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이 할일도 없고 해서..타자 실력이나 늘리자 하구서 적었어요..다들..소지하고 계신 책일 테지만..그냥..읽어주세요..제가..카페 가입만 해놓구서..한일이..거의 없네요..
여성학자 박혜란의 세 아들이야기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중 둘째 아들..이동준 부분
이 세상에 아이들이 하는 말 한마디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얼굴이 벌게지는 부모처럼 못난이가 없다는 게 내 평소 지론인데, 순간적으로 내 자존심은 휴지처럼 구겨 져버렸다.
아니,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라지만 얘들이 지 어머니를 월로 보는 거야. 푼수 엄마니, 히뜩버뜩이니,펭귄표 엄마(막내 말에 의하면 나의 체형은 영락없는 펭귄형이란다.)니 하는 말은 그래도 애교스럽지, 이건 순 인격모독이잖아.
"이 녀석들아, 증거를 대봐. 니네 에미가 사기꾼, 거짓말쟁이라는 증거를 대봐."
나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분에 겨워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역시 둘째가 제일 먼저 나선다.
"저것 보세요. 어머니는 또 역사를 만드신다니까. 우리가 얘기하는 의미는 사기꾼,거짓말쟁이라는 뜻이 아니고 과장법을 말한 거 예요. 완전히 없는 이야기를 지어 내는게 아니라 있었던 일이긴 한데 그걸 어머니 나름으로 과장 해석하신다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쉽게 흥분하던 나는 늘 내몸을 빌려 태어난 아이들의 차분하다 못해 냉정하게까지 느껴지는 태도에 놀랄때가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에게는 두 손 들게 된다. 큰애나 막내는 그래도 엄마의 표정에 주의하면서 자기 주장을 하는 편인데, 둘째는 얄밉다 싶을 정도로 자기 페이스에 충실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어쩌다'한 번 잘못해도 그걸 빌미로 마치 우리가 옛날부터 항상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는 듯이 말씀하시잖아요" 16~17
"또 잊어먹었어. 이 돌대가리야."
아이는 제 뜻대로 익혀지지 않는 글자들이 답답한데다 여태까지 별로 들어 보지 못했던 엄마의 악쓰는 소리와 거친 태도에 질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연필을 잡았다. 그래도 또 틀렸다. 이번에는 군밤.
그런데 어느 새 둘째는 다섯 살밖에 안된 녀석이 저 혼자 글자를 깨쳐 신문을 줄줄 읽어내리고 있었다. 형을 야단치는 옆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54~57
둘째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했다. 나는 농담처럼 우리 집에서 제일 값이 많이 치인 아이는 둘째라고 하는데 그건 진담이다. 둘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피아노를 치고 싶어했기 때문에 역시 같은 동네 젊은 주부가 하는 피아노방에 보냈는데 어찌된 셈인지 꼬박 3년을 싫증 한 번 내지 않고 잘도 다녔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몇 달 동안 기타 학원을 다녔는데 아무도 안 나오는 시험 기간 동안에도 열심히 나가서 학원 강사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사회학과에 들어간 것도 결국 음악을 더 잘 하기 위해서라던 녀석은 대학교 4학년에 음반을 내었으니 자기와의 약속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부모로서 더욱 기특하고 놀랍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에나 싫증을 잘 내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대학 3년동안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꼭 필요한 악기를 하나 하나 마련해 나갔다는 점이다. 63~64
누구나 자신의 성격에 백 퍼센트 만족하기란 힘든 법인가 보다. 막내는 자기가 '너무 착해 빠져서' 싫다고 하고, 둘재는 자신이 '매사에 싫증을 잘 내서' 문제라고 한다. 67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더니 어느 새 나늘 '패닉 엄마'라는 희한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95년 말 둘째가 '패닉'이라는 이름으로 이인조 그룹을 만들어 음반을 냈는데 그게 시쳇말로 '방방떠서' 순식간에 유명해 졌기 때문이다. 특히 '달팽이'라는 발라드가 인기 순위 프로에서 몇 주씩이나 1위를 하다 보니 생전 가요 프로그램과 담쌓고 지내던 친구들조차 나를 '달팽이 엄마', 남편을 '달팽이 아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 새 연뎨인 가족이 되어 버렸고 1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고 있다. 우 함은 가지각색의 예쁜 봉투들로 미어터지고 시도때도 없이 "적이(동준이의 예명)오빠 있어요?"라는 여학생들의 전화로 온 식구가 신경이 곤두설 지경이다. 책가방을 멘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아파트 입구에서 진을 쳐서 경비 아저씨들이 애를먹고, 나칫 한눈을 파는 사이 엘리베이터에는 '패닉 오빠 사랑해요'라는 낙서가 씌어있다.
