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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겐, 어거스틴, 루터, 웨슬리,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로마서는 신학사와 교회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바오로의 복음이 오늘날까지도 새롭게 주목 받고 있는 이유는 이 로마서 때문이다. 교회는 로마서를 ‘기독교 교리의 요약’으로서 읽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바오로의 깊은 그리스도의 체험과 하느님의 계시가 일치한 바오로의 영적 간증의 심오하고 탁월한 책으로 더욱 감동스럽다!
아! 사역과 사역자란 의미가 이런 것이구나!
놀랍다!
묵상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욱 나로 깨달음으로 절규케하는 성령님!
순복하는 자의 은사를 치밀하게 사용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전율과 신비감에 휩쌓인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연구함에 있어,
나는 로마서의 배경이나 저작 목적과 서론적 신학적 의미를 다루기 보다는, 그간 로마서를 수십회 기도로 읽고 묵상한 결과와 많은 관련 자료들과 특히 고난 중에 내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간증하며 본문 중심의 주석에 충실하려고 한다. 물론 내가 하고자 하는 평신도로서의 말씀 묵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간의 가톨릭 및 기독교 신학계에서 인정하는 많은 종류의 주석집과 영적 독서를 기초로 하였으며, 이는 사도와 선각자들의 계시와 그들의 계시 위에 나의 해석을 선택함으로써 객관성과 주관성의 조화를 주의할 것이다.
저자는 바오로(로마1,1)이며, 기록 연대는 주후 60년경 바오로가 제삼차 사역 여행을 하던 동안이다. 고린도가 기록 장소이며(로마15,25-32, 사도19,21, 20,1-30), 수신자는 로마에 있는 신자들(로마1,7)이다. 또한 이 편지의 동기, 장소, 시점은 로마15장 25-29절에 제시되고 있다.
짧은 머리말을 마치고 이제 본문에 들어가고자 한다.
로마서 연구가 끝날 때까지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1절,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1. 로마서의 주제는 하느님의 복음이다(1,1).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마태오복음, 마르코복음, 루카복음, 요한복음을 사복음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우로는 그의 서간가운데에서 로마서를 하나의 복음서라고 말하고 있다.
사복음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의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십자가와 부활 전에는 아직 그들 속에 계시지 않았다.
로마서에 있는 복음은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영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8-9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생명의 그 영이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다.
사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우리 밖에 계시지만, 그러나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다. 이점이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가 사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보다 더 깊고 보다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로마서의 복음은 부활하신 후 그 영(the Spirit)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다.
만일 우리에게 신약성경의 사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만 있다면 우리의 복음은 너무나 객관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섯 번째의 복음, 즉 그리스도의 주관적인 복음인 로마서의 복음이 필요하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단순히 성육신 후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만이 아니다. 우리 영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더 높고 보다 주관적인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 생명의 그 영이다. 요한복음 14, 15장의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 안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 했지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중점이므로 기억해야만 한다! 로마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의 복음이며, 이제 그를 믿는이들 안에 계신 주관적인 구주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2. 히브리어 ‘메시아’와 동일한 단어인 헬라어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으신 분을 의미한다(요한1,41, 다니9,26).
3. 히브리어 ‘여호수아’ 와 동일한 단어인 ‘예수’는 ‘여호와의 구원’, ‘여호와의 구원자’를 의미한다(마태1,21, 민수13,16, 히브4,8).
(2절,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를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1. 이것은 하느님의 복음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것임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복음이 하느님에 의해 영원 전에 계획되었음을 보여 준다. 창세 전에 하느님께서 이 복음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창세기에서 말라키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여러번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의 복음을 약속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3절,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하느님의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이다. 물론 죄사함이나 구원 등이 하느님의 복음에 포함되지만 중심 뜻은 거기에 있지 않다. 이 놀라운 인격은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다.
1.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먼저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다고 했다. 하느님의 복음은 육체가 되신 하느님에 관한 것이다. 다윗의 후손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사람의 본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거치신 과정의 첫 단계인 육체 되심을 통하여 하느님은 인성 안으로 이끌리셨다.
