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라는 직업이 원래 고되기는 하지만, 요즈음은 특히 더 피곤한거 같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엘리베이터 따위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출, 퇴근 할 때마다 5층 계단을 이용하는 일이 나의 유일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이랑 밤 새 술먹고 돌아다녀도 다음날 아침 해장국 한그릇 해치우고 출근을 서두르던, 건강 이라면 둘째 가래도 서러워할 내가 어느새 건강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다니....
그래, 이런 생각을 할 때 마다 내가 희진이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울적해진다.
나는 우선 나이가 너무 많고, 돈도 별로 없으며, 무엇보다 아내가 있는 가장이다.
나의 이 주체못할 감정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의 장래를 망치고, 아내에게 고통을 주고, 결국 나 자신마저 파멸시키는 거다....
하지만.. 난 생각을 고쳐먹기로 한다. 아직은 희진이도 날 좋아하고 있다...그 생각을 하자 다시 용기가 솟아 오른다. 그녀의 큰 눈동자가 , 날 바라보며 웃음짓던 그 눈동자가 있는 동안 만큼은 괜찮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나란 인간에게 싫증을 느끼고 떠나가려 할 것이다. 그래, 그때는 미련없이 보내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힘겹기만 하던 발걸음도 어느새 가벼워져, 5층 까지 올라와 버렸다. 비상계단 과 통하는 철제 방화문을 열고 아파트 복도로 나선다. 우리집은 계단에서 세 번째. 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지나치는 창문들 안쪽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온다. 한때는 우리집도 저런 웃음이 있었는데....기껏 솟아오른 희망을 밀어내고 다시 우울함이 찾아온다. 다 나 때문이다...아내가 희진이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그래도 아내는 얌전한 사람이어서, 절대로 따지거나 하지 않는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 - 친척, 회사동료, 이웃집 아줌마 - 은 나의 이런 외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난 그게 더 무섭다. 그녀는 날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해버린다. 내가 들어오거나 나가거나 신경쓰지 않는다. 물론 인사도 없다. 당연히 식사도 차려주지 않는다. 그녀는 멍한 눈동자로 날 쳐다볼뿐,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하기야 다른 부부들도 싸우고 냉전 할 때는 이런 식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짧게 대답 정도는 하는 법 아닌가? "네 " 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근데 아내는 그런것도 없다. 내가 아무리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는 것은 물론, 대꾸조차 않는다. 심지어는 콧방귀도 안뀐다. 그리고 그보다 더 견딜수 없는 것은, 아내는 나와 별거 하거나 각방을 쓰는 것도 아니란 거다. 그녀는 신혼 때 처럼 내 옆에서 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어쩌다 화해 하자는 뜻에서 슬그머니 애무를 해보아도 절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혼자 아내를 끌어안고 온갖 짖 을 다 해보지만, 그녀는 신음소리 한번 낸 적도 없다. 마치 자위행위 하는 것 같은 비참한 생각에 밤새도록 한숨도 못자는 일도 있었다.
나는 아내가 대단히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이 상태가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아이 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우린 아이도 없다. 그녀는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에게 하는 것처럼 날 대한다..
희진이를 알게 된날부터 2~3 일 계속 그런식이더니, 요즈음은 아예 집에도 안 들어온다.
난 아내가 어디있는지 조차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내일은 하루종일 비번이다....오랫만에 푹 쉬고 싶지만 그럴수 없다. 아내가 미뤄놓은 청소며 빨래같은 집안일들이 산더미 같기 때문이다. 열쇠로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면서, 난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 네. xx 경찰서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
강민식 일경은 전화를 받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손목 시계를 들여다본다. 틀림없다. 오후 3시정각. 요 며칠사이 계속해서 이시간에 장난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런 것 처럼 수화기 저쪽 편에선 아무 응답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다시한번 묻는다.
" 여보세요 , 말씀 하세요. "
말은 하면서 눈으로는 발신자 추적 장치의 디스플레이를 보고 있다. 요즘은 경찰장비가 굉장히 고급스러워 져서, 거의 그가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추적이 가능하다. 첩보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15 초 안에 끊으면 추적이 안되고 어쩌고 하는 것은 옛말이다. 사실 그런 것을 믿고 장난전화를 걸어 욕한마디 하고는 냉큼 끊었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디스플레이는 언제나 그런것처럼 같은 번호를 보여준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것처럼, 강일경이 전화번호를 확인하자마자 수화기에서 모기소리 같이 작은 여자목소리가 들려온다 .
"...............살려주세요...."
그리고 끊어진다.... 강민식 일경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옆에서 보고있던 박경장이 의아한 듯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박경장은 원래 다른 부서 소속이지만, 오늘은 원래 강일경의 직속상관인 최경장이 쉬는 날이라 대타로 불려온것이다.
