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도자기를 만들려고 한다고 하여보자. 이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지식은 무엇일까. 도자기를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의 사용법일까. 아니면 도자기를 만드는 기본적인 원리일까.
도구의 사용법을 모른다 하여도 도자기를 만드는 원리를 안다면 도구야 자신이 편리한대로 사용하여 도자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구의 사용법만을 알고 도자기를 만드는 법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도구 또한 유효 적절하게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구의 사용법보다 도자기를 만드는 기본적인 원리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불교용어나 불교철학 등은 부처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기초부터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어려운 불교용어나 불교철학이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도자기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그 원리를 터득하고서야 도구를 잘 사용할 수 있듯이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 나면 불교용어나 불교철학도 쉽게 이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싯다르타 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여 준 대자대비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면 의아해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님이 되신 것은 싯다르타 태자의 처절한 수행정진의 결과이고 그렇게 부처님이 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불교인데 그러한 석가모니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서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신 것이 오로지 그 분이 열심히 수행정진하신 결과인 것일까.
우리 앞에 유리컵이 있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 컵을 필자가 집어 던져서 깨뜨렸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필자가 유리컵을 깨뜨렸다고. 하지만 과연 필자가 유리컵을 깬 것일까. 만약 그 컵이 유리가 아니라 쇠로 되어 있었다고 가정하여 보자. 아니, 깨어질 수 없는 성분으로 된 컵이라고 가정하여 보자. 그러면 필자가 아무리 집어 던졌다 하더라고 그 컵은 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컵이 깨어졌다는 것은 컵 그 자체가 깨어질 수 있는 성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성분은 깨어질 수 있는 연을 만났기에 깨어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본다면 필자가 유리컵을 깬 행위도 그 행위의 표면에 나타난 모습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필자가 컵을 깼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내면에 있는 깊은 모습을 관찰하여 이야기한다면 유리컵은 그 연이 닿으면 그 누구에게나 깨질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가 필자와 그 연이 닿아 깨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으신 깨달음이 본래 깨달아 질 수 없는 것이라면 싯다르타 태자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깨달아져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이 싯다르타 태자에 의하여 깨달아졌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 그 자체가 깨달아 질 수 있는 연을 만나면 언제든지 깨달아 질 수 있는 성질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싯다르타 태자가 깨우치신 진리의 모습도 또한 누구에게나 그 연이 닿으면 깨닫게 할 성질을 가지고 있다가 싯다르타 태자라는 연을 만나서 깨달아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할적에 싯다르타 태자가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싯다르타 태자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연이 싯다르타 태자를 만나 싯다르타 태자로 하여금 석가모니부처님이 되게 하였고 그리고 그 작용은 지금도 모든 이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이란 싯다르타 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진리(부처님)의 대자대비이고, 그리고 그 대자대비는 지금도 모든 중생들에게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은 이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마음을 보다 쉽게 전달하시고자 그 당시에 있던 인도철학과 그 철학용어들을 도구로서 사용하셨던 것이다.
지금도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부처님의 마음, 이러한 부처님의 마음은 세살박이 어린이부터 저명한 불교학자까지도 모두가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실천할 수가 있다. 그러기에 불교란 어렵기로 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기로 하면 한없이 쉬운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일자 무식장이도 부처님의 마음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불교철학에 능통한 불교학 박사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마음을 모른다면 이해할 수가 없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불교의 용어나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한다는 혹자들의 말은 참으로 언어도단인 것이다.
불교는 소련의 과학자들이 우주에 우주선을 띄우는데 불경을 참고하였다는 말이 있듯이 과학을 탐구하는 수단으로 접한다면 얼마던지 과학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문학가가 문학을 탐구하고자 하여 경전을 읽는다면 불교의 경전은 얼마던지 고대인도의 문학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경제학자가 불경 속에서 경제의 새로운 논리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불교는 얼마든지 거기에도 답해 줄 수 있다.
이렇게 불교를 과학으로 문학으로 경제학으로서 배운다고 한다면 불교는 얼마든지 과학이 될 수도 있고 문학이 될 수도 있고 경제학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과학이고 문학이고 경제학이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은 과학자로서 문학가로서 경제학자로서 경전들을 설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지고자 하시는 일념으로 경전을 설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과학으로서 문학으로서 경제학으로서 공부한다면 그것은 과학이고 경제학이고 문학이지 불교는 아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세로 불교를 공부한들 이들이 불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불교를 과학으로서 문학으로서 경제학으로서 연구하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이들에게 있어서 먼저 필요한 지식은 부처님의 마음이 아니라 불교의 용어나 불교의 심오한 철학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용어나 철학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문제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불교를 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부처님의 마음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용어나 불교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에 대한 기본 용어나 기초지식은 불교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마음을 모르고 그 용어들이나 기초 지식들만을 알적에는 그러한 지식들이 부처님의 마음을 느끼려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해한 언어의 정의 내에서만 부처님의 마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기초가 될 수 있는 불교입문서란 불교의 용어나 기초교리 등을 알기 쉽게 풀이 해 놓은 글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로지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쉽게 풀어놓은 글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시중에 나돌고 있는 불교입문서들은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불교의 용어나 그 철학을 쉽게 풀이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쉽게 풀이하여 진짜 불교의 입문서가 될 수 있는 입문서를 써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 한 권의 불교 입문서를 쓰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 입문서는 불교의 용어나 불교의 기초지식을 풀이 해 놓은 여느 일반 입문서와는 그 종류를 달리 하고 있다.
만약 독자들이 이 글을 통하여 부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느낄 수 있다면 이 글은 불교입문서로써의 그 역할을 아주 훌륭히 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제2강 종교란 무엇인가?
불교도 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판단하여야 우리가 불교를 종교로서 가지고 산다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한 정의는 무수히 많이 있다. 그 중 필자가 가장 이해하기 쉬웠던 종교의 정의는 미국의 종교학자인 디리히의 "종교란 궁극적인 관심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종교란 그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에다가 두는 이가 있다면 그의 종교는 돈이 될 것이고, 명예에다 두는 이가 있다면 그의 종교는 명예가 될 것이고, 권력에다가 두는 이가 있다면 그의 종교는 권력이 될 것이고, 사랑에다가 두는 이가 있다면 그의 종교는 사랑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자기자신의 종교가 불교라는 것은 자기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두고 산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땅에 불교신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돈교신자가 아니면 명예교신자, 사랑교신자 , 권력교신자 이러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설사 불교신자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들도 사실은 불교가 아니라 스님교신자가 아니면 절교신자, 아니면 영험교신자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추종하는 스님이 자신에게 어떠한 특별한 가르침을 준 것도 아니고 제대로 말을 붙여 본 것도 아닌데 남들이 큰스님이라니까 남의 말만 듣고 그냥 추종하는 이들, 이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큰스님이니 이들의 종교는 불교가 아니라 스님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절에 가서 고작하는 일이라고는 법당에 들어가서 절이나하고 법회때는 축원문을 읽는가 어쩌는가 그것만을 확인하러 다니면서도 큰 절만을 찾아 다니는 이들의 인생에 있어서도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큰 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이들의 종교도 또한 절교이지 불교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영험이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는 이들의 인생에 있어서도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영험이니 이들의 종교 또한 불교가 아니라 영험교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종교를 불교로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 불교신자 즉 불교를 종교로서 살아가는 가장 모법적인 모습인 설산동자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여 보겠다.
설산에서 수도하는 한 동자가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도에 전념하고 있었던 어느날 어디선가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제행무상(諸行無常)], 이세상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네[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 구절이 들려왔다.
