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마성을 걷는다. 마성 외어리(外於里)를 걷고 있다. 외어리는 마성의 8개 리 중의 하나이지만, 인구나 면적이 면 전체의 4분의 1을 훨씬 넘을 정도로 마성에서는 가장 큰 동네다. 외어리는 늘목, 안늘목, 가랫골, 연작살 등 이름도 신기한 자연 부락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지역의 최고 교육기관이라 할 중학교와 야생화도 곱게 핀다는 솔숲이 있는 외어1리인 늘목에서 마성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외어4리 쪽으로 걷는다. 세월의 이끼가 검게 낀 굴다리를 만난다. 굴다리 속을 통과하면 좁다란 길을 사이에 두고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동네가 나타난다. 마성에선 제일 번화가일 터인 이 동네가 '연작살'이다. 이름이 하도 이채로와 어느 주민을 만나 유래를 물었더니, "하도 살기 어려워 이 동네는 제비도 참새도 다 굶어죽게 하는 곳이라 그렇게 부른 모양이지요."라고 한다. 그러면 '연작살(燕雀殺)'이란 말인가. 너무도 전율스런 이름―동네의 형상이 제비가 집을 짓는 형국이라 하여 '연작사(燕作舍)'라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고 그 전율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며칠 뒤였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마성에선 이 동네가 제일 큰 것 같네요."
"그렇지요, 왕년엔 이 동네에 역이 있어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지요." 그 주민은 기억 속에 끼어 있는 먼지를 털어 내기라도 하듯 머리를 내저었다.
그랬다. 마성엔 마성역(麻城驛)이 있었다. 굴다리 위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성 사람들의 기억 속에나 있을 뿐이다. 마성역은 점촌에서 문경 사이를 운행하던 문경선의 한 간이역이었다. 화차에 객차를 단 기관차는 문경 일대에서 캐낸 무연탄을 싣고 문경선을 달렸다. 시발역인 문경역 바로 다음 역이 4.9km를 달려와 정거하던 마성역이었다. 마성역에서는 마성의 여러 광구에서 캐낸 무연탄이 실리고, 이웃 마을을 내왕하던 마성 사람들, 그리고 마성을 찾아오고 떠나가던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무연탄은 신현역, 진남역, 주평역, 점촌역을 지나 22.3km의 문경선을 벗어나 가은선, 경북선으로 다시 이어지면서 전국의 산업 현장이나 가정집의 아궁이로 실려나갔다.
광업이 한창 호황을 누리던 1970년대, 그 땐 마성에 사람도 많았다. 그 시절 마성역엔 이별의 서러운 눈물을 뿌리며 새로운 살길을 찾아 도시로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자리를 따라 마성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처음 발을 내린 사람들은 탄가루에 새까맣게 덮인 마성역을 낯설어하며 발걸음 떼어놓기를 서글퍼했지만, 며칠 후면 그들은 탄가루 날리는 역두를 익숙한 걸음으로 오가는 광부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열차가 역에 닿을 때면 수기나 등을 흔들어 열차의 진입을 유도하던 역장은 타고 내리는 승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거나 출퇴근하는 광부들이었다. 늘 대하는 사람들이라 어느 마을 누구인지, 무슨 일로 어디를 다녀오는지 역장은 대충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일자리를 찾아 마성역을 처음 내리던 광부들의 모습에 나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 광부의 모습은 오늘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마성역을 처음 내리던 사람들이 흑색의 광산촌 풍경을 낯설어했으나 이내 탄광을 삶의 터로 삼은 어엿한 광부가 되어 갔듯이, 달라진 삶의 환경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정 두고 살다보면 나 또한 이 터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그 기대와 희망으로 마성을 걷는다. 힘 주어 걷는다.
마성은 문경의 중심 탄광 지구였다. 채탄활동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절, 마성 지역의 가행 광구(稼行鑛區)는 문경 지역 전체 광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고, 마성역을 통해 실려 나가는 무연탄이 연간 2백3십만 톤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면서 석유, 가스 등 대체 에너지의 발달로 석탄 산업은 급속히 사양화되어 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여러 탄광이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최후의 탄광이었던 봉명탄광마저도 1991년 9월 끝내 문을 닫는다. 이로써 마성의 광산업 역사는 막을 내리면서 지역의 인구도 급격히 감소해 갔다. 1970년대에는 1만5천여 명에 이르렀으나 1990년대는 8천여 명, 그리고 현재는 4천6백여 명 정도로 줄어들고 말았다. 네 곳이나 되던 초등학교가 한 곳만 겨우 남고, 한 곳은 분교가 되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수백 명의 학생이 모여 공부를 하던 중학교도 주인을 잃은 책상들이 널브러져 가고, 지금은 백 명도 되지 않는 아이들이 넓은 교정을 적요하게 지키고 있을 뿐이다.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역사가 너무나 무상하게 진행된 것이다.
