씩 잡아먹는 정책이었다고 해서 한 동화 작가가 동화집을 출간했습니다. 60대 이후의 분들은 이 동화를 재미있게 읽었을 것입니다. 산골짜기 오막살이집 홀어머니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엄마가 그들을 집에 두고 날품 팔러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아이들에게 주려고 떡 몇 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산 고개 하나를 넘는 길목에서 호랑이가 지키고 있다가 이 할멈을 잡아먹으려고 덤벼드니까 떡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래서 떡 하나를 주고 위기를 모면하는데, 바로 그 떡이 뭐냐 하면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 강대국에 바치던 조공입니다. 그런데 하나를 얻어먹은 호랑이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따라옵니다. 결국 할멈은 아이들에게 줄 떡을 다 빼앗겼습니다. 하나도 안 남았습니다. 통째로 나라를 잃은 것입니다. 이제 할멈은 호랑이에게 신체 한 부분씩 잡아먹힙니다. 팔을 하나 뜯어 먹히고 다리 하나 뜯어 먹히고 완전히 다 먹혀버립니다. 이것은 인권침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도 하지 못하고 인권침해를 당해 꼼짝 못하고 다 먹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호랑이는 할멈의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와서 아이들마저 잡아먹으려고 문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호랑이인줄 알고 뒷문으로 도망가서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호랑이가 따라 올라옵니다. 아이들은 갈 길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죠? “우리를 살리시려면 동아줄을 내려주시고 우리를 죽이시려면 썩은 새끼줄을 내리소서.” 그랬더니 하나님이 하늘에서 동아줄을 내리셔서 타고 올라가 오빠는 해님이 되고 동생은 달님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민족설움이 나타난 동화였습니다.
일찍이 인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법은 인간을 도와주고 행복을 도와주는데 공헌하여 왔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이라든가 히브리인의 율법이라든가 로마법과 같은 고대법이 있어왔기 때문에 이것이 발전해서 오늘의 법 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 중에는 악법이 반드시 있습니다. 최대 공약수의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법이 아니라 특정 집단이나 특정인만을 위한 법이 있어서,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은 이런 법을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법 위에는 언제나 정치가 있다고 보는데 정치 위에는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 법은 무엇을 위한 법인가 하는 철학적 정의가 확실할 때 좋은 법 제도와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오늘 읽은 레위기는 하나님이 히브리 민족에게 주신 당시의 율법입니다. 이러한 율법 제도는 매우 훌륭한 법문화로서 모든 국가가 법을 만드는데 기초적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율법 중 안식법, 노예 해방법, 물질 탕감법 등은 인간을 노예문화로부터 자유케 하는 법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법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기초로 해서 오늘날 현실에 맞는 법을 만듦으로 모든 사람의 행복이 보장되는 제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시고 하루는 안식하셨다고,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율법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법이 없었다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끝도 없이 노동에 시달리다가 비참한 생애를 살다가 죽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땅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곡식을 생산하는데 땅에 병충해가 너무 많이 생기니까 농약이라는 독약을 너무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공해 식품이라고 하는 농산물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공해 식품, 유기농 식품 이런 말들이 공식화 될 정도로 우리 주변에 식품들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땅이 병들었기 때문에 오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땅도 안식이 필요하다고 율법에 정해주었습니다. 적당히 땅을 안식시키면 땅 자체가 정화 능력이 있어 힘 있고 건강한 식품을 생산해냅니다. 그래서 “6년을 파종하였으면 1년 정도는 쉬게 하라. 그래야 땅의 건강이 유지되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나라들이 60년이 지나도 쉬게 하지 못하니까 땅이 모두 다 병들어서 거기서 생산되는 곡식들은 병든 식량만 생산해서 결국 인간이 병들게 됩니다.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돈을 주고 사온 노예도 6년 동안 부려먹었으면 7년째는 자유하게 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6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하게 할 것이며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아내도 함께 가게 하라.” 이런 것을 하나님이 율법으로 정해주셨기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이 행복합니까? 그렇게 하다가 7년씩 일곱 번이 지나면 49년이 되는데 제50년은 희년이라고 해서 이 해는 전체 사면의 해로 국민 전체가 노예는 한 사람도 없이 하고 빚진 사람이 하나도 없어지는, 다 새롭게 출발하는 대축제의 해가 되는 법을 하나님이 먼저 레위기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는 종살이 하던 사람은 이유가 어찌 되었든 상관없이 자유인이 됩니다. 남에게 빚진 것은 얼마를 언제 빚졌든지 아무 상관이 없이 다 탕감이 됩니다. 만약 히브리 백성이 외국인에게 팔려가 있으면 국가가 대신 그 값을 지불하고 자유하게 하는 이런 법입니다. 그러니 이 법 정신과 철학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희년법은 도저히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제도 속에 들어간 사람을 끄집어내서 자유케 하는 속죄의 법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 사람은 철저하게 처벌해 버리라. 너희 중에서 제하여 버릴지니” 이렇게 엄격하게 했기 때문에 자유하게 하는 법이 효력을 발생하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희년법이나 안식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 희년이라고 하는 말의 어원은 수양의 뿔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수양의 뿔을 깎아서 만든 나팔을 불어서 희년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열심히 일하고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노동의 노예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될까봐 안식법을 이렇게 철저히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는 것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지만 안식 없는 노동은 죄가 됩니다.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노예들마저도 안식을 주라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하지 말라.”라고 율법을 정해주셨기 때문에 이 법의 혜택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것입니다. 자유를 주신 하나님, 이것은 현대 복지 사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문둥병 환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당시 이 문둥병 환자들은 치유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제사장들이 진찰하고 판결합니다. 그 진찰에서 통과하면 그는 그 시간부터 문둥병 환자 법에서 자유가 됩니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있고 제한된 땅을 떠날 수도 있고 자기 맘대로 살 곳을 자기가 선택할 수도 있고 어떤 직업이든 가질 수 있고 결국 그 사회에서 복권이 주어지는 자유의 몸이 되는 법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를 보고 비판했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라며 비판하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안식일은 이런 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뭐가 잘못되었느냐?” 