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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와 함께 방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이
1998년 6월 16일 오전 임진각에서 같이
북으로 갈 소떼와 함께 보도진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9년 6월 16일 북한에 제공할 소
1천마리중 1차분인 소 5백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날 오후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7박8
일간의 방북일정에 들어갔다.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합의를 통해 군사
구역인 판문점을 개방, 민간인의 북한
방문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새로 개통된
문산-판문점간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도착,평화의 집에서 방북기자회견
을 가진 뒤 판문점중립국감독위 회의실
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주영 회장 초청 단체인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송호경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판문점 북측지역
판문각에 나와 정회장을 영접했다.
이번 정주영 회장의 방북은 북한 당국이
지난 1994년 남북 정상회담 실무회담을
제외하고 김영삼 정부기간 굳게 닫아온
판문점을 민간교류차원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2015년 의인 고(故) 이수현 아버지,
일본 정부 훈장 받아
2001년 일본 도쿄 JR신오쿠보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남성을 구하고 숨진 고 이수현(당시 26세)씨의 아버지 이성대씨가 한·일 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 훈장을 받았다
주(駐)부산일본국총영사관은 “이성대 LSH 아시아장학회 명예회장이 16일 오전 주부산일본국총영사 관저에서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인 ‘욱일쌍광장(旭日光章)’을 받는다”고 밝혔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나 문화 교류에 힘쓴 외국인에게 주는 훈장이다. 총영사관 측은 “이성대 명예회장이 아들 수현씨의 의로운 죽음 이후 일본과 대한민국의 친선, 그리고 이해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라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LSH 아시아장학회를 설립, 일본에 유학 온 아시아 18개국 639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매년 교류 행사를 가져왔다. 또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사재 1000만원을 기부하고, 이수현정신선양회 명예회장 및 피스등산대 명예회장 등을 맡아 활동해왔다. 이에 앞서 2001년에는 당시 모리 일본 총리가 수여한 목배(木杯)를 고 이수현씨를 대신해 받기도 했다.
▶2015년 한식 코스화의 효시 ‘용수산’
최상옥 회장 별세
▶2015년 원로 무용가 전황 전(前)
국립창극단장 별
▶2015년 부동산 재벌 도널트 트럼프,
미국 대선 출마 선언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69·사진)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16일(현지 시각) 뉴욕 맨해튼 트럼프타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40여분 연설에서 그는 “조국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고, 신이 창조한 최고의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며 “나는 돈이 많으니 내 돈으로 선거를 치르겠다”고 했다. 1988년부터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참여를 저울질하다 27년 만에 무대에 선 것이다.
거친 말투로 악명 높은 그는 첫날부터 ‘솜씨’를 뽐냈다. 멕시코에 대해 “성폭행범이나 마약 딜러 같은 범죄자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며 “남쪽 국경에 거대한 울타리를 쌓고, 비용을 멕시코에 청구하겠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는 “불법적인 이민 정책을 강행해서는 안 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바로 폐기하겠다”고 하고는 “나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골프장을 갖고 있다. (오바마가) 빨리 물러나 골프 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출마 선언과 함께 공개한 트럼프의 재산은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추산했던 것보다 2배 이상 많았다. 포브스는 순자산 41억달러(약 4조5500억원)를 추정했지만, 실제로는 부동산·현금·채권 등 92억4000만달러(약 10조2500억원)나 됐다. 재산 공개는 법에 따른 것으로, 모든 대선 후보는 출마 선언 30일 안에 자신과 배우자 및 미독립 자녀의 재산을 신고해야 한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 사업가로서의 성공 등을 무기 삼아 공격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워싱턴 정치인들은 말만 하지, 행동하지 않는다”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에게 약속된 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지지율은 아직 3% 수준이다.
▶2009년 신종 플루 변종 바이러스
(인플루엔자A상파울루H1N1)
브라질서 처음 발견.
