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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과 향수의 작가 오영수를 찾아
1.탐방
1)「갯마을」의 현장
「갯마을」은 단조로운 구성으로 도니 해녀 해순이의 이야기다.
-동해 바닷가의 한 갯마을. 초여름 어느 날밤, 멸치 후리가 행해진다. 유독 과부가 많은 마을인데 스물셋 나이의 해순이도 과부였다. 해순이는 숙이 엄마의 권유로 멸치 후리에 나간다. 멸치 그물을 거두어들이는 작업 중 덥석 손을 잡는 사내가 있었다. 해순이는 밤늦게 일을 끝내고 짓(작업 대가로 분배되는 고기)을 받아 집으로 왔다. 시어머니는 “애야, 문을 닫아걸고 자거라!”라고 밤마다 며느리가 안스러워 말한다. 해순이는 제주도 보재기(해녀)의 딸이었다. 해순이가 어부 성구와 짝을 짓자 어머니는 고깃배에 실려 물길로 떠나버렸다. 해순이의 남편 성구는 고등어 잡이철에 칠성이네 배를 타고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돌아오지 않았다. 바닷가 모래톰에 모인 아낙네들은 뱃노래를 슬피 불렀다. 어느 날밤 해순이는 미역바리를 하고 곤하게 잠들다가 어떤 사내의 급습을 받았다. 며칠 후 해순이 방바위에서 한천을 널고 있는데 상수가 나타났다. 상수는 상처를 하고 바닷가로 흘러온 사내다. 산수는 해순이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 해순이는 상구의 첫 제사를 치르고 상수를 따라 산골로 갔다. 일년후 멸치 후리할 때쯤 해순이는 갯마을로 돌아온다. 남편 상수가 징용으로 끌려가버렸고 오뉴월 땡볕에 밭매기가 어려웠고 바다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갯마을의 아낙네들에게 다시는 산골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함께 멸치 후리막으로 간다.
-오영수 선생이 1953년 [문예] 12월호에 발표한 「갯마을」은 1943년 기장군 일광면에 거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언양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게된 아내에게 가계를 맡기고 1942년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그 곳에서 우연히 일본에서 장식사 직공으로 같이 일했던 요내다(米田)를 만나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박람회의 일을 하게 된다. 일이 끝나자 향수를 달랠 길 없어 다음해 귀국한다.. 오영수는 만주에서 벌어온 돈으로 고향에서 진 빚을 모두 청산한다. 그때 아내가 기장군 일광보통학교로 전근하자 아내를 따라 어촌인 일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오영수는 처형의 도움으로 일광면 면서기가 되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선생은 일광역 앞 다리를 건너 포구로 낚시를 다녔다. 1943년 당시 김동리 선생의 백부 김범부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다 일광에 피신하고 있었다. 형을 만나러 온 김동리를 오영수는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오영수는 김동리에게서 문학적 영향을 받게 되었고 뒷날(1949년) [신천지]에 김동리의 추천으로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게 되었다.1)
「갯마을」 이뇌에도 어촌이나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는 「울릉도 뱃사공」이 있고, 바다와 관계되는 작품으로는 「섬에서 온 식모」 「실걸이꽃」 등이 있다.
“난 인자 안 갈테야. 성님들하고 여기서 같이 살래!」
「수수밭에 가면 수숫대가 모두 미역발 같고, 콩밭에 가면 공밭에 왼통 바다 같고…」
작품의 주인공인 해순이의 정들었던 곳에 살고자 하는 귀향의식이 결말 부분에 강하게 나타나 있다. 물론 남편 상수가 징용으로 가버린 것도 한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 갯가에 자라 산골 생활에 적응할 수 가 없었고 고향이 그리웠던 것이다.
우리가 갯마을의 무대배경인 일광면 이천리의 동쪽 갯마을을 찾았을 때는 50년도 넘게 흘러버린 세월 탓인지 옛 모습은 찾을 길 없었다. “덧게덧게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 스무남 집” 이런 풍경은 전혀 없었다. 골목길길을 들어가 보니 몇 곳에 돌각담이 그대로 남았고 기와집과 슬레이트집이 간혹 보였다. 그런데도 골목에서 해순이가 광주리를 끼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1997년 여름 기장문학회가 [오영수 소설 「갯마을」의 현장]이란 문학 표지석을 만들었다 하여 우리 일행은 그해 늦가을에 탐방하였다. 시인 이해웅 교수(기장문학회 회장)의 안내로 평론가 김천혜 송명희, 소설가 고금란, 시인 김미순 양은순 여러분과 함께 탐방했다. 표지석은 고목나무 아래의 사당 아래쪽 길가에 있었는데, “상수도 징용으로 뽑혀가고 말았다. 허전했다. 생각 끝에 해순이는 전 남편의 제삿날 다시 갯마을을 찾았다. 그녀는 갯마을이 더 좋았다.”-「갯마을」 중에서 라고 씌어 있었다.
2)침죽제 방문
내가 오영수 선생님을 처음 방문한 것은 78년 봄(정확히는 3월 26일 일요일)이었다.
오영수 선생은 탈도시와 자연귀의를 감행하고자 만년인 77년 봄(3우러15일)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근처 마을인 울산 웅촌면 곡천리에 낙향했다. 나는 신문 기사를 통해서 낙향 소식에 접하고는 선생님을 꼭 찾아뵙기로 마음먹었다.
