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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연보
1941년(1세)
음력 2월 4일. 아버지 김맹모(金孟模)와 어머니 정금성(鄭琴星) 사이의 외아들로 전남 목포시 연동 18번지에서 태어나다.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1947년(7세)
목포 산정초등학교에 입학하다.
1953년(13세)
산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에 입학하다.
이해 겨울, 부친이 강원도 원주에 일자리를 얻어 가족이 원주로 이주하다.
1954년(14세)
원주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다.
1956년(16세)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부터 문예반 활동을 하다.
재학중에 늑막염을 앓아 휴학한 뒤, 원주에서 두 달 동안 요양하다.
1959년(19세)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에 입학하다. 4∙19 후에 미학과가 문리대 문학부로 옮겨진다.
문리대 연극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1960년(20세)
4월혁명 후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학내 민주화 시위와 '새생활계몽대'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다.
미술대학 농성시위에 참여한 몇몇 선배들이 퇴학 처분을 받자 가을 학기와 이듬해 봄학기까지 휴학계를 내고 서울과 원주, 대학가를 떠돌다.
원주기독청년회관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처음 만나다.
1961년(22세)
원주에서 최초로 시화전을 열다.
1963년(23세)
3월, 《목포문학》에 〈저녁 이야기〉라는 작품을 '김지하(金之夏)'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다.
5월초,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지하(之夏)'라는 필명으로 시화전을 열다.
겨울, 원주 시내의 한 다방에서 시화전을 갖다.
1964년(24세)
3월, 복학하다.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규탄대회'에서 <곡(哭)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조사(弔辭)와 데모가 <최루탄가>를 쓰다.
6월3일, 서울대의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가두시위 진출을 맡아 시위대를 광화문으로 이끌다. 이 일로 약 넉 달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6월 13일, '6∙3사태'의 여파로 대학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당하다.
9월 20일, 서울지검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고, 며칠 뒤 무기정학이 해제되다.
1965년(25세)
8월 22일, 박정희 정권이 위수령을 발동하여 시위대를 진압할 때 1급 지명 수배자가 되어 또다시 도피의 길에 오르다.
10월 12일, '구국학생연합 사건'으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이 해 겨울까지 서울 답심리에 살던 친구 정현기의 집에 은신하다.
1966년(26세)
《청맥》으로부터 갑오동학혁명을 주제로 한 서사시를 청탁받고, 총 300행 규모의 미완성 서사시 <우슬치>를 창작했다가 폐기하다.
3월, 수배가 해제되자 재 입학하여 미학연습, 예술사론, 현대시론 등의 학과목 공부에 열중하다.
8월 30일, 졸업하다.
1967년(27세)
2월, 폐결핵이 악화되어 서울 서대문시립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
1969년(29세)
6월, 서울 서대문시립병원에서 퇴원하다.
8월, '코리아 마케팅'이라는 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취직, 약 넉 달간 직장생활을 하다.
11월, 《시인》11월에서 시 <황톳길> 외 네 편을 '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등단하다.
1970년(30세)
《사상계》 5월호에서 담시 <오적(五賊)>을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다.
6월 20일, 풍자극<나폴레옹 꼬냑>의 연출을 맡아 무대에 올리기 하루 전일 이날, 체포되다.
6월22일, 일본의 《주간 아사히》에 <오적>이 소개되다. 이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金之河'라고 써서 이후 이 이름으로 공식화되다.
7월 7일, '오적 필화 사건'에 대한 제1차 공판이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리다.
12월, 첫 시집 《황토》(한얼문고)를 출간하다.
1971년(31세)
4월 8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에 참여하다. 이 무렵 천주교 원주대교구 기획실의 농촌협동운동 관련 기획위원으로 일하면서 부활절에 원주대교구 단구동 성당에서 영세(세레 명 프란체스코)를 받다.
6월, 폐결핵이 재발하여 인천 적십자병원에서 약 한 달간 입원치료를 받다.
