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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아는 선생님 구비문학 작업을 도와드린적이 있는데
울산 울주에 살면서 호호 할배 할매 되었을때 손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시리즈로 올려볼란다~~^^
<< 허고개(虛峴) >>
울주문화원 향토연구팀 심 칠 성
Ⅰ. 들어가며
울산(蔚山)에서 언양(彦陽)방면으로 국도를 따라 가다가 범서읍(凡西邑)을 조금 못가서 오릍쪽 길로 이정표를 따라가면 강심에 우뚝 선 선바위(立岩)를 만나게 되는데 태화강(太和江)중류 망성리(望星里)앞 거랑 구비치는 곳에 옥색 물감을 풀어놓은 깊은 여울 가운데에 위풍당당한 풍체를 자랑하며 우뚯 서 있는 바위 신비스러운 절경을 끝없이 뽐내고 있다.
그의 전설을 잠시 들어보면 꼭대기 막내춤에는 동삼(童參)이 살고 있어 종종 여울에 내려와 멱을 감는다고 한다. 또 바위 밑바닥에는 아담한 석굴(石窟)에 푸심(누에고치의 껍데기)을 깔고 이심이(이무기, 천년을 기다려야 용(龍)이 될 수 있는 큰구렁이)가 살고 있어 온갖 수술을 다 부리고 있다고 전하고 있으며 이 선바위는 조물주께서 금강산(金剛山)만물상을 꾸미실 때 나라 안에 있는 자연들에게 명(命)을 내리기를 “자기의 생김새가 제법 유명 하다고 생각되면 아무날까지 모두 모여라” 하고 방(放)을 내렸는데 그 소문을 듣고 울산에 살던 바위 두개가 올라가게 된다, 그 첫째 하나는 한등어리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울산바위하고 둘째는 이 선바위였다. 울산바위는 몸집이 너무 커서 뒤뚱거리며 가다가 설악산(雪嶽山)에 이르렀을때 마감일이 지나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지금까지 살고 있어 망향의 눈물을 짖고 버티고 있는 “울산바위”이고 그 다음 선바위(立岩)는 물결을 타고 금강산을 향해 즐겁게 가고 있는데 그때 마침 이곳에는 과년한 처녀가 서답(빨래)을 씻고 있다가 갓과 탕근을 쓰고 물결을 젖으며 가고 있는 바위를 보고 “바위로 장가가는 가배.....”했드니 그 바위는 그만 사랑하는 마음이 발동하여 처녀를 깔고 앉았는데 바위는 지금까지도 꼼짝을 않는다고 한다. 애틋한 전설을 품고 살아가는 선바위, 많은 사람들에게 한없는 절경의 숭배를 받고 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소녀 소년들이 티 없이 뛰고 즐기며 물장구치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세월의 풍상을 겪고 있는 선바위를 뒤로하고 깊고 깊은 골짜기로 자꾸자꾸 올라가면 평화로운 중리 마을을 지나 돌배나무 밑에 민간 신앙이었던 성황당(城隍堂)이 모셔져 있는데(지금은 흔적이 없음) 여기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한 마음 가다듬어 당(堂) 각시에게 돌맹이 세 개 주어 얹고 인사 드려야 이 고개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고 한다. 이 성황당에 전해오는 전설토막으로는 옛날 옛날 아주 옛날에 중리마을에 밥술기나 뜨는 영감님이 살았는데 어느해 여름 사랑방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당각씨 셋이 내려와 “영감님 영감님 우리집에 천자(天子)님이 계시는데 빨리 모셔가세요 모셔가세요”한다. 영감님은 꿈이 하도 선명하고 괘이하여 삽가래를 집고 돌배나무단에 올라 갔더니 주벗은 거렁뱅이 동자가 자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천자 같지가 않아 그냥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머리위 허공에서 “천자님 맡심더 천자님 맡심더......”