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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박물관 기증관
남쪽 전시 공간은 기증 문화유산을 전시하여 기증자들을 기리며 기증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공간입니다.
기증Ⅰ
기증Ⅱ
기증Ⅲ
기증Ⅳ
* 윤동한 기증 〈수월관음도〉(기증Ⅱ실)와 손창근 기증 〈세한도〉(기증Ⅳ실)는 2024년 5월 6일(월)까지 전시됩니다.
기증Ⅰ
전시실 소개
기증Ⅰ실은 기증관의 도입부로서, 관람객이 기증의 개념과 가치에 보다 쉽게 접근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이다.
‘나눔의 가치를 발견하는 공간’이라는 주제로 새롭게 문을 연 기증Ⅰ실은 기증품 전시를 감상하며 쉴 수 있는 라운지, 기증과 관련된 자료와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아카이브, 영상 등이 어우러진 복합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아울러 손기정 선생이 기증한 그리스 투구를 집중 조명한 공간을 마련하여 선생이 투구를 기증하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투구를 매개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실 소장품
손기정 기증 청동 투구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 경기 때 승리를 기원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바치기 위해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투구는 1875년부터 7년여 동안 그리스 올림푸스 제우스 신전을 발굴한 독일 고고학교수인 쿠르티우스의 발굴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투구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코린트 양식으로 눈과 입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감싸는 일체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코린트 양식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투구는 원형의 머리부분에서 목까지 직선으로 내려오게 만들어졌습니다.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이 받은 투구와 같은 것으로 머리부분에서 아래로 잘록하게 들어갔다가 목 부분에서 나팔처럼 퍼지게 제작된 것입니다.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 우승 부상으로 받은 이 투구는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 경기 때 승리를 기원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바치기 위해 그리스 코린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손기정이 올림픽 우승 당시 메달과 함께 부상으로 받아
코린트식 투구는 구조상 너무 무겁다는 것과 귀를 모두 덮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고, 투구 내부에 통풍이 되지 않아 여름에 착용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기념비에 새겨진 무인 조각상에서 투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와 같이 완벽한 원형을 유지한 예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투구의 가치가 높습니다. 투구의 상태를 살펴보면, 앞쪽 일부분이 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상태가 양호합니다. 테두리에는 구멍이 뚫려있고 일부는 고정못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 구멍들은 머리와 투구 사이의 완충효과를 위해 헝겊 등을 안쪽에 덧대고 이를 고정하기 위해 뚫은 것으로 고정못으로 고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앞쪽에는 이 고정못 바깥으로 점열문과 톱니모양 문양이 2중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투구는 손기정 선생이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메달과 함께 부상으로 받게 되어 있었지만, 당시 손 선수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베를린박물관에 50여 년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그리스가 유물을 주는 관행은 제2회 파리 올림픽(1900년)부터 실시된 것으로 기원전 490년 아테네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후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약 40㎞를 달려온 병사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된 유물은 ‘헤르메스’의 흉상과 같은 실제 유물이었으며, 이러한 유물 수여는 고대 유물의 유출 방지령이 내려진 2차 세계대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36년에 베를린올림픽 당시에는 그리스의 브라디니(Vradyni) 신문사가 투구를 마라톤 우승자에게 선물로 내놓았던 것인데,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아마추어 선수에게는 메달 이외에 어떠한 선물도 공식적으로 수여할 수 없다’는 규정을 근거로 손기정에게 이 투구를 수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손기정은 마라톤 우승자에게 메달 이외에 수여될 부상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귀국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 출신 우승자의 권리를 대변할 의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손기정 선생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거나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건의하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실은 역사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이 투구는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메달과 함께 부상으로 받게 되었으나 전달되지 못한 채 베를린박물관에 50여 년간 보관되어 있었다가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 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손기정에게 헌정되었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후 되찾은 투구, 서구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1975년 손기정 선생은 우연히 앨범을 정리하다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직후에 일본 임원으로부터 받은 사진 속에 자신이 받아야 할 부상으로 그리스 투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선생은 이 투구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베를린 샤로텐부르그(Charlottenburg)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반환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베를린 샤로텐부르그 박물관에 전시된 이 투구의 설명판에는 ‘그리스 코린트 시대의 투구 / 마라톤 승자를 위해 아테네의 브라디니 신문사가 제공한 기념상 /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1936년 / 손기떼이(손기정의 일본어 표기) / 일본 / 2시간 29분 19초’라고 독일어로 명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투구를 반환 받기 위한 노력은 그 후 10여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반환을 위한 노력에는 국내 언론사와 대한올림픽위원회는 물론 투구를 부상으로 내놓은 그리스의 브라디니 신문사와 그리스올림픽위원회가 앞장섰습니다. 독일올림픽위원회는 이 기간 동안 절대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대신 복제품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으나 손기정 선생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1986년 베를린올림픽 개최 5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올림픽위원회에서 마련한 기념행사에서 투구를 손기정 선생에게 헌정하기로 하면서 반환 받게 되었습니다.
50년 만에 주인의 손에 돌아온 그리스 투구는 비록 외국의 유물이기는 하지만 2천 6백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의 부상품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1987년 서구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90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후 손기정 선생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뜻을 밝히고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도록 국가에 이 투구를 기증하였습니다.
