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사밧티 근처 젯타 숲에 있는 아나타핀디카[給孤獨長者]의 승원[祇園精舍]에 머물고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 닙바나와 관계된 법담(法談)으로 비구들을 가르치고 … 계셨으며, … 그 비구들은 진리 법에 귀를 기울여 듣는 데에 전념했다.
그 때, 그것의 의미·중요성을 깨달으시고서 세존께서는 바로 그 순간 영감을 주는 이러한 게송을 읊으셨다.
For the supported there is instability, for the unsupported there is no instability; when there is no instability there is serenity; when there is serenity there is no inclination: when there is no inclination there is no coming-and-going; when there is no coming-and-going there is no decease-and-uprising; when there is no decease-and-uprising there is neither “here" nor "beyond" nor “in between the two." Just this is the end of suffering.
의지하는 것(지탱하는 것)이 있으면 불안정함이 있고, 의지하지 않는 것(지탱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불안정함이 없다.
불안정함이 없으면 평온이 있다. 평온이 있으면 집착이 없다.
집착이 없으면 왕래(생멸)가 없다. 왕래가 없으면 죽음과 태어남도 없다. 죽음과 태어남이 없으면 ‘여기’도, ‘저기’도, ‘그 둘 사이’도 없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끝이다.
첫댓글 우다나에서 열반으로 분류된 4개의 게송 중 그 네번째 8.4를 올립니다.
마침 읽어보니..
어제 방문객님께서 '어리석음을 잘 알면 깨달음이다' 라는 취지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여, 그 흐름에 맞춰 올립니다.
밑에 그 찰나생명 과 날 것의 춤은 비스므리 내용인데 왜 날 것의 춤에는 열반 번호를 안 매겼소? 매기면 오늘 올린
열반 관련 본글은 열반5가 되야 맞소..
'날 것의 춤'은
식에 대한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물론 어제 방문객님 댓글에서
'식은 연기의 모습 중 하나'라고 하셨던 것에서 보듯
연기를 잘 알면 깨달음(열반)이니
식을 잘 알면 깨달음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식을 염식과 정식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요.
아집 법집 등 번뇌없는 마음이 고멸성제인 열반이죠.
열반을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로 비유하는 경도 있습니다.
정식인 청정한 마음을 열반으로 본다면 열반사덕인 상락아정과도 매치되지 않을까 합니다.
사막이냐 오아시스냐.. 선택의 문제인듯..
지탱되면 들뜨고, 지탱되지 않으면 들뜨지 않는다.
들뜨면 가라앉지 않고, 들뜨지 않아야 가라앉는다.
가라앉으면 기울어지지 않는다(경향성이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