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수봉 의대길을 오르는 김창곤 대장. 그는 "구조 이상 보람 있는 일은 없을 것"이라 자신했다.
북한산 경찰산악안전구조대 김창곤 대장(金昌坤·38)은 골수 바위꾼 이상으로 암벽등반에 몰입해 있는 구조대장으로 이름나 있다. 토·일요일이나 휴일 근무 때는 신속한 출동을 위해 인수봉 남면과 서면이 정면으로 보이는 잠수함바위 능선에서 머물지만, 그 외의 날에는 근무 중이건 비번 때건 바위에 붙어서 지내는 이다.
경찰 입문 3년 전인 93년부터 암벽등반을 시작한 그의 등반 수준은 인수봉에서 가장 어렵다는 빌라길(5.12a)을 자연스럽게 오를 정도. 그는 “바위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완벽한 구조를 위해 등반에 열중한다”고 말한다.
원활한 구조 위해 산악인들과 돈독한 관계 유지
9월12일 북한산 인수대피소 위쪽에 위치한 북한산 경찰산악안전구조대 막사에 도착했을 때 김창곤 대장은 망원경을 통해 인수봉을 살펴보고 있었다.
▲ 북한산 경찰산악안전구조대 앞마당에서 망원경을 통해 인수봉을 살피고 있다.(위쪽) 대원들에게 루트에 대해 설명하는 김창곤 대장.(아래쪽)
“와~, 저길 한 번에 올려치네요. 세 피치로 끊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분명 박 대장일 겁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니까요.”
김 대장은 구조를 신속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산악인들에게서 찾았다. 평소 안면이 있는 산악인들이 등반 직전 구조대 막사에 들르면 어떤 루트를 등반하나 확인해두었다가 구조신고가 들어오면 그들과 전화 연결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다음 구조에 나서는 것이다.
“한중희 대장처럼 구조에 큰 도움을 주는 클라이머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 사고자의 위치를 확인하고, 신속한 주마링을 위해 로프까지 깔아두는 거죠. 그런 산악인들의 도움이 없다면 구조에 더욱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올 초부터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은 암릉의 기점에서 안전요원들을 배치하면서 사고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반면 그로 인해 부작용도 생기고 있다고 김 대장은 말한다.
“안전요원들이 갖추라는 필수장비를 마련한 다음 암릉이 시시해지자 암벽으로 올라붙는 거예요. 정말 대책 없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잠수함바위 능선의 망바위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노라면 아찔할 적이 많아요. 볼트 하나에 네댓 명이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그 볼트에 걸어놓은 자일을 타고 하강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안 보는 게 차라리 속편하죠.”
대원들과 점심식사를 마치고 취나드B 출발점에 도착했을 때는 중년의 남녀 클라이머가 암벽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중 1년 전 궁형길 등반 중 추락헤 머리 수술을 받았던 중년의 남자는 김 대장에게 “언젠가 꼭 신세를 갚겠다”며 고마워했다.
취나드B 레이백 크랙을 타고 선등을 선 김 대장은 예상했던 대로 세련된 자세로 오아시스까지 가볍게 올라섰다. 이어 대원들은 벨트에 연결시킨 주마(등강기)를 자일에 걸고 주마링을 했다. 이 등강기 사용법은 김 대장이 구조를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
“등강기를 손으로 잡지 않은 상태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양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120m나 주마링을 해야 할 적도 있어요. 부목에 들것과 같은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오르노라면 정말 혀가 쭉 빠져나온답니다. 8자 하강기를 그리그리나 브렘제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어요. 물론 장비의 메카니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클라이머들에 한해서죠. 아무튼 구조를 위해서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용도가 다양한 장비가 가장 좋답니다.”
암벽등반에 입문한 것은 6년 6개월간의 해군 하사관 생활을 끝낸 직후였다. 군생활 중 대학산악부 출신인 후배 사병이 시간 날 때마다 암벽등반 때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고, 거기에 호기심을 느낀 김 대장은 급기야 93년 3월 전역 직후 인수봉 등반에 나섰다.
“심우길일 겁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퀵드로 하나 없는 상태에서 등반을 했으니…. 아무 탈 없이 하산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는 119구조대에 투신할 마음을 먹었다. 등반기술을 살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수부대 출신이 아니면 뽑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북한산과 도봉산 기슭에 경찰산악안전구조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반드시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 청와대를 경비하는 101경비단을 택했다. 그래서 96년 3월부터 6년 6개월간 101경비단 근무를 마치고 2002년 9월 강북경찰서로 발령받고 이듬해 2월 북한산 경찰구조대 대장으로 부임, 결국 꿈을 이루어냈다.
“그렇게 해서 구조대에 몸을 담기는 했는데, 막상 구조에 나서고 보니 이 실력으론 내가 죽겠다 싶더군요.”
그는 암벽등반을 제대로 배워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곤 수리봉 대부라 불리는 고 한중희씨(2005년 10월9일 사망)를 사부 삼아 이틀이 멀다 하고 함께 바위를 오르는 사이 한 단계 한 단계 기량이 발전했다.
“소위 말하는 언더그라운드 클라이머였죠. 등반에 대한 깊이뿐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추종자가 많았던 바위꾼이었답니다. 비번 날엔 거의 빠짐없이 한 대장님과 바위를 탔죠. 선인봉도 가고, 수리봉도 가곤 했으니까요. 하루에 다섯 코스는 기본이었죠. 마지막 루트를 끝낼 즈음이면 해가 꼴딱 넘어가곤 했으니까요. 정말 예술적으로 바위를 하는 분이셨답니다. 지난해 가을 선인봉에서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3년간 한 달이면 거의 보름을 같이 다녔으니 함께 산 거나 다름없죠. 사고 나기 8일 전에도 인수봉에서 추락한 클라이머를 함께 구조해냈는데…. 그 사람이 조금 전 취나드B 출발점에서 만난 분이랍니다. 그 분을 구조하면서 ‘바위는 죽어야 끝난다’고 하더니 본인이 그렇게 되고 만 셈이죠.”