기증Ⅱ
전시실 소개
기증Ⅱ실은 ‘문화유산 지키기와 기증’이라는 주제로 20세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혼란기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지킨 분들의 노력을 살펴본다. 국외로 반출되거나 훼손될 위험에 처할 뻔한 문화유산, 후손들이 정성껏 지킨 문중 문화유산, 국립중앙박물관회 등 단체의 노력이 기증으로 이어진 사례를 통해 기증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였다.
기증Ⅱ 전시실 소장품
매화에 둘러싸인 서옥
청자 퇴화 연꽃 넝쿨무늬 주자
백자 청화 난초무늬 조롱박모양 병
이항복을 호성공신으로 삼는 교서
이항복 호성공신 초상
이항복이 손수 쓴 천자문
이항복이 손수 쓴 제례에 대한 글
윤두수가 쓴 편지
황해도 관찰사 부임
이희발 시호교지
조서경 무과급제 왕지
권경로 교지
상서
오시복 교지
상서
윤상은 성적호구장
윤상정 교지
윤상정 산 송소장
평산신씨세보
예조입안
윤사신 부부 무덤 출토품
류정량과 정휘옹주 합장묘 출토 명기
백자 청화 해안군 묘지
온녕군 무덤 출토품
강희안의 무덤 출토품
독립운동가 이원순이 기증한 우리 문화유산
불감과 관음보살
화각함
나전 칠 경전 상자
나전 칠 연꽃 넝쿨무늬 상자
백자 달항아리
백자 청화 숙인 해평윤씨 묘지
안중근의 글씨
농상공부 직원 명단을 적은 소책자
관안
자수 화초길상문 병풍
순종 왕세자책봉 교명
명성황후 옥보
철종비 철인왕후 추상존호 옥책
관음보살
부처
‘정화8년’이 새겨진 향로
수월관음도
기증Ⅲ
기증Ⅲ실은 ‘기증 문화유산의 다채로운 세계’라는 주제로 서로 다른 조형성과 미감을 지닌 문화유산을 전시실을 가로지르는 중앙 통로 좌우에 전시하여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옛 생활문화를 담고 있는 문방과 규방 공예품, 흙과 금속으로 만든 문화유산, 그리고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 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한데 어우러져 조화와 공존의 의미를 보여 준다.
기증Ⅲ 전시실 소장품
파한집
지봉유설
산림경제
장자
춘추
대학
차사
백자 청화 산모양 붓걸이
인장과 인주함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재조본 경률이상 권8
천노금강경
수능엄경언해 권6
홍무예제
성리대전서절요 권1∼4
무지개 빙하
제목 미상
풍경화
기증Ⅳ
전시실 소개
기증Ⅳ실은 ‘전통미술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이 만나는 공간이다. 예술가의 안목으로 옛 물건들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전통미술품에서 받은 영감을 예술 창작활동의 원천으로 삼은 현대 작가들의 기증품을 소개한다.
기증Ⅳ 전시실 소장품
세한도 – 끝나지 않는 감동 : 이수경
〈세한도(歲寒圖)〉는 1844년 제주에서 제작된 이후 176년 동안 여러 주인을 거쳤습니다. 동아시아 삼국을 오간 〈세한도〉의 여정이 고스란히 남아 현재 긴 두루마리로 전합니다. 2020년 손창근(孫昌根, 1926~ ) 선생의 숭고한 결단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세한도〉가 되었습니다.
〈세한도〉와 22편의 감상글로 이루어진 두루마리
많은 분들이 〈세한도〉 하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그림과 글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세한도〉를 보고 한국과 중국의 문인 20명이 쓴 22편의 감상글이 덧붙여져 현재 〈세한도〉는 전체 길이 1,469.5cm의 긴 두루마리 형태로 전해옵니다.
〈세한도〉 두루마리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10년대 초 〈세한도〉 소장자였던 김준학(金準學, 1859~1914)이 오랫동안 앓다가 쾌차한 것을 기념하여 1914년에 쓴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와 시가 함께 적혀 있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가 1844년에 제작된 김정희의 〈세한도〉입니다. 세 번째는 중국 청나라 문인 16인이 1845년에 〈세한도〉를 보고 쓴 글 16편과 김준학이 1914년에 추가한 글 2편이 4개의 종이에 쓰인 부분입니다. 네 번째 부분이 753.7cm로 가장 긴데, 한국 근대 지식인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가 1949년에 쓴 3편의 글과 함께 비어 있는 부분이 거의 5m에 이릅니다.
세한과 송백을 담은 〈세한도〉
〈세한도〉가 제작된 배경은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와 관련이 깊습니다. 똑똑하고 총명했던 명문가 자제 김정희는 반대 세력인 안동 김문의 모함으로 55세 때 억울하게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엄중한 절해고도(絶海孤島) 위리안치(圍籬安置)였습니다. 즉, 멀리 떨어진 섬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감금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유배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언제 유배가 풀릴지 기한이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도 김정희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정희를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죄인 김정희를 변함없이 대하는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어 통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었습니다.
