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 : 옛 다리
사람과 사람 땅과 땅을 이어주는 원초적인 통로
사람과 사람ㆍ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는 만남과 교류의 구조물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다리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주고받았다. 옛 다리는 길과 함께 역사 발전의 바탕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역사의 향기와 민족의 정서와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는 우리의 옛 다리를 찾아 떠나자.
글 이지혜(시인) / 사진 최진연ㆍ윤광준
다리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이상하게 개천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 민족의 삶이 스며 있는 한강도 있고 금강도 있는데, 하필 개천에서 다리 이야기를 시작하려느냐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물가에 의지해, 물가에 모여 살며, 물을 건너다니던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가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라고. 이를테면 영산의 만년교나 진천의 농다리. 대천의 돌다리. 중랑천의 살곶이 다리가 소박하지만 마음을 더 끌어당기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한 마디 덧붙이면 한강이나 금강 같은 큰 물길에는 다리가 없었다는 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조 때 한강에 작은 배를 이어서 만든 배다리가 있었으나 이것은 정조의 화성 행차를 위해 임시로 만든 다리여서 반영구적이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다리를 말하면서 개천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산 만연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아담한 반원형의 아치 석교이다. 돌담을 쌓아 올린 듯한 다리 모양새가 사람의 잔손질이 느껴지는 정겨운 다리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다.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길을 만들었다. 허술한 듯하나 견고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다리의 멍에에, 구체적으로는 멍에의 끄트머리인 마구리에 도깨비상이나 동물의 얼굴형상을 새겨넣었다. 동물상은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즉 홍교에서 특히 자주 보인다. 옛사람들은 조형적인 뜻보다는 주술적인 의미로 동물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물난리나 화재 같은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 다리는 조선시대에는 가장 길고 큰 대교였다. 이성계가 이 주변에서 활을 쏘아 꽂았던 곳이라는 데서 다리 이름이 유래했다.
세종 때 만들고자 하였으나 강 너비가 너무 넓고 홍수가 잦아 완성하지 못했다가, 63년 뒤인 성종 때 완성하였다. 수수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조선시대의 교량기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다리이다. 하지만 대원군 때 경복궁을 지으면서 살곶이 다리의 석재의 절반을 뜯어다 써버려 지금은 절반만 남아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하천은 한강으로 흘러가지만 사실 한강에는 다리에 관한 향수가 개천만큼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한강에 다리다운 다리가 놓인 것이 일제 시대이니 이를 두고 옛다리라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다. 그러니 다리에 얽힌 자잘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거의 없는 편이다. 향수라고 해봐야 나룻배를 탔던 이야기 정도이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만 해도 압구정동에 사는 아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성수동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지금의 압구정동을 놓고 생각할 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최신 유행, 욕망, 불야성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는 그곳, 압구정동과 나룻배는 한 편의 블랙 코메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지금은 시멘트로 덮어버려 이름만 남아 있지만 예전에 청계천은 참 소중한 물길이었다. 서민들의 삶과 애환, 그야말로 땀방울 송글송글한 이야기가 곳곳에 맺혀 있는 생활의 무대였다.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보면 푸른 물에 의지해 옹기종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이 금방 그려진다. 물이 얼마나 맑았으면 '푸를 청'자를 써서 청계천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청계천의 옛 모습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고가도로가 버티고 서 있는 시장통의 복잡한 거리쯤으로 여기고 있을 터이다. 그러다가 성장하면서 이곳에 개천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청계천은 지금도 여전히 유명한 곳이지만 실제 모습은 사라져 버린 아득한 개천이 되어 버렸다.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에 더 그리움을 갖게 마련이다. 이제는 저 땅 밑으로 잠겨버린 청계천과 그곳에 있던 다리들, 청계천에는 광교, 수표교, 오간수교, 영미교, 관수교 등 모두 스물네개의 다리가 있었다. 광교가 있던 자리는 아직까지도 '광교'라고 불리고 있다.
청계천 2가에 있던 수표교는 복개공사 때 장충단 공원 입구의 개천으로 옮겨졌다.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리를 옮긴 것은 그만큼 이 다리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표교는 청계천의 유량을 측정하던 수표석이 다리 옆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이름은 마전교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다리이며, 청계천에 있던 다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석교이다. 또한 청계천의 다리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직까지 현존하고 있다. 수표는 세계 최초의 하천 유량 측정기로 1441년 홍수와 가뭄이 겹쳐 강우량 측정이 절실히 필요하자 세종 때 개발했다. 수표교는 그러니까 교량의 기능뿐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표는 현재 경기도 여주의 현재 세종대왕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을 1760년 영조 때 보완 수리한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수표에 10척까지 눈금을 긋고 물이 불거나 줄어드는 상황을 보고 받았다고 한다. 또, 수표교 교각에 개천 바닥을 표시해 두고 수심의 기준으로 삼았다.