선생님의 고향이 나의 고향과 같고 우리가 중학생일 때 국어 교과서에 「윤이와 소」란 작품이 실려 선생님에 대한 환상이랄까 상상이랄까 하는 것이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즈음 나는 본격적인 문학수업이랍시고 내 나름대로는 정열을 바치고 있던 때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부산 동부터미널에서 울산행 완행버스를 타고 웅촌에 내리니 다행히 비가 멎었다.
집 입구에는 작은 대밭이 있었고 마루 위의 벽에는 손수 쓰신 沈竹霽(침죽제)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 때 선생님은 방에 누워 계시다가 일어나셨다. 깡마른 체구, 얼굴에 핀 저승꽃은 70세의 연세(호적에는 1914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1909년 2월 11일생)에 비해 무척 늙고 병약해 보였다. 큰절로 인사를 드리고 문학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가르침을 받고자 왔다고 했다.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하는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쩌다 울산이나 부산에 일이 있으면 한번씩 나가 보고 낚시도 가고…그런데 내가 이 골짜기에 처박혀 있으니 개뼉다구인지 말뼉따구인지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자유부인」 그거 요새 누가 읽기나 하나? 내가 한국문학상 아세아상 예술원상 다 탔지만 버스 타고 다녀야 할 신세가 아닌가? 누가 알아주도 않고…….“
선생님은 자조적이고 원망스런 음성이었다.
선생님은 수년전에 위궤양으로 수술하신 적이 있어 건강에 대해 물었다.
“정말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마음 건강이 안 좋다. 이제 몸도 책 읽을 기력이 잘 안 된다… 한 십년만 젊어도 좋은 작품 몇 개 더 쓰겠는데, 인자 책 한 페지 읽기가 수월치 않다. [문예중앙]에서 한 장에 2천원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 주겠으니 연재를 해 달라지만 글도 안 되고 아무꺼나 쓰는 내 성미가 아니라 못 쓰고 있다.”
“앞으로 어떤 글을 쓰시겠느냐고 물었더니 “작품은 역사가 심판할 따름이다.”하고 엉뚱스런 답을 하셨다.
반짇고리 같은 것에 바구니에 가득 담긴 만년필을 꺼내어 만년필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 당시 대개의 사람들은 국산‘파카’ 만년필이나 중공제 ‘영웅’이란 것을 애용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좀 뭉뚱하게 생긴 프랑스제 몽불랑을 들고 자랑했다. 조금후 선생님은 나의 고향에 대해 물었다.
“와 몰라? 언양! 향산! 거기엔 살구꽃이 많이 피지. 진주 강씨들이 살고, 부친은 자네처럼 몸집이 크고 눈썹이 시커멓지, 잘 알고 있지 그리…그러고 보면 내 고향 사람이 소설 쓰겠다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니 오늘이 보통 날은 아닌가 보네…어디 소설쓴 것이 있으면 다음에 하나 가지고 오도록 하고……내 작품은 다 읽어 봤는가?”
나는 내가 읽었던 것을 생각나는 대로 제목을 읊어나갔다. 갯마을, 메아리, 명암, 머루…….”
나는 그 당시 하루 담배 한 갑 반 정도 태우는 골초여서 선생님의 파이프담배에 담배 갈증이 생겨 입을 오무작거렸던지 선생님은 담배태우라고 세 번이나 권유했지만 참을 수밖에. 선생님과 마주 앉은 지 두 시산이나 되어 일어나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잠시 있으라고.” 하시더니 옆방으로 가서 책 한 질을 들고 나왔다.
“이거 내 책인데 다음 올 때 다 읽어오고 그 때 책값도 가져오게. 두 달 후도 좋고 석달 후도 좋으니, 그라고 오고 싶을 때 바람 쏘일 겸 훌쩍 오라고…….”
나는 감사히 책을 받았다. 1974년 동림사 발행 ������오영수대표작선집������은 7권이었고 책값은 1만원이었다.
두번째 갔을 때는 선생님은 삼호강에 낚시를 가셨다며 사모님이 반겼다.
사모님은 언양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며 한시간 넘게 얘기를 해 주었다. 사모님이 교편을 잡을 때 선생님은 언양 금융조합(현 농업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결혼했다고. 그리고 착실한 기독교신자인 사모님인데 한 번도 선생님은 교회에 나와주지도 않는다며 약간 불만스러운 얘기를 했다.
세번째로 방문한 것은 6월 둘째 일요일이었다. ������오영수대표작선집������의 작품을 모두 읽고 카드 정리한 후여서 마음이 홀가분했다.
날씨가 하도 좋아서인지 선생님은 반바지를 입고 마루에 누워 계셨다.
“그래 책값은 받는다. 책은 원래 사봐야 다 읽어지는 거라. 그새 다 읽었는가?”
“예, 7권은 다 읽고 카드 정리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던가?”
“갯마을, 머루, 추풍령, 산호물부리, 고개, 메아리, 명암 등이 좋습디다.”
“그러면 그 중에 하나만 말한다면?”
“남들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고개」가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자네가 날 알아주는구나! 내가 가장 고심해서 쓴 작품인데 이 평론가란 작자들이 통 작품을 몰라…….”
선생님이 아주 기뻐하심에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그 다음해 「고개」는 T.V 문학관에도 방영되어 널리 알려졌다.)
「밀물」을 내놓으면서 한달 쯤 후에 들리겠으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하고는 집을 나섰다.