대중 문화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를 나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하는 사람도 드물 것 같다 데뷔 초만 해도 둘째는 "어머니는 왜 그렇게 유명하세요?"라며 투정을 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많은 기자들이 '네가 아무개 아들이냐.'며 음악 외적인 것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석 달도 안 돼 이젠 내가 내 이름 대신 패닉 이적 엄마 라고 불리기 시작했으니.
둘째가 슬슬 이름이 나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엄마인 내가 받는 질문 가운데 가장 많은 건 두 종류이다. 하나는 그 애가 언제부터 음악을 하기 시작했느냐는 것이고, 그 둘은 둘째가 앞으로도 음악을 전업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한때의 놀이로 하다 그만둘 건가에 관한 것이다.
언뜻 듣기에 첫 번째질문이 훨씬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세는 첫 번째가 두 번째 질문보다 대답하기 더 어렵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아이가 언제부터 음악을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건, 이태 전 내가 중국에 1년동안 갔다 왔더니 선배네 집에서 음악 연습을 한다고 악기를 메고 왔다갔다 했다는 게 고작ㅇ었다. 이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아마 훨씬 전부터 본격적으로 연습을 했을텐데 그게 언제부터냐고 물었다.
물론 어렸을 떄부터 피아노를 치기 좋아하고 중학교 대는 기타학원에 몇 달 다니기도 하고, 고등학교 입학때 입학선물로 오디오를 사 달라기도 하고, 용돈을 타면 음반을 사서는 집안이 울릴 정도로 꽝꽝 틀기는 했지만 그 정도 야 요즘 아이들이면 다 하는 짓이 아닌가. 그래도 대학교까지 가서 졸업반이 된 시점에 가수가 되기로 나설 정도라면 언제부터인가 뭔가 다른 징후를 보여야 했지 않을까라른 것이 주위의 기대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부터 가수들의 흉내를 낸다든가, 음악에 미쳐서 학교를 안 간다든가 등등…….
그런데 둘째는 가족이나 친척들의 눈에 튀는 그런 모습을 보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죽하면 둘째 동서가 앨범을 받고는 놀라서, "아니, 난 여태 동준이 노래하는 소리도 한 번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얌전하고 조용한 애가 도대체 언제 연습을 했냐?" 하고 물었을까.
이말을 전하자 둘째는 능청스럽게, "제사와 제사 사이에 연습했다고 말씀 전하시지 그러셨어요."라고 받는다. 한마디로 집안에 제사나 결혼식 같은 행사가 있을 때나 만나는 큰엄마가 어떻게 조카의 삶을 알겠느냐는 뜻이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무슨 듯인지 잘 알아듣지도 못했으니, 정말 세대차이는 온갖 곳에서 도사리고 있나보다.
그래도 내 딴에는 자식에게 쓸데없는 간섭은 하지 않지만 꾸준히 관심을 기울인다고 자부했는데 얼마 전 어떤 신문과의 인터뷰기사는 이런 내 자부심을 단번에 뭉개 버리기에 충분한 거시었다. 둘째 왈,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조직했다나. 이제까지의 내 정보로는 그 애가 밴드를 만들어 학교 행사에 참여한 것은 고등학교 때라고 입력되어 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중학교 때의 둘째를 되살려 보아도 그 애가 밴드를 만들어 놀았다는 흔적은 잡히지가 않는다. 그냥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늘 즐겁게 해쭉해쭉 웃으며 발뒤꿈치를 들고 가볍게 걸어다녔다는 기억밖에는.
하긴 둘째의 중학 졸업식을 하루 앞둔 날인가, 대학 다니는 조카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었다. 동준이가 『소년조선일보』에 톱 기사로 났다는 것이다. 커다란 사진과 함께. 내용인즉 중학 3년내내 귀가 잘 안 들리는 난청인 급우를 도와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도록 '헌신적으로'도와 주어 졸업식 날 선행상을 수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둘째로부터 한 번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고 이내 코끝이 찡하도록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신문에 실리는 '착한 어린이 '라면 나하고는 상관없는 진짜 별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터라 나는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엄마라는 사람이 이토록 자식을 모를 수도 있느냐는 자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아이는 그냥 덤덤했다. 어렵사리 구해온 신문을 보여주며 감격스런 표정을 짓는 내게 그 아이가 하던 말이라니.