동자는 그 심오한 진리의 말씀에 너무나도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그 진리의 말씀을 한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발 밑에서 자신의 육신과 피를 탐내는 나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동자는 나찰에게 물었다. "지금의 진리의 게송은 당신이 읊으신 것입니까?" 그러자 나찰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동자는 계속해서 "그러면 그 다음 구절도 알고 계시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진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수년을 설산에서 수행하여 왔지만 그대의 게송과 같은 진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알려 주시면 저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것 같으니 간절히 청합니다."라고 나찰에게 그 다음 법문을 들려 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러자 나찰은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겠다. 만약 내가 그 다음 구절을 일러준다면 그대의 뜨근뜨근한 살코기와 피를 나에게 주겠는가? 그러면 내 일러주마"라고 말했다. 설산동자가 "그러마" 라고 약속을 하자 나찰은" 이 도리를 인정하면 그것이 고요한 열반의 세계로다[열반적정(涅槃寂靜)]"라고 그 뒷 부분의 게송을 읊어 주었다.
이 게송을 들은 동자는 너무 기뻐서 이 바위 저 바위를 뛰어 다니며 이 문구를 바위에 세겨 놓고 난 다음 그 몸을 나찰에게 던졌다.
이 설산동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육신이 아니었다. 진리를 깨닫는 것 그것이었다. 그러기에 동자는 그 진리의 한 구절을 듣기 위하여 자신의 육신을 나찰에게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설산동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즉 우리가 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만약 지옥에 있다면 지옥이라도 갈 수 있는 마음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의 살과 피를 먹고 사는 나찰이 설한다 하여도 가서 들을 줄 아는 마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마음, 그러한 마음을 지닌 이를 우리들은 불교신자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불교를 종교로서 가지고 산다는 것은 정법을 위해서는 이 목숨도 바칠 줄 아는 마음 즉 순교할 줄 아는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절의 건물을 보고 절에 다니면서 스스로를 불교신자라 자청하고, 특정한 스님만을 따라 다나면서 자신이 불교도임을 주장하며, 영험만을 쫓아 다니면서도 자신의 종교가 불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가 불교신자임을 자청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에게 정법과 사법을 구분할 힘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이 가진 가치관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 나아가서는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개인의 바른 가치관 즉 바른 종교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지 못한 종교와 신앙은 자신이 죄악을 범하면서도 그 죄의식을 마비시키고 또 자신의 주변까지도 죄의식에 마비되게 하여 이 사회를 커다란 혼란으로 빠뜨리고 우리들을 불행으로 몰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돈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가정하여 보자. 디리히의 종교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이 사람의 종교는 돈이 될 것이다.
돈이 종교인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려고 하여 부자를 보면 부러워하고 가난뱅이를 보면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 중에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경외의 눈빛을, 돈이 없는 이에게는 경멸의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경멸의 눈빛보다는 경외의 눈빛을 받기를 원하는 법이니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은 경외의 눈빛을 받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고, 그러면서 그들도 그와 같이 변해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돈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심지어는 돈으로 행복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돈에 빠져든 집단을 탄생시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난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부유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보여지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아니한가.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는 무시하고 부유한 국가에서 온 사랍들에게는 경외의 눈빛을 보내고 있지를 않은가. 그리고 우리들 또한 다른 집단으로부터 경외의 눈빛을 받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사고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달아 여러 가지 사회의 병폐를 낳아 끝내 우리들을 패망으로 몰고 가고야 말 것이다.
또 세계 역사 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을 보라.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되어진 가치관 즉 잘못되어진 종교에 한 집단이 빠져들어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지나친 민족주의 그리고 평화주의 정의로움이 우리들에게 수 많은 죄악을 범하게 하고서도 우리들에게 그것들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게 할 조그마한 양심까지도 마비시키지 않았던가.
일본의 대동아전쟁, 나치스의 유태인학살, 공산주의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역사. 그리고 저 청교도들과 천주교인들이 아메리카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하여 지금은 씨를 말려버린 역사들이 이 모든 사실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가 다 우리들을 평화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되어진 종교는 우리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에게까지도 고통을 안기고 패망으로 이끌면서도 거기에 대하여 조그마한 죄의식도 느낄 수 없도록 우리들의 양심까지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른 종교를 갖는다는 것 그것은 나 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 나아가서는 이 인류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종교관 다시 말해서 어떠한 가치관이 올바른 것일까.
하루는 어떤 이가 절에 와서 필자를 보고 교회를 나오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그 교회에 나가면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더니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 하시는 안수 가도는 대단히 염검하여 목사님의 안수기도 후에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그러면 그 장님이 육신의 눈만 뜨고 마음의 눈은 뜨지 않더이까”하고 물어 보았더니 “마음의 눈은 모르겠지만 육신의 눈이 뜨였으니 차츰 마음의 눈도 열리겠지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육신의 눈이 뜨인다고 반드시 마음의 눈까지 열린다고는 볼 수 없지요. 육신의 눈을 뜬 이들도 마음의 눈을 못 떠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데 그 사람이 지금 육신의 눈이 열렸다고 해서 어찌 마음의 눈도 열렸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사람은 육신의 눈이 어두울 때는 못 볼일은 보지 않고 살아도 되었지만 이제 육신의 눈이 뜨였으니 못 볼일도 많이 볼 것이니 아마 마음의 눈은 더욱 열리기 힘들 겁니다. 종교의 참다운 기적은 육신의 눈을 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은 뜨지 못했어도 마음의 눈을 열러 열심히 살아다는 모습을 눈이 성한 이들에게 보여주어 그들이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이 그렇다 육신의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다리가 절름발이고 말을 못하는 등의 신체 장애는 죽으면 다 없어진다. 아무리 죽을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그 병도 죽으면 모두 없어진다. 또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죽으면 모두가 없어진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멀고 마음의 귀가 멀고 마음의 다리가 절름발이고 마음의 입이 닫혀 있는 이는 죽어서도 장애인이다. 그리고 마음이 병든 이는 죽어서도 환자이며 마음이 가난한 이는 죽어서도 가난할 수 밖에 없다. 또 마음의 눈이 먼 이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못 볼 것만 보고 살면서 죄를 짓지만 마음의 눈을 열고 육신의 눈이 먼 이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눈이 멀었음을 일깨워 주는 삶을 산다. 그리고 마음의 귀가 먼 이는 육신의 귀를 가지고 들어서는 안될 소리만 들어가면서 죄를 짓는다. 하지만 마음의 귀가 열리고 육신의 귀가 먼 이는 우리에게 마음의 귀가 멀었음을 깨닫게 하는 삶을 산다. 마음이 병든 이는 육신이 건강하여도 그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죄만 짓고 살아간다. 하지만 마음이 건강한 이는 육신의 병이 들었어도 건강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마음이 병들었음을 일깨워준다. 또 마음이 가난하고 육신이 부유한 이는 자신의 부유를 가난한 이의 재산을 빼앗는 것에 사용한다. 하지만 육신이 가난하더라도 마음이 부유한 이는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삶을 살면서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어 준다.