하길래 다시 돌아가 “천자님 저희집으로 갑시다 갑시다” 하고 거렁뱅이를 깨웠다. 그랬더니 한참 후에야 부스스 일어나며 “누가 이렇게 소란을 떠느냐”하고 고함을 지르는데 그 음성이 산천이 쩌렁쩌렁 하였다. 그 고함소리와 위세에 질린 영감님은 그저 연상 굽실거리며 동자를 데리고 와 먹이고 입히고 정성을 다해 길렀는데 동자는 부지런하기로 이를 때 없었다. 기특하기 그지 없었는데 늘 왼손은 꼭 주먹을 쥐고 일을 한다. 저게 왜 저럴까 하고 눈치만 보고 거둥만 살피다가 하루는 “천자님 그 손이 아프신가요? 왜 펴지 않으신지요”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갑자기 성을 버럭내시며 “뭐 그리 걱정이 많는교 마 못본채 하고 있시소...”하신다. -----영감님은 더 이상 묻는다던가 눈치를 살피는 일이 없다가 어느해 여름 천자님을 모신지 만 삼년이 되는 날 비는 주룩주룩 오고 있는데 천자님께서 낮잠을 곤하게 주무신다. 영감님은 갑자기 천자님의 왼손에 신경이 쓰여 살짝 한번 펴 보았다. 다섯 손바닥은 병신도 아니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그 손바닥에는 “天子”하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아차 싶은 생각이 쓰칠때 동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영감님의 볼기짝을 사정없이 후려 갈기고 문을 박차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동자는 그 후 걷고 걸어서 중국땅에 들어가 중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천자 황제가 되었다 하고 전해오고 있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해만지면 꼬리 열두 개 달린 여우가 나온다는 물풍덤을 지나 허겁지급 다다르면 해발 약400~500m의 허고개(虛峴)가 나온다. 이고개만 넘으면 두동면 은편리(斗東面 銀片里)이다. 지금은 울산에서 승용차로 오면 약 20~30분이면 충분하지만 예날에야 어디 그랬던가, 걸어오면 한나절은 족히 걸렸던 곳이다. 길도 험해서 궂은 날이면 모랭이 모랭이마다 해군지 하는 짐승들이 우글거렸고 갑자기 튀어 나온 산적들 때문에 한번 왕래하기가 몹시 힘이 드는 고개였다.
Ⅱ. 허고개라 불리워진 내력
신라(新羅) 56代 끝 임금 경순왕(敬順王)은 국력(國力)이 기울어지고 백성들의 마음이 흉흉해짐을 몸소 느껴 호국(護國)의 일념을 불사(佛事)에 두고 왕께서 친히 부처님을 공양할 때였다. 문무백관과 많은 신하들이 례(禮)를 갖추고자 준비하고 있을때 차림새가 남루한 한 비구니(여자스님)가 청하기를 “소승도 같이 禮드리기를 권하옵나이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간곡 하길래 임금님은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때가 때인지라 “저 끝터머리에 가서 합류하여라”하고 간신히 허락하신다. 왕께서는 공양(供養)하는 재(齋)를 무사히 치르고 음복(飮福) 차례에서 비구니가 임금님 곁을 스치고 지나가길래 왕께서는 희롱삼아
“이사람 비구니야...”
“예 대왕마마....” 비구니는 대답삼아 뒤를 돌아보며 대왕을 반기셨다.
“이제 그대가 본대로 돌아가면 친숙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국왕과 같이 부처님께 공양하는 재를 같이 지냈다고 말하지 말게....”
그러자 비구니가 빙그레 웃으시며 말하기를
“전하께서도 이후로는 남에게 진신문수보살(眞身文殊菩薩)을 친견(親見)하셨다고 말씀하지 마옵소서...”
