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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에게 팔린 자에 대한 규례
레 25:35-46
35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36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37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38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9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40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41 그 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42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43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44 네 종은 남녀를 막론하고 네 사방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사올 것이며
45 또 너희 중에 거류하는 동거인들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사올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어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자들 중에서도 그리 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의 소유가 될지니라
46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 이방인 중에서는 너희가 영원한 종을 삼으려니와 너희 동족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가 피차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레 25:35-46 / [가난한 이를 도와주어라] 네 겨레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난해져 생계를 꾸려 나가기가 어려워지면 너희는 그를 나그네나 손님처럼 너와 함께 살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36) 너희는 그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말아라. 너희는 하나님 무서운 줄을 알아 네 이웃이 너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37) 그에게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빌려 주어서는 안 되며 무슨 이득을 바라고 먹을 것을 주어서도 안 된다. 38)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가나안을 너희에게 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3)9 [이스라엘 노예] 네 겨레 중에서 어떤 사람이 네게 빚을 져 팔려 왔을지라도 그를 노예처럼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 40) 그를 품꾼이나 나그네처럼 대하여 희년이 올 때까지 그렇게 지내도록 하여라. 41) 희년이 되면 팔려 온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까지도 본디 속해 있던 지파로 되돌아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42) 너희는 내가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낸 나의 노예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려 갈 수 없다. 43) 너희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 팔려 온 사람을 혹독하게 부리지 말아라. 44) [이방인 노예] 노예가 필요할 경우 너희 주변 여러 나라에서 남종이든 여종이든 노예를 사들일 수 있다. 45)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몸붙여 사는 이방 사람들과 그들의 자식 중에서도 필요한 노예를 사들일 수 있다. 이렇게 사들인 노예를 너희의 소유로 삼아라. 46) 이 노예는 너희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도 있다. 그들은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주인을 잘 섬겨야 한다. 그러나 너희 겨레 이스라엘 사람끼리는 서로 혹독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본문은 가난한 형제에 대한 보호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형제를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며, 가난하여 자신에게 팔린 동족에게 예우를 다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35-38)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게 된 형제가 있을 때 그를 도와주고 그들의 필요를 제공해 주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웃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그들을 착취하지 말고, 재산 증식을 목적으로 이웃에게 돈이나 재물을 빌려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이웃을 돕도록 명령했지만 어떤 명분으로든지 그들을 이용하여 재산 증식이나 부의 축적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명령이나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명령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과거에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며, 현재도 ‘너희의 하나님’이고, 미래에도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받았기에 이 말씀은 마땅히 자기 동족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근거가 됩니다.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39-46) 혹시 동족인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팔려 온 경우에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대하고 자유하게 될 희년까지 섬기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희년에 자녀들까지 모두 그들의 가족에게 돌아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희년에는 종으로 팔려 온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까지 모두 자유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족 형제를 이방인의 종으로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종이 된 자를 학대하거나 혹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 가난하여 자신이나 자녀가 팔리는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이 필요한 경우에 가나안 땅에 있는 이방인 중에서 사라고 했습니다. 이방인 출신의 종들은 후손에게까지도 상속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 출신의 종은 희년이 되어도 해방되지 않기에 영원한 종으로 삼을 수 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엄하게 부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가난하여 종이 된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함께 간구합시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태도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복지와 인권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연악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무엇보다 주변에 있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설 교 >
종이 아닌 형제로 둘 자
레 25:39-41 / 이성희 목사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카키스는 남편과 아내를 찾을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도 찾을 수 있으며, 아이들과 애완동물을 돌보고 요리를 하고 말다툼을 하고 화해를 하는 그 곳이 또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수도원에 계시는 분이라기보다는 집 안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화해를 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면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화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화해자로 오셨습니다. 오셔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시고 나누어진 둘을 다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화해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왜 화해자가 되지 못합니까? 화해자는 양자를 다 알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둘을 다 알지 못합니다. 치우치기 쉽습니다. 우리는 둘을 다 인정하지 못합니다. 한쪽은 인정하고 다른 쪽은 모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화해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하나 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을 다 잘 아십니다. 양쪽을 다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참 하나님(vere deus)이며 참 사람(vere homo)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셔서 하나님을 알고, 참 사람이셔서 사람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자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과 죄의 종인 사람 사이의 화해자로 자처하신 것입니다. 이런 분이 화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화해자로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의 화해자로 나섰습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 화해자로 나섰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와 빌레몬 두 사람을 다 이해하고, 인정하고, 사랑합니다. 두 사람 모두 바울에게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사람 사이의 화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화해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화해함이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는 것이요,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이요, 싸늘히 식은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이런 화해자가 종을 형제로 만듭니다. 화해는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종을 자유자로, 형제로 만듭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변호합니다. 오네시모에 대하여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도망쳤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네시모가 추방당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화해자의 역할입니다. 요셉이 훗날 형들을 만나 변호하며 화해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형님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창 45:5)라고 합니다. 이것이 화해자의 말입니다.