다리는 이처럼 본래의 기능을 넘어서서 수리 과학 분야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다리는 우리 민족의 정서까지도 따스하게 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다리가 갖는 의미, 그러니까, 그 안에 이미 '연결'과 '만남'과 '이음'의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리는 수많은 은유와 상징을 가지고 있나 보다.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고, 이승과 저승의 구슬픈 통로이며, 망자와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다리. 실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리를 건너다 넘어지는 꿈을 꾼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 않던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다리는 생과 사를 연결해주는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너무 깊이 사랑하여 신의 노여움을 사 함께 지낼 수 없게 된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동양 최대의 문학적 주제이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게 된 연인들을 위해 1년에 한 번씩 날개를 이어 다리를 놓아주던 까치와 까마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작교는 우리 민족 정서 깊은 곳에도 놓여 있다. 남원 땅은 춘향이와 이도령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 광한루의 연못에 놓여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오작교이다. 오작교를 건너 다시 사랑을 꽃피울 춘향이와 이도령의 모습이 떠오른다. 역시 다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도 힘을 발휘하는 아름다운 상징이다.
우리나라에는 다리의 상징과 은유에 바탕을 둔 재미있는 풍속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다리굿과 다리밟기다. 다리굿은 평안도 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굿으로 이승의 한을 풀지 못해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는 망령들을 위한 굿이다. 실제로 다리에서 행해지던 것은 아니다. 긴 무명천을 늘어뜨려 놓고 이를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할 다리라 여기고 굿판을 벌였다. 슬픔도 많았을 삶, 얼마나 할 말이 많은데 그냥 떠나겠는가. 우리 민족은 망자에게 생전에 못한 넋두리를 무당의 입을 빌려 원없이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이승의 미련을 떨치고 편히 저승으로 가기를 기원한 것이다.
다리밟기는 대보름날 밤에 다리(橋)를 밟으면 다리(脚)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해서 생긴 세시풍속으로, 다리(橋)와 다리(脚)의 발음이 같은 데서 생긴 속신적 관습이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다리 밟기가 가장 많이 행해진 곳은 청계천의 다리들이었는데, 이중에서도 광교와 수표교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다리밟기의 형식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대개는 가족이나 젊은이들이 단체로 몰려다니다 노래도 부르고 북이나 장구로 흥을 돋우며 다리를 밟았다.
다리밟기는 고려 공민왕의 아내 노국공주의 다리밟기가 전승된 것이다.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피난길에 오른 공민왕이 안동 부근을 지나다가 풍산 소야천에 이르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인근 마을 부녀자들이 나와 개울 속으로 들어가 엎드렸다. 이른바 사람 다리를 만든 것이다. 노국공주는 이 다리로 무사히 개울을 건널 수 있었다. 이때의 놋다리밟기가 각지로 퍼져나가 흥겨운 우리의 민속놀이로 전승되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을 작은 개천이라도 다리 하나 만들어 놓는 것을 신성시하며 큰 일로 여겼다. 다리에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정서와 의미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리가 사람들의 삶과 생활에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까닭에 다른 어느 곳보다도 다리가 많은 곳이 있다. 사찰이다. 물론 사찰의 대부분이 깊은 산 속에 있어 건축학적으로 많은 다리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찰의 다리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편안하게 보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자신의 고행으로 남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불교 사상의 깊은 뜻과 통한다. 그리고, 사찰의 다리는 부처의 집과 속세를 연결하는, 더 나아가 천상의 불국와 지상의 속세를 잇는 사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가 그 좋은 예다.
이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다운 계단식 돌다리로 경덕왕 10년 불국사가 세워지면서 만들어진 다리들이다. 다리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요, 그 아래는 범인들의 땅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국보 23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청운교를 거쳐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에 이른다. 이 자하문은 다보여래의 불국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국보 22호로 지정된 연화교와 칠보교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이 안양문은 아미타여래의 평화로운 불국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생의 마지막 다리를 건넌다. 산자는 건널 수 없는 다리. 모두 안녕.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무수한 다리를 건너며 평화를 기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행복하게 때론 슬프게 살다가 이제 마지막 다리를 건넌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 다리를 건너면 이제 불국의 시작이다.
※ 위 내용은 대한항공 기내지 "Morning Calm" 2000년 6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 사진 위에 마우스를 가져다 놓으면 사진의 설명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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