이상적은 중국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책을 제주의 김정희에게 줄곧 보내주었습니다. 책은 김정희에게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늘 책에서 학문과 예술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또한 유배 중인 그에게 책은 고독을 달래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를 공자님 말씀을 담은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유명한 구절에 빗대어 칭찬하고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한국의 현대인은 이 문구를 들으면 김정희만을 떠올리지만, 기록으로 전하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여러 문인 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문구입니다.
〈세한도〉 속 세한의 표현
‘세한’은 한겨울 추운 날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림 왼쪽에 종이를 이어 네모 칸을 친 부분에 이 그림을 왜 그리게 되었는지를 강하고 굳센 필치로 상세히 적었습니다. 김정희는 이 구절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했을까요? 둥근 문이 있는 허름한 집 좌우로 소나무 두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를 세워놓았습니다. 쉽게 쓱 그린 그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줄기와 잎을 표현한 메마르면서 촘촘한 필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물기 없는 마른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칼칼하게 표현했습니다. 언뜻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마른 붓을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런 표현은 김정희가 오랫동안 갈고닦아 이루어낸 필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김정희는 메마르고 황량한 세한, 가장 추운 겨울날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가장 어울리는 필법을 찾아낸 것이지요.
이 그림은 조선시대 작품으로는 드물게 제목과 제작 동기가 명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제목을 적고, 이어서 “우선 보시게나. 완당(藕船是賞 阮堂)”이라고 써서 자신이 이상적을 위해 그렸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아래에 ‘정희’라고 찍힌 인장이 있습니다. 그림 좌측에 종이를 이어 네모 칸을 치고, 강하고 굳센 필치로 그림을 왜 그리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적었습니다.
김정희는 평소 여러 인장을 즐겨 사용했는데, 〈세한도〉에도 4개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정희(正喜)’ 외에도 호를 새긴 ‘완당(阮堂)’과 ‘추사’ 인장이 있고, 시구를 쓴 ‘장무상망(長毋相忘)’이 찍혀 있습니다. 이중 가장 주목할 인장은 그림 오른쪽 아래에 있는 ‘장무상망’입니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장무상망’ 인장은 중국 한나라 기와나 거울에 새겨진 문구를 모방한 것으로 청나라 사람들이 사용했습니다. 김정희는 젊었을 때 동그란 ‘장무상망’ 인장을 사용했는데 〈세한도〉에는 네모난 ‘장무상망’이 찍혀 있습니다. 이 인장이 누구 소유였는지 누가 찍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인장은 김정희와 이상적이 서로를 향해 송백의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말자고 했던 뜻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처럼 김정희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제목, 소재, 필법, 인장으로 치밀하게 〈세한도〉를 완성했습니다. 〈세한도〉가 뜻과 정신을 그림으로 표현한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중국으로 간 〈세한도〉
이상적은 일곱 번째로 떠나는 중국 출장길에 〈세한도〉를 소중히 챙겨갔습니다. 그리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청나라 문인 장요손(張曜孫, 1807~1863)이 주최한 모임에서 〈세한도〉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했거나, 이후 그 그림을 본 청나라 문인 16명이 감상 글을 적었습니다.
청 문인들은 〈세한도〉에 담긴 ‘군자가 송백과 같은 절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장악진(張岳鎭)은 “세한 전 송백의 절조를 먼저 배워야 한다. 오직 그 절조가 항상 있기 때문에 사철 내내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그 절조를 알아주는 자가 없어도 송백은 태연자약하다.”라며 평소 문인으로서 절개와 지조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장요손의 매형인 오찬(吳贊)은 “군자는 힘들수록 더욱 굳세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무엇을 걱정하랴.”라며 군자의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세한도〉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하며 올바른 가치를 지키는 자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그림이었습니다.
20세기 〈세한도〉의 여정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준 〈세한도〉는 이후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金秉善, 1830~1891)이 소장하다가, 그의 아들인 김준학에게 전해졌습니다. 이후 민영휘·민규식이 소장했다고 전해집니다. 1932년에는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가 〈세한도〉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김정희의 학문적 성과를 최초로 연구했고, 이한복, 손재형 등과 교류하며 김정희 관련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정년퇴임 후 그는 〈세한도〉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1944년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일본으로 가서 두 달 동안 후지쓰카를 설득한 끝에 〈세한도〉를 돌려받았습니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광복 후 1949년,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정인보, 이시영, 오세창에게 〈세한도〉 감상 글을 청했습니다. 현재의 〈세한도〉 두루마리는 손재형이 꾸민 것입니다. 손재형 이후 개성의 사업가 손세기(孫世基, 1903~1983)가 1970년대부터 소장하였고 장남 손창근이 소중히 간직하다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하였습니다.
〈세한도〉 기증으로 더 이상 감상글이 더해질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2020년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으로 〈세한도〉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면서 수많은 관람객들이 인터넷에 감상평을 남겼습니다. 함께 나누려는 기증자의 뜻에 맞게 〈세한도〉의 의미가 현대의 새로운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한도〉의 감동과 긴 여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국립 중앙박물관 기증관이 위치한
2층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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