"아무튼 그 기자 아저씨들, 되게 쓸 거리가 없었나 봐요."
한마디로 자기가 한 일은 별 거 아니라는 거다. 다른 아이들 같아도 다 그렇게 했을 건데, 어쩌다 자기 옆에 앉았기 때문에 자기가 도와 주었을 뿐이란다. 그러니 어머니도 뭐 특별히 착한 아들을 둔 걸고 착각하지 말라나. 자기는 그냥 보통 아이일 뿐이란다. 그러니 동네방네 떠들지 말란다.
괘씸하고도 대견한 녀석. 나는 둘째한테 계속 퉁을 맞으면서도 대견하다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이번과는 전혀 반대의 풍경을.
초등학교 1학년이던 둘째는 그 동네의 YMCA체육관에서 운영하는 리틀 수영단에 들어 있었다. 운좋게도 둘째는 바로 전해에 새로 생긴 아기 스포츠단에 추첨을 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수영단에 들어갔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 번도 빠짐없이 둘째는 샛노란 단복을 입고 열심히 다녔다.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저 녀석이 수영에 적성과 능력이 다 들어맞는구나, 하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추운 날에 머리가 꽁꽁 얼어가면서도 그토록 즐겁게 다닐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즈음 다른 엄마들을 만나면 자식들을 수영선수로 키우기 위한 정보들을 빈번하게 주고받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도 은근히 속으로는 '수영 선수? 좋지.'라고 행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의 발표회가 있던 날이었다. 그 조그만 아이들이 폼도 멋있게 풀에 뛰어들어 날렵하게 물을 저어나가는데 그 중에서 눈에 띄게 폼이 엉성하고 느린 아이가 있었다. 스탠드에 앉아 잇던 엄마들이, '쟤 좀 보라.'고 서로 치면서 박장대소를 하는데, 어렵쇼, 가만히 보니 바로 둘째가 아닌가. 그 때의 충격이라니. 워낙 체구가 왜소하고 몸무게가 안 나가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자유형을 하느라 몸이 반쯤 젖혀지며 나가는데, 이건 꼭 파도에 쏠리는 가랑잎처럼 나풀거리는 모습이 전혀 속도가 붙지 않는다.
나는 눈물이 났다. 눈치를 챈 옆의 엄마들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을 해돴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속이 상해서 눈물이 난 게 아니었다. 세상에, 나 같으면, 저렇게 눈 에 띄게 못한다 싶으면 아마 벌써 그만두었을 텐데, 어쩌면 1년 동안을 하루같이 그토록 즐거운 얼굴로 다닐 수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째는 아주 흔연스런 표정으로 자기 수영 솜씨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는 워낙 물을 무서워해서 여태까지 수영을 못 배웠는데 너는 쪼끄만 애가 그렇게 수영을 잘하니 얼마나 좋으냐, 정말 부럽다,라고 대답했다. 그 애는 신이 난 얼굴로 자기 반에 누구누구는 자유형을, 그리고 누구누구는 접영을 아주 잘 한다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아이들 마음의 구김살은 아이들이 만드는 게 아니다. 둘째는 비록 수영을 능숙하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수영을 즐기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것을 엄마 잣대로 재고 채찍질했다면 그 애는 아마 중도에 그만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내아이를 발견해 가는 게 부모에게 부여된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따라서 둘째가 평생 음악을 계속할지 어떨지라는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모른다.'일 수밖에 없다. 요즘 말로, '네 뜻대로 하세요.'일 뿐.
비단 둘째만이 아니라 큰애도 셋째도 내게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너무너무 말이 없이 웃기만 하던 셋째가 유치원을 졸업하던 날 가진 연극 발표회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내가 너를 잡아먹겠다--"며 악한 늑대 역을 해냈을 때의 놀라움, 기껏해야 네 살 아래밖에 안 되는 막내 동생을 마치 아들처럼 무릎에 올려 놓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해 주던 중학생 큰애를 봤을 때의 믿음직스러움.