▶2009년 대한민국-미국 정상회담.
▶2005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폐막(평양)
▶2005년 국내 최장 12km
인천대교 착공.
▶2002년 방북단, 평양서 대규모 예배.
▶2002년 프랑스 총선 중도우파 압승.
▶ 2001년 미국-러시아
동반자 관계 구축.
▶1997년 금융감독원 신설 발표
정부가 총리 직속으로 금융감독위원회(위원장 장관급)를 만들고,그 산하에 은행-증권-보험감독원을 통합하는 금융감독원을 발족시키기로 최종 결정했다.
또 한국은행에는 자료제출 및 검사요구권, 공동검사 요구권 등 간접적인 감독 기능만 남기고, 한은 총재가 매년 초 설정하는 물가방어 목표를 발표한 뒤 목표를 지키지 못하면 해임할 수 있는 ‘완만한 계약제’ 개념도 도입키로 했다.
강경식 부총리는 16일 과천 종합청사에서 이경식 한은 총재와 박성용 금융개혁위원장이 배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갖고, 중앙은행 제도와 금융감독체계 개편에 관한 정부 최종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재경원 장관이 겸직해 오던 금융통화위원장 자리를 한은에 내주고, 물가방어에 실패하는 경우 외에는 한은총재 임기(5년)를 보장, 종전보다 한은의 독자적인 통화정책이 가능하도록 독립성을 강화했다”고 밝혔다.
반면 한은의 은행감독 및 외환정책 기능을 대부분 박탈하고 임직원 인건비 같은 경비성 예산은 재경원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한은의 권한과 기능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이어서, 한은 내부에서는 이 총재 퇴진운동 등 강한 반발이 발생하는 파문으로 번졌다.
한국은행과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의 일부 간부들과 노조는16일 정부 개혁안의 철회를 요구하며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하기도 했다.
▶1996년 ‘북청사자놀음’
예능보유자 변영호씨 별세
▶1992년 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합의
부시 미국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1992년 6월 16일 가진 1차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현재 보유중인 장거리 전략핵무기를 2003년까지 3분의 1만 남기고 모두 폐기한다는데 합의했다. 이같은 핵감축은 미국과 구 소련이 15년여의 오랜 협상끝에 1991년 타결한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 합의수준에서 또 다시 절반 이상을 줄이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START에서 정한 양국의 전략핵탄두 보유 상한선은 미국 9천8백86개 소련 1만2백37개였는데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보유 상한선을 미국 3천5백개, 러시아 3천개로 다시 대폭 하향 조정했다.
양국 정상은 또 가장 가공할 무기인 중형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다탄두 ICBM을 폐기키로 합의했으며 이와함께 테러 위험 국가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인류의 안전을 확보하는 범지구방어망 구축작업을 함께 연구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때 합의된 전략핵무기 감축은 두 단계로 나눠 이뤄졌는데 1단계에서 양측은 보유 핵무기를 ICBM 1천2백50기 중형미사일 6백50기 잠수함 발사 미사일 2천2백50기 등 3천8백∼4천2백50개 수준으로 줄이도록 했다. 2단계에서 양측은 보유상한선이 1천7백50개로 제한되는 잠수함 발사 미사일(SIBM)을 포함, 각각 3천∼3천5백개의 핵탄두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폐기하도록 했다.
▶1989년 조치훈 명인, 본인방 획득
▶1984년 캐나다 수상에 존, 터너 선출
▶1983년 소련, 안드로포프
국가원수로 선출
▶1983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
모국 폴란드 방문
▶1980년 KBS TV과외
`가정고교방송` 방영개시
▶1977년 브레즈네프, 소련 국가원수로 선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1977년 6월 16일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에 선임됐다. 브레즈네프는 이로써 당과 국가의 양 쪽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 스탈린 이후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소련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를 해임한 이래 개인지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당 서기장과 수상, 최고회의 의장을 각각 분리, 트로이카 방식에 의한 집단지도체체를 유지해 왔다.
