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6.21 17:10 | 수정 : 2013.06.22 13:11
1980년 5월 보고된 CIA 기밀문건들
<일요일 비상계엄 확대선포 이후 구금된 인원은 계엄사령부가 인정한 26명보다 훨씬 많다. 일부 부패혐의를 받은 정치인이 포함됐지만, 대부분은 무당파적 반체제 인사이거나 ‘투사(militant)’ 김대중(金大中)의 지지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적어도 50명의 반체제 인사와 50명의 학생이 구금돼 있고, 당국은 여전히 남은 이들을 쫓고 있다고 추정했다.>
1980년 5월 20일 한국에 있는 정보 수집원들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보고한 기밀문건 내용 중 일부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당시 CIA의 기밀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당시 광주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에 확실한 파악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련 첩보를 집중 수집하며 사태를 예의 주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 모습. 미국은 5·18 초기 사태 파악을 확실히 하지 못했다/ 조선DB
1980년 5월 광주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 생산한 기밀문건 중 현재 공개된 것은 8건 정도다. 얼마 되지 않은 문건인 데다 삭제된 부분이 많아 본질 수준까지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이면은 미국 문건에 흔적이 남아 있다”란 말이 전해질 정도로 CIA 기밀해제 문건은 1차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최근 발행된 《월간조선》 7월호에 따르면, 당시 CIA는 ▲광주 시내 충돌 상황 ▲김영삼 등 야권 정치인의 저항 ▲전두환(全斗煥)을 중심으로 한 군부의 대응 ▲북한 정세 및 북한군 동향 등을 비교적 자세히 보고했다.
5·18 때 CIA 한국 책임자는 로버트 브루스터(Brewster) 10대 지부장으로, 그는 5·17조치 직후인 5월 18일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를 만나 5·17조치로 다수의 여야 정치인을 연행 조사하고 있는 목적을 물은 바 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당시 면담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은 “김대중과 같은 학생 소요 배후 조종 인물과 공산주의 용어를 사용해 선동을 주모(主謀)한 종교인, 박 대통령 시절 정치 요직을 담당했던 인물들의 권력남용 및 부정부패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자, 학생데모 주동자들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대다수 CIA 보고문은 내용 중 절반 정도가 삭제돼 있다. 기밀해제된 CIA 문건의 일반적인 특성이지만, 일부 지워진 부분의 경우 문단이 아닌 문장 일부분이 잘려 나가 의혹을 더욱 증폭시킨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북한과 관련한 내용은 통째로 지워졌다.
5·18 당시 군차량을 탈취한 시위대가 광주 시내를 돌고 있다/ 조선DB
CIA 기밀문건의 주요 내용은 일부 단어 선택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가 발표한 5·18 수사보고서 내용과 크게 어긋남이 없다. 미국은 1989년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총 48개 항의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광주사태 배경설명(Backgrounder)>이란 문건을 통해 상세하게 밝혔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CIA 기밀문건은 미 국무부 비밀해제 전문과 함께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재미(在美) 블로거 안치용씨는 2010년 5·18 관련 CIA 기밀해제 문건 중 일부를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했지만, 국내언론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안씨는 CIA 문건 공개와 함께 1980년 5월 7일 미 국무부 비밀 전문을 분석해 “시위 진압에 특전사 병력이 투입될 것을 미국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좌) 1980년 5월 19일 금남로에서 학생시위대가 군인들에 의해 진압당하고 있다, (우)계엄군 철수 당시 버려진 장비와 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전남도청앞을 경비하고 있다/ 조선DB
5·18은 무수한 의혹과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낳은 사건으로, 그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월간조선》은 과거 총 사망자 수에 대해 광주발(發) 2000명 설(說)보다 정부의 191명 설이 더 정확하다는 입장을 취하다 광주에서 불매운동을 당했지만, 결국 수사결과 정확한 보도였음이 밝혀졌다.
조갑제(趙甲濟) 전(前) 《월간조선》 대표는 최근 ‘대규모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가 일부 우파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조 전 대표는 33년 전 《국제신문》 기자로서 회사 방침에 불복하고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직접 광주에서 유혈사태를 취재한 바 있다. 그는 최근 발간한 《趙甲濟의 광주사태》란 책에서 5·18을 이렇게 정리했다.
<2000명 사망설이 퍼진 것이나 북한군 개입설이 퍼진 배경엔 믿고 싶어하는 감정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2000명 사망설을, 좌파나 호남에 반감(反感)을 가진 이들은 북한군 개입설로 기울었다. … (공수부대원들이 무릎쏴 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화려한 휴가>의 왜곡은 ‘북한군 개입설’보다 더 심각하다.〉
《월간조선》은 1998년 안기부의 요청으로 누락된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노동당 비서와 김덕홍(金德弘) 전 여광무역 사장의 비공개 증언을 소개하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600명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은 당시 안보상황 등에 미루어 볼 때 믿기 어렵지만, 북한의 대남(對南)공작 부서에서 고정간첩이나 자생적 좌파조직을 활용해 상황을 악화시키려 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