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둘 셋...열 속의 비밀
신지녹도문자와 최치원 천부경81자 풀이
(( 이글은 사실 책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과 한 쌍이 되는 내용이다.그래서 이글은 책의 독자들 서비스 차원에서 쓴것인데 좀 아쉬운것은 책을 읽지 않으신 독자 께서는 우리말, 특히 ㄱ ㄴ ㄷ ...ㅎ 속에 들어있는 뜻에 대해서 책 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지 못해 이해 하는데 좀 생소한 부분이 많으리라고 생각 된다.
그렇다고 그 방대한 책 내용 모두를 여기에 수록 할수도 없어서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인용 하였을 뿐이니 이점 양해 바란다.))
***신지녹도문자와 최치원 천부경81자 풀이서론 1.
천부경(天符經) 하면 흔히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하여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나는 최치원의 81자를 천부경으로 알고들 있다.
그러나 이 최치원의 81자는 원래 16자의 신지녹도전자(神誌鹿圖篆字)를 갱부작첩(更復作帖),즉 최치원이 해독하고 다시 시첩으로 만든것 이라 하므로 이것이 과연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을 그대로 번역한 번역문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천부경과 관계가 없는 최치원이 쓴 별도의 최치원 천부경인지 또는 하느님의 천부경을 예찬한 예찬문인지 우리도 한번 신지녹도문을 해독해 보자는 것이다.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이란 우리의 뿌리인 하느님께서 그 아드님 환웅이 새 나라를 세우려 하자 나라를 세우는데 근간이 되는 천하의 보물 천부인 세개와 함께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교훈을 내려 주셨는데 이 교훈은 당시 문자가 없었으므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다가(口傳之書) 환웅의 신하 신지에 의해 인류 최초의 문자가 만들어지고 이 문자로 하느님의 교훈이 멸실되거나 변질될것을 우려하여 바위에 새겨 놓은 16자의 글자이다.
그러므로 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은 하느님교훈을 가감 없이 적어놓은 글이고 또 하느님 말씀이 직접 전해지는 문서는 오직 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이외엔 없기 때문에 천부경 하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고 그렇다면 이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은 우리 한민족 한테는 대단히 중요한 글이다.
그렇다면 우선 16자의 신지녹도전자를 우리도 해독해 보고 다음 최치원의 81자를 풀이해 보아야 하는데 만약 이 신지녹도문을 최치원만이 해독하고 우리는 해독할수 없다면 이는 글자가 아니다.
다만 최치원이 그 신지녹도문을 해독 하는데 하루가 걸렸다면 우리는 열흘이면 될것이고 최치원이 한달이 결렸다면 우리는 열달이 ...또 일년이 결렸다면 우리는 10년이 걸려서라도 우리도 해독할수 있어야 그것이 글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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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역사를 통하여 선인들로 부터 현대인에 이르기 까지 그 난해 하다는 최치원의 81자를 무려 20 여년을 통하여 해석해 보고 이것이 하느님의 교훈 천부경이 아니라 천부경의 예찬시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 예찬시에서 신지녹도전자 해독하는 힌트를 얻고 이 신지녹도전자를 해독해본 결과 이 16자의 신지녹도전자가 바로 진짜 하느님의 교훈인 천부경임도 알았다.
이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이 써진지 실로 6천년 만에...최치원 이후 1200년만에 해독 하여본 결과이고 이 하느님의 진본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이란 놀랍게도 우리가 숫자로만 알고 써오던 "하나 둘 셋 ....열" 이었다.
따라서 이 우리 숫자속에는 사람의 본질과 생성원인, 그리고 번성 과정과 진로와 홍익인간의 뜻이 들어 있음을 알았다.
즉 우리가 그 심오한 뜻도 모르는채 한자 뜻만 가지고 제멋대로 윤색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 아니라 이는 사람의 최종목표 이어서 세계적 으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피의 전쟁을 끝내고 세계가 한 가족이 되며 개인적으로는 영생불사 하여 신선이 될수있는 길이 들어있으므로 이는 우리 민족은 물론 전 세계인이 외워야할 위대한 경문 이었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무수한 강의와 토론을 통하여 검정을 거친 결과이고 이는 대략 500쪽 짜리 책 한권이 되며 출판사에서 출판을 권유 받았으나 많은 독자들의 보다 원활한 독서와 토의를 위하여 여기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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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보강된 부문이다.
본론을 전개 하기전에 한자도 우리 글자이고 음양오행설도 우리 사상이니 천부경은 한자와 음양오행설로 풀어야 한다는 이론이 너무 많아 우선 이 문제 부터 집고 넘어 간다.
* 한자는 절대로 우리 글자가 아니다.