브레즈네프는 1964년부터 사망한 1982년까지 스탈인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을 소련의 지도자로 군림, 국제긴장 완화와 평화공존 이른바 ‘브레즈네프 노선’을 추진해 왔다.
▶1977년 로켓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 사망
▶1977년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의문사
* 轢死(역사) : 차에 치여 죽음, 교통사고 사망
▶1976년 남아공 소웨토에서
대규모 흑인폭동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있는 흑인거주지역 소웨토에서 1976년 6월 16일 폭동이 일어났다. 이날 백인정권의 언어정책에 항의하는 흑인학생 약1만여명이 경찰 300명과 충돌, 최소한 6명이 사망했고 14명이 부상했다.
소웨토봉기는 백인정부가 아프리칸스(네덜란드계의 현지 공용어)를 정규 교과과목으로 채택하려는 데 대해 반대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 13세 흑인소년이 사망함으로써 발생했다. 학생들은 아프리칸스로 수업을 진행하는 정부의 방침에 반발, 수주간에 걸쳐 수업을 보이콧해 왔다.
폭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년간 남아공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이 기간중 사망자수만 575명에 달했다. 아프리카 비동맹제국과 스웨덴, 파나마 8개국은 이 사건의 원인은 남아공 인종정책에 있는 것으로 판단해 유엔안보리에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유엔안보리는 5월 19일 만장일치로 이 안을 채택했다.
▶1973년 소련 브레즈네프 제1서기 방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1973년 6월 16일부터 10일간 워싱턴을 방문, 닉슨 대통령과 회담했다. 닉슨 미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서기장은 18일 오전과 오후 두차례 백악관에서 의제 확정없이 제1차회담을 시작으로 24일까지 계속될 미소정상회담을 시작했다.
이번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미소 핵제한 기본협정, 두 개의 통상관계의정서, 원자력평화이용을 위한 과학협정, 문화교류, 해양탐사, 농업협력, 민간항공 확장, 소득세 등 모두 9개의 협약에 조인했다. 그리고 25일 핵무기제한, 크메르평화, 양국교역증대, 유럽안보 등에 공동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워싱턴 정상회담을 폐막했다.
▶1972년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실무
회의, 본회의 의제확정, 합의문서교환
▶1972년 제1회 소년체전 개막
▶1971년 의료파동 발생
▶1968년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로 사망
시인 김수영에게 4·19는 분기점이었다. 모더니즘으로 출발해 설움·비애 등의 소시민적 정서를 표현하던 시(詩)세계가 이 때를 전후해 현실참여 쪽으로 완연히 기울었다. 물론 그 전에도 술만 마시면 자유당과 이승만을 욕했지만 아직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좌절과 미완이었지만 김수영에게 4·19는 언제나 꺼지지 않는 횃불이었다.
분단상황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김수영 자신이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났었다. 황혼무렵이면 발걸음이 명동의 전주집이나 은성 부근을 서성거렸지만 그는 언제나 원고료를 꼬박꼬박 집에 가져간 철저한 생활인이기도 했다. 한때는 양계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
1968년 6월 15일 늦은 밤, 김수영은 문단의 지인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귀가하던 중 갑자기 덮친 버스에 치였다. 이튿날 오전 9시경 병원에서 숨졌다. 47세였다.
▶1967년 브라질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실험에 성공
▶1966년 장창선선수,
세계아마 레슬링대회서 금메달
▶1963년 발렌티나 테레슈코바,
세계최초로 여성 우주비행에 성공
“여기는 갈매기. 기분 최고. ” 1963년 6월 16일,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가 된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슈코바(당시 26세)가 우주에서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갈매기는 그녀의 호출 부호.
보스토크 6호` 기내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테레슈코바 소위.