이런 것들이 다 경이로움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리고 이렇다 하게 배운적도 없는데 놀랍도록 정교하게 스케치를 하던 큰애의 그림 솜씨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엄마 손님에게 서툰 솜씨로 커피를 타 오는 막내의 어른스런 배려 같은 것들…….
남편은 몇 년 전인가 중학생인 막내가 엄마가 없는 집에 귀가한 아버지를 위해 냉동실에 들어 있던 꽁꽁 언 돼지고기를 녹여 구워 주었을 때, 일종의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그러고 보면 우리 부부는 선천적으로 감동 체질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부모가 보지 않는 사이에도 자라는 법이다 그러니 부모라고 해서 어떻게 아이들을 속속들이 안다고 큰소리칠 수 있으랴.
아 참,패닉이 처음 KBS 가요 톱 텐에 출연했을 때 '번개 맞은 머리'를 해갖고 번쩍거리는 가죽 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정말 기절 할 뻔했다.
"아니, 쟤가 동준이야?"
남편도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아이들이 더 이상 부모를 놀라게 만들기를 그만둘 때, 어쩌면 그 때에야 그들이 다 컸다고 말할 수 있을 때인지도 모른다. 77~83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야."
둘째가 음반을 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으레 이렇게 말한다. 재미있는건, 부부 중 누구를 더 잘 아느냐에 따라 그 '피'의 소유자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드디어 아들이 해냈다고 말하고, 내 친구들은 그러면 그렇지, 엄마의 '끼'가 어디로 가겠냐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우리 부부를 다 잘아는 오래된 친구들은 엄마 아빠가 모두 딴따라끼가 농후한데 오죽하겠느냐고 한다. 60년대 대학 시절 연극반에서 만나 결혼한 우리의 과거를 들먹이면서.
그러나 당사자인 둘째로서는 이런 반응들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다. 부모의 현재 모습 어디에서 '끼'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 난감해하는 것 같은 표정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묘한 감상에 사로잡힌다.
그래, 우리도 한때는 정말 뾰쪽한 감성의 날을 휘두르며 낭만이라는 것에 미쳐 휘둘려 다녔었댔는데, 사반세기가 넘는 결혼 생활동안 닦이고 닦여 지금은 그저 무덤덤한 일상 속에 매몰되어 버린, 그냥 코끼리 같고 하마 같은 한 쌍의 부부로 남게 되었구나. 어쩌면 젊은 너희들에겐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바위덩어리처럼 보일지도 몰라.
하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장점이 바로 부모들 가운데 한 쪽을 닮았다고 생각될 때보다 흐뭇할때도 또 없다. 그것이 외모이든 성격이든 능력이든 간에. 85~86
준이는 서너 살 때부터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 하는 꾀동이에다 붙임성도 좋았다.『로보트 태권 브이』라는 만화 영화를 둘째가 세 살, 큰애가 다섯 살 때 함께 보러 갔는데, 주제가가 나올 때마다 큰애는 가만히 앉아서 눈도 깜빡 않고 보고 있는데 둘째는 아예 일어서서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거였다. 예살 이야기를 해 보라고 시키면, 무슨 사자니 토끼니 하는 내용을 시작도 끝도 없이 좔좔 풀어내리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남편은 둘째가 혹시 천재일지도 모른다면서 아마 엄마를 닮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어디 가서나 붙임성이 좋아 인기를 끄는 모습이 꼭 남편을 닮은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재주가 많으면 한 우물을 못 파는 법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이가 나를 닮지 않기를 바랐다. 88~89
'추억만들기'는 준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단 두 부자끼리의 경주 여행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99
둘째가 학교에 입학할 때 훈이는 엄마로부터 들은 훈계를 고스란히 반복했다.
"야, 모르는 건 끝까지 모른다고 해야해. 괜히 아는 척하는 녀석은 바보야, 바보."
정말 보고 듣는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115
더구나 첫째가 여유있게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내게 터무니 없을 정도의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에 둘째와 셋째는 고3 티도 내 보지 못하고 고3을 지내야 했다. 하긴 둘째야 뭐 음악을 하기 위해 대학을 안 간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뒤늦게 마음을 바꾸었다고 해서 또 그런가 보다고 지켜보기만 했다.
