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발표수업을 위해 만들었던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서 올려 봅니다^^;;
●후한의 정치와 외척, 환관의 투쟁…
(1)후한 외척정치의 서막, 외척 두씨(竇氏)와 환관 정중(鄭衆)!
장화(章和) 2년(88년) 장제(章帝)가 승하하자 태자 조(肇)가 즉위하니 이가 화제(和帝)이다. 화제는 당시 10세에 불과했으므로 황태후 두씨가 섭정(攝政)하게 되었으며 오라비인 두헌(竇憲)을 시중(侍中)으로 삼아 정치를 전횡하였다. 두헌의 동생 두독(竇篤) 등과 두씨의 도당들이 조정의 요직과 지방관직을 독점하였으며, 두헌이 흉노원정에 성공한 이후 대장군의 자리에 오르자 두씨 도당들은 더욱 심한 횡포를 부렸다. 이에 위기를 느낀 화제는 측근의 환관 정중과 모의하여 양주(梁州)에 머물던 두헌이 돌아오자 금군(禁軍)을 동원하여 두헌을 자결케 하고 두씨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후 환관 정중이 정사에 참여하게 되고 소향후(鄛鄕侯)에 봉해졌는데, 이것이 환관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열후(列侯)에 봉해지는 단초가 되었다.
(2)외척 등씨(鄧氏)와 환관 이윤(李閏), 강경(江京)!
원흥(元興) 원년(105년) 화제가 승하하자 생후 100일된 태자 융(隆, 殤帝)이 즉위했으나 이듬해인 연평(延平)원년에 죽고, 종제 호(祜)가 즉위하니 이가 안제(安帝)이다. 안제를 옹립한 황태후 등씨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그 형제인 등즐(鄧騭) 등 일족이 득세하였다. 등태후는 교양이 풍부하였으며 외척, 환관의 등용이외에도 명사(名士)들을 등용하여 사대부의 인심을 얻으려 애썼다. 건광(建光) 원년(121)년 등태후가 승하하자 친정을 하게 된 안제는 환관 이윤, 강경 등과 모의하여 등씨 세력을 제거하였다.
(3)외척 염씨(閻氏)와 19인의 후(侯)!
등씨일족이 제거된 후 황후 염씨의 형제인 염현(閻顯)이 경교(卿校)의 지위를 차지하고, 환관 이윤, 강경 등이 대권을 장악하여 환관, 외척 공동정권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뒤이어 이들은 이귀인(李貴人) 소생의 황태자 보(保)를 폐했다. 연광(延光) 4년(125년) 3월 안제가 승하하자 염황후는 나이어린 황족인 북향후(北鄕侯) 의(懿, 少帝)를 옹립하고 스스로 황태후가 되어 정사를 전단하였다. 또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된 염현은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그해 10월 소제가 승하하자 환관 손정(孫程) 등 19인이 염현을 주살하고 염씨 세력을 제거하고 폐위된 태자 유보를 옹립하여 즉위시키니 이가 순제(順帝)이다. 순제 옹립의 공로로 손정 등 19인이 모두 후(侯)로 봉해져 환관의 권세가 더욱 증가되었고, 관직에 임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자를 두어 작(爵)을 세습하였다.
(4)외척 양씨(梁氏)의 20년 천하와 5후(五侯)!
순제가 즉위한 후 양씨를 황후로 세우자 그 부친인 양상(梁商)과 오라비 양기(梁冀)가 잇달아 대장군이 되어 대권을 장악했다. 건강(建康) 원년(144년) 순제가 승하하자 양황후는 2세의 황태자 병(炳, 沖帝)을 세웠으나 3개월 만에 죽고, 그 종형 항렬의 8세의 찬(纘, 質帝)을 옹립하고 황태후가 되어 섭정하였다. 이때 양기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강점하고, 양민을 노비로 삼았으며 양씨일족으로 조정과 군현의 관직을 채우고 뇌물을 거둬들이는 등 권력이 황제를 능가하였다. 이러한 양씨의 전횡을 목도한 질제가 노하여 양기를 “발호장군(跋扈將軍)”으로 칭하자 내심 두려움을 품은 양기가 독만두를 올려 시해하고 숙부뻘인 지(志)를 옹립하니 이가 환제(桓帝)이다. 연희(延熹) 2년(159년) 양태후의 누이였던 양황후가 승하하자 환제는 환관 단초(單超), 당형(唐衡) 등 5인과 모의하여 금군을 움직여 양기와 그 일족을 주살했다. 양씨세력 제거의 공으로 단초 등 5인은 열후에 올랐으며 이들 환관세력이 권력을 독점하여 강력한 지반을 확보하여 거의 영구정권을 획득한 듯한 양상을 보였다. 또한 이들 환관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청의(淸議)의 사대부세력을 환제시기와 뒤이은 영제(靈帝)시기에 2차에 걸친 “당고(黨錮)의 화(禍)”를 일으켜 제거하기에 이른다.
(5)"장상시(張常侍)는 내 아비요, 조상시(趙常侍)는 내 어미로다~"
10상시(十常侍)와 외척 하씨(何氏)!