“어허 무슨소리...”하고 왕께서 고개를 치켜드시는 순간 비구니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데 그의 몸에서 광채(光彩)가 발하고 있음을 보고 황급히 당황하고 뉘우치시며 번개처럼 떠오른 영감 때문에 “저분이 문수보살이시다”하고 큰소리치시고 어가(御駕)를 준비하여 뒤를 따라 다다른 곳이 여기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비구니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만다. 임금님은 이곳에서 그저 바람같이 사라진 비구니를 바라만 보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후로 바람같이 사라진 곳을 바랑골(바람)이라 부르고 바라본 곳을 망성(望星)이라 했으며 “허허”하고 한탄했다하여 허고개(虛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한편 못 먹고 굶주린 시절 여기까지 오면 허기가 진다하여 허고개라 불리워진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Ⅲ 허고개의 통곡(痛哭)
허고개를 넘으면 하늘 아래 첫동네 삼동(三涷)안이 있다. 여기는 신라(新羅)가 건국되기 전에 6부 촌장 일행이 다녀가신 일이 있는데 그 후로는 이 곳이 어떤 곳인가 싶어서, 찾는 사람이 자자했다. 그 시절 우시산국(于尸山國) 다전(茶田)에는 다운(茶雲)이란 도령이 살았는데 이 사람은 기골이 장대하고 생각이 깊고 포부가 큰 사람이라 소문난 곳이나 명성이 있는 분이 계시면 직접 찾아다니며 견문을 넒히고 지식을 쌓아 장차 원대한 꿈을 펼쳐보고 싶은 도령이었다. 그는 여나산가(歌)(신라 향가의 시작이라 추정)와 치술령 이야기, 국수봉 은율암을 두루 살펴보고 싶은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다전 마을에서 우릿골을 지나 당고개(서낭당)를 넘으면서 돌멩이 세 개를 주워 조심스럽게 쌓아놓고 소원을 빌었다.
“당각씨님, 저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어 이번 여행길에 푸짐한 수확이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하고 합장하고 돌아서니 해는 벌써 점심 나절을 가리킨다. 인적없는 골짜기에는 보리가 누르스름하게 익어 구수한 떡보리 냄새가 코 안에 가득했다. 흐르는 물소리 이름 모를 산새 소리 훈훈한 바람 소리는 길손의 흥을 돋운다. 하늘에는 솔개 무리가 먹이를 찾아 빙빙 돌면서 도령을 따라 붙는다. 중리골을 지나 물풍딤이를 돌아서면서 막 오르막길을 치닫고 있을 무렵 갑자기 누군가 다운 도령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여보시오, 저 좀 살려 주세요…”
하고 다급하게 애원한다. 곱상스럽게 생긴 글도령같은 분은 한없이 급하고 당황하게 보인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을 살리지요…”
도령이 물었을 때
“길손께서는 저를 못 봤다고만 하시면 됩니다”
하고는 언덕 밑으로 급히 내려가 보리밭에 숨는다. 다운이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려 막 10여 발자국 옮겼을 때 시퍼런 장두낫을 든 수염에 덮인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야 임마, 여기 금방 글도령 한 놈 지나가는 것 봤지?”
하고 큰소리로 다그치며 멱살을 꽉 잡고 낫을 머리 위로 쳐들면서 막 내려칠 것만 같다. 겁에 질린 도령은 숨통이 금방 멎을 것만 같은 절박함을 느끼면서 눈으로 보리밭을 가리켰다. 그 사람은 한 걸음에 뛰어간다. 그리고는 글도령을 잡아내어 단숨에 목을 치고는 쏜살같이 달아난다. 다운 도령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고 또 뛰어 허 고개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한숨을 길게 쉬고 처참했던 그 곳을 바라보니 솔개 무리가 새까맣게 하늘을 날고 있다. 하루 해는 벌써 맞은편 산 꼭대기에 걸려 있다. 다운은 그때야 비로소 발길이 허둥거리고 가슴이 뛰고 있음을 느낀다.
