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는 아니지만
더운 가을날 비가 내린다 .
들려오는 빗소리는 시원한데
날씨는 여전히 후덥지근 하다 .
문을 열어놓고 비를 바라보다가
책 한권을 펼쳐본다 .
황 순원 . 소나기 .
참 먹장구름 한장이 머리위에 와 있다 .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것 같다 .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뭇잎 에서 빗방을 듣는 소리가 난다 .
굵은 빗방울 이었다 .
목덜미가 선뜻 선뜻 했다 .
그러자 대번에 가로막는 빗줄기 .
비 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
그리로 가 비를 그을수 밖에 .
그러나 원두막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
그런대로 비가 덜 새는곳을 가려 소녀를 들어서게 했다 .
소녀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
어깨를 자꾸 떨었다 .
소녀가 들어선 곳도 비가 새기 시작했다 .
더 거기서 비를 그을수는 없었다 .
밖을 내다보던 소년이 수수밭 쪽으로 달려간다 .
세워놓은 수숫단 속을 비집어 보더니
옆의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다 .
그러고는 소녀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
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
그저 어둡고 좁은게 안됐다 .
앞에 나 앉은 소년은 그냥 비를 맞아야만 했다 .
그런 소년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 .
소녀가 속삭이듯이 ,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
괜찮다고 했다 .
소녀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
할수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
그 바람에 소녀가 안고 있는 꽃 묵음이 우그러 들었다 .
그러나 소녀는 상관 없다고 생각 했다 .
소란하던 수숫잎 소리도 뚝 그쳤다 .
밖이 멀개졌다 .
도랑 있는곳 까지 와 보니 ,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
소년이 등을 돌려댔다 .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
걷어올린 소년의 잡방이 까지 물이 올라왔다 .
소녀는 ,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그러 안았다 .
그 다음날은 소녀의 모양이 뵈지 않았다 .
다음날도 , 다음날도 매일같이
개울가로 달려와봐도 뵈지 않았다 .
그날도 소년은 주머니 속 흰 조약돌만 만지작 거리며 개울가로 나왔다 .
그랬더니 이쪽 개울둑에 소녀가 앉아 있는게 아닌가 .
" 그동안 앓았다 "
" 그날 소나기 맞은것 땜에 ? "
" 인제 다 낫냐 ? "
" 아직두 ..."
" 그럼 누워 있어야지 ? "
" 너무 갑갑해서 나왔다... 그날 참 재밋었어 ...근데 그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 본다 .
거기에 검붉은 진흙물 같은게 들어 있었다 .
" 이게 무슨 물 같니 ? "
" 내 생각해 냈다 , 그날 도랑 건널때 내가 업힌 일 있었지 ? "
" 그때 네 등 에서 옮은 물 이다 "
소년은 얼굴이 확 달아 오름을 느꼈다 .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
" 허 , 참 , 세상일두 .....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 왔는지
" 윤 초시 댁두 말이 아니어 , 그 많은 전답을 다 팔아 버리구 ,
대대루 살아오든 집 까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걸 보면 ..... "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 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
" 증손 이라곤 기집애 그애 하나뿐 이었지요 ? "
" 그렇지 , 사내애 둘 있는건 어려서 잃구 ..."
" 어쩌문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
" 글쎄 말 이지 , 이번 앤 꽤 여러날 앓는걸 약두 변변이 못 써봤다는군 "
지금 같아서는 윤 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
"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것이 여간 잔망 스럽지가 않어 ,
글쎄 죽기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든 옷은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 달라구 ..... "
신 문학 . 1953 년 .
빗 님은 꾸준히 오시는데
나 태어나기전의 고전을 읽고 있으니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내 어릴적의 그 소녀는 지금 어디에서
이 비를 바라보고 있을까 ?
여전히 예쁠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