* 한글 전용이냐? 국한문 혼용이냐? 를 TV 에서 토론하는 것을 보면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분들의 이론은 한자는 애초 우리가 만들었고 또 역사를 통하여 오래동안 써 왔으니 우리글자 라고 한다.
이는 사실로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쓰려면 사실 한자를 빼 놓고는 그 말이나 글이 성립이 되지 않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우리 순수한 말들을 죽이고 한문 문자 용어만을 써 왔고 또 원시한글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죽였기 때문이지 한자가 우리 글자는 아니라는 이론을 전개 하려한다.
(여기서 원시한글이란 세종도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 서문에서 누차 밝히고 있드시 "옛 글자를 모방하여(字放古篆) " 란 말이 수없이 나오고 또 최만리 상소문을 보면 이 문제가 누차 거론된다.따라서 필자는 원시한글 이란 신지녹도문자를 이어받은 기림토(加臨土)의 존재를 확신한다.)
" 한자를 처음에는 우리가 만들었으니 우리 글자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 필자는 이렇게 반박했다.
" 미국 자동차 박람회에 가서 " 달구지는 우리가 처음 만들었으니 자동차의 원조가 우리다"
하는것과 마찬가지 라구...
즉 우리가 처음에는 만들었으나 연구 연구 발전 시키어 그들의 언어와 맞춘것은 중국인인데 이제와서 우리 글자라고 우기는것은 위 달구지 이야기 같다고...
그러나 그래도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우기시는 분들이 많아 할수없이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서문까지 인용한것이다.
즉 세종은 한자가 우리글자이고 따라서 우리 말과 맞아떨어진다면 뭘하러 다시 훈민정음을 만들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훈민정음 서문의 글자중에 中國을 문제로 삼는것이다.
즉 세종당시에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을수 없으니 國中을 잘못 표기한것 아니냐구...
즉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가 아니고 " 나라안에 말들이 달라서... " 라는 것이다.
이건 참으로 논리적인 토론이라 필자는 이 國中이라고 한분들 한테 오히려 감사를 드리며 이글을 쓴다.
왜냐하면 진정한 학문의 성립이란 퇴계와 고봉이 그랬드시 엄청난 토론과 이의에 의하여 완성 되기 때문이다.
우선 세종이 쓰신 훈민정음 서문을 보며 中國이 말이 되는지 國中 이 말이 되는지 좀 해석해 보자.
우선 원문
"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 이를 中國으로 본 해석
國之語音異乎 中國
나라의 말과 소리가 中國과 달라
與文字不相流通故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내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이렇게 中國으로 해석하면 문장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 이를 國中 이라 한다면
國之語音異乎 國中
나라의 말과 소리가 나라 가운데에서도 달라
이 해석대로 라면 지금도 그렇지만 세종당시에는 더욱더 방언이 심해서 지방마다 말소리가 다르다는 말이고 당연히 그랬을것이다.
즉 예를 들면 祖父母를 지방에 따라 "할배, 할매" 라고 하기도 하고 " 할아버지, 할머니" 라고도하며 女를 가지고 "가시내" 라고 하는가 하면 "계집"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 글귀와 말이 연결이 되질 않는다.
與文字不相流通故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여기서 문자란 물론 기존 한자다. 즉 祖父라는 문자는 "할배"나 "할아버지"라는 말과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인가?
그렇다면 만약 한글로 적었다면 어찌 될까?
이것을 새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적었을때는 "할아버지" 라고 말하는 지방에선 "할배" 가 뭔지 모르며 "할배" 라고 말하는 지방에선 "할아버지" 가 원지 모르게 된다.
즉 우리 말과 문자가 서로 맞지 않아 새로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이 지방마다 서로 달라서 말과 문자가 맞지를 않게 된다.
그러니까 만약 國中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완전 반대가 되는 말이고 따라서 아래 글들과도 완전 딴소리가 아니라 그 반대 소리가 된다.
지금 중국에서도 지방말들이 사투리가 심해서 말로 해서 통하지 안으면 글자로 쓰고 그러면 통한다.
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만약 國中 이라고 해석한다면 祖父가 할배였건 할아버지 였건 그 뜻은 어느 지방이건 이해 할수가 있다. 그러나 먼저 말한대로 한글로 할배 라고 썻다면 할아버지 라고 하는 지방에서는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며 할아버지 라고 썻다면 할배라고 하는 지방에서는 이해를 못하여 차라리 祖父 라고 쓴것만도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종의 "나라의 말과 글자가 중국과 달라 문자와 맞지 않는다" 는 國之語音異乎 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 은 그런것이 아니다.
문자 체계가 우리 말과 다르다는 말 이므로 國中이 아니라 中國 이어야 한다.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내 이를 민망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이상으로 볼때 훈민정음 서문 中國을 國中으로 해석 하는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 그렇다면 세종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中國 소리가 왜 나왔을까?