이렇게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병을 고쳐주는 일도 인간의 자유함을 위해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기독교 최대 진리가 무엇인가? 죄로부터의 자유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반도의 민족은 참으로 불행한 민족 역사를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역사를 보면 약 700번 이상의 외세의 침략을 받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다 얻어맞는, 매 맞는 문화였습니다. 수없이 와서 민족을 때리고 우리는 말도 못하고 얻어맞고 살았습니다. 5천년 동안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상처투성이의 민족이 되어서 이것이 문화화가 될 정도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매를 때리고 맞는 문화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 아주 잘된 일이라고 보는데, 옛날에는 무엇이든 그저 매로 다스렸습니다. 관청에 끌려가면 사람을 벌거벗기고 곤장이라는 것을 내려쳐서 죄를 물었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들이 왜 그렇게 때렸는지 작대기로 후려 때리면서 그렇게 우리가 매 맞으면서 자랐습니다. 지금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때렸다가는 인터넷에 올라가고 그 선생은 곧바로 그만두어야 합니다. 옛날에 선생님한테, 훈장한테 얼마나 우리가 매 맞으며 배웠습니까? 그래서 우리 민족의 마음에 누구나 다 매를 많이 맞아서 한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을 잘 인도하려면 한풀이를 해주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 화가 생겨서 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우리 언어에서 “풀이”라는 말로 변한 것이 많습니다. 화가 나면 화풀이해야 되고 코가 막히면 코를 풀어야 되고 아기를 낳으면 몸을 풀었다고 합니다. 심심하면 심심풀이해야 되고 원한이 있을 때는 원풀이를 해야 하고 무당이 풀어주는 굿을 살풀이라고 해서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에 보세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조명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나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풀어주실 것이라는 한풀이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430년 원한이 쌓인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을 향해서 원한에 쌓인 기도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9절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고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은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으로 성경에 조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거의가 다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은 사회적 신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설 수 없습니다. 사회가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격리수용했습니다. 어쩌다 사람들이 모르고 문둥병자 곁으로 다가올 때는 문둥병자가 스스로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내 곁에 오지 말라고 세 번 소리쳐야 합니다. 인간 대우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줄줄이 예수님 주변을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 장애인들이 제일 많았는데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보고 사회적 평가를 어떻게 합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아예 죄인으로 규정해버리고 말합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이 말합니다. “왜 죄인의 집에 저렇게 들어갔느냐?”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 곁에 많이 왔는데 제자들마저도 어린아이들에게 오지 말라고 꾸짖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소문난 창녀 신분이었고,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자신의 짐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고난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게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인격대우를 해줌으로 자유하게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 사회에 온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반공포로는 약 27,000명이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공산당 포로들을 0시를 기해서 “다 나가라! 대한민국 시민권을 다 주겠다. 너희들 자유대로 살아라.”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들 가운데 반공포로 출신 여러 분이 계십니다. 희년이란 뭐냐? 과거의 빚이 얼마가 되었든지, 너의 신분이 뭐가 되었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로서 수양의 뿔 소리와 함께 이 순간부터 너희는 자유다.” 얼마나 멋진 법입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다른 것은 잘못했어도 이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8월 14일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8월 15일을 기해서 새로운 시민이 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들이 받은 것입니다.
1932년 중국도 일본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상하이 한복판에서 일본 사람들이 4월 29일 천황의 생일과 상하이 정복 전승 기념일 축하행사를 했습니다. 그러니 중국인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일본 사람들에게 대중국이 점령당해서 상하이에서 천황 생일축하와 전승 기념일 축하 파티를 여기서 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중국인들이 얼마나 울분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꼼짝 못합니다.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윤봉길이라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행사장에 폭탄을 집어던졌습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회장도 그 자리에서 죽었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 키치사보로,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 쓰마로우도 그 자리에서 중상을 당했습니다. 현장에서 일본 요직의 사람들이 다 쓰러졌습니다. 그것을 보고 중국 사람들이 “이게 누구냐?” “조선인 윤봉길이다.” 그래서 상하이 홍구 공원에 가면 윤봉길 기념비가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아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헌병대에 잡혀가면서 만족하는 웃음을 짓는 사진이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배운 진리 “어떤 강한 민족이라도 다른 민족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가장 비열한 행위이며 결국 오래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진리를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가장 많은 식민지 국가를 만들었던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로마, 영국, 독일, 일본,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 빼앗았던 땅이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도로 다 빼앗겼습니다. 남은 것은 뭡니까? 죄만 남았습니다. 지금 일본과 독일의 지성인들이 가장 마음 아파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도대체 우리 조상들은 무엇 때문에 이웃 나라 백성들을 그렇게 무차별하게 죽이고 그렇게 많이 피를 흘리게 고통을 주면서 살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이것이 심판입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다 전쟁 기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다 빼놓지 않고 가서 견학했습니다. 