진정한 기적이란 마음의 장애를 마음의 질병을 그리고 마음의 가난을 없애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루는 어떤 이가 와서 자신의 종교를 필자에게 믿으라고 권하면서 “이제 곧 심판의 날이 다가와서 세계는 멸망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재앙이나 자연재해 등이 바로 심판의 날이 왔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날이 와도 우리 종교를 믿는 이들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은 불구덩이 속 지옥으로 떨어져 한없는 고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물어보았다. “교통사고로 가족이 모두 죽고 혼자 살아 남으면 죽은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다, 산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길래 “저는 세상의 멸망이 찾아와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중생들이 다 살아지고 폐허가 된 곳에서 혼자서 살아 남기 보다는 차라리 같이 죽기를 바랍니다. 그 쓰레기며 또 재건하느라 죽도록 고생만 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또 천상에 사는 중생들은 수승한 육신을 가지고 산다고 들었는데 저도 천상에 갈 때는 지금의 육신은 버리고 그들과 같은 수승한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종말이 오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또 당신 말씀대로 당신의 종교를 믿지 않아서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하여도 후회는 안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을 해보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지옥을 모면해 보려는 마음이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만일 내가 부처님을 믿다가 지옥에 떨어진다 하여도 또한 내가 뿌린 씨앗이니 부처님과 함께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렇다. 자동차가 망가졌는데 운전사가 자신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이가 다 웃을 것이다. 또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졌는데 운전사가 자신도 배가 고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웃을 일이다. 그리고 자동차가 낡았다고 운전사도 늙어야 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자동차를 폐차시킨 운전사가 자신도 자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육신이 병이 걸리면 마음도 병이 들고 육신이 가난해지면 마음도 가난해지며 육신이 늙으면 마음도 늙고 육신이 죽으면 자신의 마음가지도 죽는 줄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종말이 와서 세계가 멸망해도 없어지는 것은 육신이지 이 마음은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세계 이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에는 그 세계에 맞는 육신이 있을 것이다. 만약 육신이 죽어 저 천상에 간다면 그 천상인간의 육신을 받아서 그곳으로 가야지 사바세계에서 살던 육신을 가지고 천상에 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더욱이 고통의 근원은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주사를 맞던 일을 생각해보라. 선생님이 내일 주사를 맞는다고 하면 그 때부터 고통은 시작된다. 그리고 주사를 맞고 나오는 아이들에게 아픈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아프냐고 물어본다. 이 순간들은 다 고통이었다. 그러나 주사를 맞고 나오는 순간부터 그러한 고통은 다 사라졌다. 어차피 맞을 주사 안 맞으려고 발버둥치니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종말도 반드시 온다. 그 순간은 바로 내가 죽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종말을 피하려고 하는 마음 그 때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백보 천보 양보하여 그 종말을 믿고 그 종교를 믿었다고 햐여 보자. 그러면 믿음이 구원인데 어디까지가 구원이 될 믿음이고 어디까지가 구원이 못 되는 믿음인가 하는 기준도 애매하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어디까지 해야 되는 지도 모르는 믿음을 향해 어떠한 노력을 하란 말인가. 돈 주고 구원의 티켓을 사는 것만이 믿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나쁜 일을 밥 먹듯이 하여 신앙인이 지옥을 가는 것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하니 그 사람이 “자신은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회계하고 십일조도 거르지 않고 내고 있으며 내가 하는 일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하느님도 용서하실 것이고 그러니 지옥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해서 할말을 잊은 적이 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교회에 가는 일 십일조를 내는 일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일 그리고 남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는 일등은 자신이 짓는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선행은 선행일 뿐이고 악행은 악행 그대로이기에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자신이 지은 악행에 대한 대가는 언젠가는 받으려는 각오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바르지 못한 종교는 말한다. 육신의 부귀영화와 권세와 건강을 주겠노라고. 자신을 믿으면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병이 낳고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서서 걷는다고. 또 세상에 종말이 와도 당신만은 영원히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그리고 이제까지 지은 죄를 믿음만 가지면 다 용서해 주겠노라고. 그러한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건강체를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을까. 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죽는 순간에 돌아보면 다 순간적인 삶에 불과한 헛된 것 일텐데 또 죽으면 없어지는 것 일텐데 그러한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잇단 말인가. 덧붙여 종교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낼 수 있는 강한 의지를 주기 보다는 어떻게든 모면해보려는 약삭빠르고 나약한 생각을 갖게 한다면 어찌 바른 종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바른 종교란 마음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마음의 부귀영화와 마음의 권세와 마음의 건강을 약속하면서 진정한 영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나감에 있어서도 나약해지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종교를 논 할적에 흔히 미신(迷信)과 정신(正信)을 가지고 종교를 논하곤 한다. 미신(迷信)과 정신(正信)의 그 차이는 미신이란 자신의 욕망에 이 세상이 따라 주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되는 믿음이고, 정신(正信)이란 이 세상의 진리에 자신이 순응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는 믿음이다.
건전한 종교란 정신(正信)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종교의 건전성을 논 할 적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미신(迷信)인가 정신(正信)인가를 스스로가 판단하여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교란 마음의 부귀영화와 건강 권세 등을 약속하는 또한 정신(正信=바른 믿음)의 종교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제3강 석가모니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을 말한다. 즉 불교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석가모니부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셨고 사람들은 그 분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받았는가
또 우리는 왜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야 하며 또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을 알면 불교를 아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성불하는 법이다. 성불이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왜 부처가 되려고 하였고 또 석가모니부처님은 왜 우리 모두가 성불하시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성불의 길을 가르치셨던가. 도대체 부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부처와 일반 우리들과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신 싯다르타 태자, 그 분이 부처님이 되시기 전의 모습과 부처님이 되신 후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면 이러한 의문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그 분의 일대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약 2500년전에 인도 석가족의 수도 카피라성에서 아버지를 정반왕으로 어머니를 마야부인으로 하여서 탄생하시어 그 이름을 싯다르타라하였다. 그 뜻은 ‘모든 소원이 성취되어진다’는 뜻이었다.
태자가 탄생하였을 적에 히말라야산맥에서 수행하던 한 예언자가 찾아와서 "탄생하실 태자는 이 나라에 머무시면 전세계를 통일하여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하여주실 전륜성왕이 되실 것이요. 출가를 하시면 부처가 되시어 만인을 제도하실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예언하였다.
정반왕의 기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지만 정반왕은 태자가 궁에 남아서 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되어 주기를 바랐기에 내심으로는 태자가 출가한다는 말이 불안하게 들렸다.
하지만 탄생하시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이신 마하파자파티부인의 손에 의하여 그 다음의 왕위를 이어받을 태자로써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양육되어진 태자는 언제나 사색에 빠져있었고 우울함에 잠겨있었다. 이러한 태자를 보며 아버지 정반왕은 태자가 출가할 것을 더욱 더 두려워 하였다.
그래서 왕은 태자를 위하여 4계절의 궁전을 만들어주고 아름답고 젊은 여인들에게 태자를 시봉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태자는 궁전의 동서남북의 문을 통하여 유람(遊覽)하게 되었다. 거기서 태자는 늙은 이와 병든 이와 죽은 이를 만나고서 자신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이러한 생각은 태자를 더욱 더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문인 북문을 유람할 적에 만났던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초월하는 길을 찾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 사문을 만난 일을 떠 올리면서 자신도 사문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하지만 그 당시 인도의 풍습에 의하면 유년기(幼年期, 태어나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시기)와 학생기(學生期, 배우는 시기)와 장년기(長年期, 자식을 낳고서 양육하는 시기)를 거치지 않고서는 편력기(遍曆期, 출가하여 수행하는 시기)에 들어 갈 수 없었다. 아직 자신이 학생기에 머물러 있음을 고뇌한 태자는 결혼을 서두르신다.
그리하여 태자는 이웃나라의 공주인 아쇼타라공주를 태자비로 맞이하시고 라후라라는 아들을 생산하시자 그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아들의 양육은 자신이 왕손인 관계로 가히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아시고서 스스로 편력기에 들어가 출가를 하신다.
이렇게 해서 육년을 고행하시고서 그 육년간의 고행으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뇌를 초탈할 수 없음을 아시고 나이자라강가에서 목욕을 하신 후에 보리수 밑에 앉으셔서 최후의 사색에 드신다.
그 날 새벽 태자는 깨달음을 얻으시고서 부처님이 되시고 자신이 얻으신 깨달음을 45년간이나 설법을 통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주시고 열반에 드신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를 요약한 내용이다.