먼저 말했드시 중국은 현재 중화민국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그 국호야 어떻건 中國 이라고 불리워 졌다.
즉 중국인들은 자기네 나라가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네 변방의 나라를 다음과 같이 무시해 불렀던것이다.
東夷 - 물론 우리 한민족 이다. 지금 우리 민족학을 논하는 학자들은 이 夷자가 弓에 大가 가해진 글자로 큰활을 가진 사람들의 뜻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예로부터 활을 잘쏘는 민족이라고 중국인이 붙여준 이름에 감지덕지 하고 있고 더구나 아래 西戎이나 南蠻 北狄에 비해 벌러지나 오랑케가 아닌 좋은 이름이라고 자위하지만 어쨋건 세계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사는 오랑케 라는 뜻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우리조차 東夷族 이라고 뽑낸다는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西戎 - 서쪽에 사는 뙤놈 이라는 뜻이고
南蠻 - 남쪽에 하는 벌래같은 랭케 이고
北狄 - 북쪽에 사는 도적같은 오랑케
이상 중국은 華夏족(지나족)인 자신들만이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고 그래서 중국 이라는 말은 세종보다 더 올라가서 단군때 부터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 증거로 다음글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닌 증거 중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기록으로본 증거 )
(역시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58쪽 - 59쪽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올린다.)
* 단기고사의 기록
천제께서 유위자에게 물어가로대
" 우리 후손들의 성쇠의 기간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대답하여 가로되
"...중략 ... 그때를 당하여 기하(基下)의 후손은 혹은 북방의 터를 보전하고 혹은 동방으로 천도를 하며 혹은 남방에 건국하리니 큰 나라는 수 천리요 작은 나라는 수백리 인데 후속들은 서로 침략이나 하다보니 문화가 차츰 쇠퇴하여 조국의 문자는 돌아보지 않고 모화(慕華)사상이 날로 높아져서 그 천년 뒤에는 모화 하는 미친 선비들이 나라에 가득하여 우리의 문자를 폐지하고 한문만을 전용하여 나라이름이나 왕의 칭호나 벼슬이름이나 지방의 이름 그리고 사람의 이름이나 물건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화식으로 하여 마침내 자손은 그 조상을 잃을 것이오니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통한 스럽나이다. 엎드려 비오니 기하께서는 깊고 멀리 생각하시어 후일을 예비하소서."
천제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은 참으로 천고의 신인(神人)이십니다. 능히 반만년 뒤의 일을 추측 하시다니요."
그러시고 하명을 하셔서 사방 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
(帝問於有爲子曰吾之雲孫盛衰之期果如何曰.....中略.... 當其時基下之後孫或保基北方或遷都東方或建國南方大邦數千里小邦數百里後屬疏遠相尋以干戈文化漸退不顧祖國文字慕華思想日漸高廣後其千年則慕華狂儒遍滿國中全廢吾國文字專用漢文至於國名王號官名地名人名物名相同於中華終至於子孫失其祖先想見將來眞所痛恨也伏乞基下深思遠慮豫備後事帝曰先生眞千古神人能推測半萬年後事乃下詔立石碑於四方國境刻帝王名號刻以本國文字曰永遠保全國文 - 檀奇古事)
* 단군세기 기록
12세 단군 아한 재위52년
무자이년(BC 1833) 여름 4월 외뿔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천제께서 나라안을 순시하시고 요하의 좌측에 이르러셔서 관경을 순수하신 비를 돌에 새겨서 세우게 했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겨서 전하게 했다. 그런데 이것이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다.
(十二世檀君阿漢 在位五十二年 丁亥元年
戊子二年夏四月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是金石之最也 - 檀君世記)
이 기록은 12세 단군 아한때 기록으로 BC1883년 이야기 이다.
그리고 위글 단기고사 에서 全廢吾國文字專用漢文 즉 우리의 문자를 페지하고 한문만을 전용 한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오 원시한글 이야기가 나온다.
또 중국의 표현은 中華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이름은 중화인민공화국 이다.
이 중화 인민공화국을 우리는 지금 그냥 중국 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위 세종대왕 서문에서 中國을 그때는 중국이 없었으니 國中 이라 해야 한다는 이론이 과연 타당한 이론이라 할것인가?
*** 교착어인 우리말과 한문은 그 토씨나 어순에도 맞지 않는다.
글자란 그 민족의 말과 맞아야 그나라 글자다.
즉 그나라 말과 맞지않는 글자는 그나라 글자가 아니라 외부에서 수입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착어인 우리말과 한문과는 그 토씨나 어순등이 전연 맞지를 않는다.