히틀러 군대에 당한 잔인한 학살 증거물이 전시장에 다 보관되어 있습니다. 히틀러 군대가 사람의 살 껍질을 벗겨서 만든 하얀 장갑이 지금 그대로 있습니다. 사람 기름을 뽑아 만든 비누도 그대로 있습니다. 사람 뼈로 갈아서 만든 비료와 기계가 산더미같이 박물관에 다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게 그것이다.” 어린이들이 거의 매일 같이 역사 공부를 하러 선생님을 따라 오는데 “이게 뭔지 아느냐? 옛날 히틀러 군대의 잔학상이다.” 그러면 독일 국민들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독일의 지성인이나 일본의 지성인들은 이 역사가 너무나도 괴로운 겁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가지고 후손들에게 남은 건 뭐냐? 죄만 남지 않았느냐?” 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다 일본의 잔인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독립기념관이 있습니다. 저는 15년 전에 처음 일본에 있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일본 교회 담임 목사로 갈 것도 아니고 좀 비판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를 물들여놓고 왜 세계 선교에 몸을 바치지 않느냐? 이렇게 일본 나라가 돈을 잘 벌면서….” 그 담임 목사가 한국 독립기념관을 구경 왔습니다. 일본의 30대 후반, 40대 초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그렇게 조선인들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독립기념관에 와서 보더니 일본 사람, 자기 조상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지은 죄를 낱낱이 보고 사람이 수천 명, 수만 명이 와글거리는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막 통곡하면서 우는 겁니다. “이게 뭐야? 무슨 소리야?” “일본 목사야. 이거 보고서 지금 회개하며 통곡하는 거야!” 그 친구는 그 후로 한국에 일 년에 한 번씩 옵니다. 제가 이사로 있는 대학이 일본의 한 학교와 자매학교로 있습니다. 일본인 총장이 학교 졸업식에 와서 저는 설교하고 그 사람은 축사를 하는 순서였습니다. 졸업 예배의 설교를 마친 후 축사 시간에 일본 대학 총장이 전교생들 앞에서 무릎을 딱 꿇고 큰 절을 하면서 “여러분, 저는 죄인입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여러분 앞에 축사를 하겠습니까? 우리 일본은 말할 수 없는 죄를 조선 땅에게 지었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너무나도 괴롭고, 왜 우리 조상들이 무엇 때문에 조선을 그렇게 괴롭혔는가에 대해서 애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십시오.” 막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비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총장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라는 겁니다. 선조들이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불행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진리와 역사로 살아야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양의 뿔, 나팔 소리가 나면 희년이라 어두웠던 과거 역사는 이제 모두 다 지워버리자! 노예는 다 해방하고 빚은 다 탕감하라! 여기서부터 출발하자! 손해가 나도 할 수 없다. 괜찮다. 민족 전체의 대화합의 역사가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양의 뿔, 자유함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법! 얼마나 훌륭합니까? 인간 관계도 국제 관계도 어느 시점에 가면 청산해야합니다. 국제 정치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원수도 없게 마련입니다. 보십시오. 원자폭탄까지 투하시켜서 전쟁하려 했던 일본과 미국은 지금 세계에서 제일 가까운 우방이 되었습니다. 무비자로 오고 갑니다. 그토록 치열하게 참여했던 월남전이었지만 이제는 협력국가입니다. 역사가 지나면 다 이렇게 변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로서 지상의 모든 민족이 형제요 자매요 그래서 우리가 노력해서 모두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하늘나라 시민된 축복을 온 세상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광복의 기쁨은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성가대가 가끔 불러주는 은혜스러운 찬송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며 환란의 궂은 비 모질게, 모질게 불어도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우리 순례자의 믿음을 가지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대한민국 만세!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광복의 선물을 저희들에게 주심을 감사하여 오늘은 우리 한국교회 전체가 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기쁨을 온 세상에 아버지의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21세기 한국인이 되게 하시고, 또한 우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 고난당하고 있는 억압된 민족을 주님께서 풀어주시고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는데 억류 중에 있는 우리 형제들 모두 다 돌아올 수 있도록 이 주간에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열방을 자유케하라
레 25:8-13 / 조상호 목사
저와 저의 아내는 선교사수련회와 선교대회를 통해 안식과 재충전을 받고 지난 금요일 오후에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제가 없는 가운데도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섬겨주시고 저희 부부를 위해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한국 방문은 다른 해에 비해 6일 정도 길었습니다. 처음에는 수련회와 선교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돌아오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운영위원들께서 저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것을 보고 저에게 휴식을 권했습니다. 저는 그 권고를 놓고 기도하는 중에 제 마음에 저의 개인적인 충전도 필요하고 더 나아가 조용기목사님께서 목회자로서 50년 사역을 마감하는 원로목사 취임예배에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케줄을 변경했습니다. 사실 그 예배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개교회 뿐 아니라, 한국과 더 나아가 세계기독교계에 매우 뜻 깊은 자리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조목사님은 6.25 전쟁 후 찢어지게 가난했던 1958년 서울 불광동의 어느 깨밭에 천막교회를 시작하여 10년 20년도 아닌, 무려 50년 동안 한 교회에서만 목회하신 분입니다. 그것도 한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조목사님은 교단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옛날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의 순서로 큰 교단을 이루었는데, 이제 5월말 현재 순복음 교단은 250만 성도, 3,000여 교회가 되어 장로교 다음으로 큰 교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선교에도 일찍 눈을 뜨셨기 때문에 60년 초 선진국으로부터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시기에 목사님께서는 오히려 나라 밖으로 나가 세계 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한국 사람으로 따로 통역을 두지 않고 직접 외국어로 설교를 하고 집회를 인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목사님은 혼자서 독학으로 외국어를 공부하여 통역 없이 세계를 누비며 영어와 일본어 등의 외국어로 선교를 하셨습니다. 약 45년 동안 세계구석구석을 누볐는데, 비행기를 탄 총거리가 지구를 104바퀴나 돌만큼 선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또 한국 사람으로는 드물게 ‘5중 복음’과 ‘3중 축복’이라는 순복음의 교리를 세우시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4차원의 영성’과 같은 수많은 책을 쓰셨습니다. 또한 한국에는 순복음신학원, 한세대학교를 세우시고, 외국에는 베데스다대학교를 비롯한 영산신학교를 세계 곳곳에 세우셨습니다. 또한 엘림복지재단과 국민일보 등을 세우고, 평양에는 심장병원을 세워 동포들의 건강을 보살펴주기로 하는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도 탁월한 사역을 많이 하셨습니다.
