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시공을 초월하고
崔 長 洙
2004년 7월 20일부터 10월 1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경복궁시대를 성공적으로 마감하는 특별전이 있었다. 국보 78호와 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의 전시였다. 이 두 작품을 동시에 전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 전시를 본 감동을 글로 적기도 했는데, 벌써 5년이 지났다. 용산으로 옮겨 새로 출발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적인 박물관이 되었다. 영국에 본사를 둔 The Art Newspaper의 세계박물관 관객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아시아에서는 1위, 세계에서는 10위로 나타다 있다. 건물은 총 295,550,69m²의 넓은 대지 위에,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세워졌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건축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아름답게 설계한, 건물의 건평은 49,395,7m², 부속건물 9개동을 포함한 연건평은 137,542,56m²라고 한다. 규모면에서도 단연 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이 용산 이전 5주년과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G20 서울정상회의를 기념하기 위한 특별전을 열었다. 2010년 10월 21일부터 11월 21일까지 ‘고려불화대전(高麗佛畵大展)—700년만의 해후’가 그것이다.
고려불화는 몽골의 침공으로 강화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이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하는, 12세기 말쯤에서 고려말기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회의 부제를 ‘700년만의 해후’라고 단 것이다. 고려인들은 재앙이 닥칠 때마다 불화를 그려 바치고 난국 극복을 기원했다. 수많은 절마다 걸렸을 불화는 다 어디로 사라지고, 현존하는 것은 160점 정도밖에 안 된다. 그 중에서도 국내에 있는 것은 고작 20점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140점의 작품은 국제고아가 되어, 120점은 일본의 사찰과 박물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는 미국과 유럽에 흩어져 있다. 이 중에서 61점이 이번에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눈물겨운 700년만의 해후다.
전시회를 위해 동분서주한 박물관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세계에 흩어져 있는 44 곳에 달하는 작품 소장 기관과 소장자들을 찾아가서 전시회의 출품을 교섭했다고 한다. 그러나 쉽지가 않았다. 작품의 훼손과 돌려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대여를 꺼리는 곳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을 설득하는데 힘이 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가 하면 ‘불화도 자신의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을 것’이라면서, 전시회 출품 을 흔쾌히 승낙해 주는, 고마운 곳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도쿄에 있는 센소지<淺草寺>의 경우는 출품을 아예 거부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광식 박물관장이 직접 나서서, 작품의 존재여부만이라도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센조지 주지는 이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든지 작품을 내어오더라는 것이다. 최관장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향해 세 번 절한 다음, 무릎을 꿇고 합장을 했다. 센소지 주지는 말없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때 감동을 받았던지, 최관장이 귀국한 뒤 센조지로부터 <수월관음도>를 빌려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일본정부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화재 환수 분위기가 있는 우리나라이므로, 돌려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심정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 작품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결국 도쿄국립박물관의 보증 하에 <수월관음도>가 일시나마 고국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가슴 찐한 에피소드다.
▲ 한국 불교 미술의 대표작,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 온화한 미소로 지친 영혼을 치유하는 6세기 후반 삼국시대 작품
흩어져 있는 고려불화를 한자리에 모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박물관 관계자들의 2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국내외를 통하여 최대 규모의 고려불화전을 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불화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아마도 다시는 없을지 모른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있던 불화들이 돌아오기는 했다. 그러나 전시가 끝나면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 기약 없는 이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손을 떠나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하여 한없는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고려불화는 불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민족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유출 문화재의 환수, 앞으로의 문화재 관리 등 고민하고 챙겨야 할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다. 이번 열리는 G20서울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 정상들의 리셉션과 업무만찬 장소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잘된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각국 정상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는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국가의 브랜드 파워인 것이다.