교착언어란 우리말로 보면 주어나 목적어 동사 다음에 "은, 는, 이, 가" 등이 붙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 교착어는 현재 우리말은 물론 수메르어나 일본어 등 '우랄 알타이 언어'의 공통된 현상인데 중국어나 인도어, 영어는 교착어가 아니다.
한문으로 예를 든다
우리말로 "나는 학교에 간다."
이것을 우리말 순서대로 한자로 쓰자면 我 學校 去 가 된다.
그러나 이런 문장은 한문에 없다.
이를 한문으로 옳게 쓰자면 "我去學敎"가 된다.
我 - 나
去 - 간다
學敎 - 학교 가 된다.
이것을 한문 어순대로 하면 " 나. 간다. 학교" 이다.
더 예를 들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 중에 析三極
析 - 쪼개다
三 - 셋
極 - 極
이것을 한문 어순으로 하면 " 쪼개다. 삼극" 인데 우리말로 하면 "三極으로 쪼개다" 이다.
더 예를 든다.
명심보감 첫머리 子曰爲善者
子 - 공자님
曰 - 말씀
爲 - 하다.
善 - 착하다.
이것을 한문 어순대로 하면 " 공자. 말씀. 착하다" 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하라면 " 공자님 가라사대 착한일을 하는 넘은..." 이다.
이와 같이 한자로 만든 한문에는 우리말과 그 어순도 맞지 않지만 그 토씨인 "은, 는, 이, 가" 등 도 없다. 그러므로 한문을 우리가 이해 하려면 일단 번역 해야 한다. 이 번역 해야만 알수 있는 문자가 과연 우리 문자 인가?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한문표기가 자기네 말과 어순이 일치하고 있으므로 새겨서 듣고 말고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인도어나 영어도 교착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번역하고 새겨 들어야 하지만 그들에게는 번역은 물론 자기네 어순과도 맞는다.
한가지 예를 더 든다
중국인이 숫자를 쓰려면 一二三四 ...라고 쓰고 이것을 읽으려면 그대로 니 얼 샨 스 ... 라고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一二三四 ... 쓰고 읽으려면 처음에는
一 - 한일
二 - 두이
三 - 석삼
四 - 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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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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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一二三四...를 우리말 "하나 둘 셋 넷..." 으로 번역한 다음에야 이해가 간다.
이렇게 어순과 토씨와 번역을 해서 이해 해야 하는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주장 하는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이야기 이고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그렇다면 왜 한자가 우리글자라는 말이 생겼는가?
필자는 애초 인류의 최초의 문자는 신지녹도 문자라고 했다.
이 신지녹도문자는 원시한글인 가림토의 어머니도 되지만 한편 초기 한자인 金文의 어머니도 되는데 가림토는 일본에 건너가 신대문자가 되었는가 하면 슈메르등 인도지방으로 퍼져나가 인도의 부라미 문자가 되었고 한편 금문은 은허 갑골문을 지나 소전 대전을 거처 현재의 한자로 발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세종전 까지는 우리 글자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한자에 매달려 와서 한자가 우리 글자처럼 친숙해 졌을까?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이는 우선 말과 글자가 몇개 되지 않던 옛날에는 그림 글자이며 뜻글인 금문이나 은허갑골문등이 모음등 조합이 혼동 되어 뜻글도 못되고 소리글도 못되는 가림토 보다는 ( 상형문자이며 뜻글이며 자기 어군에서만 통하던 소리글...이 문제는 이카페 계시판중 책에 추가할글과 보관할글 183번 (" 가림톤느 이렇게 쓰여젓다" ) 에서 자세히 설명 했다.
즉 가림토는 원래 그 물건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 (像形文字)인 뜻글 이면서도 그 어군(語群) 에만 통하던 소리글 이었다.
이를 예로 들면 'ㅅ'은 그 모양대로 서거나 솟거나 그 끝이 뽀죽 하므로 서는 동물인 사람, 그 모양 비슷한 서까래, 사타구니, 또 그 잎의 모양과 같은 삼(인삼 포함), 그리고 그 끝이 뽀죽한 솔(松) 등에 쓰여젔지 그 어군이 다른 하늘이나 땅에는 쓸수가 없었다.
이것은 애초 원시한글인 가림토는 물론 지금 한글도 그 뿌리는 천부인인 ㅇ ㅁ △ (ㅅ) 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글은 완전한 소리글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한자만을 신봉하던 학자들은 이 글을 쓸수가 없었다.
즉 ㅅ 으로 발음되는 事物, 事件 등에는 쓸수가 없는 글자였다. 즉 상형문자도 아니고 소리글도 아니여서 혼동되는 글자였다.