10월 5일, 원주대교구에서 열린 '부정부패 규탄대회'에서 발표한 선언문의 초안을 쓰다.
10월 15일, 박정권이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무장군인을 대학에 투입, 학생들을 연행하다. 이때 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지명 수배되어 강원도 탄광 지역으로 피신하다. 피신중에 희곡 <금관의 예수>를 집필하다.
12월, 일본 도쿄에서 담시 <오적>과 희곡 <구리 이순신> 등이 수록된 작품집 《긴 어둠의 저편에》(주오코론샤)가 출간되다.
1972년(32세)
《창조》4월호에 담시 <비어(蜚語)>를 발표하다.
4월 12일, 서울 모래내의 하숙방에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다.
5월 31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으나 폐결핵 때문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마산의 국립결핵요양원에서 7월 15일까지 강제 연금생활을 하다.
1973년(33세)
4월 7일, 명동성당에서 김영주와 결혼하다.
9월, 일본의 경제침략 정책을 비판한 장편 풍자시 <분씨물어(糞氏物語)>(뒤에<똥바다>로 개제)를 쓰다.
10월, 농촌계몽극 <진오귀(鎭惡鬼)>를 쓰다.
12월 24일,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위한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 결성에 참여하다.
12월 29일, 풍자시 <오행(五行)>을 집필하다.
1974년(34세)
긴급조치 제1호, 제2호가 발동하자 석 달 동안 강릉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하며 조영래∙나병식∙이철∙유인태∙서중석 등과 접촉, 반유신투쟁을 위한 전국적 규모의 학생조직의 필요성 을 강조하고, 이에 필요한 활동자금을 조영래를 통해 전달하다.
4월 19일, 장남 원보가 태어나다.
4월 25일, 영화<청녀(淸女)>의 촬영 팀이 묵고 있던 대흑산도에서 체포되다.
7월 13일, 민청학련 핵심 관련자 32명에 대한 비상보통군법회의의 제1심 판결에서 사형이 선고되다.
7월 20일, 국방장관의 판결 확인 과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지하를 비롯한 5인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다. 이 무렵, 미국∙일본∙프랑스∙독일 등지에서 김지하 구명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다.
8월 15일, 재일교포 시인 강순의 번역으로 《김지하 시집 오적∙황토∙비어》(아오키 서점)가 일본에서 출간되다.
1975년(35세)
2월 15일, 민청학련 관련자 148명이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석방되다. 이날 밤 투옥 열 달만에 영등포교도소에서 출옥하다.
2월 25 - 27일,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옥중수기 <고행∙∙∙1974>를 연재하다.
3월 12일, 함세웅 신부가 '민주회복국민회의'의 대변인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자 이를 수락하다.
3월 13일 정릉의 처갓집 박경리 여사의 자택을 나서는 도중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체포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다.
계간《창작과비평》 봄호에 <빈산>, <불귀(不歸)>등 시 열두 편이 발표되나 즉각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다.
4월 4일, 중앙정보부가 날조한 '나는 공산주의다'라는 내용의 자필 진술서가 포함된 100쪽 분량의 '김지하에 대한 반공법 위반사건 관계자료'가 문공부에 의해 국내외에 대량 배포되다.
5월 3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앞으로 옥중서신을 통해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몰지 말라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발표하다. 이 양심선언은 감옥 밖으로 은밀히 유출시킨 김지하의 옥중수첩을 토대로 조영래가 집필한 것이다.
6월 29일,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에서 '로터스 특별상'을 김지하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하다. 아울러 '김지하 석방요구서'를 박대통령에게 발송하다.
이 무렵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작가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1975년도 노벨문학상,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다.
9월 16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감찰부가 김지하에 대한 무기징역의 '형집행정지' 결정을 취소하다. 이로써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구속되어 다시 무기징역수가 되다.
1976년(36세)
12월 14일, 제13차 공판에서 검찰이 김지하에게 기왕의 무기징역형에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추가로 구형하다.
12월 31일, 재판부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7년, 자격정지 7년을 추가로 판결하다.