해결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화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화해에 초점을 맞출 때에 문제는 그 중요성을 잃고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바울이 가르쳐준 화해의 영성을 보면서 우리가 화해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이전에는 종이었던 사람입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에는 이전에는 종이었던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화해자는 그 사람의 이전의 상태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이해하고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노예제도에 대한 바울의 태도에 대하여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의 악풍을 철폐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비난합니다. 그의 윤리가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은 노예제도에 대하여 제도적인 개혁보다 중심적인 개혁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종이었던 사람이 형제로 변화합니다. 놀라운 은총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 은총입니다. 레위기 25:39에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라고 합니다. 종이었던 사람이 형제가 된 오네시모를 바울은 말합니다. 레위기는 형제가 종이 된 경우를 말하면서 종으로 부리지 말라고 합니다. 형제가 종이 되어도 부리지 말라고 하는데 하물며 종이었던 사람이 형제가 되었는데 부릴 수는 없습니다.
종의 삶은 비참합니다. 동물보다 못한 삶을 삽니다. 동물들은 의지와 인격이 없으니 차라리 낫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종이 되어 사는 것은 죽음보자 못한 삶입니다. 노예는 자기의 의지대로 하지 못합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에 불과합니다. 노예는 자신도 모르게 노예의지, 노예근성에 따라 살게 됩니다.
노예근성은 노예 의지에 따라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근성입니다. 이것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종의 신세를 지게 됩니다. 종의 근성은 편한 것을 선택하고 편한 것에 안주하려는 생각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것 외에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루터 당시에 인문학자이며 최고의 지성을 대표하던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이란 책을 1524년에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에라스무스는 사람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선택하며, 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1525년에 ‘노예의지론’을 출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으므로 구원을 위한 아무런 작용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지배되는 노예의지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이 몸속에서는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죄에 노예가 된 노예의지만 경험할 뿐입니다. 죄의 해방이 없는 자유의지는 의미가 없고 오히려 방종하게 하고 타락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대신 기독자의 자유(Christian Liberty)라는 새로운 의미를 취급하여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신학적, 영적 자유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애급에서 가지고 있던 노예근성을 완전히 뿌리 뽑고 새로운 의지로 일하고 차지하고 살게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40년 동안 새벽에 만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싸우게 하셨습니다. 땅을 갈아 일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훈련을 다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종입니다. 지식의 종이며, 물질의 종이며, 명예의 종입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의 종이 되어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종의 근성을 뿌리 뽑고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가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후에는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바울은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합니다. 아직 종이지만 종에게 형제라고 합니다. 오네시모의 엄청난 신분 상승입니다. 바울을 만나 신분의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신분의 상승, 신분의 변화가 왔습니까? 예수 믿고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죄와 마귀의 지배를 받는 노예의지가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 자유의지를 가진 자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선생인 바울에게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빌레몬에게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영적 관계뿐입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육적, 영적 이중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혈육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는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인 동인, 동인을 죽인 안재선이란 공산주의자를 용서해주고 아들로 삼았습니다. 안재선도 이름을 손재선으로 바꾸었습니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은 선을 악으로 갚은 도둑입니다. 자신을 먹여주고 보살펴준 집에서 금촛대를 훔쳐 나왔습니다. 밀리에르 주교는 장발장을 형제로 생각하여 금촛대는 자신이 준 것이라고 경찰에게 말합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15에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종이 아니라고 합니까? 주인의 하는 일을 알게 하시려고 합니다. 이제 종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친구입니다. 형제보다 친구가 훨씬 낫습니다.