따라서 한문 학자들은 말과 글자가 몇마디 되지 안던 그 시절에는 차라리 완전한 상형문자, 즉 뜻글인 한자를 쓰는게 더 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한 이유는 고조선이 망하고 중화족이 강한 나라가 되자 모화 사상이 너무 강했던 미천 선비들때문...
그리고 이 미친 선비들의 문자를 통한 정보의 독점욕 때문, 즉 현재 우리 정치 언론계나 학자들 처럼 영어를 쓰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유식한체 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한자를 너무 오랫동안 대하다 보니 한자가 우리 글자처럼 친숙해진것도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했드시 한자의 시초는 우리가 만들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연구 발전시킨 글자가 아니기에 위에서 말했드시 우리 말과 맞지를 않으니 우리 글자가 아니다.
* 이외 한자는 글자 하나를 두 음으로 읽는 글자가 많다.
즉 한자의 인사말 爾好를 우리는 "이호" 라고 읽지만 중국인들은 "니 하오" 라 하고, 다시 보자는 再見을 우리는 "재견" 이라고 읽지만 그들은 "짜이지엔" 이다.
여기서 중국말인 "하오" 즉 好를 왜 우리가 " 호" , 再를 '짜이', 見을 '지엔' 으로 발음하는 것은 세종때 까지만 해도 우리도 그랬다.
이 세종때 발음은 魏秦시대 즉 조조와 유현덕이 나오던 삼국지 시대의 발음이 그때까지 그대로 써졌다.
그러나 지금은 물질 문명의 발달과 함께 그들의 발음도 많이 변해서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中國의 발음은 세종때 까지는 '듕귁' 이었으나 지금은 '듕궈' 이다.
그런데 세종은 이 한자 음의 두마디를 한 마디로 축소 시켜 '하오'를 '호', '짜이' '째', '찌엔'을 을 '짼' 으로 축소하여 표시 하다보니 훈민정음 발표후 바로 써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에는 우리가 읽을수 없는 괴상한 글자들이 많다.
이것을 현재 우리가 읽기 편하게 째(再)를 '재'로, 찌엔(見)을 '견' 으로 고친 이는 1824년 (순조 24 )년에 류희 이다.
즉 그가 저술한 그의 문집 文通 제 19권 '한글 한자음' 에 대한 연구서에서 그는 四聲점, 즉 훤인천강지곡 등 훈민정음 음에 점을 찍었던 것은 중국인들의 한자 음 에서는 필요하나 우리말에서는 불필요 하며 된소리도 우리에게는 필요 없다고 주장 했다.
류희는 신숙주 최세진 박성원 이광사 이영익 정동유 등의 학설을 수용 비판 햐여 자신의 학설을 폈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한자음을 제대로 표기 할수 있도록 연구를 해 처음으로 우리말 위주의 연구를 시도한 책으로 조선시대 국어학 연구에 가장 돌출하다는 칭송도 받기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음은 애초 중국인들의 음을 우리 입맛에 맞게 여러 사람이 고친것 뿐 이니 그러므로 한자가 우리글자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참으로 뚱딴지 캐먹는 이론이다.
*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볼수 있는것이 두개 있다.
1) 好 의 발음은 우리식으로 "호" 가 맞는데 중국인들이 이 발음이 안되니까 풀어서 " 하오" 라고 하고 再도 원래는 우리 음과 같은 "재" 인데 중국인들이 "재" 발음이 되지 않아 "짜이", 見도 견 발음이 되질 않아 "찌엔" ... 즉 우리 원 발음을 중국인들이 비슷하게 흉내 냈는가 아니면 함경도 경상도 사투리와 같은 사투리에 불과 한가?
2) 그 반대 경우이다. "짜이" 가 우리에게는 그대로 발음이 잘 되지 안으니 " 재" 로, '지엔" 이 "견" 으로 ...
여기서 1)번 중국인들은 다른말에서 '호' 나 '재' 나 '견' 발음이 나오므로 그들이 그 발음이 되지 안는다는것은 말이 되질 안는다.
그러나 2) 우리말에는 '하오' 정도는 몰라도 '짜이' 나 '찌엔' 같은 발음은 함경도건 경상도건 없다.
* 그런데 이런건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말에 " 달 이 밝다" 라고 하지만 " 月이 밝다는 말은 없다. 달이 밝다는 말을 한문으로 하려면 明月 이라고 해야 한다. 그건데 明月의 중국 발음은 "멩 위엘 " 이다.
여기서 우선 月 발음만 보자.
한자는 소리글이 아닌 뜻글이다 중국인들은 달을 보고 '위엘' 이라 했다. 그리고 글자는月자를 쓴다. 이 월자를 우리가 들여다 쓰자니 '위엘' 이라는 말은 우리 말에 없어 발음이 되질 안는다. 그래서 '월' 로 발음하게 된것이다.