여름 방학이 되어 웅촌에 들렸더니, 「밀물」이 아주 마음에 든다며 이쯤되는 작품 하나만 더 가져 와 보라고 하셨다. 그 사이 두어번 방문했지만 겨울 방학땐 작품 쓰느라 들리지 못했는데, 선생님에게 필화사건이 생겼다. 이어령씨가 주간으로 있던 [문학사상]에 「특질고」란 작품을 발표하셨는데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되어 선생님이 크게 곤욕을 겪게 되었다. [문학사상]이 한달 정간을 하고 중앙지에 공개사과문을 내었다. 작품의 내용은 제목이 암시하듯 각 지방인의 특색을 말하는 에세이 스타일의 단편인데 그 중 전라도 사람에 대해 그 단점을 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선생님은 비난의 전화와 항의하러 오는 방문객 때문에 애를 먹었고 가족들까지도 마음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선생님은 위장병이 더치어 79년 5월 15일 운명하게 되었는데 필화사건도 선생님의 죽음을 재촉한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장례식날 언양으로 갔더니 상여가 언양초등학교 앞에서 발인을 했다.
친척들 여남은 명, 그리고 상두꾼, 문인들 몇이 뒤를 따랐다. 현대문학의 김국태, 이범선 선생님, 김해의 김성홍이 와 계셨다. 선생님이 30여년간 유년과 청정년기를 보낸 고향 마을 뒷산인 화장산 기슭 선산으로 상여 행렬은 상두꾼의 “어화홍! 어화홍! 어화넘차 어화홍!”구슬픈 만가를 부르며 향했다. 선생님이 젊었을 때 사셨던 슬레이트 집 담장을 끼고 작은 들판길로 나섰다. 5월의 훈풍이 보리 이랑을 물결치고 화장산에서는 뻐꾸기가 울어댔다. 옛날 밤밭엔 잠사공장이 들어섰고 화장산은 소나무로 울창했다. 선생님의 선영은 화장산 남쪽 기슭으로 안송대 마을에 가까웠다. 징조 조부 부친묘 그 아래에 이미 묘를 파 두었다. 소나무 둥치에 걸린 라디오 카셋트에서는 찬불가가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장지에 온 사람들은 전형적인 한국의 소고기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금 있으니 울산에서 시인 김성춘, 희곡작가 최종두, 수필가 최일락 여러분이 왔다. 이어령 선생의 부인도 오고, 서울에서 강호삼, 김용철, 김일주, 한용환 여러분도 하관할 즈음 장지에 도착했다. 도래솔 아래 감자밭에는 감자꽃이 하얗게 피어 나비를 부르고 있었다. 산에서는 간간히 낮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난계 오영수(蘭溪 吳永壽-1909.2.11~1979.5.15) 선생은 억압과 혼란과 전쟁과 독재와 산업부흥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소박한 리리시즘으로 소외된 인간들에게 따뜻하고 흐뭇한 애정을 쏟아 보냈고, 유년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글로써 노래했다.
그는 김동인 이효석 김유정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손꼽히며, 1949년 「남이와 엿장수」를 [신천지] 7월호에 발표하고 뒤이어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머루」로 입선한 이래 30여년간 200여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흔히들 그를 가장 한국적인 향토작가라 일컫고 한편으로는 시민과 도시를 버린 나약한 작가란 비난도 받았다. 오영수의 작품은 그만큼 개성적이고 특수성을 지녔다.
오영수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주제에 관한 연구2)다. 자연 속에서의 순수한 삶, 원초적 세계로의 회귀, 귀향의식이 그 주조이다. 둘째는 서정소설론에 대한 연구3)이다. 셋째는 형식적 특성( 구성, 문체 , 배경 등)에 대한 연구4)이다..
가장 많이 다루어진 것은 주제론이다. 주제론을 셋으로 나누면 전기에는 자연의 서정적 이해와 인간의 선성(善性) 문제에 대해, 중기에는 전쟁과 물질문면으로 인한 숙명적 비극과 인간성 상실 문제에 대해, 후기에는 귀향의식과 이상향의 문제를 작품 속에 담고 있다고 분석되어진다.5) 그리고 종합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는 김영화의 오영수론6)과 이재인의 오영수 문학연구7)이다. 한편 오영수 소설에 역사의식의 부재나 현실의식의 한계를 지적한 연구가들로는 박동규8)와 장승우9) 등이 있다.
필자는 작품에 나타난 주제적 특성으로, 유년과 향수․인정의 미학․이상향의 추구, 형식적 특성으로 수필적 경향, 이 넷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2.유년과 향수
일반적으로 단편소설에서는 그 구성의 단계를 부룩스 워렌의 분류처럼 발단(exposition) 전개(complication) 절정(climac) 대단원(denouement)10)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오영수 소설에 있어서 극적인 장면으로 독자에게 감명을 줄 그런 절정은 없다. 더욱이 절정과 대단원이 동시에 끝날 때 가슴 찌릿한 충격을 맛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작품은 명작에 많다. 모파상의 「목걸이」나 오우․헨리의 「마지막 잎새」 같은 것들이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럼 오영수의 작품에서 클라이맥스가 있다고 보아지는 작품은 총 114편11) 중에서 「고개」 「후일담」 「용년삽화」 「소쩍새」등이다. 클라이맥스는 없지만 단일한 효과와 구성의 긴밀로 긴장감을 가져오는 것으로는 「후조」 「갯마을」 「머루」 정도다. 절정이 없다는 말은 극적 드라마가 없다는 말이다. 퍼어시․라복크는 소재를 다루는 방법으로 회화적(pictorial) 방법과 극적(dramatic) 방법12)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극적 드라마가 없다는 말은 회화적 방법으로 일고나하고 있다. 회화적 방법은 수동적인 의식으로 사건이나 대상을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정적(靜的)으로 그려나감을 말한다.
