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해서 탐진치를 끊어버린 자리가 해탈(解脫)
우리 중생들은 십악죄을 짓습니다.
십악(十惡).
몸으로 세 가지 업을 짓고,
입으로 네 가지 업을 짓고,
뜻으로 세 가지 업을 짓지요. 아시죠?
중요한 것은 뜻으로 짓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탐진치입니다. 이것이 운전사예요.
자동차를 운전하고 간다 할 때 운전사가 없으면 자동차가 갑니까? 못 가지요.
이 탐진치가 문제예요.
탐진치가 있어서 몸뚱이가 세 가지 업을 지어요.
살도음(殺盜淫), 살(殺)-죽이고, 도(盜)-훔치고, 음(淫)-사음해요.
입으로 네 가지 업을 지어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 탐진치가 문제예요. 요놈이 문제예요. 그래서 온갖 업을 지어요.
탐진치가 온갖 번뇌를 일으켜서 수없이 지중한 업을 짓는데
그저 삼악도에 갈 업을 다 짓는다고요.
이것을 수행해서 타~악 탐진치를 끊어버린 자리가 해탈(解脫)이어요.
열반(涅槃)이어요. 법위를 아라한이라고 그래요.
수행해서 탐진치를 제거한 거예요.
그러니까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을 해탈이라고 그래요.
생사의 고통에서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난 마음의 상태, 이것을 열반이라고 그래요.
기존의 불교는 여기까지는 알아요.
여기까지는 아는데 더 깊은 열반은 몰라요.
보살 ‧ 붓다의 대열반을 몰라요. 모른다고요.
보살이 되려면 탐진치라고 하는 번뇌의 뿌리를 뽑아야 해요.
이것을 뽑으려면 사실은 두타행으로 나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두타행으로 수행해야 삼독심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 탐진ㆍ공포의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어요.
이 아라한 경계가 엄청난 경계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어요.
기존 불교는 여기를 궁극적인 경지로 봤는데 아니어요.
스님이 불과를 증해놓고 보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 이후로 많은 붓다님이 인간으로 몸 받아 오셔서
대승경전을 편집하고 가셨습니다.
《반야경》《법화경》《화엄경》을요.
그러니까 저자가 없잖아요.
나(我)라고 하는 생각이 없으니까 내 이름을 안 붙이는 거예요.
문수보살님도 오셨고 보현보살님도 오셨고 지장보살님도 오셨고
관세음보살님도 오셨어요.
그래서 대승경전을 다 써놓고 가신 거예요.
그런데 지금의 불교는 대승경전을 어떻게 보느냐?
방편설로 본다니까요.《화엄경》을 방편설로 본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없지요.
소위 큰스님들이 어떻게 《화엄경》을 이해합니까?
출처:2014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