이 일대기속에서 우리는 고뇌하는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과 그 고뇌를 해결하여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싯다르타 태자가 고뇌하던 문제는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의 해결을 위한 고뇌였으나 부처님이 되신 모습에서는 생노병사의 고통으로 해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부처님이 된다는 것, 곧 성불한다는 것은 생노병사의 고통이 해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불교란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을 가르치는 가르침이고 그것이 해결되어진 모습을 우리는 부처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져야 하는가. 즉 우리는 왜 성불하여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왜냐하면 그린 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도 잘 살고 있다고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사성제(四聖諦)가 있다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네 가지의 성스러운 전리란, 고(苦)에 대한 진리와 집(集)에 대한 진리와 멸(滅)에 대한 진리와 도(道)에 대한 전리이다. 고에 대한 진리란 인생은 모두가 고통이라는 것이고, 집에 대한 진리는 그 원인은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며, 멸이라는 전리는 집착을 끊으면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행복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며, 도에 대한 진리란 그러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 즉 팔정도(八正道)를 행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그 원인을 알아 질병이 완쾌된 상태를 설정해서 그 치료법을 택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이 중생들의 병을 진단한 것이 바로 중생들의 삶은 고퉁이라는 것이고, 그 병의 원인은 집착하기 때문이며. 집작을 끊으면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처방으로서 팔정도(여덟 가지의 바른 길)를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중생들 그 차체를 질병에 걸린 상태로 진단한다. 그러기에 중생들이 삶 그 자체를 고통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그 자체가 완벽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불행은 행복이 그 씨앗이 되어서 찾아오고, 그 행복은 불행이 그 씨앗이 되어서 찾아온다. 또 즐거움이란 고통이 그 씨앗이 되어서 찾아오며 그 고통은 즐거움이 그 씨앗이 되어서 찾아온다.
변방의 어떤 노인이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숫말 한 마리를 소중히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끼던 말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안타까위 하자 그 노인은 “그렇게 안타까워하지 마시오. 이 불행이 씨앗이 피어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며 초연해 하雩다,
그러던 어느날 그 숫말이 암컷 야생마 한 마리와 함께 돌아와서 새끼를 낳았다. 사람들이 와서 축하하자 그 노안은 “너무들 좋아하지 마세요. 이 행복이 씨앗이 되어 불행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며 초연해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외아들이 결들이지 않은 야생마를 타려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자 또 사람들이 와서 안타까워 하자 노인은 또 “너무들 안타까워 하지 마세요. 불행이 씨앗이 되어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며 초연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이 나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끌려가 살아 돌아온 이가 없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졌기에 전쟁터에 끌려나가지 않고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는 우리들의 행복은 완전한 행복이 아니라, 불완전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왕이 사냥을 갔다가 길을 잃었다. 그래서 만가를 찾아 들어갔는데 오랜 시간 길을 찾아 헤매었던 까닭에 무척 허기져 있었다. 그래서 산 속 민가에서는 달리 대접할 것이 없어 감자를 삶아서 내놓았다. 왕은 허기졌던 까닭에 그것을 맛있게 먹었고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궁전에 들어와 감자를 삶아오게 하여 먹어보았더니 별로 맛이 없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운동 뒤에 마시는 맥주 한 잔이 서원하듯이 인간들의 즐거움은 고통 후에 찾아와야 배로 즐겁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들의 삶 그 자체는 행복도 즐거움도 불행과 고통이 있기에 느끼는 상대적인 감정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는 그 자체를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디.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고통인 것이다.
우리들에게 인생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말은 상당히 염세적으로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에는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있고 때로는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것을 즐겁게 극복하라고 하지는 못할 망정,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씀하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분명히 염세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부처님이 우리들의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고통으로 받아 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란 것이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고통으로 보인다는 말인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학생이면서 매일같이 술이나 마시고 본드나 마시고 또 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불량한 청소년을 가진 부모가 있다고 하자. 이 청소년에게 있어서 자신이 술을 마시고 본드를 마시고 싸움을 하는 것, 그것이 그 동안은 아니다. 나름대로 즐거움도 있고 보람된 감정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부모의 심정은 고통 그대로일 것이다.
또 술에 취해 정신없이 즐거워 하면서 추태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님에게는 그 자체가 고통이다. 이처럼 부처님이 중생들을 보는 눈은 불량한 청소년을 가진 부모의 심정이며,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자식을 쳐다보는 부모의 심정,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들이 즐거움도 부처님에게는 고통 그 자체로 보아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중생들이 삶의 모습을 보면서 왜 고통스러워 하시는 것일까. 중생들이 삶이 불량한 청소년의 모습과 같고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모습과 같기 때문에 그것이 창피해 고통스럽게 느끼시는 것일까. 그것은 청소년을 가진 부모님이 자기 자식을 보는 심정 또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자식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왜 자신의 자식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자식들이 누리는 지금의 즐거움 뒤에는 반드시 커다란 고통이 있음을 자신들은 알지만 자식들은 그것을 모르고 지금 거기에 탐착하여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삶을 고통스럽게 느끼시는 것은 중생들이 누리고 있는 삶 그 자체에는 커다란 고통이 따르고 있음을 당신은 아시건만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고 지금의 삶에만 탐착하여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들이 삶 그 궁극적인 곳에 오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우선 삶이 있으니 죽음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요, 젊음이 있으니 늙음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요, 건강이 있으니 질병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요, 행복이 있으니 불행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요, 즐거움이 있으니 괴로움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죽고 난 다음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대비하려고 하지 않는다. 젊은 자는 자신의 젊음이 영원할 줄 알고 늙은이를 업신여기고, 건강한 자는 자신의 건강이 영원할 줄 알고 질병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행복한 자도 즐거운 자도 불행과 괴로움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불행이, 괴로움이, 늙음이, 질병이, 죽음이 찾아오면 울고 불고 하면서 슬퍼하고 괴로워 한다. 이것이 중생들이 삶이기에 부처님에게는 중생들이 삶 그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죽음의 고통 그것이 싫다면 태어나지 않았으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태어나 있다. 그러기에 죽음이라는 고통은 누구나 다 겪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거부하려 하고 또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죽음이나 불행 등이 닥쳐오면 그때 가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부처님을 원망한다. 이러한 중생들이 삶의 모습은 부처님의 눈에는 질병을 가진 환자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신병환자가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음을 모르듯 중생들도 자신들이 이러한 질병에 걸려 있음을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중생들은 환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루 빨리 중생들을 치료하여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들도 하루 빨리 병을 고쳐 건장한 몸0] 되어야 한다. 즉 중생들도 빨리 병을 치료하여 건강체인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행복과 즐거움만을 원하고 불행과 고통을 배척하려고 한다. 즉 인간의 행복과 즐거움은 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기에 고통인 것이다. 그런데 행복과 불행, 그리고 즐거움과 고통 등을 느끼게 하는 감정은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일까?
그 문제를 사색하다 보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문제가 생로병사의 문제이다.그렇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 ,그리고 즐거움과 고통이라는 상대적인 세계를 뛰어 넘어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행복을 누리지 위해서 우리들은 우선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이유이며 또 성불하여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제4강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범부가 부처가 되는 길’, 거기에 불교의 핵심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핵심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어떠하였는가를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으시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셨을까? 이것은 부처님이 얻으신 깨달음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 있어서 싯다르타 태자의 심경까지 자세하게 전하는 경전은 없다. 하지만「사분율(因分律)에 싯다르타 태자가 육년 고행을 욕심과 악(惡)과 불선법(不二善法)이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은 우리에게 그 심정을 추적함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싯다르타 태자의 육년고행은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와 철저한 금욕(禁欲)의 생활이었을 텐데, 왜 싯다르타 태자는 그리한 생활을 욕심과 악과 불선법의 생활이었다고 고백하였을까. 하지만 우리는 육년 고행을 하면서 싯다르다 태자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은 이세상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 있고 그러기에 노(老) , 병(病), 사(死)의 고통이 담아 있다. 그러면 늙음,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가. 병, 병들음,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가? 아니면 죽음,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가? 아니다. 젊음에 접착하여 늙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 건강에 접착하여 병이 들고 싶어하지 않는 나의 마음, 삶에 애착을 느껴 죽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병들음과 늙음과 죽음이 태자를 괴롭혔던 것이 아니라, 젊음과 건강과 삶에 집착하는 태자의 마음이 태자를 괴롭힌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태자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에 육년 고행은 생로병사에 집착되어져 있는 욕심. 악. 불선법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또 궁전에서 풍족한 재물과 아리따운 여색에 빠져 살던 삶과 재물을 멀리 하고 여색을 멀리 하며 살았던 육년 고행의 삶 그 두 가지의 삶 모두가 재물과 여색에 집착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궁전에서의 삶만이 재물과 여색에 집착한 삶이었고. 육년 고행의 삶은 재물과 여색에 집착한 삶이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재물과 여색을 추구하는 것이나 또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 재물과 여색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 태자가 육년 고헹 역시 재물과 여색에 빠진 모습이었기에 욕심과 악과 불선법이었다고 고백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면서 태자는 육년 고행의 결과로써 삼법인(三法印)을 발견한 것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하기에 항상 하는 것이 없건만 항상 하여야 한다고 착각하는 태자의 마음(諸行無常)이 태자를 괴롭히는 것이었고, 또 늙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면 이 젊음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닌데 늙음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고 젊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마음(諸法無我)이 태자를 괴롭혔고,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진정한 나란 이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고서 참 나를 찾아 참 나와 함께 사는 것이 바로 생로병사를 초월한 경지(涅槃寂靜)라는 사실을.......