다음 우리 말에 '사람이 많다'라고는 하지만 " 사람이 多라" 하지는 안는다. 이것을 한문으로 하자면 人多 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도 우선 多의 발음을 보자. 중국인들은 이것을 '뚜어', 와 '뚜아' 의 중간음 즉 '어' 와 '아'의 중간음이 발음된다. 이런말도 우리 말에는 없기 때문에 '똬'로 하려 했지만 이 발음도 되지 안아 '다' 로 한는 것이다.
이것도 반대라고 생각해 보자, 중국인들이 우리 한자르 가져 갔다고 치자.
즉 한자와 그 발음이 우리것 이어서 우리는 달을 '달' 과 '月' 이라고 두 가지 말을 썻으며 그중 중국인들은 '달' 은 가저 가지 안고 이 '월' 만 가져가가 그들 혀로 '월' 발음이 되지 안으니 '위엘' 이라고 했을 것이며 우리말 '많다'와 多 둘중에서 '많다'는 버리고 多 만 들여다가 '다' 발음이 되질 안으니 '뚜어' 라고 했을것 같은가?
도대체 우리말의 구성요소와 중국어의 구성요소를 전연 공부해 본일이 없는 사람들이 한자가 우리 글자라 하면서 천부경 해석을 한자와 음양오행서만 풀려 하고 이 방 이론을 공격하니 이 한자가 우리 글자가 아니라는 이론을 너무 상세히 쓴다.
또 말한다.
우리에게도 얼마전 유행했던 중국 영화의 주제곡 티엔미미(甛蜜密)에서 好像花兒開在春風里의 발음은 우리 한자 발음으로는 " 호상화아개재첨풍리" 인데 중국 발음은 " 하우쇙화러 가이짜이 텬풍리" (이것도 대강 우리글자로 쓴것이지 원음은 한글로 표시 못함)이며 우리의 아리랑과 같이 중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月亮代表我的心도 우리의 발음은 '월량대표아적심' 이지만 그들의 발음은 "위엘량따오비에워디씬" 이다. 이도 우리 한글로 중국어를 표현 하기에는 부정확 하므로 대강 적은 것이다.
이게 과연 우리 음인가?
우리가 고대에서 중국인들과 뒤엉켜 살았을때 우리 혀도 그들과 같이 이렇게도 돌아갔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분명 아닌 증거는 우리 뿌리말에서 이따위 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자가 우리 글자라 치고 우리의 한자음 " 호상화아개춘풍리"를그들이 가져다가 " 하우쇙화러 가이짜이 텬충리" 로 고쳤단 말인가?
다음 '호상화아개춘풍리' 를 우리 한자 우리 발음이라 하더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글세대나 옛 평민은 그만두고 한학자들 까지도 말로 해서는 모르고 한자로 써 놓고도 번역을 해야 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들식 대로 발음하면 번역이고 뭐고 할것도 없이 문맹자 라도 다 알아 듣는다.
이것이 과연 우리 말이고 글자인가?
또 여기서도 위에 말한 어순 문제가 발생한다.
즉 한자는 글자 하나 하나 이고 한문은 그 글자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여시서 甛蜜密는 우리 말로 해석하면 " 꿀같이 달콤해" 이다 그러나 한자 글자순 대로 한다면 " 달콤해 꿀" 이다.月亮代表我的心는 이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 달빛이 내마음을 대표 한다" 인데 한자 순서대로 하면 " 달빛이 대표한다. 내말음" 이다.
즉 위에 써진 문장들은 한문이고 한문은 한자의 연결 이며 그 한문은 우리 맘대로 고칠수도 없는 고정화된 하나의 문법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자를 우리글 이라고 가정하고 우리 글자인 한자를 가지고 우리 말을 만들때 왜 우리 자신은 몰라도 중국인이나 알수있는 어법 등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왜 우리는 한문을 중국인들처럼 그대로 읽지 못하고 영어 번역학듯 번역해야만 우리 말이 된단 말인가?
참으로 이런 문제를 전연 생각 하지 안은자들이 한문이 우리 글자라고 우기는데 속이 터진다.
따라서 한자는 중국사람들이 그들의 말과 어순에 맞게 발전시킨 글자이고 우리는 그 한자들을 들여다가 우리 발음에 맞게 고치고 번역하여 쓰는 것이니 이것이 왜 우리 글자인가?
이렇게 우리가 중국 발음을 고처 제멋대로 고처 발음하자 이곳 저곳에서 한자의 발음이 다 달라지게 되어 각자가 만든 한자 발음으로 하면 서로 헷갈리어 서로 상통하기가 힘이 들었다.
