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역사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2천여년간 많은 왕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을 제외하면 그 이전 왕들의 무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신라 천년 고도인 경주에서 지금까지 신라금관이 무려 다섯 개나 발굴됐지만 주인공을 알 수 없어 학술용어로 천마총이니 금관총이니 하고 있을 뿐이다.
무덤 주인공의 이름이 전해 내려오거나 무덤 앞에 비석이 있어서 알려진 신라 임금의 무덤은 불과 몇 기 되지 않는다.
백제는 초대 온조왕에서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무려 30명의 왕이 있었지만 왕릉의 주인이 밝혀진 것은 제25대 무령왕이 처음이자 현재까지론 마지막이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배우고 사회에 나온 뒤 지금까지 고고학과 관련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내게 가장 큰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무령왕릉 발굴 조사다.
참여는 무엇보다 큰 행운이고 감격스런 일이었다. 두 번 다시 발굴조사를 할 수 없는 왕릉 발굴조사에 말단 실무자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고 감격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일이 우리 고고발굴사에 있어 큰 불행이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발굴작업이 허물을 씻을 수 없을 정도의 졸속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1년 우연히 발견됐다. 공주 송산리의 구릉 위에 모여 있는 백제시대 무덤 중에는 무덤 내부 벽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소위 송산리 제6호분이 있다.
이 무덤 내부 벽면은 여름이면 습기가 차 물이 흘러내리곤 했다.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이 습기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고 이를 위해 무덤 뒤편을 가로지르는 배수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해 7월 5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날이 바로 작업 인부에 의해 무령왕릉이 발견된 날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초기 한성백제가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잡혀 죽임을 당한 뒤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했다. 백제 역사에서 가장 참담했던 이른바 웅진백제 시기, 백제 증흥의 기틀을 잡은 임금이 바로 무령왕이다.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던 백제의 왕릉이 실로 1천4백50여년의 잠을 깨고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우리나라 대학에 고고학과가 마련되고 10년 만의 일이었다. 고고학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는 61년에 와서야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고 65년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국립박물관이나 문화재관리국에 몇몇이 근무하고 있었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내가 대학 졸업과 군복무를 마치고 69년 문화재관리국에 몸담은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그 해 7월 6일 갑자기 공주 송산리 고분발굴 현장으로 가라는 출장명령을 받았다. 현장은 원인도 모르는 채 서울에서 내려온 언론사 기자들과 사진기자들, 지방지 기자들,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경찰관들, 그리고 조사대원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백제무덤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주에서 전돌로 축조된 무덤이 온전하게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우선 '왕릉일 것'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사람들은 제일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간 김원룡 중앙박물관장과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 나와 자초지종을 확인해 주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무덤 밖으로 나와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는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이라고 발표했다.
왕릉이 발견됐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이 어떻게 된 것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무덤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아우성이었고 사진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먼저 내부를 촬영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다. 마치 무령왕이 환생한 듯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조사단에서 부랴부랴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우선 TV기자와 사진기자의 촬영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또한 먼저 무덤 안에 들어가 촬영하고자 하는 각자의 욕심에 아수라장 일보 직전까지 갔다. 겨우 내부를 조명할 수 있는 기자재를 갖춘 방송기자를 먼저 들여보내는 선에서 양해가 이뤄졌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전에 조사요원보다 기자가 먼저 들어가는 주객이 전도되는 꼴이 됐다. 그 결과 무덤 내부의 널 길에서 무령왕과 왕비의 관을 지키고 있는 돌짐승의 머리에 꽂혀 있는 철제 장식이 부러지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청동숟가락 하나가 밟혀 부러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으나 모두들 홀렸는지 정신이 없어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사진기자들의 촬영이 끝났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전해지고 세상의 이목이 온통 공주로 쏠리게 됐다. 더구나 방송이 나가고 나서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굴순서와 방법의 의논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한시바삐 내부조사를 끝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야간작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결국 하룻밤 사이에 발굴조사를 마쳤다.
세계적으로 고고학 발굴사에 남을 수 있는 왕릉 발굴을 이렇게 해서 하룻밤 사이에, 어처구니없이 졸속으로 끝내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 발굴사에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됐다.
나의 스승이자 당시 발굴책임자였던 김원룡 선생은 무령왕릉 발굴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글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나는 사람들이 더 밀려오기 전에 어서 발굴을 끝내기로 작정해 밤을 새우며 발굴작업을 진행시켰다. 이 바람에 고분이 갖고 있던 많은 정보들을 나의 실수로 영원히 모르게 하고 만 것이다. 이 중요한 고분의 경우는 한해 이태가 걸리더라도 모든 정성과 신중을 다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어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무령왕릉에 대한 나의 실수는 비단 나 자신만의 아쉬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에 대한 큰 죄가 되고 말았다. "
하지만 이 일이 어디 발굴단장만의 책임뿐이겠는가. 나 역시 조사에 참가한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고, 그 후 지금까지 발굴조사 때마다 반성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내게 무령왕릉 발굴은 뜨거운 환희와 뼈저린 교훈을 동시에 경험케 했고, 그 후 줄곧 고고학 인생을 걷고 있는 내 마음속 첫째 자리에는 무령왕릉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