이러한 결론은 태자로 하여금 육년 고행을 그만두도록 하였다. 태자의 마음 속에는 생로병사를 초월하는 어떠한 경지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있어서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삶, 건강, 젊음에 짐작하여 죽음, 병, 늙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집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젊음, 건강, 삶에 집착하는 차기 자신을 찾기 위하여 마을 의 소녀인 수자타가 공양 올리는 우유죽을 받아 드시고 나이아자라 강가에서 목욕을 하시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시 육년 고행으로 인하여 지쳐버린 심신을 달래고서 진정으로 구해야 할 참 나를 발견하실 명상에 들어가시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태자의 모습을 보고 태자와 함께 수행하던 다섯명의 비구는 태자가 타락하였다 하여 태자의 곁을 떠나버렸다. 이제 홀로 되어 버린 태자는 보리수 밑에 앉아 참 나를 찾기 위한 최후의 명상에 몰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태자는 참 나를 찾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부정하려고만 했던 자신의 번뇌가 있는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경전은 마왕이 부처님에게 쳐들어 오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사실이 태자를 괴롭혔던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음, 건강, 삶에만 집착했던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괴롭힌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리고 늙음과 병들음과 죽음이 두려워 떨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 그것이 가장 먼저 보였던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태자가 인정하기 싫었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늙음과 병들음 죽음을 향하여 6년 동안 철저하게 고행하였던 것이다. 고행하여야 할 쇨요가 있었을까.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냥 인정하면 될 것을.
이렇게 모든 것이 무상한 자연 현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거늘, 단지 모른다고 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자기 자신, 그리고 그것을 수용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싯다르타 태자는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러한 두려움도 스스로의 내면 속에 용해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 모습을 경전에서는 마왕이 공갈, 협박을 하는 모습으로 쓰여져 있고, 그러한 마왕이 태자의 내면 속에서 용해되어짐을 경전에서 는 싯다르타 태자가 마왕을 물리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태자는 만나게 된다.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러한 것을 부정하려고만 했던 자신의 모습, 그러한 모습은 그것을 긍정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재물과 명예, 권력을 부정하려는 그 마음 또한 그것을 인정하는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싯다르타 태자는 처음으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이미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버리려는 마음도.구하려는 마음도 모두가 싯다르타 태자의 내면 속으로 용해되어져 버렸던 것이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마왕이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태자를 유혹하였고 태자가 이를 물리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태자는 마지막으로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즉 애욕을 부정하려고 하였던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 또한 애욕을 긍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마음과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태자는 이러한 자기 자신의 모습도 긍정하였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애욕 또한 태자의 내면 속에서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부분을 경전은 마왕이 절세미인인 자신의 세 딸을 보내어 태자를 유혹하고, 태자가 이것을 물리치는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태자가 발견하신 참 나의 모습은 청정하고 깨끗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태자는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그러한 모습들은 이미 자신의 적어 아니었고 자신이 극복하여야 할 어떠한 대삼도 될 수가 없었다. 즉, 이렇게 추악한 마왕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쫓아내려 하지 않고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내면 속에서 용해시켜버리고 이미 그러한 세계를 초월해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불교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가르침이 아니다. 즉 사함과 정의로움을 구분하여 사함을 부수고 정의로움을 세우려는 그러한 가르침은 아닌 것이다. 사항과 정의로움을 구분하려는 분별심을 그만 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함의 위치에 섬으로써 그 사항과 정의로움을 자신의 내면 속에서 용해시켜 버리는 그러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는 파하여야 할 대상이 없고 그러니 적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없다. 따라서 경전에 등장하는 마왕의 그 모습 또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으로서 인정하여야 할 대상인 것이다.
즉, 스스로의 모습이 마왕임을 인정한 싯다르타 태자가 부처가 된 모습, 이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 하고 변명하여, 스스로를 장식하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는 곳에 번뇌가 있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곳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싯다르타 태자는 부처가 되었다. 하지만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은 깨달음의 내용을 일반 중생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마왕임을 안정시키는 것이 그 깨달음의 요지인데 다른 이가 "당신은 마왕이오"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 그 말을 기쁘게 들으며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아마 그런 말을 하는 이를 보고 "당신이야말로 마왕이오"라며 공격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 때문이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스스로만의 깨달음으로 만족하시고 그만 열반에 드시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부처님의 머릿 속에는 새로운 생각들이 전광석화처림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분명히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왕의 성품을 이기려고 육년 고행도 하였다. 그러한 나도 내가 마왕임을 인정할 수가 있었다. 과연 이것은 내가 수승하여서 그랬던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참 나를 드러나게 하였단 말인가. 커다란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물방울에 의하여 거대한 바위에 구멍이 뚫리는 것, 과연 그것은 그 물방울만의 힘일까. 아닐 것이다. 바위에게 구멍이 뚫릴 성질이 없었다면 아마 그 구멍은 뚫리지 않았을 것처럼 아무리 내가 진리를 보고자 노력하였어도 진리가 나를 깨우치고자 하는 성질이 없었다면 나는 진리를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참 나를 발견한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나에게 참 나를 발견시켜 주려는 또 다른 힘이 있었구나. 그것이 무엇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른 싯다르타 태자는 더욱 짚은 사색에 빠져 들기 시작하였다. 그 사색은 진리에 대한 사색이었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렀다. 스스로에게 불성이라는 거울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제까지 그 불성이라는 거울에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명이라는 이물질이 끼어 있었기에 참 나를 불 수 없었고, 그리고 이 거울은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으며 진리의 합은 끊임없이 모든 중생에게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비쳐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결론에. 그리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중생들에게 스스로가 마왕임을 가르쳐 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성이라는 거울에 끼어있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명이라는 이물질이 제거되도록 도와주어야겠다. 그러면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부담 없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느새 녹야원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성에 대한 발견과 항상 참 나를 발견시켜 주려는 진리의 움직임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처럼 현재도 모든 중생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은 부처님. 즉 진리의 작용에 대한 발견이었고 그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대한 발견이었다. 이렇게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완성되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명 속에 묻혀버린 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 즉 참 나의 발견이며 그 창 나의 발견을 도와주고 또 항상 함께 하시는 부처님에 대한 발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5강 성불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상에서 말한 것을 종합하여 본다면 불교란 성불의 가르침이고 또 부처가 된다는 것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불성이라는 거울에 낀 자기 합리화와 자기변명이라는 이물질을 제거하여 참 나를 보고 그것을 인정함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완전한 부처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는 것과 완전한 부처를 이루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세 사나이가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의 등에는 사막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 만큼의 양식과, 이들의 머리 위에는 이들을 사막 저편으로 인도해 줄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나이는 등에 있는 양식이 먹는 것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짊어지고만 간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이 자신에게 사막 저편으로 건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음도 몰랐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이 사나이가 언제 사막을 건널 수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이 사나이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가끔 가다가 만나보는 조그마한 즐거움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사막을 건너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냥 사막을 방황할 뿐이었다.