또한 포오스트는 등장인물을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과 입체적 인물(round character) 13)로 나누고 있다. 한 작품 속에서 그 인물의 성격이 변하지 않는 인물을 평면적 인물로 보았다. 에드윈 미어는 이를 정적 인물(static character)14)라 했다.
김유정의 「소나기」의 주인공 ‘춘호’는 평면적 인물이요, 「감자」의 ‘복녀’나 「이방인」의 ‘뫼르소’는 대표적인 입체인물이다. 오영수의 인물은 발전적이고 변화 있는 이물이 아니라 평면적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성을 연구하려는 것이 현대소설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비해 그는 오히려 인간의 복잡성을 되도록 간추려서 단순화로 귀납한다.15) 그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단순화함으로써 순박한 인간성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퍼어시 라복크는 스토리의 제시방법으로 장면중심적방법과 파노라마적 방법으로 나누고 있는데, 오영수 소설으 전개법은 한가롭게 명상에 잠겨 관조적 경지에서 회상의 흐름을 택하고 있다. 극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고개」나 「대장간 두칠이」마저 회상적 수법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산호물부리」 「황혼」 「추풍령」 「요람기」 「흘러간 이야기」 「지나버린 이야기」 「고향에 있을 무렵」 「후일담」 등은 제목 자체도 그렇고 전개 방법도 회상적이다.
이러한 회상적인 파노라마 기법의 작품은 작품의 정신적 고향인 유년과 고향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곧 향수라는 말에는 유년과 어머님과 향토에 대한 그리움이다. 오영수의 경우 소년소녀는 어떠한 경우라도 순진무구하게 그려지고 있다. 오늘날 과잉보호로 인한 문제아와 현대문물의 악영향으로 ‘무서운 아이들’이 곧장 이야기되고 있는데 반하여 오영수의 경우 소년소녀가 주인공이 된 소설 16편은 한결같이 그 순진성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좀도둑질하면서 구결하는 거지에게 이웃부인의 만류를 속여가면서 거지소년에게 쌀을 떠주는 「거지와 진주반지」, 「후조」의 구칠이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다. 소년소녀에 대한 사랑은 곧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닭, 소, 새, 맹꽁이, 매미, 개, 쥐, 나비, 두꺼비, 제비, 까마귀 등 가축 이름이나 어린이들과 유사한 속성을 지닌 동물이 그대로 제목으로나 주태재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반해, 흔히 산골에서 곧 잘 이야기 되는 범과 같은 맹수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음은 주목할만하다. 그의 동물에 대한 애정은 「흘러간 이야기」의 정 노인과 남 생원과의 대화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
“짐승이지만 정이 들대로 들어서…”
“자넨 별나게도 소를 아꼈지.”
“생각을 좀 해보렴. 그 소가 어떤 손지.”
“근데 형, 저녁마실이라도 갔다 들어오면 마굿간에 누웠다. 소가 푸우-하고 일어서서 찡그렁 요령이라도 흔들라치면 말요….”
“온 집안이 훈훈하고 꽉 차지.”
“그럼요, 그렇게 마음 든든할 수가 있겠소.”
“누가 아니라.”
다음으로 모성애를 다룬 작품을 보면 「고개」, 「어떤 여인상」, 「응혈」, 「화산댁이」, 「망향수」, 「용연삽화」, 「염초네」 등이 있는데 그 중에도 「두메모자」와 「노을」에 육친애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작품 중에 모성애에 관계된 작품이 많음은 어머니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란 인간의 원초적인 심리와도 관계 있겠지만 장남이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어메가 앞시면 좋겠는데 안주 이슬이 안 말랐으요.”
“오냐오냐, 어서 가자. 내 걱정을랑 말고, 짐이 좀 무겁제?”
“오데에 게안심더.”
“마리지도 안한 나무로 그렇게 졌노, 쯧쯧.”
“아, 걱정 마이소.” (「두메 母子」에서)
…수(壽)야, 니도 어서 커서 우리도 옛말하고 살재이-하고 했으나 국민학교 이학년인가 삼학년 이었던가 한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옛말도 한번 못해 보고 어머니는 가셨다. 옛말은 못해도 오늘도 저렇게 노을은 도미비늘처럼 곱게 타고 있다.
…어메야 옛말도 못해보고 가신 어메야… 그래도… 어메야 뿔세는 저렇게 곱게곱게만 타네.
어메야-
어메야- (「노을」에서)
그의 작품을 주제별로 보면 낚시에 관한 것이 11편으로 많은 편이지만 그보다 산골, 섬 등 고향에 관한 작품이 23편으로 가장 많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일지라도 주인공들은 대개 시골에서 도시로 흘러들어온 사람의 얘기다. 그의 작품의 태재는 유년과 자연과 고향이라고 볼수 있다.
