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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ry eyes
추적추적 비가 땅을 적신다. 그 위를 붉게 핀 장미꽃들이 이리저리 나뒹굴며 비를 맞고 있다. 물론 나도 장미들과 함께 내리는 비에 흠뻑 취해있다. 이 비에 취해 모두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 비참한 기억은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지워지지 않고 같이 하게 되겠지. 하아, 부족한 나를 탓해야 할까? 아니면 무심하신 하늘을 탓해야 할까?
“젠장…….”
아, 지랄 맞게도 날씨와 기분이 딱 맞아떨어진다.
- 삐빅, 삐빅, 삐빅, 삐빅
기계적인 시계 알람 음이 도서관 안을 울리었다. 나는 흘끔 도서관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보고 말했다.
“벌써 4시인가… 슬슬 가봐야겠네.”
아직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도서관이 문을 열자마자 와서 공부했으니 꽤나 오래했다.
몸도 찌뿌드드하니 이곳저곳 녹이 슬은 것 같고 밥도 못 먹고 죽 앉아서 책이랑 씨름을 했으니 이제 가봐도 되겠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크게 기지개를 펴고 나서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이 4시 40분쯤에 있으니 조금 뛰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될 것 같았다. 나는 혹시라도 지하철을 놓칠까봐 급하게 뛰어나왔다. 시간을 맞추며 뛰고 걷기를 30여 분. 지하철역이 눈에 들어왔다. 늦을까봐 많이 뛰어서 그런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5분 정도가 남았으니 표를 뽑고 천천히 걸어가도 늦지 않을 터. 지레짐작한 나는 여유 있게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거 있지 않는가, 머피의 법칙이라고.
- 삐리리릭, 이제 곧 지하철이 도착하겠사오니…
손목의 은색 전자시계를 보니 4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젠장맞을. 꼭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재수 없게 이러니. 여유롭게 걸어오다가 들려오는 방송에 개찰구에 표를 던져 넣다시피 한 후에 뭣 빠져라 하고 뛰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머피의 법칙은 나를 피해주지 않았다. 볼썽사납게 구석을 돌다가 한 여인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그것도 머리로 말이다.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는 얼른 일어서서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미처 피하질 못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 쪽팔리긴 했지만 상대 분은 어떻겠는가?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일 테지. 내 덩치도 있거니와 내 머리가 여간 단단한 게 아닌데 많이 아플 듯싶었다.
“아야야야, 아니에요. 이크 , 늦겠다.”
그녀는 마주 고개를 숙인다음 바람처럼 지나갔다. 비록 트레이닝 복 차림이었지만 흩날리는 생머리와 아름다운 뒤태, 한 방에 빠져 버렸달까.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딱 느낌이 왔다.
“아, 저기…….”
급하게 부르려고 했지만 어느새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린 그녀. 왠지 모를 아쉬움이 마음속에 가득했다.
- 삐리리릭-
“이런! 이럴 때가 아닌… 어?”
지하철이 도착하는 소리에 뛰어가려다가 눈에 띈 핸드폰. 핑크색의 앙증맞게 생긴 그 것은 그녀의 물건이 틀림없다. 아까 나와 부딪쳤을 때 떨어뜨린 듯 하다. 잽싸게 주워들고 나서 닫히려는 지하철 문을 비집고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이미 타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음하하- 이름모를 그녀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어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았다.
“룰루루루.”
나는 고개를 돌려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최근에 산 MP3 플레이어를 꺼내어 이어폰을 귀에 꼽고 노래를 틀었다. 날카로운 일렉기타의 음률에 맞춰서 발을 굴렀다. 오늘 오후에 아마추어 테니스 경기가 있으니 몸을 풀어야 하지만 집에 들렀다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오는 데만도 시간이 다 될 것 같으니 이렇게라도 풀어줘야겠다.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L'Arc~en~Ciel의 기타소리는 정말이지 전율을 일으켰다. 그렇게 음악을 들으면서 몸을 풀고 있는 사이 시간은 5시를 넘겼고, 지하철은 집 앞의 역에 도착했다. 얼른 내려서 집에 들러서 라켓을 챙겼다. 그리고 갈아입을 옷가지와 수건등을 가방에 넣고 택시를 잡았다. 지하철이 훨씬 싸긴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져버렸다.
“아저씨, 시민공원 테니스 장으로 가주세요.”
“테니스 경기 나가시나봐요?”
“아, 네. 하핫. 그런 셈이죠.”
미터기가 불안한 수치까지 올라가도록 택시기사 분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도착했다. 시간은 6시 15분 전.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나이스 타이밍. 얼른 뛰어가서 접수하면 첫 경기 시간은 얼추 맞출 듯 했다. 오늘은 왜 이리 뛰어만 다니는지… 얼른 참가 접수를 끝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들어갔다. 제 1 코트 옆에 있는 남자 탈의실은 시설이 허술하기 그지 없어서 늘 올때마다 불만이다. 입고있던 후드티와 카고바지를 벗어던지고 테니스 복으로 갈아입을 때 이었다. 가방 속에서 조그마한 진동소리가 느껴졌다.
“아앗! 설마!”
잽싸게 상의를 내리고 가방을 뒤졌다. 역시나 이름모를 그녀의 핸드폰이 진원지였다. 나는 조심스레 폴더를 열어젖히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조신하고 차분한 목소리. 아, 다시 들어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목소리이다. 나는 주체하지 못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아, 네.
내가 대답을 하자 그녀의 불안한 듯한, 조금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곧바로 화답했다.
- 혹시 제 핸드폰을 주우셨나요?
- 예,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지금 어디신가요?
- 저, 지금 시민공원 테니스 경기장인데……. 지금 그 것이 없어서 친구들한테 경기나간다고 연락두 못하구. 지금 돌려주실 수 있으세요?