(4절,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 왜 그리스도의 인성이 먼저 언급되고 그리스도의 신성이 나중에 언급되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두 단계를 거치셨는데 첫째 단계는 성육신이며, 둘째 단계가 죽음과 부활이다. 그리스도는 첫째 단계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사람 속으로 이끄셨으며, 그리스도의 둘째 단계로 말미암아 사람을 하느님 속으로 인도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인격으로서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요한1,18).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성육신 전에도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며, 로마서 8장 3절에서도 ‘하느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전에도 하느님의 아들이었는데 왜 부활하심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 이유는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아무 관계가 없는 요소와 육신과 사람의 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인격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전에도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사람의 본성을 가진 마리아에게서 태여나신 예수인 그 부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그 부분은 사람이었다.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본성을 가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 나셨다고 말한다(사도13,33, 히브1,5).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33년 반 동안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은 마치 꽃씨와 같았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지만 아무도 그것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죽음 속에 뿌려지고 부활하심으로 자라나서 꽃을 피우셨다.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 이러한 과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육신, 곧 사람의 본성을 위로 올리셨다. 그분은 육신을 벗으신 것이 아니었으며 인성을 벗어신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거룩하게 하시고, 위로 올리시고, 변화시켰으며, 이러한 변화된 인성을 가지고 거룩한 능력을 가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성육신 전 하느님의 아들이었을 때에는 그리스도에게 사람의 본성이 없었으나, 부활하심으로 위로 올려지고 거룩해지고 변화된 인성을 가진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는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후손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육신이 되셨다. 구속을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 신성에는 피가 없으며 오직 인성에만 피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구속에는 반듯이 피가 필요하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브9,22).
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위하여 육신이 되셨으나, 구속은 하느님의 목적이 아니시다. 구속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을 제시한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육신이 되셨으며, 자신을 우리의 생명으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그리스도의 첫째 단계는 구속을 위함이요, 둘재 단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속에는 우리의 생명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신다. 하느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이 있다(1요한5,12).
로마서의 첫째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을 다루고, 둘째 부분은 생명을 넣어 주는 것을 다룬다. 왜 로마서는 이렇게 시작하는가? 그 목적은 하느님의 많은 아들들을 산출하기 위함이다. 타락한 죄인인 우리들에게는 거듭나고, 변화되고, 하느님의 아들들로 완전히 영화롭게 되기 위해서는 구속이 필요하고, 하느님의 생명이 필요하며, 하느님의 생명으로 생활함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아들들이 될 것이다.
본래 하느님의 아들은 외아들, 즉 독생하신 아들이었다. 이 하느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육신을 입고 오셨다. 육신이 되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라 불리었다. 33년 반이라는 시간을 거치신 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느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겸한 한 아들을 얻은 것이다. 성육신 전에 하느님의 아들에게는 다만 신성만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 하느님 아들은 신성과 인성을 갖게 되었다. 이제 인성도 하느님의 아들의 일부가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에게는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있으시다.
3. 그분은 그분의 인성안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그분은 육신 안에서 사람의 아들이셨는데, 어떻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 그렇게 신성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부활 안에서 인정됨으로써였다.
이 인정됨은 거룩한 영(성결의 영)에 따라 능력 안에서였다. 성결의 영은 다윗의 씨-인성의 씨(로마5,15, 17하, 19)-안에 있는 신성이다(로마9,5).
로마서 9장 5절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하느님으로서 그분은 다윗의 씨 곧 인성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분 자신 안에 신성을 가지고 계셨다.
육신 안에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결의 영을 따라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부활은 과정을 거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완결이다. 부활은 인격이다.
주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요한11,25)라고 하셨다. 영원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은 다만 삼위일체 하느님이셨으며, 신성하실 뿐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성육신과 인생과 부활을 통과하시면서 과정을 거치셨다. 그리고 나서 부활 안에서 그분은 완결되시어 신성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적이 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부활 자체인 완결된 삼위일체 하느님이 되셨다. 과정을 거친 삼위일체 하느님의 완결인 그러한 부활로부터 육신 안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맏아들이 되셨다(로마8,29).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이제 하느님의 아들은 이전의 하느님의 아들의 어떠하심과는 다르다. 하느님의 아들이 다만 독생자였을 때에는 그분에게 신성만 있었지만, 이제 그분에게는 인성이 있으며 그분의 인성은 신성하게 되어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일부가 되었다.
독생자는 결코 맏아들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심으로 많은 아들들이 뒤따름을 가리킨다. 이 많은 아들들은 하느님이 택하신 사람들이다. 수많은 그들이 모두 동일한 부활 안에서 거듭났다(1베드1,3). 그분의 부활 안에서 이 모든 믿는이들은 거듭남을 통하여 신성하게 되어 하느님의 많은 아들들이 되었다. 거듭난 믿는이들은 인성과 신성을 모두 소유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느님의 복음 안에 있는 그분의 의도를 함축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분에 의해 구속된 타락한 사람들이 그분의 많은 아들들이 되어 그분의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그분의 생명과 본성에서 하느님과 똑같게 되도록 유일한 하느님이신 그분이 사람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간 정리된 노트를 음미하고 뒤적이며 독서하고 묵상하며 이 글을 쓰다 문득 시계판을 보니 새벽을 지나 6시나 되었네! 이제 내일을 위해 잠을 좀 자두어야겠다. 이렇게 하다 보니 그간의 성경 연구와 묵상에 정리와 체계가 갖추어지는 것 같아 기쁘다. 더욱 새롭고 독창적이며 귀한 말씀으로 그분은 채워주실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