3.인정의 미학
오영수의 소설에 있어서 주인물은 대개가 우리들 생활에서 소외된 잊혀진 사람들이다. 주인물이 펼치는 사건에 따라 주제가 형성되므로 주인물이 어떠한 사회적 경제적인 위치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그 소설은 이미 그 행방이 정해지는 것이다. 오영수 소설의 주인물을 그 「신분별로 보면 하층민 13편-「섬에서 온 식모」의 월례, 「도라지꽃」의 식모 덕순이, 「용연삽화」의 여종 춘례, 「염초네」의 마을 하인 염초네, 「소쩍새」의 종의 딸 순이, 「개개비」의 식당 숙수 윤도, 「어떤 죽음」의 머슴 김천만, 「시계」의 기생 계월, 「명암」의 죄수 껄떡이, 「고개」의 전과범 사나이, 「상춘」의 거지인 길이엄마, 「안나의 유서」의 전쟁 고아 안나, 「대장간 두칠이」의 두칠이. 소외되고 버림받은 노인들 6편- 「떡」의 박 노인, 「춘한」의 추강 선생, 「명촌 할아버지」, 「뚝섬할머니」, 「기러기」의 황곡 노인과 이 주사, 「지나버린 이야기」의 윤생원. 현실에 소외당하고 산골에서 새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 6편- 「흘러간 이야기」의 정노인과 윤생원, 「메아리」의 양동욱 내외와 박 노인, 「망향수」의 할머니, 「두메모자」의 영천댁, 「은냇골 이야기」의 김 노인과 박 노인. 실직이거나, 있으나마나한 직장을 가진 전직교사의 소시민들 8편- 「박학도」의 박학도, 「불구」의 영석, 「여우」의 달오, 「제비」의 그, 「낙수」의 기수, 「합창」의 박두헌, 「초가을」의 그, 「응혈」의 명구. 전쟁의 피해자들 5편- 「두 피난민」의 마동이와 이가, 「전우」의 녀석, 「추풍령」의 그와 아내, 「설야」의 억수, 「후일담」의 여인. 이밖에도 「낙엽」의 안양댁, 「종차」의 종우삼촌, 「저어」의 유근수, 「어떤 여인상」의 여인 등 모두 42편으로 총 145편에서 1인칭 소설류 42편과 소년소녀를 주인물로 한 16편을 제하면 거의 50%가 되는 셈이다. 이들은 모두 헐벗고 굶주리는 하층민이거나 아니면 우리들의 정상적인 일상에서 소외된 저변의 생활군이다.
김봉군16)은 1)무지렁이 익살스런 토속 인간, 2)피해자, 피학자, 소외인간의 두 부류로 나우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내세워서 이들에게 겨울날 따사한 한 줄기 햇빛과 같이 훈훈한 애정을 불어 넣는 것이 오영수소설의 본질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성격과 주제와 구성은 삼위일체인 상관속이다. 우리가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늘 명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삼자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17) 사실상 작가가 형상화하려는 주제에 따라 성격과 구성이 이루어짐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오영수 소설에서 이 삼자의 상관관계를 주제 곧 작가의 인생관에 따라 구성이나 인물이 처하는 상태를 알아보기도 한다. 「피」 「소쩍새」 「안나의 유서」 등은 오영수가 시대 변화에 민감한 작가라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18)
오영수의 작품은 비록 현실의 비리를 고발할 때도 그대로 dramatic하게 하지 않고 언제나 담담한 엣세이로, 아니면 우화적인 표현을 한다. 그런 가운데도 해학과 유모어의 훈훈한 인정미가 넘치고 있다.
감방안의 죄수들의 이야기인 「명암」에서는 감방장의 신참에 대한 훈계에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낮도깨비」에서는 허생원이 저승차사에게 잡혀가 국제회의를 구경하게 되는데, 공자 묻기를
“그럼 기독씨에게 묻겠는데, 이 나라에서는 전부가 미신과 광신의 소굴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오. 피를 흘린 당신의 사랑이 수십파로 갈라져 서로 할퀴고 뜯고만 있으니 이것이…”
현실의식이 풍자적인 수법으로 나타난다. 또한 「엿들은 대화」에서는 개 누렁이와 닭 꼬꼬씨가 주인을 비방하는데
“말 마오. 세상은 왼통 도둑놈 판이오!”
“허…”
“온 세상이 도둑놈판인데 내가 그걸 일일이 다 짖어대다간 이 울대가 글쎄 하룬들 배겨나겠소. 그래서 숫제 안 짖기로 했소.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 양심 바른 사람이 보이면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한두 번 짖어줄 뿐이요.”
이렇게 우화로써 표현한다. 「여우」에서는 성호의 여우같은 악과 달오의 순박한 「선」이 맞부딪치면서 양호원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러니와 유모어를 가져다 주고 달오의 지나치게 순박한 인정미는 단칸방에 성호를 오랫동안 함께 기거하도록 허락하여 정상을 이탈해 버린다. 악을 고발하고 선을 옹호하려는 주제가 그만 인정에 묻혀 오히려 삭감되고 만다. 나아가 독자에게 따스한 미소를 띄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영수문학의 본원이다.
이러한 동양적인 휴머니즘은 전쟁의 비정을 읊은 「후일담」에도, 생활에 탈기한 기수가 저지르는 도둑질의 「낙수」에서도 구두닦기 소년 구칠이가 민우「교사」에게 베푸는 인정의 「후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 놓고 앉아라.”
도둑은 박스를 들고 양복을 낀채 와들와들 떨기 시작한다.
사나이는 머리위로 손을 뻗어 담배를 붙이면서
“앉아라 거기”
도둑은 조심조심 정강이를 꿇고 앉는다.
사나이는 천장으로 연기를 한모금 뿜고는
“ 너 가진 것부터 내 놔라.”
“…….”
“내 놔 빨리!”
도둑은 연신 떨면서
“가 가진거라니요 돈 말이요?”
“돈이 아냐. 그 연장말야….”
“연장이라니요.”
“아니 그래, 이런 영업을 하러 다니면서 맨손으로 다니냐?”