또 한 사나이는 다행히도 사막을 건너본 이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막을 건넌 이들은 아무도 양식이라는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를 통해 들었다. 그리고 사막을 건넌 곳에는 길을 인도해 주는 별도 필요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등에 짊어진 양식과 하늘의 별만이 없어지면 사막을 건넌 것이라고 그래서 등에 짊어진 양식을 버렸다. 그리고 하늘의 별도 보지 않고서 자신이 사막을 건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이 사나이가 사막을 언제 건널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이 사나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 또한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가끔 가다가 느낄 수 있는 조그마한 즐거움뿐이었다. 그러다가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사나이는 사막을 건너야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영원히 사막을 방황할 뿐이었다.
그런데 또 한 사나이는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 등에 짊어진 양식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됨을 발견하고서 그 양식을 먹으면서 별이 인도하는 곳을 향하여 열심히 걸었다.
이 세 사나이 중 사막을 건넌 이는 마지막 사나이뿐이었다.
이 비유는 성불이라는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비유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막이란 육도윤회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사막을 건넜다 함은 성불도를 이루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등에 짊어 진 짐이란 우리들의 업장이며 이것을 짊어지고 가면서 느끼는 여러가지의 감정 그것이 번뇌와 욕망이다. 그리고 이들 앞에 다가올 시련과 즐거움은 우리들의 행복하고 불행한 삶을 말한다. 그리고 별이란 우리들이 무사히 사막을 건너도록 인도해 주시는 부처님을 의미한다.
부처가 된다는 것, 그것은 사막을 무사히 건넜음을 말한다. 하지만 사막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서는 등에 짊어진 양식을 먹어야 하며 또 별의 인도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등에 짊어진 양식을 먹는 법을 알고 별의 인도대로 간다는 것, 그 자체가 사막을 건넌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에게 있어서 사막을 건너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러기에 그것 또한 사막을 건넌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모습을 사막을 건넌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사막을 건넜다는 것을 정각(正覺)을 이룬 경지 즉 완벽한 부처님이 된 것이라 한다면 사막을 건너는 법을 알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경지 즉 등정각(等正覺)을 이룬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들의 업장이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사막을 건너는 중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정각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면 육신을 지니고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업장소멸하는 법을 알아 그것을 실천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인도를 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지고 얻을 수 있는 부처의 경지란 정각이 아니라 등정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등정각의 경치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얻으신 경지인 것이며 우리가 육신의 몸을 가지고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이 등정각의 경지를 얻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얻으신 깨달음을 유여열반(有餘涅槃=업이 남아있는 열반)이라 하고 부처님의 육신의 열반(죽음)을 무여열반(無餘涅槃=업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업장소멸의 방법을 알아 실천하며 부처님의 인도를 받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업이 남아 있는 상태의 깨달음이기에 유여열반이며 정각을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이기에 정각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에서 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내용은 앞에서 말한 불성에 낀 자기 합리화와 자기변명이라는 이물질이 제거되어서 발견된 참 나이고 그것을 발견시켜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부처님에 대한 발견인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부처를 이루었다는 것. 그것은 업장이 다 소멸되어서 다시는 육도윤회의 사바세계에 떨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 즉 무여열반 이라 하며 이것을 정각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제6강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은 어떠한 분인가
그렇다면 사막의 비유에 있어서 사막을 건너는 이들에게 방향이 되어주는 별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부처님은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많다 하였으며 또 우리가 금방 떠올리는 부처님도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아미타불, 약사여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상당수가 있다. 그렇다 보니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을 바르게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불타신앙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교 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이란 어떠한 부처님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불교에서 지칭하는 부처님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부터 알아야 하겠다.
단단한 바위에 몇 백년 몇 천년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진다면 그 딱딱한 바위도 깎이어 마모된다. 우리는 이것을 보며 힘없는 물방울이 오랜 시간에 걸쳐 딱딱한 바위를 뚫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바위 자체에 마모되는 성질이 없다면 물방울이 천년이 아니라 만년 아니 영원히 떨어진들 바위에 구멍이 뚫리겠는가. 이처럼 싯다르타 태자가 진리를 깨우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진리 자체가 깨달아질 성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었을까? 바꾸어 생각한다면 진리가 싯다르타 태자를 부처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이 진리를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다. 앞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緣)에 의하여 이루어져서 항상 하지 않건만(諸行無常) 항상 한다고 생각하고, 또 모든 것은 연에 의하여 생긴 것이기에 나다,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건만(諸法無我) 나다,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기에 생로병사가 고(苦)로 인식되어지고 그 원인은 항상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과 나나, 나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하여 나다, 나이 것이라고 집착(集)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 취하려는 마음(貪)과 내가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는 마음(瞋)을 가지고 자신을 항상 합리화하고 변명하려는 마음(痴)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연에 의하여 생기고 없어지기에 항상 하지 않고 또 나다,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음을 알아 생로병사를 수용하여 좋아하는 것만 피하려는 마음과 싫어하는 것은 취하려 하지 않는 마음을 버리며 또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명을 않으면(道=八正道) 진정한 행복(涅槃寂淨, 滅)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부처님이라 하여 신앙한다는 것은 뭔가 가슴에 쉽게 와 닿지를 않는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화 되어지는 부처님이라고 할 때는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으신 깨달음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내용을 석가모니부처님이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준 진리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진리의 내용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본래 마모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위를 물방울이 천년이 아니라 만년에 걸쳐서 떨어진다 한들 구멍을 뚫을 수 없듯이 본래 깨우칠 수 없는 진리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깨우쳐 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깨우쳐 질 수 있는 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 부처님이라고 하여 인격화 시킨 대상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깨우쳐 질 수 있는 작용 즉 진리의 작용을 말한다. 그러면 그 작용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가?
어느날 뉴우톤은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뉴우톤은 생각하였다. "왜 사과는 밑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뉴우톤은 "사과를 밑으로 당기는 어떠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힘은 땅의 힘일 것인데 그렇다면 지구가 사과를 당겼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모든 물체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고 가정할 때 지구와 사과가 서로 당기고 있다가 지구의 힘이 강하여 사과가 지구쪽으로 끌려가서 떨어진 것이구나. 그렇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서로 당기고 있다"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뉴우톤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우톤이 발견하기 전에도 있었고. 또 뉴우톤이 발견하였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더욱이 만유인력의 법칙이 숨어 있다가 뉴우톤에게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항상 누구나 이 만유인력의 법칙 속에서 살고 있었건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진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시기 전에는 없었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셔서 새로 생긴 것도 아니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셨다고 없어진 것도 아니며, 숨어 있다가 석가모니 부처님 앞에만 나타난 것도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시기 전에도 있었고, 깨달으신 당시에도 있었고, 또 지금도 우리들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으며 누구나 그 진리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진리의 작용은 모두에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 진리의 작용을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고, 또 그 진리의 작용을 깨우친 사람도 역시 부처님이라 하는데 그 대표적인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의 작용이 나타난 구체적인 형태를 이야기한다면 수없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모든 것이다 진리의 작용의 구체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경우를 보더라도 일찍 여읜 어머니 또 사문유람을 통하여 만난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들 그리고 사문 나아가 마지막으로 6년 고행을 그만 두게한 모든 여건들 이러한 것들이 진리의 구체적인 모습인 것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의인화되어 신앙의 부처님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의인화된 진리의 작용이 경전에서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세계가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에게 있어 신앙의 대상을 확실히 파악함에 혼란을 야기시키는 일면도 있다. 그러기에 불교에는 그 많은 부처님을 정리하기 위한 사상으로서 삼신불(三身佛) 사상이 있는 것이다.