1977년(37세)
1월 6일, 제1심 판결에 불복하여 서울고법에 항소하다.
1978(38세)
8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김지하의 법정 최후진술 내용을 수록한 소책자《암흑속의 횃불》을 발간하다.
1979년(39세)
박정희 시해 사건, 이른바 10∙26 사건이 발생한 이즈음, 감옥 생활 5년째에 접어들면서 불 교와 동학 관련 서적 등을 다시 읽기 시작하고, 테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에 심취하다. 또 백 일 동안 참선을 하고 감옥의 시멘트 틈새에 개가죽나무가 뿌리내리는 장면을 목격한뒤, '생명사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기존의 투쟁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환을 모색 하다.
1980(40세)
12월 12일, 국내외의 지속적인 석방운동으로 투옥 5년 9개월 만에 석방되다. 이후 원주에 머물며 옥고에 지친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장일순 선생에게 묵란을 배우고, 장선생과 지속 적인 만남을 가지며 생명운동, 풀뿌리운동, 구체적인 생활∙문화∙사상 운동에 매진하기로 마음먹다.
1981년(41세)
9월, 둘째아들 세희가 태어나다.
12월 2일,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에서 1975년에 선정됐던 '로터스 특별상'과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위원회'가 주는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동시에 수상하다.
이 해에 '세계시인대회'가 수여하는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하다.
1982년(42세)
5월, 첫 시집 발간 이후 22년 만에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되다.
12월, '대설(大雪)'《남(南)1》(창작과비평사)이 출간되다.
1983년(43세)
천주교 원주대교구 기획실의 사회개발위원회 위원직을 사임하다.
1984년(44세)
4월, '밥이 곧 하늘이다'라는 주제의 이야기 모음집 《밥》(분도출판사)을 출간하다.
7월, 첫 시집 《황토》(풀빛)를 재출간하다.
8월, 대설 《남 2》(창작과비평사), 산문집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동광)가 출간되다. 이즈음 사면복권되다.
12월부터 '사상기행'을 시작하다.
1985년(45세)
3월, 대설《남 3》(창작과비평사)이 출간되다.
7월, '김지하 이야기 모음' 《남녘땅 뱃노래》(두레)가 출간되다. 이즈음 원주와 해남 등지를 왕래하며 동학과 생명사상의 체계적 심화에 주력하다.
1986년(46세)
3월, 시집 《애린(첫째권)》(실천문학사)이 출간되다.
5월, 강원도 삼척 두타산 무릉계곡에서 체험한 영적 충격을 집필한 시집 《검은 산 하얀방》(분도출판사)이 출간되다.
9월, 《애린(둘째권)》(실천문학사)이 출간되다.
1987년(47세)
6월, 수상록 《살림》(동광)이 출간되다.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다.
10월 19일, 판금서적 431종이 공식 해금되어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이 일반 서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하다.
이 해 겨울, 원주기독병원에서 잠시 입원 치료를 받다.
1988년(48세)
4월, 대설 《남》 집필을 중단하고, 수운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다룬 장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동광)을 출간하다.
11월, 해남을 떠나 광주에 머물다가 상경하다.
12월 23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지도위원으로 추대되다.
1989년(49세)
6월, 서정시집《별밭을 우러르며》(동광)가 출간되다.
1991년(51세)
3월, 산문집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동광), 《김지하 전집(서정시, 담시, 희곡 집, 산문집1․2》(동광)이 출간되다.
《동아일보》에 회상기 <모로 누운 돌부처>를 발표하다.
6월, 산문집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동광)가 출간되다.
11월, 시선집 《마지막 살의 그리움》(미래사)이 출간되다.
1992년(52세)
6월, 생명사상에 관한 글을 묶은 산문집 《생명》(솔)이 출간되다.
11월, 문학선집 《모로 누운 돌부처》(나남)가 출간되다.
1993년(53세)
1~5월, 《결정본 김지하 시선집 1∙2∙3》(솔)이 출간되다.