극장 안에 들어서자 구칠이는 부리나케 앞으로 다가가서 자리를 잡아 민우를 앉히고는 귀에다 대고,
“선생님 연속임더. 아시지요. 이거 마치면 또 첨부터 합니더. 보고 가이소. 내 저 사람들 신닦아 놓고 올께요.”
흐뭇한 인정의 세계, 우리 인간의 본심에 흐르는 순수한 그리움- 그것을 향수라 해도 좋고 육친애라 해도 좋고 자연애라 해도 좋다. 오영수는 이런 훈훈한 인정, 곧 동양적 휴머니즘을 담담한 엣세이식으로 읊었다. 송하섭19)은 전통적 아름다움과 정서를 환기시켜, 이효석․김유정․황순원에 이어진 서정적 소설이 오영수에 이르러 정점에 이룬 발전을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면에서 가장 오영수적인 작품은 「후조」 「수련」 「어린 상록수」 「두메 모자」라 할 수 있겠다.
4.이상향의 추구
오영수는 「메아리」에서, 지리산 산골에 들어가 자연에 묻혀 사는 양동욱 내외와 박 노인 윤 생원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자연귀의를 구가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정 노인 내외와 남 생원이 운문산 속 뛰지마을에서 새 삶을 영위하는 「흘러간 이야기」에서도 「메아리」와 같은 자연귀의의 은둔사상을 그렸다. 「어린 상록수」에서는 위의 두 작품과는 다르게 버림받은 사람들의 새로운 인생이 아니라 젊은 지성인이 버려진 땅을 개척하며 이상향을 실현하는 자연에의 도전을 훈훈하게 그렸다. 이 작품은 전라도 부안에서 황무지를 개척하며 살아가는 작자의 막내아들을 모델로 하여 건실하고 소박한 현대적인 새 농촌 일꾼을 통해 이상향을 노래했다. 오영수의 작품은 후기에 올수록 그 분량이 줄어들어 수필에 밀착하고 있고 주제도 유년과 고향에 대한 끝없는 향수를 나타내었는데, 이 「어린 상록수」는 그 분량이 중편에 육박하는 걸로 보아서도 가장 오영수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탈도시 자연귀의’를 몸소 실천하려는 의지는 「오지에서 온 편지」에서 아주 강하게 그려졌고 「황혼」에서는 직접 향리를 찾아가 옛날 이웃의 체머리할머니를 만나 유년시절을 회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실향」에서는 상경한 고향 친구 B를 통해 완전히 변모된 고향 소식을 듣고 실망한다. 어릴 때 소먹이던 밤밭등엔 잠사공장이 들어서고 고속도로에 미나리강도 붕덤이 먹터도 먹혀 버림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의 꿈을 저버릴 수 없어 77년 낙향을 단행한다. 그러나 너무나 변모해 버린 향리 울주군 언양에는 가지 않고 백리 상거의 웅촌 곡천으로 낙향했다. 낙향후 나온 그의 창작집 「잃어버린 도원」은 바로 자신의 자연귀의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그 제목이나 형식에 있어서 수필에 가까운 「속두메 낙수」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자연애를 순박하게 그려 자연과의 합일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두루마기를 논둑에 벗어놓고 두렁을 꼬불꼬불 타고 깊숙이 들어갔다.
사람의 내왕이 없는 논둑인데… 그러나 그럴 수도 없었다. 허리띠를 풀다하니 갓이 그대로 정수리에 얹혀 있다.
-아무리 일이 급하기로 보는 사람이 없다기로 갓을 쓴 채 뒤를 볼 수야… 갓을 벗어 논둑에 박힌 소나무 말뚝에 걸어놓고 몇 걸음 더 들어가서 중의 춤을 까고 시속말로 기분좋게 뒤를 보기 시작했다.
울려다 보는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한두 조각 떠 있을 뿐 티없이 맑다.
추석 전 들녘은 벼가 한창 고개를 숙이고 서풍에 튀길 듯이 익어가고 있다.
-올해도 장히 거두겠는데… 아니 저 저, 저게, 아니 저게 내 갓 아냐. 아 저런 놈 봤나. 저, 저, 야 이놈아, 어른 갓으로… 저런 버르장머리없는 놈. 빨리 제자리에 갖다 놓지 못해. 허 그 놈 장난도 분수지.
그러나 황새란 놈 아랑곳없이 유유히 원을 그리면서 날고만 있다.
그리고 앞에 든 「두메 母子」에서도 순수한 인간본능의 인정미와 훈훈한 모자지정을, 그리고 「노을」에서는 유년과 어머님을 회상하여 눈시울을 적신다. 향토애는 「소박한 사람들」의 농부들의 물싸움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냐, 올라카거던 자식놈에게 유언부터 해 놓고 오나라아!”
“오냐 이놈, 두고 보자아!”
“아암 봐야지, 눈깔에 흙이 들때까지 두고 봐야지이!”
이러다 보면 배도 꺼지고 입아귀도 아프다. 헛기침소리와 함께 담뱃불이 떨어진다. 그러나 다음날밤이면 또
“야아, 아무개 이놈아아-”
대개는 윗논이 공세고 아랫논이 뱃장이다.
“오냐, 이놈아 그렇잖아도 기다리는 참이다아!”
“니 apt대조 때…”
이렇게 몇 대 조상까지 들먹이고 심지어는 족보까지 캐고 든다. 이런 싸움이 끝장이 날리 없다. 그러나 이러다가도 비만 함뿍 와버리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비가 자알 왔지?”
“논에 사태나 밀리지 않겠는가?”