누누이 밝히신 것처럼, 어쩌면 목사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장 많이 받으신 분 중의 한 분이십니다. 많은 전문가들에 의하면 갈수록 한국 교회가 어려워지고 있는 흐름에 따라, 앞으로 한국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같은 Mega Church는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여러 지역에서 인공위성으로 동시에 예배를 드리고 있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수많은 지성전들이 독립을 하여 지교회로 탈바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멀지 않은 시기에 세계최대교회라는 별명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조목사님은 우리 시대에 한국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가장 크게 쓰임 받으셨던 목사님이십니다. 어쩌면 앞으로 그렇게 크게 쓰임 받으시는 분이 나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조목사님께서는 지난 14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원로목사에 취임하심으로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셨습니다. 물론 순복음세계선교회 총재로서의 선교사역은 계속 하실 예정입니다만, 목사님의 주된 사역은 목회사역 대신 ‘사랑과 행복 나눔 운동’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진행하실 새로운 사역을 위해서, 그리고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 여행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많이 묵상한 단어가 있습니다. 조목사님의 50년 사역과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50주년을 보면서, 또한 이번 34회 순복음선교대회 주제였던 ‘희년’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아마 ‘희년’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희년은 안식년과 안식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는 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1주일 중 하루를 쉬면서 예배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6년 동안 농사를 지은 후 7년째에는 땅을 쉬게 하는 안식년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레위기 25장 8절부터 13절까지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희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같이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 나팔을 크게 불지며“ 안식년이 7번 지난 49년째 다음 해인 50년째가 바로 희년입니다. ‘희년’이라는 말은 영어로 ‘쥬빌리(Jubilee)’라고 하는데, 뉴질랜드에서 이 단어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몇 개월 전에도 어느 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쥬빌리(Jubilee)’라는 간판을 본 적이 있는데, 그 학교가 개교 50주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래 이 ‘쥬빌리(Jubilee)’라는 말은 수양뿔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요발(yobal)’이라는 단어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 50년 7월10일 대속죄일이 되면 전국에서 일제히 요발, 즉 수양뿔로 만든 나팔을 불어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희년 벽두에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는 자유를 선포하는 소리였습니다. 이 나팔소리는 슬픔이나 탄식이나 애통하는 소리가 아니라,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소리였습니다. 이 나팔소리가 울리면 모든 종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동안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와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든지, 부모가 종이어서 자동적으로 종이 되었든지 간에, 희년이 되면 모든 종들은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년에는 사람에게만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토지에게도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 동안 농사를 짓던 땅에 어떠한 것도 심지 않고 1년 동안 푹 쉬게 하였습니다. 소유하고 있던 땅도 하나님께서 각 지파 별로 나누어 주셨던 기준대로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진 빚들도 다 면제해주어 빚을 진 사람은 그 빚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이처럼 희년은 잃었던 땅을 원상 회복시켜주고, 종이 되었던 사람들을 원래대로 자유롭게 살도록 해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희년은 ‘자유와 해방의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뒤돌아보면, 안타깝게도 이 희년 제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희년의 제도가 장차 오실 메시아에 의해서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61장 2절에서 이 희년을 ‘은혜의 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약 700년이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고향인 나사렛의 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다같이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여기 ‘복음을 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유앙겔리조(euanggelizo)’는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예수님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또한 ‘포로 된 자’란 사탄의 속박 아래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눈먼 자’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을 의미하며, ‘눌린 자’란 육체의 질병이나 사탄에게 눌려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 즉 하늘의 것에 가난한 자들,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 신령한 것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와 눌린 자와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함으로 말미암아, 친히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이처럼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용서해주셨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3년 동안 그 말씀대로 수많은 사람들을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또한 마지막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였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질병이나 정신적인 눌림과 영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는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정신병원 의사는 그를 열심히 치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방법을 찾아내어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당신은 과거에 쥐였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깨닫다니,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그러나 이제 당신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사람이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청년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렇군요. 아, 내가 사람이 되었군요!” 청년은 드디어 퇴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기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년이 다시 병원으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벌벌 떨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병원 바로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어요.“ ”그게 무슨 문제지요?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쥐가 아니란 말입니다. 고양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청년이 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변화되었다는 것, 저는 더 이상 쥐가 아니라는 것을…“ 청년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고양이도 제가 더 이상 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까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으로 자신을 제한하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마음껏 날지 못하고 새장에 갇혀 있는 새처럼, 생각의 포로가 되어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은 그렇다 치고, 예수 믿고 구원받은 크리스챤들 가운데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든 생각의 감옥에 사로잡혀 눌려 있는 크리스챤들이 있습니다. 혹시 마귀가 나를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 자녀가 몹쓸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라는 염려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크리스챤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다 상처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농담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슴에 담고 두고두고 억울해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다 눈에 거슬립니다.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상처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삽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일수록 그 마음에 승리의식을 품고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가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실수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면 주님께 용서 받을 수 있고,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는 죄가 아닙니다. 실수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는 패배의식을 승리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서울 목동에 있는 지구촌교회를 섬기시는 조봉희목사님이 쓰신 글에서 ‘벤 후퍼’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녀가 사생아인 벤 후퍼와 함께 노는 것을 꺼렸습니다. 당연히 벤 후퍼는 친구가 없었고, 왕따를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동네 교회에 새 목사님이 부임해오셨습니다. 