테레슈코바가 1인승 우주선 ‘보스토크 6호’에 몸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낮 12시30분이었다. 장시간의 우주여행이 남녀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은 이를 위해 발레리 비코프스키 중령을 태운 ‘보스토크 5호’를 이틀 전에 발사, 그녀와 함께 비행하도록 했다. 모스크바 방송은 무중력 상태를 실연(實演)하는 그녀의 모습을 오후 3시30분부터 생중계하기도 했다. 보스토크 6호는 70시간50분 동안 지구를 48바퀴 선회한 뒤 19일 오전 11시20분쯤 지구에 착륙했고, 보스토크 5호는 81바퀴를 돌며 119시간6분 동안 우주에 머무는 신기록을 달성한 뒤 같은 날 오후 2시쯤 지구로 돌아왔다.
흐루시초프는 “여성은 약하지 않다”며 소련에서 6번째, 세계에서 10번째의 우주비행사가 된 테레슈코바의 장도를 축하해주었다.
▶1960년 일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문 취소
1960년 6월 16일 일본정부가 강력한 좌익계 시위자들에게 굴복하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신변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연기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좌파 사회당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일 연기발표에 즉각적인 승리의 반응을 보여줬다.
전날 15일에 미-일 신안전보장조약과 관련해 발생한 유혈충돌에서 여학생의 희생에 의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당초 일본을 방문한 후 22일경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3일 앞당겨 19일 한국에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극동 친선방문의 마지막 목적지인 하와이 호놀룰루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 9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이번 순방 기간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에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며칠간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존재가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중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 수시간전에 대만 앞바다의 섬들에 공격을 가했다.
▶1956년 적십자사, 납북자 신고 접수
▶1956년 국내 최초 TV방영 시작
▶1954년 제5회 월드컵 스위스서 개막
▶1954년 고 딘 디엠,
베트남 수상에 취임
▶1947년 제1회 유엔아시아극동경제
위원회(ECAFE) 상해서 개막
▶1944년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 사망
▶1940년프랑스 페탱 내각,
독일에 항복
▶1932년 로잔배상회의
(독일의 배상액 절하)
▶1924년 중국,
황포군관학교 개교. 교장 장개석
▶1920년 멕시코의 대통령(1972-82)
로페스 포르티요 출생
▶1917년 제1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1910년 페루의 대통령(1968-75)
벨라스코 알바라도 출생
▶1903년 미국 포드자동차사 설립
* 헨리 포드 / 1910년식 포드모델 T
포드는 1903년 6월 16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Dearborn)에서 헨리 포드(Henry Ford)가 설립했고 디어본에는 현재에도 포드 본사가 있다. 2004년 포츈 잡지의 매출액 기준에 의하면, 양대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 자동차와 토요타 자동차의 뒤를 이어 세계 3위의 자동차 회사이다. 그러나 수년 전만 해도 포드는 제너럴 모터스에 이어 둘째로 큰 자동차 회사였다.
포드는 과거 거대 노동인력을 관리하는 방법과 자동차 제조공정의 방법을 개혁해 왔다. 제조공정의 연구 결과로 엘리 휘트니가 제안했던 교환가능한 부품을 사용한 최초의 일괄 작업 공정을 1913년 도입하기도 했다. 이 방식에 따라 자동차는 벨트를 따라 이동하게 되고 작업자는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부품을 장착하게 되어, 기업 입장에서는 저비용으로도 높은 품질 관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의 수많은 제조 기업들이 이 공정을 채택하여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노사관계 역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1914년 당시 일반적인 노동시간은 하루 9시간이었고 임금은 일당 2달러 34센트였다. 그러던 것을 8시간 노동시간에 5달러를 지급하면서 노동자의 복지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설립 초기 포드 자동차의 성공은 1908년 10월 포드 모델 T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 자동차에는 8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이 매겨졌다. 포드 모델 T는 1914년 50만대 이상 팔리면서 미국 전체 자동차의 반 이상을 포드 자동차일 정도로 포드 자동차의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운 모델이다.