둘째의 고3여름은 살인적인 더위가 닥친 해였다. 고3 스트레스를 피아노를 두드려대는 걸로 풀던 둘째는 과연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아이'답게 제발 에어컨디셔너를 들여놓을 수 없느냐고 제안해왔다. 에어컨디셔너가 있는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오면 더위가 숨을 조여온다는 것이다. 고3이 무슨 벼슬이냐고 한마디로 밀쳐 내기엔 나에게도 그 해 여름은 너무 더웠다. 나는 거금을 들여 급속 냉각 에어컨디셔너를 주문했다.
막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던 해 둘째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저녁 둘째가 막내에게 들려 준 조언은 가히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야, 너 괜히 어머니를 믿었다가는 큰일난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너 혼자 알아서 해야 해. 어머니는 너 대학 못 들어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실거야." 140
그러나 요즘처럼 형제가 기껏 두셋밖에 안 되고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에 굳이 형제를 우열 관계로 비교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둘째는 그런 점에서 어렸을 때 상처를 많이 받았다. 눈이 작다고, 키가 작다고 형제간에 너무 비교를 많이 당했던 것이다.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을 거다. 한밤중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남편 친구들이 여럿 찾아온 적이 있었다. 큰애는 워낙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기 때문에 첫눈에 아주 잘생겨 보인다. 따라서 큰애가 인사하러 나왔더니 여느 때나 다름없이 모두들 "아이구, 그 놈 참 훤칠하게 잘생겼다."고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곧이어 둘째가 인사를 하자 손님들은 즉각적으로 "아니 얘는 왜이렇게 작아, 누굴 닮았지?"라며 웃어댄다. 내 친구들 같았으면 미리 그런 말을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으련만. 그 순간 내눈에는 둘째의 가슴에 스며드는 멍울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났다. 예전에도 무심한 어른들이 숱하게 저지른 폭력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둘째였지만 그 날 어른들의 행태는 지나치게 원초적이었다. 아마도 술 탓이었겠지만.
"어머니, 형은 잘생기고 동생은 예쁘게 생겼는데 난 왜 이렇게 못생겼어요, 눈도 작고, 키도 작고……."
손님들이 가고 난 후 둘째는 잠을 못 이룬 채 이렇게 울먹였다.
"아빠 친구들이 뭘 몰라서 그래. 우리 동준이가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데. 요 조그만 눈에 꾀가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데. 엄마는 동준이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둘째는 좀체로 키가 크지 않더니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갑자기 부쩍 컸다. 형과 동생이 워낙 키가 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여전히 제일 작았지만 현재 175센티미터를 넘었으니 작은 편은 아니다.
훈이는 겨우 제 이름자만 쓸 줄 알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숙제에 엄마가 받아쓰기 열 문제를 내 주고 채점까지 해 오라는 적이 많았다. 저녁 준비에, 집안 청소에, 설거지하고, 아이들 목욕시키는 데 시간과 손이 한창 많이 들던 때였기 때문에 나는 한가하게 받아쓰기 문제를 낼 여유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 둘째는 형보다 먼저 한글을 해독했던 터였기 때문에 나는 다섯 살짜리 둘째에게 형 받아쓰기 숙제를 내 주라고 시켰다. 둘째는 신이 나서 어려운 말들을 불러 주고, 형을 또 고마워하면서 열심히 받아쓰기를 했다. 물론 채점은 내 차지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세상에 별일도 다 있다면서, 형이 자존심 상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만약 형이 자존심이 상했으면 동생이 숙제를 부르도록 놔 두었겠냐고 반문햇다. 준이도 형을 업신여기거나 잘난 척하지 않고 자기에게 일거리가 생겼다는 재미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훈이가 한글을 잘 읽는 동생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점이다.
아마 이런일이 가능 했던 것은 엄마가 형에게 왜 동생보다 늦되냐고 꾸짖지 않고, 동생에게도 단지 형보다 글을 빨리 깨쳤을 뿐이지 형보다 잘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 했기 때문일 거 같다. 나중에 준이가 입학했을 때는 훈이가 산수 더하기 빼기 문제를 다 내주었다. 윤이 때는 두 형들이 도맡았기 때문에 나는 결국 아이들을 셋이나 키우면서도 아이들 숙제를 봐 준 적이 거의 없었다는 고백을 하는 셈이다.
둘째는 고등학교 때 수학 때문에 애를 먹었다. 반면 큰애는 수학이나 물리는 공부를 안해도 저절로 해답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고 했다. 같은 형제라도 아이들은 그렇게 각자 능력과 적성이 다른 거다. 147~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