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전시실 소개
사유의 방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공간이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면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다.
뛰어난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근엄한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사유의 방 전시실 소장품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1962-1),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옛 지정번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반가좌(半跏坐)라는 특이한 자세 때문에 얼굴과 팔, 다리, 허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치마의 처리도 매우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반가사유상의 등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조각사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풍부한 조형성과 함께 뛰어난 주조기술을 선보이는 동양조각사에 있어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반가사유상이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의 자세는 출가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인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대다수가 독립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그 중 석굴암 조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飛鳥), 하쿠호(白鳳)시대의 반가사유상 제작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가사유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미륵보살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이는 미래에 태어나 성불하는 구세주 미륵보살의 행적이 과거 싯다르타 태자의 그것을 비슷하게 따른다는 경전의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가사유상의 조형적 아름다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반가사유상은 우선 화려한 보관이 눈에 띕니다. 마치 탑처럼 보이는 장식이 솟아 있는 이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특이한 형식으로 흔히 일월식(日月蝕)이라고 합니다. 일월식의 보관 장식은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유래․발전하여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보관으로 차용되었는데, 인도 간다라의 보살상이나 중국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지에서 다양한 예가 나타납니다. 정면에서 이 반가사유상을 보면 허리가 가늘며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측면에서 보면 상승하는 힘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탄력 넘치는 신체의 곡선이 강조되었고 양쪽 어깨로부터 끝이 위로 올라와 날카로움을 한층 더해주고 있는 천의자락은 유려한 선을 그리면서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양 무릎과 뒷면의 의자 덮개에 새겨진 주름은 타원과 S자형의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변화무쌍한 흐름을 나타냅니다.
반가좌의 자세도 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팔을 길게 늘인 비사실적인 비례를 통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유의 모습을 창출해낸 조각가의 예술적 창의력에서 비롯됩니다. 더욱이 뺨 위에 살짝 댄 오른손 손가락은 깊은 내면의 법열(法悅)을 전하듯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오묘합니다. 한마디로 이 불상의 조형미는 비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종교적 아름다움, 곧 이상적 사실미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고졸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반가좌의 자세,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 조화, 천의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완벽한 주조 기법 등, 우리는 이 금동불에서 가장 이상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이 상은 내부가 흙으로 채워진 중공식(中空式) 주조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크기가 1m에 가까워서 금동불로는 비교적 큰 상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의 두께가 2~4mm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얇은 두께를 고르게 유지하기 위하여 머리까지 관통하는 수직의 철심과 어깨를 가로지르는 수평의 철심을 교차시키고, 머리 부분에 철못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도의 주조 기술이 뒷받침되었기에 이처럼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불상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옛 지정번호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의 비교
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반가사유상입니다. 그러나 두 상은 조형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입니다. 국보 83호 상은 머리에 낮은 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이라고 합니다. 또한 국보 78호 상과 달리 상반신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으며, 단순한 목걸이만 착용하였습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표현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로 보아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국보 78호보다 조금 뒷 시기인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닮아, 우리나라 불상의 고대 일본 전래와 관련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한편,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과 관련하여 정확한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아 백제 혹은 신라의 것이라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신체와 천의의 힘찬 기세, 고구려에서 특히 중국의 북위와 동위시대 양식의 불상이 크게 유행한 점,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양식과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불상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로는 하나의 특정 국가를 지목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는 이 반가사유상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은 범용적 예술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반가사유상(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金銅半跏思惟像) :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각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6, 7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조각품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상은 일찍이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형상이 매우 흡사하여 한국과 일본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대개 어떤 주된 불상에 종속되거나 한 부분적인 존재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단독으로 독립되어 예배 대상으로 조성된 예가 드물지만, 백제에 와서는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따라서 반가좌 특유의 복잡한 신체 구조를 무리 없이 소화하여 중국의 반가사유상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자세의 과장과 단순화, 동일한 단위의 옷주름이 반복되는 도식성을 극복하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합니다.
정교함과 잔잔한 미소가 풍기는 숭고미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이른바 반가(半跏)한 자세에 오른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마치 사유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도의 간다라나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불전(佛傳) 부조 중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사유상(思惟像)’, ‘용수상(龍樹像)’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미래의 부처)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의 아스카, 하쿠호 시대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보는 인식은 신라에서 특히 성행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게 됩니다. 당시 신라에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로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으면서 이와 같이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단정 지어 부르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많이 약하여 ‘반가사유상’으로 칭하는 것이 보다 무난합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 주름, 분명하게 표현된 이목구비, 정교하고 완벽한 주조기술, 여기에 더해 얼굴의 잔잔한 미소는 종교의 예배 대상이 주는 숭고미를 더해줍니다.
머리에는 세 개의 반원이 이어진 삼산관(三山冠) 또는 연화관(蓮花冠)을 쓰고 있습니다. 관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도 표현되지 않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이러한 형식의 보관은 인도나 중국의 보살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 선은 길게 호를 지으며 콧선으로 이어지는데, 작지만 길게 묘사된 눈은 끝이 살짝 올라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깁니다. 그러나 이를 무마하듯 단정하게 다문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는 모습은 신비감마저 주고 있습니다.
나형(裸形)의 상체는 가슴근육이 살짝 도드라지고 허리는 잘록합니다. 오른쪽 얼굴에 대고 있는 손가락은 움직임을 표현하여 율동감이 있으며, 이와 대칭되기라도 하는 듯 위로 올린 오른발의 발가락은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린 모습이 생동감을 더합니다. 반가사유상의 제작에 있어 특히 어려운 점은 오른팔의 처리입니다. 오른 팔은 무릎에서 꺾여서 뺨에 다시 닿아야 하므로 길게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상은 오른쪽 무릎을 위로 살짝 들어 팔꿈치를 받쳐주고 그 팔 또한 비스듬히 꺾어 살짝 구부린 손가락을 통해 뺨에 대고 있어 매우 치밀한 역학적 구성을 보여주며,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는 살짝 숙인 얼굴과 상체로 이어집니다.
국보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중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품입니다.
출토지가 불명확하여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이 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합니다. 지금까지 이 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근거로 신라작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두 상은 삼면관의 보관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 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이 매우 흡사하여 일찍이 양국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에 있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당시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이 녹나무나 비자나무로 제작된 것과 비교하여, 한국의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제작방법에 있어서도 신체의 각 부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짜 맞추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통나무 하나에 상을 그대로 깎아서 조각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류지 상이 우리 상에 비해 정적인 느낌이 강하여 서로 다른 조형감각을 풍긴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으며, 미술사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형태와 우아하고 세련된 조각 기술로 미루어 백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작국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국립 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이 위치한
2층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