현재 포드 자동차 회사의 최고 경영자는 윌리엄 클레이 포드 2세이다.
포드 자동차 회사는 투자자 열두 명으로부터 28,000달러를 받아 마차 공장을 개조한 곳에서 설립되었다. 초기 수년간 디트로이트 시의 공장에서 하루에 몇 대의 자동차만을 생산하는 소규모 회사였다.
1903년 우리나라 고종이 재위 40년 기념으로 영국에서 자동차를 들여왔는데, 바로 포드 A 자동차였다.
1908년 포드는 포드 모델 T를 발표하였다. 초기 모델들은 포드 피켓 공장(Piquette Manufacturing Plant)에서 제조되었지만, 곧이어 포드 하이랜드 파크 공장(Highland Park Plant)으로 옮겼고 이곳에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하루 천대 생산이라는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다. 또한 1913년까지 조립 라인과 대량 생산에 관한 모든 기술을 발전시켰다. 포드는 1913년 12월 1일 이동 조립 라인을 세계 최초로 소개하면서 섀시(chassis) 조립을 12시간 30분에서 2시간 40분으로 줄이는 획기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 혁신보다도 더 혁신적인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었다. 포드 자동차는 단조로운 작업으로 인해 숙련된 작업자가 회사를 떠나지 않도록 1914년 1월 5일 당시 평균 일당의 두 배인 5달러로 급료를 올리고 하루 9시간 근무를 하루 8시간 근무로 낮추는 등의 급진적인 정책을 발표한다. 이러한 혁신적인 정책의 결과로 1913년 말 포드 자동차는 미국 내 자동차의 50 퍼센트를 생산했고, 1918년에는 미국 전체 자동차의 절반이 포드 모델 T일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19년 1월 헨리 포드의 아들인 엣셀 포드(Edsel Ford)가 새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대는 미국 소비자 신용도의 증가로 인해 포드의 시장 점유율이 많이 떨어진 시기였다. 그 이유는 당시 포드의 목표가 미국의 일반 노동자도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값싼 자동차를 생산해 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는 헨리 포드의 의지였다). 따라서 가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기능을 최소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너럴 모터스와 같은 다른 경쟁사들은 더 다양한 색상과 고급 기능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신용도가 높은 소비자들은 고급 자동차를 구매하게 된다. 포드는 이러한 시장 상황을 극복하고자, 1927년 12월 2일 포드 모델 T를 단종하고 포드 모델 A를 발표한다.
1922년 포드는 적극적으로 고급 자동차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링컨을 인수하고,머큐리 자동차 사업부를 발족시켜 1930년대에 중저가 자동차 시장에도 진출하게 된다.
헨리 포드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II)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의 사장으로 재임하고 1960년부터 1980년까지 회장과 최고 경영자(CEO) 자리에 있었다. 1956년에 포드는 기업을 공개하게 되지만, 포드 일가는 주식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1946년 포드 자동차 회사에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가 재무기획 관리자로 합류한다. 그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존 F. 케네디가 당선된 다음 날인 1960년 11월 9일 포드 자동차 회사의 대표직에까지 오른다. 포드가(家) 출신이 아닌 최초의 회사 대표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포드 자동차 회사가 성공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로버트 맥나마라는 포드 일가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대표직을 맡은 지 5주도 채 안돼서 존 F. 케네디의 권유로 미국의 국방장관이 된다.