어린 후퍼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마다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교회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시간에 일부러 늦게 예배당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그날도 그렇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날 목사님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는 바람에 축도 전에 예배당을 빠져나오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 틈에 끼여 나오는데 목사님이 벤 후퍼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한 벤 후퍼는 황급히 교회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더 큰 소리로 후퍼의 등에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날부터 벤 후퍼는 자신이 사생아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사생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부터 패배의식에서 해방되어 인간 승리자, 곧 테네시 주의 주지사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믿기 전에는 체면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과 자괴감에 사로잡혀 살았다 할지라도, 2,000년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신 주님 안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동안에는 죄의 종이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비록 돈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공부를 못해 대학진학에 실패했다 할지라도, 건강이 나쁘거나 신체에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외모가 좀 부족하게 생겼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부족하고 나에게 허물투성이 밖에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거절치 않으시고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나에게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나는 이제 자유인이다.“ 이 시간 옆 사람과 이렇게 인사하시겠습니다. ”죄인인 줄 알았는데, 의인이 되셨군요?“ 다시 인사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당신은 자유인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희년에는 해방과 자유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믿음으로 자유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눌려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눌려있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도착한 주에 기온이 32도까지 올랐는데, 그 무더운 날씨에도 검정색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를 하고 검정색 부츠를 신고 언제 씻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만 얼굴을 하고 다니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지난 4일 대학연합교회 주일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는데,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지하철 기차 안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까 어느 경찰서와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으니까, 119를 눌러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어까지 섞어가며 “나는 지금 예배드리러 가는 중이야. 너 갈현동에 있는 OO감리교회 알지? 나 지금 거기에 가는 중이야.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You out! 임마, 이제 너는 끝났어."라고 말하고 나서, 일방적으로 핸드폰 뚜껑을 닫아버린 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가다보면, 아무도 없는데 마구 떠들며 혼자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경기가 좋지 못해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충격으로 인해서인지, 아니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충격으로 인해서인지, 아니면 가족에게 버림 받아서인지 그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서울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러한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불렀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악한 마귀에 눌려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에 마귀가 조종하는 귀신에 눌려 우울증에 걸려있는 사람들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람들을 피하고, 심하면 자살까지 하는 눌려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 같은 선진국가에도 우울증에 걸려 사회생활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돈이 많고 사회제도가 잘 되어 있으면 평안과 행복을 누려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는 방안에만 쳐박혀서 운둔생활을 하고 있는 일명 '히키고모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또 같은 장 36절에 보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돈으로도 자유를 줄 수 없고, 세상의 권력으로도 자유를 줄 수 없고, 인기로도 자유를 줄 수 없지만, 복음의 진리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없지만,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를 맛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는 자유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눌려 있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자유케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세상 사람을 자유케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의 국장에는 독수리가 상징물로 새겨져 있습니다. 독수리는 자유의 새입니다. 독수리가 하늘을 마음껏 나는 것처럼, 미국 국민 모두가 자유를 누리며 살자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를 뒤돌아보면 자유를 추구하자는 이 기준이 베어져 있습니다. 1776년 미합중국이 독립을 선언할 때 ‘자유의 종’을 쳤습니다. 그 종에는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 25장 10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뉴질랜드에 사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세상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우리는 우리만 자유를 누릴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한 채 눌려있는 사람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자유케 해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과 악한 마귀를 누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해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꿈자리가 시끄러워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한다든지, 잡념이 생겨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든지, 자꾸만 걱정이 몰려오고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사라진다면, 예수 이름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정신을 혼미케 하는 악한 마귀야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라.“ ”마음을 불안케 하는 더러운 귀신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모든 강력을 파하는 능력의 예수 이름으로 악한 마귀를 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악한 마귀에 눌려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희년을 선포하고 열방을 자유케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희년을 선포하라! 열방을 자유케 하라!“
희년의 감격으로
레 25:8-17 / 성흥모 목사
오늘 우리는 2003년 1월 1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02년도를 뒤로하고 희망찬 2003년도를 맞이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한 해 동안 정말 힘들게 살아오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아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간이 정말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무엇을 배워보겠다고 하신다면 배울 것이라도 적어보아야 합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쓰고 그것을 우리의 비전이라고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실천 가능한 적은 일부터 결심하고 실행에 옮겨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해 들어 무엇보다도 굽히지 않는 의지와 용기와 도전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전에 국민일보를 보다가 읽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하 독방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고독과 절망에 몸을 떨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였던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그를 외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외로움에 견디다 못하여 독방의 벽에 글을 적었습니다. "신은 없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방의 갈라진 벽의 틈새로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싹은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을 향하여 강인한 생명력을 보였습니다. 그는 간수가 넣어주는 물을 아껴 매일같이 새싹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 싹은 자라나 꽃망울을 맺더니 아름다운 파란 꽃이 피었던 것입니다. 억울한 죄수는 생명의 신비에 감동하여 무릎을 꿇고 벽면에 썼던 글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런 글을 써놓았다고 합니다. "하늘이 준 생명의 신비여,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걷고 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이런 밤중에 하나님의 성전에 나오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올 한해 정말 의미 있게 살고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고독한 존재가 아니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생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올해로 우리 영주교회는 창립 제5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50주년을 맞이하시는 몇 분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중에 50주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 중에 창립100주년을 맞이하시는 분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20대 청년들 중에 앞으로 50년 동안 우리 교회를 출석하고 지키시다가 꼭 창립 100주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35세 이하의 사람들은 모쪼록 창립 100주년을 보내시고, 그 때에 회고하기를 50주년을 보내시던 목사님이 축복하시기를 창립 100주년을 꼭 보내라고 하였다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 교회를 지키시면서 한 자리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은 한 자리에서 신앙의 거목이 탄생하는 법입니다. 옮겨 심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창립 50주년보다는 100주년이 더 의미가 있는 해가 될 것이지만, 유대 나라에서는 50주년에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50주년의 해를 희년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희년이라는 해는 안식년의 절정이요, 안식년 중에 안식년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희년의 감격으로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2003년도의 교회의 목회적인 표어를 "모이는 교회 보내심을 받은 교회"라고 정하고 이제 마지막 해로 끝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창립 50주년을 희년의 감격으로"라는 한 해의 표어를 가지려고 합니다. 창립 50주년의 금년 한 해는 희년의 감격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그런 정신으로 힘차게 달려야할 것입니다.