음변(은편) 마을을 지나면서 하룻밤 잘 곳을 찾으니 장재밭 건너 양지 마을에 서당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 곳을 찾아 훈장님께 간신히 허락을 받고 방구석에 주저앉았다. 등불이 켜지고 글공부하는 아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왁자지껄하던 방안은 훈장님의 드심으로 조용해지고 글공부는 시작된다. 밤이 제법 이슥해서야 가르치고 배움은 끝이 났는데도 다운은 꼼짝을 안했다. 떠들고 글 읽는 소리는 전혀 안 들렸고 낮에 겪었던 그 광경때문에 한없이 괴롭다. 아이들은 뿔뿔이 돌아가고 꼬맹이 두서넛이 남아 오늘 공부한 것을 서로 복습하면서 희희낙락하고 구워온 감자를 산보따리를 풀어 헤쳐놓고 다운 도령에게도 어른 대접으로 한 개 드시라고 권한다. 예절이 퍽 밝은 아이들이다. 도령은 공부는 웬만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복습하는 문장은 훤했다. 감자를 한 개 받아먹던 다운 도령은 그제서야 시장기를 느끼면서 ‘한 개 더 없나’ 하고 두리두리 살핀다. 그 중 한 아이는 다운 도령의 눈치를 퍼뜩 알아차리고는 부리나케 집에 달려가 주섬주섬 먹을 것을 차려온다. 식은밥 한 덩이, 피감자 조금, 그리고 열무김치 한 사발이었다. 다운 도령은 이것 저것 가릴 틈도 없이 한꺼번에 버무려 눈 깜짝할 사이 먹어 치웠다. 그제서야 눈이 빤히 뜨이는 것 같았다. 얻어먹은 댓가로 아이들이 복습하는 것을 도와주고 아이들과 친해진 후 낮에 일어났던 일을 옛날 이야기처럼 꾸며서 들려주며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세 사람이 모두 다치지 않고 목 숨을 건질 수 있었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셋 중에 제일 작은 꼬맹이가 불쑥 대답하기를
“그 때 과객은 짝대기(지팡이)를 짚고 있었능교…”
하고 묻는다.
“물론,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
“그렇카믄 문제는 간단했심더.”
“어떻게 간단했느냐?”
“그야 뭐 눈을 꽉 감고 봉사짓만 했시믄 안됐능교”
다운 도령은 여기까지 듣고는 얼굴이 화끈해오고 가슴이 펄떡펄떡 뛰고 있음을 느낀다. 경험 없고 재치 없던 자신을 원망했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밤을 지샌 그는 그 놈 험상궂은 살인마를 내 손으로 잡아 억울하게 돌아가신 그 분의 원한을 풀어줘야겠다고 맹세했다.
Ⅳ. 허고개의 아름다운 용서
다운 도령은 날이 새면서부터 어디서부터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될지 막막했다. 뾰족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 훈장 어른께서 큰기침을 지르시며
“이 사람아! 일어나셨는가!”
하시며 서당 방문을 벌컥 여신다. 다운 도령은
“예”
하고 대답하며 어른을 맞았다. 훈장 어른 뒤에는 아침 밥상을 든 십사오 세 되어 보이는 댕기머리 처녀가 서 있다.
“이 사람아! 얼른 받게…”
하고 재촉하신다. 도령은 밥상을 받으면서 댕기머리 처녀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이었다. 참 예쁘다고 느꼈다. 흰 깨끼저고리에 검은색 통치마를 입고 짚신을 단정하게 신었다. 가슴은 뛰고 황홀했다. 짧은 만남에 깊은 생각은 끝이 없었다. 그저 멍하고 있을 때
“이 사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노? 국 다 식겠네…”
하셨을 때 그제서야 구수한 시래기국 냄새가 코를 찌른다. 훈장 어른은 같이 겸상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물으신다.
“그래, 양친은 다 계시는가?”
“예”
“농사는 많이 지으시는가?”
“예, 논농사는 좀 짓고 주로 밭농사를 많이 합니다. 그 중에는 차(茶)농사도 짓습니다.”
“아이고, 꽤 바쁘겠구나”
“그래, 형제는 많으신가?”
“예, 제가 둘째로 위로 형님 한 분, 여동생 둘, 모두 사남매올시다.”
“장가는 들었는가”
“아닙니다. 아직 미혼입니다. 형님만 결혼했심더.”
다운은 혼기가 꽉찬 당년 열여덟이었다. 그 시절은 혼인 적기였다. 여기까지 묻고 답하는 동안 밥 한 그릇이 후딱 비워졌다.
“곱단아! 숭늉 두가.”