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나라국립박물관, 규슈국립박물관 등에서 27점,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보스턴미술관, 프랑스의 기메박물관과 독일의 동아시아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티주박물관 등 동유럽에서 15점, 국내 호암미술관에서 19점 등 고려불화 61점과 중국 및 일본 불화 20점, 조선 전기 불화 5점, 고려시대 불상과 공예품 22점 등 모두 108점이다. 그 중에서 상당수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기획전시실 앞에는 관람객이 줄을 잇고 있었다. 젊은 비구니스님이 단체로 관람하고 있어 이채로웠다. 외국인도 많이 섞여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유리벽에 ‘아름다움은 시공을 초월하고, 염원은 생사를 뛰어넘는다.’라고 크게 써 있었다. 700년만의 해후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왕실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화의 제작도 성행했다. 고려불화는 고려인들의 높은 미적 안목과 화려하게 꽃피었던 불교문화, 그리고 깊은 신심에서 제작된 것이다. 원색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채와 화사한 금물의 문양, 섬세하고 단아한 형태, 흐르는 듯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선묘(線描) 등은 고려인이 독창적으로 창조한 미의 세계였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예술품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벽화 형식의 불화도 많이 제작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두루마리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본 전시에 앞서 ‘화면에 펼친 진리의 세계’라는 프롤로그가 있었다. 고려불화의 제작기법과 사용된 안료(顔料)에 대한 설명이었다. 고려불화는 대부분 비단 바탕 위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를 사용하여 제작했다. 제작기법의 형식적 특징은 배채법(背彩法)이다. 배채법이란 그림을 그릴 때, 종이나 비단의 뒷면에 물감을 칠해서 색깔이 앞면으로 우러나오게 한 뒤에, 앞면에서 음영과 채색을 보완하는 기법이다. 그리고 뒷면에는 배접이라 하여 종이를 덧대어 붙인다. 그러면 두껍게 칠한 안료가 떨어져 나가지 않고, 색깔의 변화도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색채가 매우 아름답고 정교하다는 학예관의 설명이었다.
▲국보 78호 ▲국보 83호 ▲ 국보 78호(왼쪽) 반가사유상은 화려하다. 장식에 신경을 쓴 반면 몸통은 직선으로 흐르고 손발은 다소 뻣뻣하다. 반면 국보 83호(오른쪽) 반가사유상은 장식성이 확연하게 사라졌다. 대신 가슴을 통통하게 표현하는 등 생동감이 있다. 손가락도 78호에 비해 작고 멋을 부린 흔적이 있다. 특히 명상 중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듯하여 인상적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주로 쓰인 적색, 녹색, 청색의 안료는 각각 주사(朱沙), 석록(石綠), 석청(石靑)이라는 광석을 원료로 한다. 원석을 가루로 낸 뒤, 거기에 잘 접착할 수 있도록 맑은 아교 물을 부어서 썼다. 이밖에 금가루를 개어서 만드는 금니(金泥)도 많이 사용했다. 원석과 광석 가루, 그리고 아교가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은 5부로 나누어 주제별로 전시하고 있었다. 제1부의 주제는 ‘깨달음의 존재, 부처’였다. 불화 가운데서 부처를 주존(主尊)으로 그린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고려불화에는 비로자나불, 미륵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 등 다양한 부처가 등장한다. 대체로 화엄종은 비로자나불, 법상종은 미륵불, 천태종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고 있어, 각 종파에서는 그에 맞는 주존을 주로 봉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사찰과 스님들은 특정 종파의 경전이나 신앙대상만을 엄격히 고수하지는 않았다. 이는 불전(佛殿)이나 불상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는 정토신앙이 성행했으므로,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가 많았다. 그 가운데서 호암미술관 소장인 국보 제218호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미타삼존도>는 중생을 보살펴 극락으로 인도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고, 보통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가 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지장보살이 세지보살 대신으로 그려져 있었다. 아미타불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빛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죽은 자를 감싸면서, 그가 아미타불에 의해 극락으로 곧 인도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은 오른손에 구슬을 들고 있고, 관음보살은 허리를 굽혀 극락왕생할 사람이 타고 갈 연꽃대좌를 내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그림을 <아미타 내영도(來迎圖)>로 보기도 한다.
제2부의 주제는 ‘중생의 구제자, 보살’이었다.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도들에게 가장 친근한 존재인 보살도를 전시한 것이다. 보살은 보통 부처를 모시는 존재로서 부처와 함께 그려지지만, 단독으로 그리기도 했다. 특히 관음보살도와 지장보살도가 유행했다. 현세에서의 안락과 사후세계에서의 평안함을 바라는 염원에서였을 것이다. 고려불화의 백미는, <수월관음도>다. 고려불화 중 <수월관음도>는 40점이나 되어 압도적으로 많다. 관음보살은 살아서는 질병과 재난을 막아주고, 죽어서는 극락정토로 인도해주는 보살이다.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入法戒品)’에 의하면 관음보살은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보타락가산에는 물이 흐르고 바위가 솟아 있으며,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수월관음도>는 관음보살이 이 보타락가산을 배경으로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방문을 받아, 살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선재동자는 53선지식을 두루 찾아가, 그때마다 새로운 눈을 뜨는 구도자다. 선재동자가 28번째로 찾아가 만나는 것이 관음보살보살이다.