" 장난전화입니다. 신경쓰지 마십쇼 "
" 왜? 뭐라고 하는데? 장난전화 거는 놈 이면 잡아야지 !"
" 잡을수가 있어야 잡죠 "
박경장이 강일경을 한 대 쥐어박으며 말한다.
" 야 이놈아, 저 추적장비가 얼마짜리 인데 그걸 조작 못하냐? 발신자 번호 안나와? "
강일경은 얻어맞은 자리를 감싸잡고 억울한 듯 박경장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 모르는 소리 마십쇼. 번호는 나옵니다. 근데 그게 최경장님 댁이란 말입니다. "
" 뭐? "
" 한 일주일 전부터 계속 그럽니다. 한 세시쯤 되면 전화가 오고, 살려주세요... 그러는데, 발신자 번호는 최경장님 댁이란 말입니다. 그분은 아이도 없고 부인 혼자 집에 계시는데, 경찰관의 아내가 경찰서에 장난전화 걸겠습니까? "
박경장은 왠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다시 물었다.
" 살려주세요....그런다고? "
휴우....이제서야 빨래가 끝났다. 난 베란다에 있는 빨래걸이에 이제 막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들을 걸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린 것이다.
난 현관문 앞까지 다가가 문은 열지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 누구십니까? "
" 나야. 박경장 "
"아....박경장 자네가 왠일인가? 미안하지만 지금은...."
"부인이 많이 아프다길래 문병 차 왔지. 빨리 문열게. "
"아, 글쎄.. 그런 정도가 아니라네...미안하지만..돌아가주게 "
" 난 꼭 들어가야 겠네 "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열쇠 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가 막을 사이도 없이 이내 문이 확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보이는 것은, 박경장과 그를 따라온듯한 눈에익은 정복차림의 경관 서너명, 그리고 당황한 표정의 관리인이었다. 관리인의 손에는 비상키 인듯한 열쇠가 들려있었다.
난 무척 화가 났기 때문에 고함을 질렸다
" 자네!! 이게 대체 무슨짓인가? "
박경장은 내앞을 가로막으며 서서 정복경관 들을 향해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 샅샅이 뒤져봐 !! "
그리고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 설명해 주지. 얼마전에 자네 아내의 실종신고가 우리 과에 접수되었네. 내가 바로 자네에게 그걸 이야기 해주지 않은 것은 두가지가 수상했기 때문이야. 첫째. 신고한 사람은 이웃 아주머니 인데, 자네와 아내가 크게 다투는 소리를 들은 그 며칠 뒤 부터 부인이 보이지 않았다는 구만. 그리고 더 수상한 두 번째는 정작 당사자인 자네는 왜 아무말도 없었느냐 하는 것이야 !! "
난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이제 다 끝난거다..
" 박경장님 !!"
정복경관 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박경장은 대뜸 내 손을 잡더니 믿겨지지 않는 힘으로 날 끌고 갔다. 난 굳이 반항할 이유도 느끼지 못하고 슬슬 따라갔다. 소리를 지른 경관이 서 있는곳은 냉장고 앞이었다. 냉동실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그 앞에 경관은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 뭔가 찾았나? "
경관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냉동고 안쪽을 가르켰다.
" 최...최경장 님의..............얼굴........ 그리고......."
" 뭐??"
박경장은 이제 아예 날 매달다 시피 끌고서 그 쪽으로 다가갔다. 하기야 난 원래 무게가 가벼웠다. 아니, 아예 없었다.
냉동고 안에는 잘려진 내 머리가 두 눈을 부릎뜬채 놓여있다. 그걸 본 박경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헬쓱 해지며 날 돌아본다. 난 웃었다.
하...웃을 상황은 아니군. 미안해 여보, 더 멀리 도망치셔야 겠군 그래. 난 속죄 할려고 했을뿐이야.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당신이 의심받을수도 있겠다 싶어서 평상시처럼 ' 살아 ' 왔지. 당신이 살인범이 되는건 원치 않았는데..일이 이리될지는 정말 몰랐다고....
그런데 말야, 여보... 희진이가 내말을 너무 안듣는 거 있지?
내가 그러지 말랬는데, 매일 오후 세시쯤에 강일경 한테 전화를 걸더라고.....
" 살려주세요....."
하면서 말이야........말리지 못해서 미안해 ....
바로 옆에 그녀의 얼굴을보면서, 그 커다랗게 떠진 눈을 보고있노라니...별로 애써 말리고 싶지 않더라고....... 희진아, 너 왜 내옆에 있니.... 미안하다....내탓이다......싶어서말야.
그럼 여보, 잘있어......얼마뒤에 다시 볼수 있겠지.
첫댓글 『ⓣrap™』님은 오싹 한것 만 올리세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