하면 그만이다.
오영수의 이상향은 자연귀의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낙향하여 머문 웅촌의 집 이름을 스스로 침죽재라고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낙향수 쓴 일련의 작품들 「속두메낙수」 「노을」 창작집 ������잃어버린 도원������「두메 母子」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5. 수필적 경향
현대 단편 소설이 수필을 닮아가는 경향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오영수의 경우처럼 수필이 접근한 소설이 많은 분도 드물 것이다.
우선 그의 소설을 서술의 시점(point of view) 별로 보면 논의의 대상으로 한 114편 중에서 1인칭 서술 시점이 21편-「촌뚜기의 변」, 「병상기」, ,두꺼비」, 「난」, 「시계., 「수변춘추」, 「요람기」, 「바캉스」, 「매미」, 「오지에서 온 편지」, 「고향에 있을 무렵」, 「말을 앞세웠던 후회」, 「입추전후」, 「입원기」, 「축견기」, 「대화」, 「매미와 바캉스」, 「황혼」, 「건망증」, 「노이로제」, 「노을」 1인칭 관찰자 시점이 10편- 「박학도」, 「동부전선」, 「명촌 할아버지」, 「산딸기」, 「어린 상록수」, 「피로」, 「실향」, 「산호물부리」, 「목에 걸린 가시」, 「화장산에 얽힌 이야기」 이밖에 3인칭 시점으로 「수련」의 B, 「실소」의 B, 「심정」의 그, 「입추전후」의 그, 「장자늪」의 그, 「뜸」의 Y, 「낚시광」의 Y, 「삼호강」의 그, 「어느 여름밤의 대화」의 그, 「세배」의 그, 등 11편에 나오는 인물들도 작자 자신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총 145편 중 42편이 인물들도 작자 자신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총 145편 중 42편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이는 확실히 수필에 접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분량별 즉 길이로 보아도 원고지 200장을 넘는 것은 「메아리」, 「안나의 유서」, 「어린 상록수」, 「실걸이꽃」, 「오지에서 온 편지」 이 다섯 편 뿐이며 가장 긴 것이 원고지 250장 내외의 「오지에서 온 편지」이며, 가장 짧은 것은 짧은 수필에 지나지 않는 「잡초」로 원고지로 6장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원고지 20장 이내인 것을 가려보면-「윤이와 소」, 「코스모스와 소년」, 「촌뚜기의 변」, 「병상기」, 「봄」, 「떡」, 「욱이란 아이」, 「낙엽」, 「까마귀와 소녀」, 「어떤 대화」, 「촌경A」, 「심정」, 「낚시터 인심」, 「골목안 점경」, 「도라지꽃」, 「화장산에 얽힌 이야기」, 「잡초」, 「메기와 권위」, 「말을 앞세웠던 후회」, 「입추전후」, 「낚시광」, 「매미와 바캉스」, 「악몽」, 「입추전후」, 「두메낙수」, 「봄」, 「노을」, 「게와 술」, 「어떤 애처가」-이 29편 중에도 10장도 되지 않는 것이 몇 편 있다. 사실 오영수의 경우는 소설과 수필을 동일시하는 경향마저 있는 것이다. 분량이 짧다하여 콩트(掌篇)라고 간주하기는 매우 어려운 작품들이다. 이무영20)은 ‘장편은 가벼운 유모어, 반등, 기지 등이 많이 쓰여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딴 세계로 끌고 가다가 최종 일이행에 가서 홀딱 뒤집어 보인다든가 어쨌던 인생의 아주 작은 면을 붙잡아서 심각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하고 그 분량도 ‘이백자 원고지 십매’라고 말했다. 분량은 꼭 콩트에 상응하지만 그 내용상 도저히 콩트라 말할 수 없다. 그 구성면에서 앞에 든 200장이 넘는 작품들도 단편일 따름이지 결코 중편일 수 없는 것이다. 「인정」과 「입추전후」는 자신이 연재소설을 쓸 수 없는 심리적 콤플랙스와 결백성을 대화형식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저쪽에서는 재미나게만 써 주면 딴 조건은 없다잖아 눈 딱 감고 해보는 거다.”
“그렇지만 그 재미란 게……”
“옛다. 제어길헐. 그 뭐 택시 안에서도 젊은 계집 옷도 좀 벗기고, 다방, 캬바레, 비밀요정, 사장족, 술, 계집, 도박, 마약… 이런 것들을 원료로 해서 범벅탕을 끓이는 거야.”
“그렇지만 도박은 십원내기 섰다밖에는 해 본 적이 없고, 술은 맥주 두 잔이면 벌벌 기는 판이고, 계집이라면 아냐, 젊은 계집들의 환한 겨드랑이만 봐도 얼굴이 붉어지고, 마약은 구경도 못한 주제에 어떻게 그런 걸 쓴담.”
「입추전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잃어버린 도원」의 후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내게는 태재나 형식이 따로 있지 않다. 생활이 즉 태재요 문학이 즉 생활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개성이 창조인 이상 거기에 무슨 틀(型, 形)이 있겠는가?”