마태복음 12:50에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주님의 형제입니다. 자매입니다.
오래 전 어느 전직 대통령께서 예수님을 자기 형님이라고 하여 구설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전혀 틀린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형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친구라고 하기에 우리도 감히 친구라고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사실은 바울에게는 이 말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흔한 욕 가운데 “개새끼”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개는 기분 좋지만, 사람에게는 나쁜 말입니다. 개는 사람만큼 신분 상승을 가져온 말입니다. 종에게 형제라고 하면 종은 좋지만, 바울이 종이 되는 신분 하락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히브리서 2:11에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다 한 근원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은혜지요. 그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말할 수 없는 감사이지요.
탕자의 비유에는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품꾼의 하나로 써주소서”라고 합니다. 솔직히 품꾼은 아무나 합니까? 지게도 져 본 사람이 진다고 품꾼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아들보다 더 어려운 일이 품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이라 하지 않고 아들로 인정합니다. 종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모세도 당시의 법에 따르면 노예의 후손입니다. 노예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예이지만 공주의 손에 들어가니 왕자로 삽니다. 누구의 손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의 손에 있는가에 따라 신분이 완전히 바뀝니다. 애굽의 공주의 손에 있으니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왕자가 됩니다. 하나님 손에 있으면 왕자가 되기도 하고, 공주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때문에 수지맞은 자들입니다. 그 손에서 종이 아니라 형제자매입니다. 왕자요 공주입니다.
2세기 작가 루키아노스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필요를 도와주는 열정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종교의 창시자 예수는 그들이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그들의 머리에 각인시켜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세요. 안디옥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을 보세요. 카타콤베에서 서로 사랑한 모습을 보세요. ‘쿼바디스’에 나오는 장면처럼 황제의 박해에 서로 위해주는 놀라운 형제애를 보세요.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한 아기가 심장에 큰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의사들은 이 아기가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한 아기가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한 간호사가 두 아기를 하나의 인큐베이터에 넣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원래 두 아기를 한 인큐베이터에 넣지를 않습니다.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란히 눕히기로 결정했습니다. 얼마 후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도 두 아이는 정상으로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신문사가 이 소식을 듣고 기자가 와서 서로 포옹하는 사진을 찍고 “생명을 구하는 포옹”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형제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시는지요? 형제애는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결 론
최근에 사이토 다카시의 ‘코멘트력’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시절, 가츠 가이슈라는 정치인이 시미즈 지로초라는 협객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부하가 몇이나 되는가?” 이에 시미즈 지로초는 대답했습니다.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놈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시미즈 지로초의 명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가치 있습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낮아질 수 있다면 세상이 변할 것입니다.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종인데 형제라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극진한 사랑과 낮아지는 자세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형제우애가 생긴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종이었습니다. 죄의 종이고, 욕망의 종이고, 세상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이제는 종이 아니라 형제라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형제가 되었으니 종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종의 의지를 버려야 합니다. 종의 근성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형제의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형제의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형제우애를 쌓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5에는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인정하고, 목숨 버리신 그분을 위해 더 이상 세상의 종이 아닌 주님의 형제로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형제우애를 사랑을 공급하며 사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희년 정신과 품꾼으로의 삶
레 25:35-46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의 나라는 평등과 평화의 나라입니다.
이는 차별이 없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내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로 비유해 주셨습니다.
잔치 집에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복에서부터 음식까지 모든 것을 다 주인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그냥 가서 주인이 차려 놓은 것을 먹고 마시면서 즐기면 됩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을 축하해 주면 됩니다.
잔치 집에 음식을 가지고 가는 것은 결례입니다.
그건 주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잔치 집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가는 것이 주인을 예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는 자기 의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죄인들이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의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은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잘난 척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로 나오는 자입니다.
