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천 산책로
주말 태풍으로 동남해안은 많은 비가 내렸고 내륙까지 과수를 비롯한 수확기 작물에 큰 피해를 주었다. 자연 재해를 입은 농민들은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테다. 일요일 거가대교 통행이 통제되어 월요일 아침 거제로 건너왔다. 출근 시간이 빠듯해 고현에서 연사까지 택시를 탔다. 기사한테 주말 이틀 거제에 비가 많이 내렸느냐 물었더니 엄청 왔다고 했다.
월요일 일과를 끝내고 다시 고현으로 나갈 일이 생겼다. 한 달 한 번 내과에 들려 혈당을 체크하고 약을 타오는 일이다. 와실에 들어 신발을 운동화로 바꾸어 연사 들녘 들길을 걸었다. 바람에 쓰러진 벼가 적어 농부는 시름을 잊어도 될 듯했다. 연초교를 지나 연초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많은 비가 내려 상류로부터 흘러오는 냇물이 가득했다. 평소와 다르게 보인 하천이었다.
연초천이 고현만으로 드는 하류에는 흰뺨검둥오리들이 떼 지어 날아와 유유히 헤엄쳐 놀았다. 물 만난 고기들처럼 녀석들의 세상이었다. 천변 산책로에는 저물 무렵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제법 오갔다. 중곡지구 아파트 사는 사람들에겐 연초천 산책로가 건강을 지켜주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연사에서 고현까지 시내버스로 가면 십 분 남짓인데 걸어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연초천이 고현만에 닿은 저만치 삼성조선소 도크가 보였다. 날이 저물어가는 때라 불빛이 들어왔다. 고현만 개발 매립지를 지나 시가지로 향했다. 고층 아파트 뒤로 계룡산엔 산허리로 운무가 걸쳐 있었다. 내가 다니는 내과에 들려 간호사로부터 혈당을 체크하니 95였다. 약을 먹긴 해도 식후 그 정도면 정상치나 마찬가지다. 고혈당에 코가 꿰어 자존심 상하게 주치의를 면담했다.
의사는 별다른 문진도 없이 집에서 혈당을 체크해 보느냐고 물어와 그러질 않는다고 했다. 이번까지 지난번과 같은 처방전을 쓰고 이후는 다시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들려 약봉지를 받았다. 문을 밀치고 나오니 실내포장 주점 골목이었다. 거길 둘러보니 혼자 자리를 치지하긴 어색할 듯했다. 길을 건너 다른 골목을 지나다 알맞은 주점을 한 곳 물색했다.
시내 나온 김에 저녁을 때우고 싶었다. 그곳 역시 실내포장으로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구석엔 앳된 처자 셋이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한 자리 차지해 차림표를 살폈다. 젊은이가 좋아할 안주들이 다양했다. 나는 바지락 탕으로 소주를 한 병 시켜 자작했다. 몇몇 친구들에게 고현 저잣거리로 나와 저녁끼니를 대신해 주님을 만난다는 문자를 날려 보냈다.
바지락을 까가며 잔을 비우니 한 병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다. 돼지껍데기 야채볶음으로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그제야 다른 차림을 주문하지 않아도 저녁 끼니를 대신해도 되었다. 구석자리 처자들은 지역 대학생인 듯했다. 아르바이트 얘기를 나누다 뭔가 심각한 고민이 있는지 두 차례나 문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왔다. 나는 소주 두 병과 안주가 저녁을 대신해도 되었다.
주점을 나오니 골목은 아직 초저녁인데 어둠이 내려 간판엔 환한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연사로 가는 버스정류소가 가까이 있었지만 거기로 가지 않았다. 저 멀리 삼성조선소 불빛이 보이는 고현만으로 나갔다. 연사 와실로 복귀도 아까 왔던 연초천 산책로를 걸어가고 싶었다. 천변으로 나가니 가로등이 켜져 있어 걷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더러 산책을 나왔다.
어둔 밤 연초천 산책로를 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불과 두어 시간 사이 산책 교량엔 야간 조명이 들어와 운치를 더했다. 고현만으로 흘러든 연초천은 인근 아파트 불빛이 수면에 거꾸로 비치어 아름다웠다. 시내버스를 타지 않고 걷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초교를 건너 연사 들녘을 지났다. 아침마다 내가 그 들녘을 빙글 둘러 산책을 하면서 학교로 출근했던 동선과 겹쳤다. 19.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