“등반보다 더욱 깊이 있는 게 구조랍니다”
오아시스에 도착하자 김창곤 대장은 산악인들이 설치해놓은 낙석방지용 철망을 가리키며 “저런 일을 기꺼이 하는 산악인들이 많기 때문에 그나마 사고가 적게 나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 인수봉 등반중 환한 미소를 짓는 김창곤 대장.(왼쪽) 김창곤 대장은 관할 암벽과 암릉에 대해 샅샅이 꿰고 있어야 안전하고 신속한 구조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의대길 하강.
김 대장은 이어 처음엔 의대길 정도는 자유자재로 올라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며 “오랜만에 의대길이나 한 번 해보자”고 기자에게 권했다.
경찰구조대원의 확보를 받으며 첫 피치와 두 번째 피치를 한 번에 이어 등반하는 김 대장의 한 동작 한 동작은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역시 루트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기 전에는 해낼 수 없는 자세의 연속이었다.
그는 “바위 타는 즐거움보다는 구조를 위해 클라이밍을 열심히 배운다”고 말한다. 인수봉이든 염초봉 암릉이든 그가 맡고 있는 지역의 암벽 루트에 대해서만큼은 통달하고 있어야 사고가 났을 때 신속하면서도 안전하게 사고자를 구해낼 수 있고, 구조대원들의 안전도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루트 몇 피치에 볼트가 몇 개 박혀 있고, 또 어떤 지점에서 사고가 났을 경우 대개 어느 부위를 다치는지까지도 상세히 알고 있다고 한다.
▲ 조난자 엎어 내리기를 훈련하는 김창곤 대장.
“평소 훈련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현장에 도착하면 마음만 급하고 떠오르지 않아 헤맬 적이 있답니다. 그래서 집에서 TV를 볼 때에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매듭을 짓곤 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아내에게 ‘그럴 정성이면 진급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요(웃음). 평소엔 사고 위험이 높은 루트는 노트에 개념도를 그려놓고 수시로 들여다보면서 사고 유형에 대해 분석하곤 한답니다. 구조에 도움이 될 만한 장비 사용법에 대해서도 늘 연구하고요. 등반 세계도 그렇듯이 구조의 세계도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대장의 아내 한순아씨(韓順兒·34·혜화경찰서 수사과 진흥1팀장) 역시 경찰 공무원이다. 두 사람은 중앙경찰학교에서 교육생 인연으로 만난 이듬해 97년 결혼, 동국(세검초교 2년), 동주(″ 1년) 두 아들을 키우며 단란한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다. 김창곤 대장은 구조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책임이지만 대원들을 안전하게 돌보는 것도 의무라고 말한다.
“비번날 수리봉 같은 곳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쁘죠. 제 자식이 그럴진대 그렇게 곱게 키운 아이들을 무작정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낙석지대는 정말 위험하답니다. 사람 한 번 업어 내리고 나면 무릎이 시큰거리고요. 물론 책임감을 갖고 충실히 맡은 바 일을 다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구조하다가 다쳐서는 안 되겠죠. 대원들이 구조대 생활을 마쳤을 때 두 다리 멀쩡한 상태로 하루재를 넘어가는 것을 보는 게 저를 비롯한 대장들의 의무이자 가장 큰 바람입니다.”
김창곤 대장은 구조에 열중하는 이유를 묻자 엉뚱하게도 “구조는 마약과도 같다”고 대답한다. 이어 “다른 산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다”며, “다른 산 갈 여유가 있다면 그럴 시간에 인수봉을 한 번이라도 더 올라가는 게 낫다”고 말했다. 루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사실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게 구조작업인데 싫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사고자를 완벽하게 후송하고 나면 보람을 느낀답니다. 두개골 부상자처럼 촌각을 다투는 사고자를 살려냈을 때는 더하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만족감이 느껴지니까요. 봉사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 아니겠어요? 바위도 깊이가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게 구조랍니다. 그래서 구조가 더욱 매력적이라는 겁니다.”
“제겐 젊은 날의 꿈을 이룬 겁니다”
▲ 대원들과 함께 파이팅! 김 대장은 대원들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일이 구조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 말한다.(위쪽) 내부반에서 대원들에게 구조 요령을 가르치고 있다.(아래쪽)
김 대장은 1주일에 한 번은 수영장에서 여러 시간을 보낸다. 암벽등반이나 구조활동 중 뭉친 근육을 푸는 데 수영이 최고라는 생각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인 함양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부산 영도다 보니 밥만 먹여준다면 하루 종일 물에 떠 있을 정도는 됩니다. 어쨌든 긴장이 풀어지면 제대로 구조작업을 해낼 수 없습니다. 저의 작은 실수로 한 생명을 잃을 수 있고, 물론 제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한중희씨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후유증도 겪고 게을러지기도 했지만, 얼마 전부터 다시 마음을 잡았습니다.”
김창곤 대장은 “구조를 제대로 하고 대원들도 안전하게 이끌 수 있을 만큼 깊이가 있으려면 적어도 10년은 지내야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 부임했을 때는 경찰 생활을 구조대에서 마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친 것 같아 지금은 마음을 비우면서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