우수개 소리로 지옥에는 잘난 놈들이 가는 곳이고 천국에는 못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세상에서도 잘난 놈들이 모인 곳은 시끄럽고, 못난 사람들이 모인 곳은 평화롭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잘난 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항상 잘난 자들은 장자로 나타나고 못난 자들은 차자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러했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러했고,
에서와 야곱이 그러했고,
사울과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잘난 장자들이 못한 차자들을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잘난 자들을 버리고 못난 자들을 보듬어 안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못난 자가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 속에 배치해 두셨습니다.
독자적인 힘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들과 같은 자들을 이스라엘 경내에 두시고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달아 보셨습니다.
이들을 ‘하삐루’ 라고 합니다.
‘하삐루’를 가지고 너희도 애굽에서 ‘하삐루’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들을 구원해서 기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잊지 못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경내에 ‘하삐루’들을 배치해 두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삐루’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신앙을 가늠해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하삐루’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희년 정신에 담아 두었습니다.
희년 정신은 동등 사상입니다.
사람 간에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나안에 들어 와서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인도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 온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하여서 생겨난 민족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한 백성들은 모두가 동일합니다.
잘난 자도 없고 못난 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서로 간에 차별이 없이 동등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은혜로 다스려져야 합니다.
‘너와 나’가 어린 양의 피로 ‘우리’로 살아난 자들이니까 ‘너와 나’로 살지 말고 ‘우리’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한 몸’ 사상을 희년에 담아 놓았습니다.
희년 속에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가야 하는 백성들에게 희년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서 교회로 부르심을 입고 천국에 가는 것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세상이라고 한다면,
광야는 교회를 상징하고,
가나안은 천국을 예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천국을 예표하기도 하지만 교회를 예표 하기도 하는 이중적 계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희년 속에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행하여야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교회에서 가나안에서 살아갈 것을 가르쳤습니다.
희년이 되면 네 가지 회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째, 종에서 해방을 받게 됩니다.
둘째, 잃어버렸던 기업의 회복하게 됩니다.
셋째, 모든 채무로부터 벗어나는 빚의 탕감이 일어납니다.
넷째, 땅의 경작을 쉬게 하여 모든 노동으로부터의 안식이 주어집니다.
안식년은 땅을 쉬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년은 사람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쉬게 한다는 것은 매였던 것으로부터 해방을 말합니다.
종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합니다.
곧 죄로부터 자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죄가 수고와 슬픔을 몰고 왔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이 되면 수고와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죄 문제를 탕감 받은 속죄일에 희년의 나팔을 불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을 통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유는 어린 양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에는 희생 제물인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숫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맞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속죄일에 불려지는 나팔 소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복음인 것입니다.
자유는 종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의 나팔 소리가 불려지면 매였던 종들도 놓아주고, 빚도 탕감하여주고, 잃어버린 기업도 회복을 시켜주고, 모든 노동으로부터 쉼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희년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한 대속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들고 올 제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바치지는 제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모든 백성이 아니고 오로지 자기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고 창세로부터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되어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고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따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입니다.
거저 받았기 때문에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은혜가 희년 정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희년 정신은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가는 의인의 희생으로 죄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고엘 사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엘 사상은 부자(강한 자)가 가난한 사람의 짐을 대신 담당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고엘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부요(강함)하신 자입니다.
그런데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강하신 분인데 약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걸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종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이를 가난 한 자들이 부요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걸 교회 안에서 연보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연보는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위하여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러면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연보 안에서 평균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종의 모습으로 가난케 되심은 가난한 자들을 평균케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강하심)이신데 가난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부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부요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러면 예수님이 희년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종이었던 자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희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년 속에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나고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새로운 민족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광야 이스라엘입니다.
광야 이스라엘은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게 되면 애굽적 사고가 지배하게 됩니다.
애굽적 사고는 인간의 조건에 의한 강한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을 하는 양육강식의 사고입니다.