1950년대에 포드 자동차 회사는 1955년 포드 선더버드(Thunderbird)를 발표하고, 1958년에는 엣셀(Edsel) 브랜드를 발표한다. 그러나 엣셀 브랜드는 27개월이 안 돼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타격을 입었던 포드 자동차 회사는 1960년 포드 팰콘과 1964년 포드 머스탱(Mustang)을 발표하면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고, 그 여세로 1967년 자회사인 포드 유럽까지 설립한다.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도 포드 머스탱이나 포드 핀토와 같이 시장에서 성공한 몇몇 유명한 자동차 설계에 참여하면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대표가 되었지만, 헨리 포드 2세와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결국은 헨리 포드 2세가 1978년 그를 해고했다. 그 당시 포드 자동차 회사는 회계상 2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해롤드 폴링(Harold Poling)이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회장과 최고 경영자로 재임했다. 알렉스 트로트만(Alex Trotman)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잭스 내써(Jacques Nasser)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의 최고 경영자였다.
▶1902년 이상재 등
개혁당사건에 관련되어 구속
▶1901년 손문, 일본에 망명
▶1840년 아편전쟁 발발
중국이 홍콩반환을 앞두고 제작한 영화 `아편전쟁`에서 몰수한 아편을 폐기하는 장면
(원내 사진은 임칙서).
영국의회는 4월 10일 271대 262라는 근소한 표차로 전쟁을 결의한 바 있다. 100여년 동안 중국에 아편을 팔아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던 영국은 중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보복차원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광주에 부임한 임칙서가 `아편금연대업(阿片禁煙大業)`에 나서면서 촉발됐다. 임칙서는 중국인 밀매자들을 적발해 처벌하고 밀수선들을 억류하거나 이를 보호하고 있는 영국 상관을 포위하는 등 강력한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압수한 아편 전량을 폐기하기도 했다. 아편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 1762년 실학자 정약용 출생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을 꿈꾸다, 정약용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귀양살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성실을 제일로 친 사람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탄생한 것이다.
수학과 관료생활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약용의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린 이유로, 큰 형 약현이 '삼미집'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어릴 적 스승은 부친이었다. 10세 나이에 경사(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마현에 터를 잡은 그가 서울 출입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15세에 서울 회현동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들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입신의 생활은 20대부터였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교유 관계를 넓혔다. 성균관 재학 시에 이미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세에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다.
정약용은 23세에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西學)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이후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는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지만,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천주교 문제가 터지기 전,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관직은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 등으로 승승장구하였다.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았다. 한때나마 외직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고마고(雇馬庫) 개혁, 가좌부(家坐簿) 제도 개선, [마과회통(麻科會通)] 저작 등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가장 이상적인 관료가였다. 배다리와 기중가의 설계에서 이미 재능을 펼쳤지만, 그의 저작에서 엿보이는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민본(民本)이었다. 정약용은 왕정시대에도 주민 자치가 실현되기를 소원한 인물이다. 조선후기를 살았던 인물이었지만, 소박하게나마 민주주의를 지향한 인물이었지 않았을까.
기나긴 유배 생활의 시작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은 정조였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환란이 없었지만,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정약용도 정조 사후에 완벽히 정계에서 배제되고 잊혀져 갔다. 사실 정약용은 관직에 나간 지 2년 만에 당색(黨色)으로 비판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가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산시문집] 제4권에는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정약용의 시가 전해진다.
빈소를 열고 발인하는 날 슬픔을 적다[啓引日述哀]
운기(雲旗), 우개(羽蓋) 펄럭펄럭 세상 먼지 터는 걸까 홍화문(弘化) 앞에다 조장(祖帳)을 차리었네
열두 전거(輇車)에다 채워둔 우상 말(塑馬)이 일시에 머리 들어 서쪽을 향하고 있네
영구 수레(龍輴)가 밤 되어 노량(露梁) 사장 도착하니 일천 개 등촉들이 강사(絳紗) 장막 에워싸네
단청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똑같은데 님의 넋은 어느새 우화관(于華館)으로 가셨을까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의상(衣裳)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궐은 옛 모습 그대로 있건마는 서향각 배알을 각지기가 못하게 하네
([다산시문집] 제4권, 시)
유배 생활 처음에는 천주교도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천주교인이라는 소문으로 나자 모두 정약용을 모른척했다. 유배지의 어려움 속에서도 승려 혜장(惠藏) 등과 교유하고, 제자들을 키우며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담배 역시 유배의 시름을 덜어주는 벗이었다.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머무른 곳이 사의재(四宜齋)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 기거하면서 예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이후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과 목리(牧里)의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전전하면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천여 권의 서적을 쌓아 놓고 유교 경전을 연구하였다. 그의 이른바 주석 학문인 경학(經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마현으로의 귀향과 [여유당집]의 완성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57세에 해배되어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향인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해배되었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지냈던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자신이 지은 많은 저술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초로의 나이에 더 이상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저술들을 널리 소개하여 읽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경세(經世)의 길이었다. 이후 자신의 호를 다음 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즐겨 사용한 것 역시 그런 의미였다. 그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의 저술에 대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고, 일표(一表)와 이서(二書)는 천하와 국가를 위함이니, 본말(本末)이 갖추어졌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육경과 사서에 관한 저술이 근본이라면,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는 경세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다.