환제에 이어 영제시기에 이르자 조정을 장악한 환관의 세력이 전성기에 이른다. 당고의 화 이후 환관들은 크게 매관(賣官)의 길을 열었고, 친척, 당파를 지방에 파견하여 토지를 점탈하는 등 횡포가 극에 달했다. 이때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환관들이 장양(張讓), 단규(段珪), 조충(趙忠) 등 10인으로 그 유명한 십상시였다. 중평(中平) 5년(189년) 영제가 승하하고 14세의 황자 변(弁, 少帝)이 즉위하자 그 어머니인 태후 하씨가 오라비 하진(何進)과 함께 대권을 장악했다. 하진은 환관세력을 제거하여 화근을 없애려 했으나 도리어 환관에게 속아 궁중에서 암살되었다. 이에 궁문 밖에서 대기하던 원소(袁紹)가 군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가 환관 2000여명을 주살하니 화제이래로 횡포를 일삼던 환관세력이 일시에 소멸되었고, 하진의 죽음으로 외척세력도 소멸되어 이후 천하는 대란에 휩싸이게 된다.
첫댓글 사실상 후환은 환관과 외척이 다 말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당시 최고의 출세길은 고자되기 ㄲㄲ
디씨의 100억고자랑 같은 맥락이군요.ㅋ
'고자되기'보다는 외척에게 연줄을 대거나,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이었습니다ㅡㅡ; 당시의 '고자되기'는 '인간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었죠ㅡㅡ;; "환관"들은 아무리 '조정대신'들과 관품이 같아도 상당한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ㅡㅡ;;;
예외도 있는데 명의 '왕진'입니다. 향시에 합격한 거인출신이지만 스스로 고자가 되어 환관이 되었습니다. 선덕제 이후로 환관도 글을 배웠기 떄문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환관에게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급속하게 출세하게 됩니다
한나라 때와 명나라 때를 비교하는 것은 좀 그런듯 하네요ㅡㅡ; 명나라의 경우는 "환관"이 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에 지원하는 바람에~ "환관"과 "환관 후보생"의 숫자가 수십만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나라 때는 그 정도로 인기있는 직업이 아니었고~ "환관" 자체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되도록이면 꺼려하는 직업중의 하나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후한시대인줄 모르고 괜히 엉뚱한 말을 적었네요
해동천자/저도 명과 한을 좀 햇갈린듯하군요 //ㅂ//)
흔히 중국의 "환관"하면~ 주로 명나라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쉽게 시대구분을 하는 방법은~ 이전 시대일수록 "유교"의 원칙에 철저하다는 것이죠!!! 한나라는 모든 생활이 '예(禮)'에 따라 영위되는 "예교주의 사회"였던데 반해서~ 명나라는 '권력'과 '돈'이 우선하는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환관"이 되는 것에 대해 한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의 길을 포기할 수가 있는가ㅜㅜ" 라는 의식을 보이는 반면, 명나라 사람들은 "환관이 되면 부귀를 한번에!!! 가자~ 거세하러!!!" 라는 행태를 보이죠ㅠㅠ
환관은 후한, 당, 명 때 가장 많이 득세했지만 후한이나 명의 환관들은 당의 환관들보다 힘이 '약간' 약했습니다. 세 나라 환관 다 황제의 권력이 기생하는 존재였지만 후한과 명의 환관은 황제를 바꿀만한 힘은 없었던 것에 비해 당의 환관은 황제를 독살하고 바꾸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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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환관"들과 후한시대의 "환관"들은 권력을 장악하는데 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후한시대의 경우는 어린 황제가 "외척"들의 전횡에 눌려 있다가, 장성하여 '친정'을 할 무렵이 되면~ "외척"이 득세한 '조정'의 힘보다는 측근인 "환관"의 힘을 빌어 "외척"을 제거했기 때문에 "환관"이 일종의 '공신'으로써 정사에 참여했고, 어디까지나 황제의 종복으로써 '총애'를 매개로 정권을 유지합니다!!! 또 "외척"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는 몸을 숙일 뿐이지~ 완전히 '숙청'당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환관"들은 아예 황제를 옹립하면서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단순한 '공신' 이상의 힘을 발휘했고, 마음대로 황제를 폐립하거나~ 시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문생천자(門生天子), 정책국로(政策國老)"라는 말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당나라의 "환관"들은 계속해서 정권을 장악했고, 정쟁도 같은 "환관"들이 서로 다른 황자를 옹립하는데서 발생합니다ㅡㅡ; '조정대신'들이 황제와 제휴하여 "환관"들을 제거하려다 번번히 실패하는 것을 봐도 그들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감로의 변"이 있죠ㅡㅡ;;
후한은 환관과 외척중 외척이 좀더 강했다고 볼수있겠네요. 마지막은 환관이 잡았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단정하는 건 좀 어렵습니다^^; "외척"의 경우는~ 대개 1대에 한해서 대권을 장악하지만, "환관"의 경우는~ 2대, 3대에 걸쳐서 위세를 부리죠^^;; "외척"이 좀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건~ "사대부"와 "문벌대족"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은 "외척"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지만, "환관"을 아예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둘 중에서 "외척"을 지지하는 편이었거든요^^;;;
강력한 외척을 환관을 키워 잡고 하는 패턴이 반복되다가, 결국은 환관이 잡아먹었죠. 환녕제가 괜히 암군의 대명사로 써먹힌 게 아니니까.
그런 패턴이 반복될 수 밖에 없었던 건~ "후한"의 황제들이 대부분 단명하는 바람에 어린 황제를 옹립한 "태후"와 "외척"이 손쉽게 대권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무제"나 "효명황제(명제)"를 제외하곤 모두 젊은 나이에 승하했죠ㅜㅜ 또 "외척"들의 등쌀이 얼마나 심했던지~ "환제"가 "외척" 양씨를 제거하기 위해 "환관" "당형" 등과 모의했던 장소는 다름아닌 "측간(厠間 ; 화장실)"이었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