탄광의 폐광 이후 마성역에서는 석탄이 사라졌다. 문경선을 왕래하던 기관차는 실어야 할 화물은 잃어버린 채, 관광 열차가 되어 하루에 서너 차례 오갔으나 그마저도 1995년4월부터 끊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 문경선 철길은 할 일을 잃고 무성한 잡초 속에서 녹이 슬어 갔다. 지역 사회에서는 지난 시절의 번성을 되찾아 보리라고 대규모의 논공단지를 조성하여 회생을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지난날 번성의 추억을 전설로만 간직하고 있을 뿐 한창 때의 전성(全盛)은 좀처럼 돌아올 줄을 모른다.
역이 있었던 자리를 찾아간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출입로는 지난날 그대로 건만,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출입구는 길다란 장대에 가로막혀 있다. 장대에는 'ㅇㅇ농장 표고버섯 재배지'라는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역사(驛舍)는 자취도 찾을 수 없고, 검은 부직포가 씌어진 커다란 철골 하우스들이 대오를 지우고 있다. 하우스 옆에는 버섯 재배를 위한 참나무 등걸
이 쌓여 있다. 하우스가 들어서 있는 지리가 역사와 저탄장이 있었던 자리일 것이다. 플랫폼이었던 곳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향나무 한 그루가 얼씨년스런 모습으로 지난날의 발자취를 지키고 있을 뿐, 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조립식 건물들이 서 있는 철로 건너편에 시멘트 구조물을 만드는 작업장과 수북이 쌓인 철근 더미가 보인다. 작업중인 인부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골프장 조성에 필요한 구조물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했다. 마성은 지금 봉명산 자락의 골프장 조성 사업을 최대의 화두로 삼고 있다. 시민주(市民株)까지 공모하여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라 한다. 경기 회복을 위한 지역민들의 안간힘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지난날의 영화를 안고 사라져 간 마성역은 오직 녹슨 철길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잡초 마른 줄기만이 자욱한 철길에는 간혹 조그만 새들이 무심히 날아왔다 날아간다. 침목과 자갈은 옛날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건만, 가득한 석탄을 싣고 힘차게 달리던 기관차의 바퀴를 굳건히 받쳐 주던 일을 어쩌면 까마득히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랬듯이 문경에서 이어져온 마성의 철길은 신현으로, 진남으로 뻗어 점촌으로 간다. 그러나 태워야 물건도 사람도 잃어버린 지금은 머리카락 잘린 삼손 마냥 세월도 잃고 힘도 잃은 채, 기약 없이 기력 없이 누워 있다. 세월의 이끼가 된 붉은
녹은 날이 갈수록 그 빛이 짙어지는데 철길 가운데의 자욱한 잡초 사이로 또 다른 길이 나고 있다. 기관차가 아닌 사람의 발길이 침목을 닳게 하고 있는 것이다. 철도(鐵道)가 아니라 보도(步道)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제 할 일을 잃은 채 녹빛 짙어 가는 철길 따라 마성의 역사도 녹슬어 가고만 있는가.
희망은 찾는 자의 것, 만드는 자의 것이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자라나고 있다. 마성에 봄이 오고 있다. 저 남쪽엔 산수유가 벌써 곱게 피어났다던데, 마성엔 지금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려 가고 있다. 마성의 철길에 지금 꽃이 피고 있다. 그대로 녹만 슬어 갈 줄 알았던 철길에 녹이 벗겨져 가고 있다.
탄광이 문을 닫은 이후 줄곧 방치 방치되던 문경선 철로 위로 관광용 자전거가 달리고 있다. 문경시에서 어느 네티즌이 낸 아이디어를 따라 진남역을 기점으로 하여 가은까지 철로 자전거를 운행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에 시범 운행을 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꽃 피고 잎 돋는 봄이 다시 오면 본격적인 운행에 돌입할 것이라 한다. 지금 마성 사람들은 예전의 영광이 되살아 날 것이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문경선의 희망은 그것뿐만 아니다. 수도권과 충북 충주권, 영남권을 연결하는 중부내륙철도 공사를 오는 2008년부터 시작하여 2014년에 완공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충북 충주, 그리고 경북 문경을 잇는 95.8㎞의 중부내륙선 철도는, 문경에서는 문경선을 지나 김천과 영주 사이를 잇는 경북선과 연결된다고 한다. 이 철로가 완공되면 내륙의 물류 기능이 강화되는 것은 물론 지역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마성 사람들은 무엇보다 기뻐하는 것은 영원히 잡초 속으로 묻혀갈 줄 알았던 문경선 철길이 제 할 일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문경선은 마성의 추억 어린 전설인 동시에 아린 상처였다. 그 상처가 아물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사라진 마성역에 봄이 오고 있다. 마성에 봄이 오고 있다. 그 봄 속에 마성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마성 사람들 속에 내가 살고 있다.
세상에 없는 마성역을 아시나요, 봄이 오고 있는 그 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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