희년을 주신 것은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므로 가나안에서 살아갈 때는 애굽적 사고가 자리 잡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혹시라도 애굽식의 삶이 나타나더라도 희년이 되면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희년 정신의 삶은 가나안에서 애굽적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다가 보면 원치 않는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남에게 빚을 지는 일도 생기고,
빚을 갚지 못하여 토지와 기업을 저당 잡힐 때도 있고,
심지어 자녀들을 종으로 팔려가게 할 때도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생기더라도 50년이 되면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려 놓으라고 합니다.
처음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분배를 받고 살아가던 그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 올 때는 빈부(貧富)가 없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두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는 것으로 얻어먹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각자에게 나누어준 땅에서 살아가면서부터 빈부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는 목축업을 하였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농경사회가 되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땅은 재산입니다.
그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무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을 매매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빌려서 쓰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고 합니다.
남의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므로 토지의 매매를 근절 시키신 것입니다.
23절.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나그네는 잠시 통과하여서 지나가는 자이고,
우거하는 자는 잠시 동안 머물다 가는 자입니다.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는 잠시 있다가 떠나야 하는 자이므로 땅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정착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비록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었지만 실상은 가나안 땅에 정착할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인 천국으로 나아가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8-16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인도 받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오자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여주시고는 저기가 내가 너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이라고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우거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인도를 받아서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를 받아서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인도 받은 땅이나 이스라엘이 인도 받은 땅이나 동일한 그 땅입니다.
그럼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아가는 이스라엘도 아브라함처럼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가나안 땅을 사고 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땅에서 영원히 정착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을 사고팔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땅에 정착할 이유도 없고 땅을 사고 팔 이유가 없으면 서로에게 속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살면서 남을 속여서 과도한 이익을 취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14.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라”
35.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36.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37.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혹시 이웃에게 돈을 빌려줄 일이 생기더라도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살다보면 돈을 빌리기도 하고 빌려주기도 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생기더라도 서로 간에 내 형제에게 일어나는 일이라 여기고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한 형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는 한 부모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서로 돕고 살아가야 하는 자입니다.
그게 형제입니다.
부모는 자식들 간에 차별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아프면 모두가 그 아픔을 나누어서 지라는 것입니다.
혹시 주변에 가난한 형제가 살고 있으면 못 본체 하지 말고 내 형제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돌보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내 품꾼이라고 합니다.
55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품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을 맡아서 다스리는 자라는 말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품꾼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하나님의 품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품꾼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희년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품꾼은 주인의 집안 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일을 하기 이전에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주인의 성향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인은 움켜쥐고 모으기를 좋아 하는 분인지,
아니면 손을 펴서 나누어 주기를 좋아 하는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인의 성향을 알아야 주인이 기뻐하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다가는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품꾼은 항상 주인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어떤 고을에 부자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 청지기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인의 돈을 빌려주고서는 이자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청지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열심히 주인의 곡간을 채우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은 어느 날 청지기를 불러서 너는 어찌 하여서 내 것을 허비 하느냐 라고 하면서 너는 불의한 청지기라고 하면서 이제 그 일을 그만하라고 합니다.
어느 기한까지만 일을 하고 그만 두라고 해고 통지를 한 것입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청지기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성향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주인의 곡간을 채우는 것을 허비라고 하고,
빚진 자들로부터 이자를 받는 것을 불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럼 이 주인은 곡간을 비우는 것이 채움이 되고,
진 자들에게 이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 의로운 것이 되는 것임을 알고 곡간을 비우기 시작을 합니다.
빚진 자들을 불러서 탕감해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흐뭇해하면서 지혜롭게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해고 통지를 철회하고서는 그 시무를 다시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기지 비유를 가지고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재물을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고 합니다.
이는 친구를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그 친구가 누구냐?
하나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바로 하나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자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 재물을 교회에 내어 놓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러한 곳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빚진 자들이 탕감을 받는 곳입니다.
빚진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품꾼인 이스라엘도 가나안에 살면서 불의한 청지기처럼 곡간을 열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 정신으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토지를 사고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백성들에게 무상(無償)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러면 주인의 성향이 나타났습니다.