* 여기서 충령대군 이었던 세종은 위로 양녕대군과 효령 대군이 있으므로 자신이 왕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고 따라서 왕이 되어 국가를 통치한 王道 보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이 한자 발음들을 중국음 (당시 연경 - 북경)그대로 통일 시키고 싶어 중국 발음사전인 洪武正韻을 참고 한다.
그러나 한자로 설명된 이 사전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세종은 녹음기 같이 정확한 발음 사전을 만들 생각을 한다.
왕세자가 아니니 마음대로 외부 출입을 할수 있었던 세종은 상것들이 무먹구구 식으로 쓰는 언문에 주목 한다.
세종때 언문이 있었다는 증거는 다음 최만리 상소문을 보자.
* 옛 글자가 있었다는 상소문 기록
* 언문은 다 옛자를 근본으로 했음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히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 전 조정(고려?)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借使諺文自前朝有)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 이옵니다.
(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 속용문자(俗用文字) -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 韻解)에 의하면 동방에는 예로부터 속용문자가 있었는데 그 수는 가추어 지지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었다.
이렇게 상것들이 무먹구구 식으로 쓰는 언문을 유심히 관찰한 세종은 깜짝 놀라 이것만 가지고 그 조합법만 잘 마추면 중국인들의 정확한 한자 발음은 물론 우리의 모든말 까지 정확히 적어 한자를 몰라 고생하는 백성들의 고생도 덜어줄것 같았다.
세종은 그후 왕이 되고서도 이 한글제작에 몰두 한다. (단 아들 몇명을 조수로 하여)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어 반포하고 바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우리 혀로는 돌아가지 안아 페기된 발음들로 책을 만들고 여기에 더하여 그간 자기가 그렇게 만들고 싶었던 정확한 중국 발음 사전까지 만들기 위해 신숙주 성삼문등을 요동에 수도 없이 보내어 신숙주 성상문의 엉덩이제는 말을 타느라고 생긴 굳은살 까지 박혔다.
왜 요동에 보냈는가는 거기에는 중국에서 귀양온 황찬 이란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발음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신숙주 등은 그의 한자발음을 새로 만든 한글로 적어 왔고 드디어 훈민정음 반포후 4 년만에 세종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던 한자 발음 기호책을 다시 만드니 그 이름은 동국정운(東國正韻)이다.
이 통일된 중국 북경음 괴상한 음을 다시 우리 입맛에 맞게 고친것이 현재 우리가 쓰는 한자음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자가 우리 글자이고 그 한자 발음은 우리 발음 그 대로 라면 세종이 뭣 때문에 그 한자의 정확한 발음기호 책을 만들려고 그 고생을 했겠는가?
만약 한자가 우리 글자였다면 오히려 중국인들이 우리 발음을 배우려고 애썼어야 할것 아닌가?
따라서 한자가 우리가 만들었으니 우리글자라고 주장 하고 여기에서 비슷한 한자음과 우리말을 연구하는 모 언어 연구소의 이론들은 마치 미국 자동차 박람회에 가서 " 달구지는 우리가 먼저 만들었으니 자동차의 원조도 우리다" 하는 말과 같다.
이 필자의 이론에 아직도 이의가 있다면 한번 독자 토론마당에 반론을 펴 보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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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양오행설은 우리것이 아니니 음양오행설로 천부경을 풀수는 없다.
한자와 음양오행설은 우리것이 아니라 중국것이니 하느님 교훈 천부경을 풀때는 순 우리말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인데 한자와 음양오행설이 모두 우리것이니 그걸로 천부경을 풀어야 한다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 많아 여기서는 음양오행설이 우리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공위성의 전파를 타는 TV 도 보고 휴대폰을 쓰는 세상에 살면서도 신비한것만 쫓아 다닌다.
즉 별들의 운행이 궁굼하면 천문대로 가는게 아니라 점성술을 보며 천둥번개가 치면 피뢰침을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뭔 귀신에게 기도를 하고 풍랑이 심하면 기상관측을 잘 하는게 아니라 심청이를 물에 던진것을 생각하고 하늘을 날고 싶으면 새들이 나는 원리는 생각새 보지는 안고 요술램프의 나르는 담요를 생각한다.
이와같이 음양오행의 원리가 되는 역의 원리로 무엇인가 풀려고 한다는 것은 신비한것만 동경하는 사람들의 호기심 이라고 보므로 이론은 받아 드릴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음양오행설이 그렇게 정확하다면 그걸로 로또 복권이나 사 보라고 하는것이다.
이 역등 음양오행설은 과학이 뭔지도 몰랐던 원시에서 신비한 우주 운행을 점처 보려던 하나의 수단이었고 이는 잠재의식의 작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맞는것도 사실 이다.