여름, 솔출판사에서 '그물코' 네트워크 개소식을 갖고 이후 '생명운동' 소식지 《그물코》를 20여 회에 걸쳐 발간하다.
《결정본 김지하 시선집》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제정한 제5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다.
1994년(54세)
1월,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집필한 《동학이야기》(솔)가 출간되다.
8월, 신작 시집 《중심의 괴로움》(솔)이 출간되다. 이즈음 거처를 서울 목동에서 일산으로 옮기다.
10월, '생명 가치를 위한 민초들의 모임(생명민회)'을 결성하다.
11월, 생명운동과 주민자치에 관한 담론을 모은 산문집 《옹치격》(솔)이 출간되다.
1995년(55세)
10월, '틈'과 '모심' 사상을 주제로 한 산문집 《님》(솔)이 출간되다.
1996년(56세)
1월, 생명운동의 확산을 위해 채희완∙김영동∙심정수∙최태연 등과 함께 '신풍류회의'를 결성하다.
3월, 생태정치학자 문순홍과의 대담을 엮은 《생명과 자치》(솔)가 출간되다.
11월, 1970년대에 발표된 시편들을 모은 시집 《빈 산》(솔)이 출간되다.
1998년(58세)
8월부터 9회에 걸쳐 '율려학회' 창립 준비를 위한 학술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율려사상'과 '신인간운동'을 주창하다.
12월, 일본 가와사키의 시민운동 단체가 주최한 초청 강연회에 참석하다.
1999년(59세)
3월 23일, 환경운동연합이 주최한 동감댐 건설 반대시위에 참가하다.
4월,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동포와 민족문화>란 주제로 초청강연을 하다.
《김지하의 사상기행 1∙2》(실천문학사)가 출간되다.
이 해 봄부터 명지대 국문과 석좌교수로 임명되어 매달 한 차례씩 미학과 시학에 관해 특강 형식으로 강의하다.
6월,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의 대표로 취임하다.
7월, '율려'에 관한 강연모음집 《율려란 무엇인가》(한문화)가 출간되다.
8월 4일, '율려학회' 창립대회에서 '율려학회' 회장으로 추대되고, '마고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창립 기념강연을 하다.
9월,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대안사상으로 율려운동을 펼치게 된 이유, 1991 년 당시 《조선일보》 기고문 파동으로 진보진영과 불편한 관계를 초래한 일 등에 대해 해 명하고, 진보진영과의 화해를 요청하다.
10월, 명지대 등에서 행한 미학 강의를 한데 모은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실천문학 사)이 출간되다.
12월, 시선집 《꽃과 그늘》(실천문학사)이 출간되다. 이 무렵 '겸손하게 열심히 일한다' 는 뜻의 '노겸'이라는 아호를 쓰다.
2000년(60세)
1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으로 추대되다.
2월, 문화운동에 대한 담론을 모은 《옛 가야에서 뛰우는 편지》(두레)가 출간되다.
2001년(61세)
5월 4일,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서울 시청 앞에서 주도한 '박정희기념관 건립 반대 일인 시 위'에 참가하다.
9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가 연재되기 시작 하다.
12월, 학고재화랑에서 '미의 여정, 김지하의 묵란'전을 열다.
2002년(62세)
7월,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가 제2부부터 《월간중앙》에 동시에 연재되기 시작하다.
5월, 시 <백학봉(白鶴峰)>으로 제14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다.
10월, 《김지하 사상 전집 1∙2∙3》(실천문학사)이 출간되다.
11월, 시집 《화개(花開)》로 제 17회 '만해문학상'과 제10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하다.
2003년(63세)
1월, '붉은 악마'와 '촛불 시위'에 관한 수상을 담은 산문집 《김지하의 화두 - 붉은 악마 와 촛불》(화남)이 출간되다.
문학강연 및 대담집 《사이버 시대와 시의 운명》(문학동네)이 출간되다.
4월, 수묵시화첩 《절, 그언저리》(창작과비평사)가 출간되다.
6월, 시<절, 그 언저리>로 제11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