숭늉이 들어오고 밥상이 물러갔다.
“내 말일세, 자식이라곤 저것 하나 밖에 없네”
훈장 어른은 좀 서글픈 표정으로 한숨을 지으시며 장죽에 담배를 넣고 화로에 묻으신다.
“본 이름은 뿌뚜일세, 위로 딸 셋, 아들 둘을 잃고 저거 하나 붙잡았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곱단이라고 불러 줘 지금은 그렇게 부른다네. 할망구도 저 애 핏덩일 때 가슴에 한을 담고 떠나 버렸지”
듣고 있는 다운은 훈장 어른이 측은했다. 그 시절 그때는 아이들의 생명을 건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홍진(홍역), 손님병(마마), 날수 많은 병(장티푸스), 이짐(이질)같은 돌림병이 한 번 지나가면 면역이 약한 아이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다운은 훈장 어른을 돕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어난다. 어른의 신세 타령은 계속된다.
“내 나이 올해 일흔일세. 언제 갈지 모르는 고희에 자나 깨나 걱정일세. 여보게 젊은이, 나 좀 도와주게. 어젯밤 늦게까지 아이들에게 글 다루는 소릴 들었네. 내 뒤를 좀 이어주게”
어른은 돌아앉아 정색을 하시며 다운의 손을 잡는다. 다운은 생각하고 망설일 겨를도 없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어른과 약조를 했다. 그 날부터 낮에는 그 집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아이들 글 가르치는 절차를 하나하나 훈장 어른으로부터 물려받아 훈장일에 전념했다. 아이들은 젊고 패기에 찬 새 훈장을 잘 따라 주었다. 다전 본가에는 왕래하는 인편에 소식을 종종 전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니 풍년을 맞은 나락 수확이 푸짐했다. 거기다가 글 새경을 받아 모으니 조천 부자가 눈 아래 보였다. 가을이 저물어 찬바람이 일면서 훈장 어른은 날이 다르게 건강이 나빠지신다. 첨안(기침)에 불면증까지 겹쳐 기어이 자리에 눕고 마신다. 그 해 동짓날 늦은 밤에 훈장 어른은 딸 곱단이와 다운을 불러 놓고“
“내가 숨을 거두기 전에 우리 곱단이와 가례를 치러 주게”
하고 권하신다.
“곱단아! 잘 듣거라, 다운 훈장을 지아비로 맞아 한 평생 행복하거라. 에미 없이 자란 불쌍한 것…”
훈장 어른께서는 딸과 다운의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을 지으신다. 둘은 그날 밤 오랫동안 어른께서 들려주시는 당부의 말씀을 듣고 물러 나오면서 서로를 위하여 사랑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3일 후, 다운은 다전(茶田) 본가에 기별하고 동네 어른들을 모신 자리에서 간략한 가례를 치르고 신접살림에 들어갔다. 그 후 이틀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훈장 어른은기어이 세상을 뜨셨다. 이 소식을 듣고 산 넘어 당산골에서 손님 내외분이 오셔서 슬피슬피 우셨다. 다른 사람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먼길에 오신 그 분들만 자리를 뜨지 않으신다. 날은 저물고 아이들이 없는 빈 서당방에 그 분 내외를 모셨다. 그 날 밤, 손님 내외분은 할 말이 있다면서 다운을 청하신다. 그 분들은 다운의 옷자락을 잡으시며 지난 봄 외동아들이 서당에 간다면서 집을 나간 후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고 소식이 없단다. 다운은 섬찟하면서 머리에 급히 스쳐가는 허고개 사건이 떠오른다. 설마하는 생각으로 신방에 들어가 잠을 청하였으나 영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못 자 뒤척거리는 신랑을 보다못해 각씨 곱단이는 왜 잠을 못 자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다운이는 서당 방 내외분의 시름에 겨워 슬퍼하시던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곱단이는 벌떡 일어나면서
“아버지께서 지난 초여름 말씀하셨어요. 당산에 있는 그놈이 통 안 보인다고 그러시면서 나는 그 놈을 너의 배필감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신 후 아버지께서는 더욱 건강이 나빠지시고 일손을 놓으셨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다운이는 허고개의 참상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며 사건의 전말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빨리도 흘러 벌써 십오륙년이 흘렀다. 자식도 아들 하나, 딸 둘을 낳고 또 하나 아내의 뱃속에서 자라는 중이었다. 그 동안 많은 제자들도 길러 냈다. 그 중에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여러 기관에서 충성을 다하는 제자도 여럿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마음속에는 그 옛날 허고개 사건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사로국 촌장이 돌아가셨다면서 제자 여럿이 다운을 사로국 촌장으로 추대한다. 다운은 뜻밖에 촌장이 되어 선정을 베풀기 시작한다. 배고픈 이는 쌀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겐 옷을 줘 나라를 다스리니 모든 백성이 평화롭고 자유로웠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겐 한을 풀어 주고 베풀고 사는 사람에겐 상을 내리며 사오년을 지냈다.