이 역의 창시자는 하느님 보다 천년이나 뒤진 전설적 인물 복희씨 ( 이걸 가지고 중국인과 한국인은 서로 자기 조상이라고 싸우고 있음) 에 의하여 팔괘가 시작되었다고 하나 은나라때 팔괘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도 지어낸 이야기 라는것이 저의 연구결과 이기도 하지만 역에 대해서 30년간 연구한 서울대 철학박사 金敬琢의 '易' 해석이란 책에 나온다.( 明文堂 간)
또 그의 책을 보면 그 뒤몇 천년이 지나 문왕과 공자가 이를 철저히 연구 발전시켜 十翼은 공자가 붙인것이고 그후 이 역들은 중국인들이 더욱 연구 발전 시켰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이 易은 우리가 처음 만들었다 가정 하더라도 이미 우리것이 아닌 중국 사람들이 연구 발전 시킨것이며(문왕, 공자가 동이인 이라 하더라도 이는 이미 중국인이니...) 이를 우리것 이라고 주장 한다면 이는 비유 하건대 서양 자동차 전시장에 가서 달구지는 처음 우리가 만들었으니 자동차의 원조는 우리다" 하는것과 같다.
우리는 그간 음양의 태극이 아닌 천지인의 삼태극을 써 왔으며 그 근거는 이방 표지판 책 뒷면아래 제시 했드시 신라시대 보검, 기왓장 등 수없이 많으나 내가 알기로 이조전 태극 문양유물은 아직 발견 못했는데 어딘가에 한두개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이 음양오행설이 우리에게 들어온것은 이조초 정도전의 성리학이며 이것을 더욱 발전시키어 우리에게 익숙하게 한 사람은 퇴계 이황의 聖學十圖 이다.
그뒤 우리 선비들은 이 이론이 아닌면 말을 못했고 드디어 우리의 태극기 까지 만들어 지는데 이 태극기의 역사가 비극적 이다.
고종황제는 일본에 의하여 개항이 되고 배가 출입을 하게 되자 일본인들은 배에 그나라 국기를 달게 했고 고종은 신하들과 상의 하여 처음에는 태극만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멀리서 보면 우리 일장기와 흡사하니 고치라 하였고 이를 가지고 고심하던 고종과 신학들은 그기에 팔괘를 그려 넣었다.
그러나 이 팔괘는 너무 복잡 하므로 지금과 같은 사괘가 된것인데 이것도 일본이 그만하면 됬다고 싸인을 해 줘서 된것이다.
그러나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태극은 아직까지 점서로 써진일도없고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도 음전자 양성자 중성자등 존재의 기본 사상을 말하는데만 쓰여지는데 이는 그간 우리 조상들이 홍살문이나 북 그리고 심지어 부채와 요즘 지하철역 환승역도 이 삼태극을 쓰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잠재적으로 삼태극을 써 왔다는 증거가 아닌가?
다음 그림은 필자의 음양오행설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쓰여진것은 이조 후기라는 말에 반론을 단 그림들인데 한번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http://www.songpr.com/flag1.htm
치우기 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누가 그렸는지는 몰라도 은나라 때에도 팔괘의 기록이 없는데 그 천년전 치우때는 혹 팔괘가 있었다 하더라도 음양 태극은 없던 시절 이다.
이 원리들은 누차 말했드시 하는님 고손자의 고손자 그리고 또 그 고손자 때에도 없었던 이론인데 하느님이 과연 그 고손자를 위하여 음양오행설로 천부경을 말했을까 하는점 이다.
이상으로 지금까지 천부경 해석들을 써 왔기문에 필자는 우리 천부경과 음양오행 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반론자가 제시한 중국의 문양들
중국의 태극+팔괘문양
한국은 고대로 부터 3태극만 썼다는 필자의 이론에 반론을 제기한 그림
회암사를 비롯한 여러 태극문양
사진 좌측은 중국 산동성 백수현 사관촌 창성묘(史官村 倉聖廟) 에 있는 창성조적서비 (倉聖鳥跡書碑) 비문으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글자인 한자의 창시조 창힐(倉詰)이 한자 만드는 과정을 적은 글자로 알고 국보와 같이 귀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필자가 해독해 본 결과에 의하면 이는 일종의 견문록 이다.
즉 창힐은 신지에게서 6년간이나 글자 만드는 법을 배운자로 한자 만드는 과정을 적은것이 아니라 환웅이 배달(밝달 >培達)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그것을 기록한 일종의 견문록 으로 중국인들 한테가 아니라 우리 한민족 에게 국보가 되는 매우 중요한 비문 이다. ( 이 글씨의 해독은 이방 39번 신지녹도전자로 쓴 평양 법수교 아래 고천문 해독18.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