힘들게 빌려온 일본 센소지의 소장품인 <수월관음도> 앞에는 관람객이 많이 몰려 있었다. 관음보살은 한없이 자상한 얼굴과 우아한 자태로 선재동자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선재동자는 공손히 합장을 하고 관음보살을 우러르고 있었다. 관음보살이 치유를 상징하는 버드나무가지를 들어 늘어뜨리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유려했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녹색의 물방울 모양의 광배(光背) 안에서, 관음보살은 물속에서 솟아나온 연화좌를 딛고 서 있었다. 그래서 ‘물방울관음’이라고도 한다. 중생을 향한 자비심이 가득한 눈빛, 격자의 직조형태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후, 그 위에 금물로 꽃문양을 새긴 투명한 사라(紗羅, 베일)가 발끝까지 뒤덮고 있었다. 해동치승혜허필(海東癡僧慧虛筆)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이 <수월관음도>를 일본에서는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라고 부르며, 일반에게는 물론, 학자들의 연구 목적에도 엄격한 제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관음보살도 옆에는 실물인 금강저(金剛杵), 금강령(金剛鈴), 정병(淨甁) 등의 불구(佛具)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92호인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이 있었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는 물병이지만, 불화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지물(持物)로 나타난다. 쭉 뻗은 긴 목에 중간 마디가 있고, 어깨에서 벌어졌다가 서서히 좁아진 몸체의 어깨 한 옆에, 마디가 짧은 주구(注口)가 달려 있었다. 문양은 어깨와 저부에 여의두문대(如意頭紋帶)를 돌리고, 그 사이에 갈대가 우거진 물가에 늘어진 수양버들이 있고, 그 아래에 앉아 있는 낚시꾼, 물 위의 고깃배와 오리, 하늘에는 기러기가 날고 있는 모습을 은입사로 나타내고 있었다. 은입사는 금속물의 표면에 문양의 형태를 따라 홈을 파고, 은선(銀線)을 감입하는 금속공예의 한 기법이다. 청동의 표면에는 청색의 녹이 고루 나와 있었다, 이것이 은입사의 은색과 대조되어 문양에 아름다움을 더해,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정병이며, 동시에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금속공예품이다.
일본 단잔진자<談山神社>가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도 화려한 금니와 고운 색채가잘 살아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보타락가산의 바위에 앉아, 법을 구하러 온 선재동자를 맞이하는 관음보살의 모습은 엄숙하고 단아했다. 투명한 사라와 염주가 바람에 휘날리듯 우아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내용을 그린 것은 다른 보살도와 같았다. 그런데 화면 하단에 나찰귀(羅刹鬼), 우산을 쓴 사람, 맹수와 독사에 쫓기는 사람, 도둑에게 화를 당하는 사람, 목에 칼이 걸린 사람,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 화마에 휩싸인 집, 배를 젓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법화경(法華經)>의 ‘관음보살보문품(觀音菩薩普門品)’의 ‘팔난(八難)’의 내용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월관음도>는 한 그림에 화엄경과 법화경의 내용을 융합해서 담고 있는 것이다. <관음보살도>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 수월 관음도. - 밝은 달빛 휘영청 찬란한 바다 물 위에 관음이 한 잎의 연꽃 위에 나타나 설법하는 모습 즉, 물가 벼랑 위에 밝은 달처럼 나타난 관음의 모습을 수월관음이라고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서술되어 있음.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는, 석존이 마가다국 빈비사라왕(頻毘裟羅王)의 왕비 위제희(韋提希)에게 극락정토의 16가지 장면을 보여주고 깨달음을 얻게 하여, 구제해 주었다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그린 불화다. ‘관경’은 <관무량수경>을 줄인 말이며, 변상도는 불교경전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린 그림이다. <원각경변상도(圓覺經變相圖)>를 비롯한 많은 변상도가 있다. 이 밖에 <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 <문수보살도(文殊菩薩圖)>, <보현보살도(普賢菩薩圖)>,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저승세계의 재판관인 10대 대왕을 그린 <시왕도(十王圖)>등이 있었다. 우리가 많이 듣고 있는 염라대왕은 다섯 번째의 대왕이다.