삼신불이란 부처님의 모습을 셋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르침인데, 부처님의 세 가지 모습을 법신불(法身佛)과 보신불(報身佛)과 응화신불(應化身佛)이라 한다. 하지만 필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응화신불을 응신불과 화신불로 분류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법신불이란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진리란 그 색깔도 모양도 냄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말도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억지로 인격화시켜서 말로 표현하여 법신불이라 하는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비로자나불(毘盧蔗那佛)이라 하고, 「대일여래경(大日如來經)」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 하는 분이 그분이시다.
그리고 보신불이란 은혜로운 부처님으로서 중생을 구원하시고자 원을 세우신 부처님이시다, 그리고 이분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신데 「화엄경」에서는 노사나불이라고도 하며.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 또 밀교에서는 관자재여래(觀自在如來) 등 여러 가지 이명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응화신불은 보신불의 중생구원의 서원을 실천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응신불이라고도 하고 화신불이라고도 한다. 응신불이란 중생의 서원에 응하기에 응신불이라 하고 화신불이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이 세상에 모습을 나투었다 하여 화신불이라 하는데, 사실 중생의 서원에 응하였기에 변화하여 나타나는 것이므로 응신불이나 화신불이나 같은 뜻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부처님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응신불과 화신불을 분류해서 설명하겠다.
즉 화신불이란 보신불의 중생구원의 서원을 실천하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나투시는 분은 모두가 화신불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분으로서 인간의 몸으로 나오셔서 인간에게 법을 설하신 부처님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들 수 있기에 석가모니불 한 분으로 한정하고자 하며. 응신불이란 중생들의 소원에 응하시는 부처님은 모두가 응신불이지만 그 특징상 영험을 보여주시는 성격이 강하기에 약사여래나 관세음보살 ·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등의 법신불과 보신불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제외한 모든 제불여래에 한정하고자 한다.
어쨌든 이러한 응신불이 존재하는 것은 중생의 소원과 부처님의 서원이 틀리기 때문이다. 중생들이 육신으로 누리는 부귀영화와 권세 등은 육신이 사라지면 육신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중생들이 육신에 찾아오는 늙음, 병들음, 죽음, 가난 등도 육신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진다. 하지만 중생들의 마음에 찾아온 늙음과 병들음. 죽음, 가난은 육신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고 중생들이 마음에 찾아온 부귀영화와 권세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서원은 중생들의 마음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지만 중생들은 그것보다도 육신의 부귀영화와 건강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응신불은 우선적으로 중생들의 소원에 응하여 중생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부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 어린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왕이 백방으로 아들을 찾고 있던 중 세월은 흘러 아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아들은 자신이 그 나라 왕자임을 모르고 거렁뱅이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아들을 우연한 기회에 만난 왕은 한 눈에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접근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왕자임을 모르는 아들은 왕이 자신에게 접근함을 보고 큰 해를 입을 까 두려워서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래서 왕은 한가지 방편을 생각하여 자신도 거렁뱅이와 같은 모습으로 변장하여서 아들에게 접근해 말하였다. "왕궁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왕궁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구만. 자네를 보니 참으로 성실하게 보여 내가 소개할 터이니 왕궁에 가서 화장실 청소를 해보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굶주림의 고통은 면할 수 있을 걸세, 어떤가?" 그러자 아들은 그의 말을 믿고 왕궁으로 따라갔다. 그래서 왕궁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 궁전에서 살게 된 아들에게 왕은 이번에게 창고지기장으로 변장하여 나타나서 “자네같이 성실한 사람이 화장실 청소나 하면서 이런 곳에 있으면 되겠는가. 우리 창고에 와서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터인데 오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아들은 승락하여 창고에 가서 일하면서 지금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또 관리로 변장하여 나타나서 “자네같이 유능한 사람이 이런 곳에서 창고일이나 하면 되겠는가 내 밑에 와서 벼슬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지금보다 대우도 좋아지고 명예도 얻을 걸세”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은 벼슬을 하게되었다. 이런 식으로 왕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나서 보살피며 그의 지위를 조금씩 올려주다가 드디어는 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임종을 맞이한 왕은 모든 신하들을 불러 모아놓고 재상을 가리키며 "사실 이 사람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찾던 나의 아들이요. 하지만 아들이 자신이 왕자임을 믿으려 하지 않기에 내가 방편을 사용하여 지금 그를 재상까지 끌어 올려놓았소. 나는 이제 생명이 다하여 죽으니 이제 여러분은 나의 아들을 왕으로 섬겨 이 나라의 정사를 돌보시오"하였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의 자비에 감사하여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이 비유에서 왕은 법신불 즉 비로자나불이다. 그리고 아들은 중생을 말한다. 또 왕이 아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있을 때의 그 왕의 마음은 보신불 즉 아미타불이다. 그리고 왕이 거렁뱅이로 변장하여 아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는 모습은 석가모니불인 화신불의 모습이고, 또 궁중에서 사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나서 그를 보살피는 모습은 응신불인 약사여래·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부처님의 모습 중 우리들의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은 누구인가. 즉 육도를 윤회하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이 윤회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지해야 할 부처님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윤회에서 벗어나 부처를 이루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부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들었던 비유를 가지고 생각하여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법신불로 비유되어진 왕이라는 지위 그것은 왕이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지위이다. 다시 말해서 왕이 아들을 그렇게 만들고자 하는 목표인 것이다. 그러기에 법신불이란 우리가 성불한 모습, 우리들의 목표가 되는 것이며.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희망으로써 우리를 격려해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기에 신앙의 대상은 아니다.
또 화신불로 비유되어진 변장하고 왕자에게 나타나 왕자를 설득시키는 왕에게 변장하는 방면의 지혜를 떠오르게 한 것은 왕자를 구원하여야 겠다는 왕의 일념이었다. 즉 변장하고 왕자에게 나타나 왕자를 설득시키는 왕은 왕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왕의 간절한 마음이 변화한 모습인 것이다. 이와 같이 화신불이란 중생들이 등에 짊어진 업장이 무겁다고만 칭얼거릴 줄 알지 그것을 먹을 줄도 모르고 또 자신을 밝혀주고 있는 별에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기에, 이를 안타깝게 여기어 부처님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오셔서 솔선수범하여 사막을 건넘을 보여 주시면서 중생을 설득시키신 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신불은 중생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보신불의 간절한 서원이 변화한 것이다. 그러기에 화신불이신 석가모니불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스승님이시지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어떤 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하여 보자. 지나가는 이가 길을 가르쳐 주었건만, 길을 물은 이가 가르쳐 준 길은 가려고 하지 않고 길을 가르쳐 준 이의 뒤만 쫓아다닌다면, 이 사람은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결코 갈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되려는 중생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성불하는 법을 실천해야지 그분을 신앙의 대상으로 알고 그분의 뒤만 쫓아다닌다면 성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를 이루기 전에 육년간의 고행을 하였다하여 자신도 그러한 고행을 해야만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할 때까지 이천번의 실패를 하였다고 하여 자신도 에디슨이 한 것처럼 이천번의 실패를 거듭해야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은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이나 그분이 부처를 이루시기 전에 행하였던 수행은 아니다. 즉 화신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에게 성불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스승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자신이 왕자임을 모르고 궁전에서 화장실 청소나 하고 있는 왕자가 궁전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언제든지 궁전에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뛰쳐나갈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변장하여 궁전에서 사는 왕자를 보살폈던 왕이 있었기에 왕자는 구원될 수가 있었다. 즉 응신불이 있기에 중생들은 사바세계에서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 아주 투철한 어떤 사람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이 사람이 아들에게 "그 병은 부처님이 네 마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니, 너의 마음을 치료하면서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라"고 하면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사람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처럼 종교를 마시고 취해버린 정신병자의 모습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이 말하는 신앙은 이론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부처님에게 매달리며 "나를 죽이시고 나의 아들을 살려주소서" 하는 것이 정상이다.