그러나 마음 속 한구석에서 풀지 못한 허 고개 사건에 대한 일을 이어이 착수했다. 집을 나간 사람의 인상착의, 또 갑자기 이사를 하고 소식이 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했다. 많은 사람이 수사 대상에 올랐는데 그 중에는 당산에서 집 나간지 십수년이 되고 전에 장인 어른의 서당에서 공부하다 소식이 없는 그 젊은이에게 대한 집중 수사를 했다. 인상착의가 허고개 사건과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때쯤 돌쇠라는 이가 장가를 늦게 들어 서당 근방에서 글공부하는 아이들의 밥을 해주며 살았는데 갑자기 없어지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단다. 인상착의를 탐문해 보니 수염이 텁수룩한 점이 수상했다. 물어물어 행방을 찾았더니 언양에서 청도로 넘어가는 운문산 깊은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이미 환갑을 넘긴 늙은 노인이었다. 촌장 앞에 끌려온 그는 그날 일을 낱낱이 실토했다. 지난 일을 한없이 뉘우치는 눈물을 비오듯 흘린다.
돌쇠네는 사건 당일 점심을 지으려고 나무를 고르다가 투껍지에 손이 찔린다. 이를 본 그날 피해자는 나무 투껍지를 뽑아주고 된장을 발라 헝겊으로 싸매 주었다. 이 때 나무를 내리던 돌쇠는 자기 아내의 손을 잡고 있는 도령을 나뭇짐에 꽂혀 있던 장두낫을 뽑아 그 자리에서 쳐죽이려고 달려든다. 이에 겁에 질린 그는 달아나기 시작한다. 결국 허고개까지 가게 되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촌장은 그 글방 도령의 부모를 불러 위로하고 죽은 아들의 넋을 달래주는 영가 굿을 올려준다. 예나 지금이나 죄짓고는 못 산다는 교훈을 뿌리깊게 심어주는 이야기다. 글 도령 부모는 다운 촌장께 간청하신다.
“촌장님, 돌쇠를 벌 준다고 죽은 내 자식이 살아오리까, 돌쇠를 그냥 돌려보내 주세요. 잠시나마 가족들과 남은 여생을 지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간곡한 청에 촌장도 어쩔 수 없어 돌쇠를 용서하신다.
Ⅴ. 허고개의 역사적 考察
(1) 신작로( 新作路)
본래의 길은 경순왕(敬順王)께서 다녀가신 곳으로 매년 7월 달이면 숲안, 밤골, 은편, 지지 마을들이 구간을 배분하여 분담된 지역은 부역으로 다듬어왔다. 말(馬)을 타고 다닐 수 있고, 가마 행렬이 충분이 다닐수 있도록 관리해 왔다.