제3부의 주제는 ‘수행자의 모습, 나한(羅漢)’이었다. 나한은 불제자로서 수행 끝에 최고의 단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聖者)들이다. ‘아라한’을 줄여서 ‘나한’이라 한다. 이들은 보살과는 달리 실존인물들이다. 일체의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얻은 존자(尊者)들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수많은 나한이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은 16나한과 500나한이다. 고려시대에는 나한신앙이 성행하여 나한재(羅漢齋)가 자주 열렸고, 따라서 나한상과 나한도도 많이 제작되었다. 그 가운데서 고종22년(1235)과 고종23년에 그려진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가 전시되어 있었다. 전체는 500쪽의 연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부만이 전한다. 그 중에서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7점과 미국과 일본에서 대여 받은 3점을 더하여 10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작품이 제작된 시기는 현재 국보이며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재조고려대장경(再雕高麗大藏經)의 조조(雕造) 가 시작되는 1년 전이었다. 대몽항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였으므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염원을 담아 그렸을 것이다. 작품마다 국토태평(國土太平), 성수장천(聖壽長天)이라는 명문과 함께 김의인(金義仁)이라는 그린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제4부의 주제는 ‘이웃나라의 불보살’이었다. 고려불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중국과 일본의 불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당대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불교회화를 넓은 시야에서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제5부는 에필로그로 ‘전통의 계승’이었다. 고려불화의 전통이 조선시대에 어떻게 계승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불화의 제작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효령대군(孝寧大君), 문정왕후(文定王后) 등 왕실의 후원에 의해 고려불화의 맥이 조선 전기까지는 이어졌다. 조선전기 왕실의 발원 불화의 하나인 <사불회도(四佛會圖)>가 전시되어 있었다.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 미륵불의 네 부처가 설법하는 모습을 한 화면에 그린 독특한 불화다. 문정왕후가 1565년 회암사 중창 시에 발원한 불화 중의 하나인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도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상실에서 주요 작품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을 보고, 고려불화와 헤어져 전시장을 나왔다. 10월 28일에는 ‘동아시아 불교와 고려불화’를 주제로 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려, 국내 학자 4명과 외국 학자 4명의 논문발표가 있었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시공을 초월하고, 염원은 생사를 뛰어 넘는다.’가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현재 고려불화의 재현을 위해 힘쓰고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속초에 있는 계태사(啓太寺)의 사단법인 고려화불연구소(高麗畵佛硏究所)다. 이 절의 주지인 혜담(慧潭)스님은 평생을 고려불화의 재현에 힘쓰고 있는 인간문화재다. 그는 우리의 고려불화가 거의 외국에 있어, 나라 안의 사람들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고려불화를 재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30년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동안 주로 외국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안료와 제작기법은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써서, 300여점의 고려불화를 재현했다. 열 차례의 전시회를 가졌고, 포럼, 학술대회를 열어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리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비단에 그린 길이 4,7m, 폭 2,7m의 대형 <수월관음도>, 500명이 넘는 인물과 동식물이 복잡한 구도로 얽혀 있는 <오백나한도> 등이 있다. 스님은 불화 한 점을 그리려면, 불교 경전을 완전히 이해고 있어야 하고, 보는 사람 또한 불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관련 있는 경전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화는 일반 회화와는 달리, 불심에서 제작되어야 하고, 불심으로 보아야 참뜻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열린마당’에 섰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고려시대에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아래쪽으로 ‘거울못’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수면은 잔잔했다. 그 위에 저녁놀이 내려앉아 금물결을 이루며 파닥거리고 있었다. 청자정 주변에는 갈대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주변의 숲은 화려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속에 들어가면 석조물 정원에서 구절초와 억새를 거느리고 우뚝 서 있는 국보급 탑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미르폭포와 미르못에서는 자연생태를 보면서, 아름다운 가을 정취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뒤돌아보니 멀리 남산 위에 N탑이 바라보였다. 오늘은 고려 사람이 되어 안복(眼福)을 누린 하루였다.
작 가 명 - 최 장 수./ 장 르 - 수 필. 출 생 지 - 경상북도/ 출생년도 - 1930 년 대표작품 <훌륭한 사람>, <삶에는 머무름이 없다> [등단] 1990. 수필. 수필문학 <훌륭한 사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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