해배 이후 학문적 교제를 했던 대상은 신작(申綽, 1760~1828)·김매순(金邁淳, 1776~1840)·홍석주(洪奭周, 1774~1842)·홍길주(洪吉周, 1786~1841)·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 당시 저명한 노·소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정권을 잡은 노·소론계였지만 고정된 정론이나 학설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경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경세관을 펼쳐 나갔다.
정약용이 가진 국가개혁의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국가개혁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경세유표]에서 그는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이 종합된 개혁사상을 전개하였다. 정약용의 개혁안은 장인영국(匠人營國)과 정전법(井田法)을 중심으로 한 체국경야(體國經野)라 평가할 수 있다. 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건설(체국)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경야)을 바탕으로 세제,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안의 주요 골자이다. [주례(周禮)]의 체국경야 체제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 조선후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상공업의 진흥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경세유표]를 후대에도 계속해서 갈고 닦아야 할 ‘초본’이라 했다. 그가 펼친 국가개혁사상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 생명력을 가진 근대적 사상이었다고 할 것이다.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던 정약용은 양반제자 18명과 중인제자 6명이 각각 별도로 그의 아들과 더불어 자기가 경영하던 전답을 기본재산으로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였다. 또 초의(草衣)선사를 비롯한 만덕사의 스님들은 전등계(傳燈契)를 조직하게 하여, 길이 우의를 다지도록 했다. 그는 귀향 이후에도 옛 제자들과 서로 내왕하면서 강진에서 있을 때와 다르지 않게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다산의 저술활동은, 물론 다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과의 공동작업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다산의 많은 저서에는 공저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는데, 그러한 표기가 없는 경우에도 공동저작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목민심서]는 정용편(丁鏞編)으로 되어 있는데, 저술의 체계를 잡고 조목마다 편자의 의견을 붙이는 일은 다산 스스로가 행했지만, 각종의 전적(典籍)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할 뿐만이 아니라 다산의 구술을 기록하고 정서(精書)·제책(製冊)하는 일은 모두 제자들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48권 16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목민심서]가 단 1년 이내에 저술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회갑을 맞은 1822년 다산은 인생을 정리한다. 자신의 장지를 정하고, 스스로 묘지명을 짓는다. 별호도 후대를 기약한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사용한다. 그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기존 저술에 대한 종합과 문집의 편집으로 나타났다.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으로 모두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 이후 별세할 때까지 15년 동안 그는 [매씨상서평]을 개정하거나, [상서고훈]과 [상서지원록]을 개수하고 합편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정리하는 등 저작에 대한 분합, 필삭, 윤색에 온 힘을 기울여 182책 503권의 가장본 [여유당집]을 완성하였다. 아들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여유당집]의 교열을 부탁했으며, 1883년(고종 20)에는 왕명에 따라 [여유당집]이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되었다.
▶ 1583년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유능한 총리로 불리는 악셀 옥센셰르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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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AhdUIzRWCs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