서기 1900년대에 들어오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자기네들의 편리를 위해 신작로를 만드는데 1차로 두서면 인보 입구에서 허고개 까지를 개통했는데 이곳의 산(山)을 잘라야 했다. 연화산(蓮花山)에서 솥발산을 이어 국수봉(菊秀奉)까지 연결된 허고개의 잘룩이를 깊이 약 10여m, 길이 약 200여m, 너비 약 50여m를 끊고 잘라 지금의 도로를 만들 것이다. 이 신작로가 군도 31호선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공사를 할 때 이곳에 장정 팔뚝서리만큼 굵은 쇠말뚝, 깊이는 약 석자(1m)정도 되는 것이 여러 개 나왔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사람(일본)들은 임란이후 우리나라의 명당(明堂)이란 명당은 모두 쇠말뚝을 몰래 박아 혈맥을 끊어놓고 영원한 자기네의 식민지를 꿈꾸었던 것으로 상상된다. 참으로 몹쓸 민족이다.
(2) 적석총(積石塚)
다시 돌아가서 허고개에서 경순왕이 다녀가신 길 북으로 약 10여m 지점 오른쪽에 크다란 돌무덤이 있었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눈짐작으로 지름이 한 20여m는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동쪽으로는 작은 제단(祭壇)이 차려져 있고 술잔이 두어 벌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떠오른다. 어른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로는 이 돌무덤의 돌 한덩이라도 건드리면 큰 재앙을 입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돌무덤의 돌은 1960년도이후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환경 개선책으로 울타리를 없애고 돌담을 쌓기 위해 무지(無知)한 사람들이 몽땅 싣고 가버렸다. 그때만 해도 민도가 낮고 전해오는 문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저질러진 일이라 여겨진다. 적석총이 조성된 것은 부족이나 대 부대가 이동할 때 갑자기 장수나 그 무리의 실력자 또는 일행이 급사하면 돌로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듣고 있다. 울산 지방에는 이 적석총이 여러 군데 발견되고 있는데 웅촌면 대대리의 적석총이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허고개의 적성총도 하루 빨리 복원이 되어 소중한 우리 문화를 길이길이 보존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앞선다. 적석총이 위치했던 산은 지간뒷산(솥발산.와불산)이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3) 지잔물탕
경순왕(敬順王)께서 문수보살을 친견 못하시고 허허로운 낙심에 차 계실 때 찬물 한 그릇 드신 곳이 지잔물탕이다. 한여름일수록 물이 찹고 3~4m 남직한 낙수물인데 물의 양은 대여섯살 먹는 어린아이의 팔둑 굵기만 했다. 한여름 땀때기(땀띠)와 피로회복, 특히 산후 조리에 특효였다. 뼈골 쑤시는데 찬물을 덮어쓰고 입술이 파랗게 멍들때 쯤 뜨거운 미역국 한 그릇 훌훌 마시고 절절 끊는 방바닥에서 다시 한번 땀을 푹 흘리고 나면 온몸이 가뿐해지고 피로가 확 풀린다고 했다. 60년대 전만 하여도 지잔물탕 물 맞으러 다니는 사람으로 아래 윗길이 꽉꽉 막혔었는데 모텔이 생긴 이후로는 물 맞는 발걸음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옛날에야 아낙네는 콩밭 뿌리 내려놓고 남정네는 막논 짚신짝 한곳에 모아두고 해거름 다시 이곳에 모여든다. 삼복땡볕에 쇠파리에 쏘이신 땀때기에 진물나면 이곳 물탕물이 제격이었다. 아이들이야 어찌 저녁나절에 물맞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어른들 다 맞고 난 후, 한밤중쯤 되어야 꾸역꾸역 모여든다. 그때만 해도 물탕 바닥으로 가는 길은 칠흑같은 어둠이었는데 그래도 그놈에 반딧불이가 여러 마리 비쳐주는 바람에 쉽게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 한 토막은 밤이 이슥하여 따끔거리는 땀띠 잡으려고 물탕을 찾았다. 언제 왔는지 인근에 있는 친구 대여섯이 모였다. 밤이 늦어 주인의 눈을 피해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왔더니 젊은 여인들의 목소리가 찰랑찰랑 들려온다. 