희년을 제정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다보니 한 사회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생기고, 국가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살다보면 어떤 사회든지 사회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배 계급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지배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가진 것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커지게 마련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농토를 팔아야 하고, 집을 팔고 심지어 아내와 아이들까지 팔든지 버리는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 문제요, 불평등한 사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 곧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너무나 심각한 사회 문제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희년법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해로부터 매 7년마다 안식년을 지켜야 하며, 안식년의 일곱 번째 안식년을 보내고 그 다음 해를 희년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희년이 되는 7월 10일 백성의 대속죄일에 수양의 뿔로 만든 양각나팔을 크게 불면서 온 땅 거민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고 희년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첫째 희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상황이었던지 자유케 하시는 은혜였습니다.
10절입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갈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땅의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희년의 근본 정신이 있다면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당신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근본 정신을 따라 자유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종살이 하던 사람이 놓임을 받아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이 돌아오는 날이 그에게 있어 희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하시면서 희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은혜의 해"라는 말씀이 희년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진정한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진정한 희년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오늘 우리 영주교회의 희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창립50주년을 희년의 감격으로 보내려고 하면 죄의 사슬에 얽매어 사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고, 나아가 악한 영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노예된 상태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이제부터 자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구원의 확신을 간직하면서 아직도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구원할 때 진정한 희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립 50주년이 이 지역 사회의 불신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당신들끼리만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이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이웃들을 초청하여 함께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 심령이 참된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하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될 때 참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나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를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희년은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해입니다. 9절 말씀에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하였습니다. 희년을 선포하는데 백성의 대속죄일이 될 때에 뿔나팔을 불면서 희년이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7월 10일이 한 해의 첫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7월 1일이 나팔절이라고 하여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이것은 유대의 민간력에 따르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력에 따르면 니산월이라고 하는 아빕월이 유대 종교력에 따르면 새 해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력 7월 티쉬리월이 민간력의 1월로 우리의 달력에 따르면 9-10월에 있는 가을철입니다. 어찌하든지 속죄일이 한 해의 시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년의 선포는 백성의 대속죄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피를 뿌리면서 용서를 구하는 시간에 백성들에게는 희년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순간, 우리도 용서하며 사랑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노예를 풀어주고 토지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았다는 감격이 없이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 나는 이웃에게 용서를 빌고, 함께 용서하는 화해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희년에는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10)
10절 하반절에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자리로 돌아갈 때에 인간의 본연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본래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감격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49년간 빈부의 격차가 너무나 벌어졌습니다. 부조리한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자리잡았습니다.
이제 희년을 맞이하면서 다같이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자는 정신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처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들은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토지, 가옥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맡겨주신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탐욕에 매어 살다보니 가서는 안될 방향으로 너무나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희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희년법에서 반복하여 강조한 말이 "타슈부"라는 말인데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교만과 이기심과 증오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희년의 은혜를 입는 성도들입니다.
네 번째 희년에는 사람도 안식을 누리고 토지도 휴식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의 안식년에 토지를 쉬게 하고, 또 다시 희년에도 쉬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다른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일년을 농사짓지 말라는 것도 힘든 요구인데, 하나님은 그 전에 삼년의 양식을 허락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희년이 왔음을 양각 나팔을 불면서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즐거움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희년이란 희(喜)자를 기쁠 희자를 쓰는데 글자 그대로 기쁨의 해입니다. 그래서 희년의 대 주제는 안식과 자유입니다. 출애굽이 제1해방이라면, 희년은 제2해방입니다. 출애굽이 일시적 해방이라면, 희년은 반복적 해방입니다. 출애굽이 외국으로부터 해방이라면, 희년은 본국에서의 해방입니다. 신앙적 의미에서 출애굽이 죄와 사망으로 건짐 받은 구원의 사건이라면, 희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성화적 사건입니다. 또한 희년은 안식일로 시작되어 안식년으로 이어지는 안식의 총체적 안식을 뜻합니다. 안식일과 안식년이 개인적 안식이라면, 희년은 공동체의 안식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과 함께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 안식을 얻지 못하면 개인적으로 참 안식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절, 희년이 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와 자유가 보장되고, 인권이 회복되고, 사람 살만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복음화하고, 참된 자유를 선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만의 축제가 아니라, 우리 동리의 축제가 되어야 하며, 우리 민족을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희년은 대사면이 이루어지는 해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종으로 팔렸던 사람을 놓아주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모든 땅과 집도 돌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구원의 감격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려 희생의 제물이 되셨기에 우리는 구원의 감격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 화해의 공동체, 그리고 기회의 균등을 실현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희년의 감격이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영주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희년, 새로운 출발
