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음 생은
원서동에 살고 싶다
창덕궁 높은 궐담 아래
원서동 볕 좋은 이 골목길에
사는 듯 마는 듯
소리 없이 살고 싶다
창덕궁5길 31번지
나즈막한 지붕에
굴뚝을 내고
조붓한 밭에
맨드라미도 심고
내 괭이만 사랑하고 싶다
그렇게 잃어버릴 줄 알았으면
단 한 번만이라도
그늘진 방에서 데리고 나올 것을
이 볕 좋은 원서동 골목길 함께 걷다
창덕궁 후원에 들어 나란히
부용 연못가에 앉았기도 할 것을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지
내 괭이를 잃어버리고도
괭이라면 어느 괭이라도
다 같으려니 했지
세월이 흘러서야
슬픔을 알았지
다음 생은 정말
이 볕 좋은 원서동
들어가는 길이 나오는 길이 되는 골목에서
내 괭이와 양지바른 사랑만 하다
있었는 듯 없었는 듯
살다 가고 싶다
-『공정한시인의사회』 2021년 12월호 -
사진 〈Bing Image〉
별들의 고향
방 민 호
눈을 뜬다는 건
어렵군 아주 어려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니
그 사이에 나는 무슨 일을 벌인 걸까
헤매며 실컷 나다니기나 하다
이제야 겨우 눈 뜨다니
누가 그토록 무거운 어둠을
이 두 눈꺼풀 위에 얹어 놓았나
버렸어야 해 일찍 올게만 보이면 굽신거리는 짓 비굴하게 서둘러 고개 숙였지 그 덕에 뭐 하나 제대로 못 봤지
〈인형의 집〉의 노라에
여자에게 자기만의 방을 주라는 울프에
별빛 같은 여인 테스까지 넣고도
그는 이상李箱도 잊지 않았네
스물여섯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인데
그래서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겠지
경아가 그래서 그토록 처절하게 망가져
겨울밤에 그렇게 스러질 수 있었겠지
그녀는 지금쯤 고향에 닿았을까
별 세상은 머니까 아직 멀었겠지
힘들어도 보통 힘든 게 아냐
제 눈 맑게 씻어내서
옥을 알아보는 일
내가 옳은 데서
벗어나는 일
사진 〈Bing Image〉
괭 이
방 민 호
남 모르는 내 작은 반지하방에
괭이 한 마리 살고 있었네
나도 외롭고
괭이도 외로워
우리는 서로 정 깊은 동무였네
외출에서 돌아오면
괭이는 내 품에 안겨들어
야웅, 소리를 내고
제 볼을 내 가슴에 부비고
장난 그리운 아이의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네
나밖에 모르고
하루 종일 나 없는 빈방을 지키며
나만 기다린 내 괭이
나도 녀석의 목덜미를 만져주고 등허리를 쓸어주고
여린 발톱마저 애무해 주다 보면
시간은 나와 내 괭이 옆에서 영원히 멈춰 서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로 다 사라져 버렸을까
나만 알던 내 반지하방은
나만 기다리던 내 괭이는
내 괭이를 위해 노란 수선화를 들고 돌아와
내 괭이와 함께 그 긴 여름 장마 빗소리를 밤새 듣던 나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박항률 作 〈낮꿈〉 / 사진 〈Bing Image〉
낮 꿈
방 민 호
깜빡 잠든 꿈에
소설 한 편 있으되
한 사내와 한 여자가
사랑한 얘기였네
때는 오랑캐가 바다로 올 즈음
한 사내가 함경도로 유배를 갔는데
햇살이 돌길에 바스러지는 저녁에
여자가 멀리 사내를 찾아왔다
여자는 다른 사내 첩살이를 한댔는데
꿈은 결말을 다 보여주지 않고
돌아가는 여자의 그림자만 비춘다
덧없는 꿈에서 깨어나 보니
나는 지금 현재에 살고
유배도 아니 가고
선비도 못 되었다
옛 여자가 나를 찾아올 리 없는데
아직도 꿈에나 살고 있는 듯
엎드려 상소 올리던 옛일을 떠올린다
여자는 다른 사내 품에 잘 있으려니 한다
이 현재보다는
옛날이 좋을 테고
재물도 넉넉해야
버티려니 한다
텅 빈 하늘에
조각 구름 하나 떠
사는 일은 언제나
꿈이라고 한다
-《쿨투라》 2022년 9월호(통권 99호)-
방민호 1965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창작과 비평' 제 1회 신인 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 평론집으로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행인의 독법' '문명의 감각' '납함 아래의 침묵'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가 있다.
2001년 '현대시'로 시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으로 '숨은 벽' '내 고통은 바닷속 한방울의 공기도 되지 못했네'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2012년 '문학의 오늘'에 '짜장면이 맞다'를 발표하면서 소설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대전스토리, 겨울' '연인 심청'이 있으며 창작집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이 있다. 산문집으로 '서울문학기행' '명주'가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