우리는 모두 선녀나 만난듯이 물탕주위를 애워 샀다. 소나무 판자로 가리개 울타리를 했는데 물탕 안에서는 그 고운 목소리가 소근소근 흘러나온다. 모두가 사춘기에 접어든 우리는 얼마나 호기심에 찾겠는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체를 보고 싶었겠는가? 숨소리를 죽이고 한참을 바라보며 상상하며 반딧불이의 연약한 빛 속에서도 그들의 아름다움은 환하게 보인다. 누구의 짓인지도 모른다. 아! 하는 신음소리 때문에 여인들은 한 목소리로 한밤의 적막을 찢고 말았다. 주인집에서는 등불, 손전등, 몽둥이를 들고 대여섯 내려온다. 그 뒤를 여자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한놈도 남구지 말고 다 잡아 죽여라”
우리는 무서웠다. 뿔뿔이 사방으로 우당탕탕 도망질 했다. 얼마나 피해왔을까. 허고개 만댕이에서 그래도 모두 만났는데 긁히고 찢어지고 신발도 벗겨진 채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모기에 실컷 뜯기면서 눈한번 부치고 새벽녘에야 지기집에 돌아왔다
(4) 지지(知止)부락과 국수봉(國讐奉)
허고개(虛峴) 아래로 깊숙히 빠져있는 작은 동네를 지지(知止)라고 한다. 이 마을은 앞산으로 국수봉, 뒷산으로 솥발산(와불)으로 이어지는 오목한 한 송이의 작은 연꽃(蓮)으로 본다면 등넘어 있는 삼동안은 큰 연꽃으로 추정된다. 글자를 쓰기로는 알지(知) 끝지(止)자를 쓰고 있다. 문헌을 찾아봐도 속 시원하게 설명해 놓은 것은 없고, 듣고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아는 사람 즉, 학문을 하는 사람은 여기서부터 끝이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신라(新羅)당시에는 모든 문화와 학문은 서라벌(경주)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주위로 번져간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락에는 국수봉 밑에 진(陳)참봉이란 분이 살았는데 그분은 당대에 700석을 했다고 전한다. 비좁은 골짜기에서 700석은 엄청난 수확이었다. 북쪽편으로 숲안이란 동네에는 진(陳)씨의 집성촌이다. 지지부락 앞산이 국수봉(國讐奉)인데 육부촌장이 화백제도를 결의해놓고 두동면 삼동안이 지세가 뛰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도읍을 정하려고 답사차 오시는데 국수봉산이 뒤로 돌아앉아 나라에 해를 끼칠것이다하고 결론을 짓고 나라국(國) 원수수(讐)자를 썼다고 전해온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이 산은 국사봉(國寺奉)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신라 이후 많은 절이 이산에 있었다는 뜻이 되며 지금도 많은 곳에 절터가 남아 있다.
지지 뒷산은 솥발산(와불)산이고 공부하는 서당도 있었고 절도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지금 이 부락은 농가 호수 34가구로 평화롭게 살고 있고 지하수가 으뜸이라 음심점(가든)들이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모텔과 찜질방도 운영되고 있는데 농촌에 과연 이것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봄에서 가을까지 산나물이 많아 외부인들의 발길이 잦으며 물이 좋아 외부인들이 물떠러 자주온다.
국수봉(國讐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산맥)을 방아제라 부르는데 흡사 국수봉 봉우리가 디딜방아 머리통을 연상케 하고 방아제는 발가벗은 사람의 보드라운 궁댕이로 보인다. 이곳에 올라가 동해바다를 바라보면 대마도섬이 한눈에 보이고 일본본토가 안개에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어느 군수님은 이 부락을 반딧불이 서식지로 만들 계획을 세워 발표하신적도 있었다.
(5) 끝맺음을 하며
지금의 허고개는 많은 차량들의 왕래가 잦다. 봉계지방의 한우단지 발달로 풍요로운 식생활을 영위케 하고 있고 산업화 사회에서 물동량 배달의 수단으로 극히 현실적으로 대구, 서울 등지의 지름길이 되고 있다.
이 글을 쓴 동기로는 어릴때 서당에서 훈장님에게 들은 것과 이 고장에 사셨던 연로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모아 꾸며 보았다.
(2005.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