레 25:10-13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 민족에게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신앙적 제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나라에서 보면 이상스럽고 손해 보는 일 같아 보이나 그대로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놀라운 은총과 복의 통로들입니다.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 꾀를 부리기 때문에 손해보는 인생을 사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손해 보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손해 보는 인생이 아니라 남는 인생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도 중에는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칠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이며 그 중심은 사람입니다. 안식년은 칠년 중 일년을 쉬는 것이며 그 중심은 사람과 땅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면 잘 될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도 땅도 고장이 나기 마련입니다. 기계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 더 많이 생산을 할 것 같지만 고장나면 생산이 중단되 버리는 것과 같이, 땅도 계속해서 경작하면 소출이 많을 것 같지만 땅의 영양가가 다 달아나고 결국엔 소출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식일과 안식년에 쉬라고 하실 때 대상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사람도 쉬는 것이고 없는 사람도 쉬는 것입니다. 큰 땅도 쉬는 것 작은 땅도 쉬는 것입니다. 큰 집의 주인도 쉬는 것이고 그 집 하인도 쉬는 것이고 그 집에 머무는 나그네도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쉼(안식)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인생과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한 주인임을 알게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쉼(안식)을 통해서 손해보는 인생이 아니라 복된 남는 인생임을 알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의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제도 중에서 희년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희년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안식년이 일곱번 오고 그 다음 해가 희년입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8-10)"
이 희년은 이스라엘 달력으로 하면 그 해 칠월 십일 대속죄일에 나팔을 불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희년에 가장 중심되는 말은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기업으로 돌아가라.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그렇다면 무엇이 돌아가는 것입니까? 바로 종과 노예가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빚진 사람의 빚이 탕감되어 원상으로 돌아갑니다. 혹사 당하던 땅이 원기 회복을 위해 씨를 뿌리지 않고 휴식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돌아간다는 것은 원래의 자리로, 당연히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불량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필요치 않은 사람도 필요한 사람도, 하나님께 꾸중 들을 사람도 칭찬들을 사람도 모두 돌아갔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언젠가는 우리도 다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드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이고 은혜의 자리이고 믿음의 자리이고 사랑의 자리입니다. 돌아가는 것은 해방이고 자유이고 회복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올 한해 우리 교회 안에 회복되어지고 복음의 자유로 돌아오는 일이 많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잘 되돌리시려고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 금식 후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나사렛 동네 어느 회당에서 안식일에 비치된 성경을 가져다가 당신의 사역 목적을 이렇게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여기서 말하는 은혜의 해라는 것은 바로 희년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희년을 선포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희년의 회복과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되돌리시는 것입니다.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가난한 사람, 포로된 사람, 눈 먼 사람, 눌린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으로 다 되돌리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부요하게, 포로를 자유인으로,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 눌린 사람을 자유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요 복음의 위력입니다.
3. 그리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감사요 기쁨이요 축복일 뿐만 아니라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희년을 선포하고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돌아가서 회복하라는 것이고, 돌아간 자리에서 다시 새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은 헌신 더 나은 삶 더 나은 인생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반복되지 않으며 세월은 거꾸로 돌릴 수 없지만 마음과 생각과 믿음은 언제든지 새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올 한해 내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마음에 새기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더 나은 헌신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헛된 길을 가면서 손해 보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서 남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희년, 새로운 출발
레 25:10-14 / 서종호 목사
우리 영암교회는 지난 주 창립 50주년을 맞으면서 희년이 시작된 셈입니다. 오늘은 희년의 의미와 함께 영암교회의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예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도 중에는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칠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이며 그 중심은 사람입니다. 안식년은 칠년 중 일 년을 쉬는 것이며 그 중심은 사람과 땅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면 잘 될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도 땅도 고장이 나기 마련입니다. 기계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 더 많이 생산을 할 것 같지만 고장 나면 생산이 중단되어 버리는 것과 같이, 땅도 계속해서 경작하면 소출이 많을 것 같지만 땅의 영양가가 다 달아나고 결국엔 소출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식일과 안식년에 쉬라고 하실 때 대상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사람도 쉬는 것이고 없는 사람도 쉬는 것입니다. 큰 땅도 쉬는 것이고 작은 땅도 쉬는 것입니다. 큰 집의 주인도 쉬는 것이고 그 집 하인도 쉬는 것이고 그 집에 머무는 나그네도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쉼(안식)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거나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한 주인임을 알게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쉼(안식)을 통해 손해 보는 인생이 아니라 복된 인생, 남는 인생임을 알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희년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희년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50년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 시점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430년 동안 이나 애굽의 억압과 압제 속에 고통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자 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된 해로부터,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한 후 매 50년이 되는 해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 서 명한 것이 희년의 나팔을 불라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나 50년이 되는 해가 희년이었습니다. 희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요벨"이라는 단어로서 그 뜻은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가리키는 단어 입니다. 9절에 보면 그 나팔을 전국에 크게 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팔이 담고 있는 의미는 첫째 시간을 알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상 시간, 취침 시간, 공격할 시간, 멈출 시간이 되었을 때에 나팔을 통하여 깨닫게 합니다.
교회의 희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정한 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오랜 시간동안 생활을 하다가 보면, 주기적인 삶의 패턴 속에서 목적과 방향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루하루 일주일을 살고 안식일을 통하여 영육 간의 쉼을 갖고, 또 한해 한해를 살면서 7년이 되는 해에는 안식년을 맞이하고, 이렇게 일곱 번이 지나고 나면, 50년이 되는 해에는 그냥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고,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 획을 긋는 의미를 갖으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희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회개와 상처를 감싸주는 것에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61:1-3에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마디로 "희년의 나팔이며 희년의 선포 "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4) 우리 교회에게 선포하시는 희년의 나팔소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시기를 바랍니다.
희년은 자유의 선언
희년의 근본정신은 자유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은 자유인으로 살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희년은 억울한 자가 없어지는 날이요, 가난한 자가 기쁜 소식을 듣는 날이요, 포로 된 자들이 해방되는 날이요, 종살이 하던 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거듭남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죄로부터 자유하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며 모든 탐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어집니다.