가나안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움켜잡아서 모으는 분이 아니라 손을 펴서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럼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품꾼들은 하나님처럼 나누어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주인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변에 가난한 자들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한 것입니다.
지어주고 양식도 주고 함께 잘 살아가도록 보살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걸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고엘 제도란? 부자가 가난한 자의 짐을 대신 지고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보아스가 이방 여자인 룻을 도와서 자식을 낳게 해 주고 토지도 주어서 나오미의 가문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엘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자들을 자신의 희생으로 끄집어내서 가나안 땅으로 들여서 땅을 나누어주어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너희는 나의 품꾼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가나안 땅에서 고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짐을 대신 져주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동족은 종으로 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설령 종의 신세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종처럼 엄하게 부리지 말라고 합니다.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42.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바 나의 품군인즉 종으로 팔리지 말 것이라
43.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가나안에 들어 온 자들은 차별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차별 없이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홍해 바다 속에서도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광야 40년도 하나님의 은혜로 차별 없이 살아온 자들입니다.
가나안 땅도 차별 없이 분배를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자기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품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부(貧富)가 없고 귀천(貴賤)이 없습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음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살아야 가나안에서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 사실을 잊고 애굽에서와 같이 차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그 땅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자이므로 불의한 청지기처럼 해고 통지를 받게 되고 급기야는 그 땅에서 토하여 내침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고엘이 되어서 살아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용서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생겨난 한 형제들입니다.
교회는 희년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희년 정신으로 세워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초대교회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신분의 차별도 없고 빈부의 차별도 없고 인종의 차별도 없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다 허물어지고 평등하게 하나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가진 자와 없는 자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자가 차별이 없이 너와 나가 우리가 되어서 유무상통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몸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 나라 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 법칙으로 세워져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품꾼들입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합니다.
지체는 몸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체와 지체는 서로 상합하여서 몸에 유익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희년 정신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빌립보서 2:1-8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품으라는 말은 이미 와 있으니 잘 관리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닭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로 부화시켜 내듯이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서 희년 정신의 삶을 풀어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가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품꾼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 안에서 행하라고 합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들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가 기뻐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돌아보면서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이 그리스도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형제가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가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돌아보고 성도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희년 제도는 어느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민족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교회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교회를 돌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이 희년 정신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차별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잘난 자와 못난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는 우열이 없습니다.
우열이 없으므로 서열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부모 아래서 난 자들이므로 평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하나가 되어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희년 정신이 자리 잡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이는 천국은 물질적 가치로 사는 곳이 아니고 영적 가치로 살아가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럼 그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성도는 영적 가치로 살아가게 됩니다.
영적 가치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정신은 세상적 가치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사람간의 차별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이 희년 정신으로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희년 정신이 자리 잡아야 차별이 사라집니다.
차별이 사라지면 평등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희년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세상 가치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늘에 사람입니다.
하늘에 사람은 땅에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조건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옛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이 발호하지 못하는 싸움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발호하면 법이 작동을 하여서 사람들을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럼 차별이 생기고 우리가 너와 나로 바뀌게 됩니다.
너와 나가 되면 경쟁이 됩니다.
경쟁이 되면 마음에 평강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평강이 사라지면 지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세상 가치가 자리 잡지 못하도록 힘써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도 은혜이고,
둘째도 은혜이고,
셋째도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교회로 부르심의 구원도 은혜로 주어졌고,
교회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인이 머물 자리는 은혜와 긍휼의 자리입니다.
하늘의 비가 그치면 땅은 가뭄으로 산물을 내지 못하고 황폐해 지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마음이 강퍅해지고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서 마귀의 놀이터가 되고 맙니다.
우리의 마음은 땅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는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들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세상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러한 것은 마음에 쉼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은혜로서 굳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마음에 세상의 법이 자리 잡으면 지옥으로 살게 되고,
마음에 희년 정신이 자리 잡으면 천국으로 살게 됩니다.
은혜로 주어진 가나안 땅을 애굽적 사고로 빼앗기지 않도록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희년 정신이 자리 잡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천국을 빼앗기지 말고 은혜로 굳게 지켜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