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교보문고에 가서 조용헌이 쓴
<고수기행>(랜덤하우스중앙)을 샀다.
그 책에는 <이 시대의 진정한 고수, 행복한 아웃사이더>라는 부제처럼
인생의 고수이며 행복한 아웃사이더로 사는 사람들을 취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월급도 퇴직금도 없이 살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일깨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반추해 보게 된다.
이번 주말에는 그런 고수를 찾아가 볼 것이다.
오대산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런 고수 두 분이 계신 곳이다.
오대산 북쪽자락 홍천군 내면 대둔리 살둔에는
더러 답사가들에게 알려진 살둔산장이 있다.
평범한 산골마을 쯤으로 느껴지는 이곳을 유명하게 한 것은
2층 건물의 살둔산장이다. 과거 한 출판사가 선정한
한국의 살고 싶은 100대 집에 선정되기도 할 만큼 그 모양새가 특이하다.
살둔산장은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엮어 올리는
강원도 전통의 2층 귀틀집으로 1985년 윤두선 씨가
오대산의 월정사 복원작업에 참여한 도목수에게 특별히 부탁해 지었다.
윤두선 씨는 이를테면 비운의 방랑적 인생을 살다가 간 분이다.
그는 본래 윤보선 전 대통령과는 이복동생이었다.
서자로 태어난 그가 한국 최대의 명문가 집안에서 겪었을 수모는
그의 인생이 비련의 삶이 되는데 필요충분조건이 있었다.
집안의 주선으로 명문가의 딸과 일찍이 혼례를 치렀지만
그는 가정에 안주하지 못했다.
특히 윤씨 집안에 대한 반감은 평생을 떠도는 방랑자로 그를 만들었다.
절간의 선방을 기웃거리거나,
산간에 스며든 도사들, 그리고 한물간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그는
오대산 월정사 주지와 교분을 쌓으면서 살둔산장을 짓게 된다.
6.25당시 불타버린 월정사를 당시 박 대통령이 복원을 지시하면서
1972년에 시작된 복원공사가 몇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때 남은 자재와, 당시 국내 최고의 목수들을 빌려와
이 살둔산장은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살둔산장은 본래 윤두선 씨가
한 여인을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여인은 윤두선 씨가 방랑생활을 할 때
자신의 비운의 인생을 이해하는 사연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래되는 말에 살둔에서는 새로 지은 집에서는
꼭 사람이 죽어나간다고 했다.
그런 전설이 사실인지 몰라도 3년 만에
윤두선은 산골 어디선가 객사를 했다.
그 후 그 여인은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 뒤로 산장지기가 여러번 바뀌었다.
그런데 대부분 3년을 못 넘기고 다 죽어 나갔다고 한다.
7년 전 그 산장에 스며든 사람이 있었다.
이상주...청청백백...고운 인품을 지닌 내가 존경하는 선배였다.
형수님은 유명작가이기도 하고, 당신은 중앙일보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던 그가 반독재 운동을 한다고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느날 심각한 교통사고를 입어서
생사를 넘나든 뇌수술을 3년여에 걸쳐서 하게 되었다.
처음엔 사람도 잘 못 알아볼 정도였고, 병의 치료를 위해
형수님과도 해혼(解婚=이혼은 헤어지는 것이지만, 해혼은 결혼을 푼다는 뜻이라는데, 그 차이는 잘 모르겠다.)을 하고 강원도 산골로 스며들었다.
여러 절간과 산을 헤매다 끝내 정착한 곳이
살둔산장지기이다.
그런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형님은 건강하게 잘 살아있다.
2년 전부터는 누님에게 산장 관리를 맡기고
지금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인적을 피해 산속에 들어가
토굴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작년겨울에 우연히 오대산을 헤매다,
이상주 선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 그를 따라 그 토굴로 찾아갔었다.
여전히 해맑은 웃음을 띠며 차를 대접하는 선배를
나는 황토아궁이 통나무 의자에 앉아 얻어먹었다.
요즘 무슨 생각을 하시냐고 묻자
그저 “무념무상” 그 네 마디 뿐이다.
토굴에는 1만 여권의 장서가 쌓여있고,
온갖 산약초에 대한 해박한 설명과,
그러한 약초로 담근 술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아름아름 지인들에게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
또 33일 만에 주변의 보급지원도 없이
백두대간을 왕복으로 주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선배는 오대산 산신령이거나 도사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도 흐르지 않는 오대산에
겨울이 또 지났으니,
이젠 백발과 흰 수염이 더 성성해 졌을 것이다.
이번 도정에 만날 수 있을지....
오대산 남쪽자락엔
꽤 유명한 박해조 선생이 산다.
건축업을 하다가 20년 전에
자신의 영혼을 만나고 싶어서 오대산에 무작정 입조를 한 분이다.
밥을 안 먹고 앉은 자리에서 17일간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하였고,
눈 속에 갖혀서 오대산에서 4개월을 그냥 명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10년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은 목사와 수녀, 정치인과 학자들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매주 찾아온다고 한다.
그의 이론은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정리해서 펴낸바가 있지만,
그의 깨달음을 알고자 한다면
오대산 속에 있는 그의 집에서
커다란 별들을 머리에 이고
마당에 불을 피워 삽겹살과 소주가 곁들여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마침 인도에서 ‘깨달음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나의 정신적 보디사트바이며 티베트불교 전문가인 Miss염이 동참한다고 하고,
한 20여명의 고수들이 내일밤 오대산에 모이기로 했다.
그 자리에 껴서 나도 오대산을 안아볼까 한다.
그의 이론은 독특하지만,
나는 확실히 그가 도통했다고 믿고 있다.
오대산 북대사 가는 길엔
몇 년 전부터 자작나무를 심었다.
그 자작은 유난히 껍질의 고운 윤기가 아름답다.
겨울을 나고 선 그 빛나는 자작나무의 모습처럼
나도 은은함으로 서고 싶다.
첫댓글 자주 들러주세요. 반가움~
자작나무.....ㅎㅎㅎ.......은은한 모습으로 늘 함께 하기를.
에에~ 곳간면 양촌리 이장이 한말씀~ 하고 흉내내려다가,,, 내 가까운 뒷날에 위의 모습 숭내나 내 볼 수 있 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