희년은 사면의 선포
희년의 정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 사면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50년간 타인의 손에 넘기어 졌던 많은 것들이 원래의 장소, 원래의 소유대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어떤 이유든지 종으로 팔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가족에게로 돌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삼아 하나님의 제단인 십자가 위에 바쳐 드림으로 온 인류에게 희년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희년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며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상실한 마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희년의 은총으로 회복 받아야 합니다.
희년은 돌아오는 것
희년이 되면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고 인간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과 이기심과 증오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희년의 은혜를 입는 자입니다. 옛 사람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부활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희년은 나눔과 공유하는 공동체가 될 때 누리게 됩니다.
이 희년은 이스라엘 달력으로 하면 그 해 칠월 십일 대속죄일에 나팔을 불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희년에 가장 중심 되는 말은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기업으로 돌아가라.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그렇다면 무엇이 돌아가는 것입니까? 바로 종과 노예가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빚진 사람의 빚이 탕감되어 원상으로 돌아갑니다. 혹사당하던 땅이 원기 회복을 위해 씨를 뿌리지 않고 휴식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돌아간다는 것은 원래의 자리로, 당연히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불량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필요치 않은 사람도 필요한 사람도, 하나님께 꾸중 들을 사람도 칭찬 들을 사람도 모두 돌아갑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돌아갑니다. 아마 언젠가는 우리도 다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드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이고 은혜의 자리이고 믿음의 자리이고 사랑의 자리입니다. 돌아가는 것은 해방이고 자유이고 회복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교회 안에 회복되어지고 복음의 자유로 돌아오는 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처음 설교하신 것이 이사야 61:2-3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희년을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 희년을 단순히 율법의 규정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전진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희년선포와 여호와의 날의 선포 사이의 차이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희년법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희년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희년이 시작되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즉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 중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갇힌 사람에게 해방이 오고, 눈먼 사람들이 보게 되고, 억눌린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는 일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고, 또 그것을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이 지금 이루어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금식 후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나사렛 동네 어느 회당에서 안식일에 비치된 성경을 가져다가 당신의 사역 목적을 이렇게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여기서 말하는 은혜의 해라는 것은 바로 희년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희년을 선포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희년의 회복과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되돌리시는 것입니다.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 먼 사람, 눌린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으로 다 되돌리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부요하게, 포로를 자유인으로,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 눌린 사람을 자유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요 복음의 위력입니다.
희년이 갖고 있는 의미는 회복과 치유이다.
희년을 맞이하면 종 된 자와 노예 된 자에게도 회복시켜 주도록 명하셨으며, 모든 부채도 정리하고 탕감해주라고 말씀합니다. 빼앗았던 토지가 있거든 그 때에는 돌려주라고 말씀합니다. 희년의 축복은 회복의 시작에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적인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가진 사람은 점점 가진 것 때문에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더 가난해져 가기 때문에 경제 공황과 불경기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까? 모두의 불행을 자초합니다. 우리에게 희년의 축복을 주신 것은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하시는 축복의 회복인 것입니다. 용서하고 탕감하고 돌이키게 하는 일이 결코 우리들에게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희년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용서와 자비에 근거한 축복의 해이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빚진 모든 것과 용서치 못하는 모든 마음들을 모두 정돈하고 새롭게 출발하여야 하는 의무도 주어진 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한 회복의 축복은 이사야 35:1-10에 잘 말씀되어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 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 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 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 여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죄와 욕심과 물질에 메여 살던 우리의 모든 삶이 낳은 것은 두려움과 어두움뿐이지만, 하나님은 온전하고도 완전한 회복을 허락하시는 축복의 해가 희년입니다. 원상회복 운동의 하나로 머리속에 찌들어 있는 순수한 믿음의 원상을 회복하는 운동도 필요하며 원상회복과 더불어 버려야 할 과거와의 단절운동도 필요합니다. 옛 땅과 옛 이권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철저히 부정되어야 합니다. 이집트에 버리고 왔어야 할 것을 새 땅에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희년의 회복 선포는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온전하고도 중심을 다한 회복을 말씀합니다.
희년의 선포는 우리 중심의 회복과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한 모든 자에게 희년의 복된 소식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사의 회복을 얻는 축복을 받는 복된 희년의 선포가 우리들의 중심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의 회복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의 가정의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삶, 민족의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감사요 기쁨이요 축복일 뿐만 아니라 새 출발을 의미한다.
희년을 선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돌아가서 회복하라는 것이고, 돌아간 자리에서 다시 새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은 헌신, 더 나은 삶, 더 나은 인생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반복되지 않으며 세월은 거꾸로 돌릴 수 없지만 마음과 생각과 믿음은 언제든지 새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희년은 영적 충만의 의미가 있다
희년은 성경에 중요한 또 하나의 의미가 영적 충만의 의미입니다. 회개와 회복의 축복을 통한 궁극적 축복은 영적 충만인 것입 니다. 애굽으로부터 정녕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희미해진 우리의 주께로 향한 마음을 다시 한 번 돌이킴으로 영적인 충만함으로 재충전하는 기회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이라는 말도 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50일째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의 축복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성령 충만한 축복의 날이었습니다. 희년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의 백성들의 멀어졌던 마음들, 세상적인 것들에 빼앗겼던 마음들로부터 돌이켜 영적인 회복, 하나님 되심과 그의 백성 됨의 충만함을 위한 나팔이었습니다.
영적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교회 안에 있습니다. 희년은 성령의 충만함과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년에 선포한 것은 "자유를 공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3:17을 보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자유 의 선포는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이루어짐을 말씀합니다.
희년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빛에 비추어 어긋난 것을 바로잡고 억눌리고 버려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희년으로 새롭게 시작한 영암교회 성도님들! 내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마음에 새기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더 나은 헌신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헛된 길을 가면서 손해 보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서 남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