이 말은 생활 자체와 문학을 통일시하고 형식에 아무런 구애됨이 없음을 말함인 즉 수필과 소설을 그 장르상으로 혼동 내지 동일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오영수가 즐겼던 생활, 난초 낚시처럼 정적이고 관조적인 생활 그 자체가 그대로 문학화 되어 나타났다. 애수적이면서도 담담한 수필을 방불하게 하는 「수련」을 중심하여 많은 작품이 있다. 그는 확실히 소설에 있어서 허구를 제거하고 오로지 신변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사소설 내지 수필에 접근하고 있다. 이재선21)은 한국의 소설을 ① 서술자주관적 3인칭소설 ② 1인칭소설 ③ 서술자퇴행적 3인칭소설의 3유형으로 분화시켜 1인칭소설을 정의하여 ‘서술자가 곧 소설의 주인공이거나 또는 부차적인 인물인 경우인데 이런 유형의 서술방법상의 특징은 역시 보고적 기법이 우세하다. 소설의 세계는 회상 속에서 재구성된 세계다. 또한 서술자는 그만큼 제약을 받기 때문에 체험이나 관찰의 영역을 일탈할 수 없고 고백과 방관의 형식이라고 했다. 위의 소론은 오영수 소설이 수필에 밀착되어 있음을 뒷받침 하고 있다.
남은말
성선설에 입각한 humanism으로, 시대적으로 사라져 가는 저층의 인간군의 애상(pathos)를 노래하는 마지막의 한 사람같은 고고한 인생을 살다가 간 그는 ‘한국 서민의 일상적 애환을 문체적으로 간결하게 시점상으로 소박하게 다루어온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실사회를 버리고 동양적 선유적인 기질로 낚시와 자연과 회고에 한거해버린 작가라 하여 그 작품의 많은 분량이나 독특한 경지를 무시하고 많은 평가들의 논외의 대상이 되어 왔음은 과연 올바른 일일까?
오영수의 작중 인물은 수동적 평면적 인물이거나 인정적 선의적이면서도 벌미받은 인물들이다. 그리고 구성은 단순 구성이고 배경은 주로 농어촌이다. 주제는 휴머니즘과 동야적 자연주의다. 자연과 더물어 사는 삶의 기쁨을 노래했다.
오영수의 향토에 대한 애정은 근래 물의를 일으킨 「특질고」를 쓰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지방적 차별을 조장한다하여 지나치게 혹평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일생을 창작한 전심한 원로작가의 붓을 끊게 해버린 처사는 그리고 그것이 직접 운명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오영수는 「잃어버린 도원」 출간 이후 「녹슨 칼」(1978.10 현대문학) 「편지」(울산문학제4집) 등 수권을 발표했는데, 이제 오영수씨의 창작은 그의 운명과 함께 매듭을 지었다.
1980.5. 오영수 선생 일주기 묘소를 찾아
좌-->강인수 최해군 성병오 이재기
작가 연보
1909 2월 11일 경남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에서 아버지 오시영 씨와 어머니 손필옥 씨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호는 월주(月州) 또는 난계(蘭溪). 9세까지 서당 에서 한학을 수학함.
1928 언양 공립 보통학교 졸업.
1932 일본 오사카에서 니나와 중학 속성과 수료.
1935 일본대학 전문부에 적을 두었으나 각기병으로 중퇴, 귀국.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동시(童詩)를 발표.
1937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국민예술원에 입학, 도중에 학도병을 피해 전전.
1939 국민예술원 졸업. 귀국한 뒤 만주로 방랑.
1942 동래 일신여고(현재 동래여고) 출신의 김정선(金貞善)과 결혼. 장녀 숙희(淑嬉)출생.
1943 母喪 1944 父喪
1945 처가가 있는 경남 양산군 일광면 산전리로 이사. 이 무렵 김동리의 백씨 범부 선생이 기장좌천에 은거. 이 관계로 김동리와 교우. 여기에서 해방을 맞음.
부산 경남여고 미술교사. 후에는 국어를 가르침.
1946 부산시 낙민동 242번지로 이사. 장남 윤(潤) 출생.
1948 시 「산골아가」 (백민 10월호) 발표.
1949 시 「6월의 아침」발표. 단편 「남이와 엿장수」(「고무신」으로 게재)가 서울신문 신 춘문예 모집에 입선. 동 작품을 [신천지]에 발표.
차남 건(建) 출생.
1950 단편 「머루」가 서울 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동 작품을 [신천지]에 발표.
6․25를 맞아 청마와 함께 동부전선에 종군.
1951 부산 중학교로 전임. 차녀 영아(玲娥) 출생.
1954 [현대문학]창간을 위해 상경. 아우 오양근 집에서 기거.
제1창작집 『머루』(문화당) 간행.
1955 조연현 씨를 주간으로 [현대문학] 창간호를 편집, 발행.
제1회 한국 문학가협회상 수상.
1956 제2창작집 『갯마을』간행.
1957 가족이 서울 성북구 돈암동 250번지로 이사. 이 무렵부터 신경성 위궤양을 앓음.
1958 제3창작집 『명암』(백수사) 간행.
1959 제 7 회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
1960 제4창작집『메아리』(백수사) 간행.
1963 서울 도봉구 우이동으로 이사.
1965 제5창작집 『수련』간행.
1966 위궤양으로 현대문학사의 실무를 떠남.
1968 『오영수 전집』 전5권(현대서적)을 간행.
1970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 위원장 피선.
1972 12월부터 위궤양 악화. 서울대학병원 입원, 재수술.
1973 1월 퇴원.
1974 『오영수 대표작 선집』전 7권(동림출판사)을 간행.
도봉구 쌍문동 486번지로 이사.
1977 경남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로 이사. 제 22 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1978 창작집 『잃어버린 도원』(율성사) 간행.
1979 「특질고」로 필화를 겪음.
5월 15일 상오 7시 30분 곡천리 자택에서 간염으로 타계.
언양면 송태리 선영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