……. 시민공원? 테니스 경기장? 설마… 아니겠지? 오, 세상에나! 내가 알기로는 테니스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은 지금 이 곳 밖에 없다. 이건 신이 주신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호, 혹시 경기에 나가시나요?
- 아, 네에. 그 쪽분도?
- 예. 제 1코트에서 6시 20분 경기입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성함좀 알 수 있을까요?
- 네? 아, 네. 정미유라고 해요.
- 저는 김시혁이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제 곧 시합이라서 끝나고 나서야 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아, 나는 천재가 아닐까 한다. 단번에 이름을 따내다니! 그녀, 아니 미유 양은 머뭇머뭇 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 네. 제가 그 다음 경기라서 1 코트장 앞에 있어요. 지금 친구 핸드폰이라서요. 이만 끊어야 할 듯 싶은데, 다시 전화드릴게요.
- 예, 알겠습니다.
이얍! 오늘 어째 안좋은 일만 계속 있었더니 신께서 내게 진짜로 한번 기회를 주시려나보다. 나는 내 라켓 K-Factor us 의 거트를 점검하면서 탈의실 밖으로 나섰다. 마침 석양이 아름답게 일그러지고 있다. 분위기를 한껏 내면서 멋지게 승리를 장식한다면 필시 내게 좋은 인상을 가지리라. 아자, 힘내자! 필승을 다짐하며 테니스 화를 고쳐 신고 코트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었다.
“Match Point! to serivce 김 현!”
5:1 에 40:15 매치 포인트 상황.
이번에 리턴 샷이 꽂혀 들어간다면 내 승리로 경기가 끝날 것이다. 토스를 하는 상대의 긴장 된 숨소리가 역력하게 느껴진다.
“후웁,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모래바닥을 쓸고지나가 네트를 넘어서 서브를 넣으려는 상대방의 라켓에 시선이 꽂힌다.
‘하나… 둘… 셋!’
느린 공, 느린 공, 좀 더 느린 공. 나를 향해서 날아오는 공이 보인다. 상대의 라켓을 떠난 공이 가물가물 눈에 잡힌다. 찰나를 잡는다는 것이 이런느낌일까? 1초를 수천 번 쪼갠 슬라이드 영상을 보고 있는 기분. 시야에 선하게 들어오는 공의 궤적을 쫓아서 그대로 발을 옮겼다.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튀어오르는 공을 밀어내듯이 크로스 라이징 샷. 손끝부터 짜릿한 감각이 타고 들어와서 온 몸을 적시었다. 들어갔다! 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꽉 메웠다. 예상대로 깔끔하게 스위트 스폿을 맞고 넘어간 공은 상대방의 반대 쪽을 향해 머리를 드밀려는 참이었다.
“으헉?”
상대 선수는 자신의 강한 서브를 앞으로 달려나와서 깔끔하게 리턴 샷을 칠 수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네트로 대쉬를 하던 참이라 반박자 빠르게 쳐낸 라이징 샷에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공은 그대로 라인을 맞고 경기장 밖으로 떨어졌다.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그려진다. 완벽하게 상대방을 스탠딩 상태로 내몰고 매치 포인트를 가져가다니. 1 회전부터 승승장구다. 주변 관객들이 저건 말도 안돼! 라고 외치는 것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Game Set! Game won by 김 시혁! 양 선수 중앙으로!”
“예압!”
나는 손을 하늘을 향해 번쩍 내지르고 풀 죽은 상대 선수와 악수를 하고나서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상대는 아는지 모르는지 본체만체 얼른 뛰쳐나가 버렸다.
‘후훗, 우승자에게 졌다고 생각하라구. 그리 분하지는 않을테니.’
맞다, 그녀의 경기가 바로 내 다음 경기라고 했으니 필시 보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아자자잡, 기분 좋구나! 응? 누가 내 머리를…’
“Yo! 시혁아, 너 1 차전부터 너무 상대방을 짓밟는 거 아니냐?”
어느 새 내 뒤에 섰던걸까. 187cm의 장신에 75kg.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리치 길이. 테니스를 하는데 있어서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신이 내린 몸 지니고 있는 이 사람. 우리 학교 테니스 부의 주장이자 내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우혁 선배! 나와 같은 김씨에 혁자 돌림이라 형제라고 기쁜 오해도 많이 받았다.
“형은 벌써 끝났나보네-?”
내 질문에 형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머리를 산발이 되도록 문질러대고는 땀을 닦으라며 수건을 건네주었다.
“뭐, 내 실력은 이미 고교 수준에서는 자타공인 최강 클래스 아니냐 인마? 푸하하.”
“푸부부부. 에이, 형 맨날 나 한테 지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뭐야? 인마? 푸하하하, 너 대회 끝나면 보자?”
“헹, 두고 보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하나도 없네요. 베-.”
‘아무튼 내 강렬한 포스를 보여줬으니 좋은 인상이 심어졌겠지?’
나는 얼른 네트 옆에 놓아두었던 내 가방을 들쳐메고 서둘러 우혁 형과 함께 코트를 벗어났다.
“여기 어디 계실텐데-?”
“뭘 자꾸 두리번 거리냐? 뭐 찾는 거 라도 있어?”
“그런 게 있어요-. 선배님은 신경 꺼.주.세.요! 알겠죠?”
두리번- 두리번- 사방 온 천지를 뒤져보아도 내가 상상하던 그녀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도대체 어디있는거지?
그때 였다.
“꺅, 경기 잘봤어요. 여기에요- 여기-!”
얼라? 뒤 인가! 하고 고개를 팍 돌리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 할 수밖에 없었다. 오 신이시여!
첫댓글 오, 뒤에 계신분이 정미유양인가보군요.^^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흥미진진해지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