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행을 다니면서 작가의 고향을 둘러보노라면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 지만 어쩐지 산천의 지세가 명망있는 예술인을 길러 낼 만한 곳이라는 느낌 을 받을 때가 많다. 풍수에 문외한 일 뿐더러 실상은 풍수를 별로 믿지도 않 는 터이면서도 말이다. 육사의 고향에서, 조지훈의 고향에서, 이호 우의 고향 에서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유명한 작가의 고향이라는 선입관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마을마다 으레 남아있기 마련인 ‘대 문장가가 날 자리’라는 식의 전해내 려오는 이야기에 혹한 때문인 지를 생각해 보지만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 으니 딱한 노릇이다.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얕잡아 보일만큼 초라하지도 않은 적당한 산들이 마을 앞에 길게 늘어서 포근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경주시 건천읍 모량 2리. 앞산에서 문득 노루, 그것도 청노루 한마리가 뛰쳐 나올 듯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마을에서도 기자는 왠지 목월(1916~1978)이라는 탁월한 서 정시인이 태어날 만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200여호를 헤아릴 만큼 동네 규모가 좀 커다랄 뿐 별반 눈 여겨 볼 만한 구석이 없는 데도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목월의 명성이 그만큼 큰 탓 이 아닐까. 목월의 생가는 대로변에서도 1km는 더 들어가야 하는 모량 2리의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건천읍에서 경주방면으로 잠시 달리다 모 량초등학교 바로 옆길로 우회전해 들어가면 곳곳에 목월의 고향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설치돼 있어 찾기는 아주 수월한 셈이다.
그러나 쉽사리 목월의 생가를 찾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이내 실망하고 만다. 입구에 붙어 있는 안내판에서 1980년대까지 남아 있던 생가가 헐리고 , 지금 이 집은 목월과는 무관한 집이 돼버렸다는 아쉬움을 읽었기 때문. 그러니까 실상 은 생가가 아니라 생가터를 보고 있는 셈이 아닌가. 고개를 들어 마을 주위를 둘러보면 그의 시 곳곳에서 한 두번씩 등장하는 선도산, 단석산 등이 목월의 시심을 키워주던 그 시절의 그 모습으로 여태 마을 을 보듬고 있어 그나마 실 망감을 덜어준다.
목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마을 안길을 둘러본다. 인기척이 없는 마을, 그런데도 마을의 안어른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지만 금세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는다. 이 궁벽한 산골에서 그 시절 대구 계성학교로 유학을 갈 정도였으니 제법 가세가 넉넉했겠다 싶 어 목월 집안의 형편을 물어보 니 서로 대답이 엉뚱하다. 한 할머니는 모량 리는 물론 건천에도 전답이 있을 정도 로 부잣집이었다고 기억했으나 또 다 른 할머니는 “그 집은 형편없는 오두막이었 는데 ‘부자는 무슨 부자’였겠 느냐”고 반문한다.
목월에 대한 기억은 그의 고향에서도 이정표와 안내판으 로만 남아 있을 정도로 어느새 먼 과거의 일이 되고 만 것일까. 그의 시 에서는 고향마을의 서정이 그대 로 녹아들어 아직도 숨쉬고 있는데 말이다. 사실 목월은 ‘문장’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할 당시까지 이 동네에서 살았고, 그의 집은 50섬 정도를 추수하는 동네에 서도 손꼽히는 살림살이였다 고 한다. 특히 그의 조부는 넉넉한 살림을 일궜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집 사랑에 훈장을 모셔놓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로 교육 열이 높았고, 신 학문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이같은 조부의 적극적 인 교육열 탓에 부친에 이어 목월도 대구에 유학을 할 수 있었고, 자연스 레 그의 시재도 빛을 볼 수 있었던 것. 목월 집안의 교육열은 목 월이 당 시 산골인 모량리에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정도로 어린 나이인 7세에 마 을에 서 10리쯤 떨어진 건천초등학교에 입학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어린 목월은 동네를 감싸고 있는 들판의 밀밭 사잇길로 늘 걸어서 통학했고, 그 기 억이 후일 그의 시 ‘나그네’에 고스란히 배어들었을 것이다.
행여 지금도 밀밭을 구경할 수 있을까 싶어 마을 안길 옆 밭에서 잡 초를 뽑고 있는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청하자 “예전에는 마을 주변이 모두 밀밭과 보 리밭이었지만 지금은 보리농사는 조금씩 짓지만 밀농사는 아 무도 짓지않는다 ”고 대답해 준다. 밭 둔덕에서 멀리 큰 길쪽을 바라보자 들어올 땐 통로박스를 지나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고속도로와 철도가 보인 다.
이 동네의 어른들을 만나 볼 요량으로 마을복지회관을 찾았지만 여기도 인적없 이 조용하다. 부지깽이도 한몫한다는 농번기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다. 길옆에는 사람대신 거름자리를 뒤집는 포클레인만이 요란스레 마을의 적 막을 깨운다.
목월이 후일 ‘나의 문학 청년시절은 참으로 고독했다.…이 유배의 땅에 서 나는 스 물, 스물 하나, 스물 둘 그야말로 꽃같은 시절을 보냈다’고 회고한 경주로 향한다.
경주까지는 20km. 우리 일행이 달리고 있는 이 길 은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에 몸담았던 목월이 자전거로 출퇴근했던 그 길 이다. 황성공원. 한낮의 더위 속에 서도 청량감을 주는 숲길이 조성된 황성공원 으로 들어서 잠시 걸음을 재촉하자 산책로 한 켠에 자그마한 노래비가 자 리잡고 있다.
목월의 초기 동시 ‘얼룩 송아지’가 새겨진 노래비다. 1968 년에 세워진 이 비에도 어느새 세월의 연륜이 쌓여 있다. 요즘 세운 문학 비 등 과는 외관부터가 다르다. 경주문협은 매년 봄 이 노래비 앞에서 ‘ 목월백일장’을 개최, 목월의 뒤를 잇는문 재의 출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 다. 목월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경주예총 노종내 사무국장과의 약속장 소로 가는 길, 군데군데 고분군이 언뜻언뜻 지나치는 모습에서 여기가 경주 라고 실감한다. 이곳에서 고독한 문학수업기를 거친 목월은 모처럼의 문학동 지 김동리마저 훌쩍 떠나버리자 ‘그러므로 나는 늘 혼자 였다…반 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
실로 내가 벗할 것이라곤 황폐 한 고도의 산천과 하늘 뿐이었다’라고 회고했지만 지 금의 경주는 황폐함과 는 거리가 먼 번듯한 도회지로 변모했고, 그때문에 신라고도 로서의 멋스러움 은 되레 사라진 아쉬움을 남긴다. 노 국장이 건네준 자료에는 정 지용의 추천사도 함께 담겨 있다. ‘북에 김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박목월이 날 만 하다. 소월의 톡톡 불 거지는 삭주 구성조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않아 아 기자기 섬세 한 맛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