즉 우리 중생들이 성불로 가는 길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가 있다. 그러기에 중생들은 부처님의 서원대로만 살수는 없다. 더욱이 중생들은 부처님의 서원대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장애가 되는 요인들이 너무도 많음을 잘 알고 있다. 이럴 때 영험을 보여 주시면서 중생을 보살피시는 부처님이 응신불이다. 하지만 영험을 주시는 것은 그 시련을 극복시켜 주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정진할 수 있게 하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험에만 의지하여 갈 길을 가려 하지 않고 영험만 달라고 한다면, 이는 어떤 이가 길을 가면서 배가 고파 밥을 달라고 하여 다른 이가 음식을 주어 잘 대접하였더니 그 음식의 맛에 취하여 가던 길을 중단하고 그 음식을 조금만이라도 더 먹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어리석음과 같다. 즉 신앙의 대상을 자신에게 영험을 주는 응신불로 삼아서 관세음보살이나 부르고 또는 지장보살이나 부르는 이러한 중생들이 바로 맛있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얻어먹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와 같은 중생이다. 응신불이 주시는 영험이란 계속해서 성불의 길로 매진하기를 바라서 주는 것이지 그냥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이란 응신불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왕자님을 모르고 헤매는 왕자를 구원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왕의 일념이었다. 이러한 왕의 일념이 왕자를 설득하고 끝까지 왕자를 보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중생들을 구원하는 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하시는 분은 중생을 구원하고자 원을 세우신 보신불 즉 아미타불이신 것이다.
앞의 사막의 비유에서 사막을 여행하는 이에게 길을 인도하여 주는 별은 보신불이다. 별은 그 별을 보는 이에게 길이 되어주고, 보지 않는 이에게는 길이 되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길을 인도하건만 그것을 보고 안보는 것은 중생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신 부처님은 모든 중생에게 불청우(不請友)가 되셔서 중생이 청하지 않아도 사막을 건너는 모든 이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 그리고 화신불로 변하기도 하고 응신불의 모습을 가지고 영험을 보이기도 하시면서 중생들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보살피신다.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이란 바로 이 보신불 즉 아미타불인 것이다.
아미타불은 210억의 불국토를 돌아다니며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들 중에서 48가지의 수승한 서원을 뽑아서 극락정토를 완성하신 부처님이시다. 즉 210억의 불국토를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을 섭렵하였다는 것은. 아미타불의 서원에는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이 함축되어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이 종합되어진 형태가 바로 아미타부처님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즈음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만화영화 중에서 우주의 나쁜 로봇이 인간을 괴롭혀 그것을 막기 위하여 여러 로봇이 모여 싸우다가 안되니까 그 로봇들이 결합하여 커다란 로봇으로 변신해 우주의 나쁜 로봇을 무찌르는 만화영화가 있다. 그 만화영화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여러 로봇들이 결합하여 커다란 로봇으로 변신하듯이 제불여래가 결합하여 더 완벽한 부처님의 모습으로 변한 모습이 바로 아미타불이라 이해하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신앙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부처님은 보신불인 아미타 부처님이시다.
즉 불교에 있어서 신앙의 형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아미타불에 의지하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약사여래 등등의 응신불인 제불과 호법신장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비로자나불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라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함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체인 신앙의 대상은 보신불인 아미타불이지 영험을 주시는 응신불이나 진리 그대로의 부처님이신 비로자나불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은 아미타불은 죽은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한 부처님일 뿐 불교에서 신앙의 근본대상이 되는 것을 잘 모르고 있기에 대부분이 관음신앙을 하고 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은 머리에 쓴 보관에 아미타부처님을 이고 계시며 또 아미타부처님의 왼쪽에 서서 시봉하는 보살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한국불교의 신앙에 대한 모순을 금방 알 수 있다.
또 중국영화를 보면 소림사 스님들의 말머리와 말끝에 "아미타파"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나무아무아미타불"을 말하는 것으로, 소림사라면 선종의 초대조인 달마대사가 창건한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는 장면을 통하여 대승불교에 있어서 종파를 막론하고 아미타불이 불교신앙의 근본대상이 되는 부처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이 아미타불은 대승불교 신앙의 근본대상이 되는 부처님이었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아미타불이 대승불교 신앙의 근본이 되었다. 그 증거로 지금도 절에서 기도 정진할 때 다른 부처님의 명호에는 "나무" 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정근하지만 아미타불을 정근할 때는 항상 "나무" 라는 말을 붙여서 정근한다.
즉 관음정근은 그냥 "관세음보살", 지장정근은 그냥 "지장보살", 석가모니불의 정근은 그냥 "석가모니불", 그리고 약사여래정근은 그냥 "약사여래" 라고 명호만을 부르건만 아미타불의 정근은 귀의한다는 뜻이 담긴 "나무"라는 말을 넣어서 "나무아미타불"하고 정근하고 있는 것이다. 또 모든 종파를 막론하고 큰스님들이 법문하시다가 부처님의 경전을 인용하시면서 그 끝에 "나무아미타불"을 신도들과 함께 길게 복창하는 것과, 옛날에 조성되었던 불상에는 아미타불상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경주박물관에 가면 많은 불상이 아미타불상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 신앙의 대상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시대 때 일본정부가 우리의 정신문화를 말살하기 위하여 전시교학(戰時敎學)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일본천황이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가르치면서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이나 천황만세를 부르는 것은 동일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한 큰스님들이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극락을 발원하는 것은 미신적인 신앙이라 하면서 절에 있는 염불당을 없애버렸다. 그러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찾는 것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불교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그러자 아미타불을 가장 가까이에서 시봉하는 보살님인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도록 시켰던 것이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님으로서 보관에는 아미타불을 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관세음보살만 부르게 하지 않고 "나무아미타불" 뒤에 관세음보살을 붙여서 부르게 하였다. 그러던 것이 나무아미타불이 사라지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게 되더니, 요즘은 지장보살이니 약사여래니 또는 "나무비로자나불"이니 "마하반야바라밀"이니 하면서 불교신앙의 대혼란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가는 지장보살, 병들면 약사여래 등등을 부르게 하는 식으로 불교답지 못한 신앙의 형태로 적당히 타협해 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텔레비전의 전기와 라디오의 전기와 또 냉장고의 전기가 각각 다른가. 모두 다 같은 전기이다.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과 약사여래와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 다른가. 아니다. 중생구원에 있어서 다 한 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부처님들의 서원을 모두 성립하여 만든 서원이 아미타불의 48원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냉장고, 선풍기가 다 전기의 응화신인 것처럼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등이 모두가 아미타불의 응화신불인 것이다.
불교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부처님은 사막을 건넌 모습인 법신불도 아니며,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 부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업장소멸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한다. 중생들이 방황하기에 우선 그들을 달래 놓기 위하여 방편을 쓰시는 관세음보살, 약사여래,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의 응신불도 불교의 신앙대상의 부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오로지 사막 저편 하늘에 영롱한 불빛이 되어서 항상 중생들의 머리 위를 비추며 그들을 사막 저편으로 인도하고 계신 보신불 즉 아미타불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대통령에게 상서를 올리어 그것이 채택되면 각 부의 담당장관에게 명령이 떨어지듯,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해당 담당의 보살과 부처님들이 활동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신앙의 부처님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 신앙하셨던 부처님도 아미타부처님이시며 석가모니 부처님 또한 아미타불을 신앙할 것을 중생들에게 간곡히 당부하시고 계신 것이다.
제7강 사바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는가
앞장에서는 사막의 비유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과 부처가 되는 것의 차이와 그 의미를 알아보았고 더불어 사막을 건너는 이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별이 되어주시는 부처님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사막에 비유되어진 사바세계와 사막을 헤매는 것에 비유되어진 육도윤회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바세계이다. 이 사바세계는 육도윤회의 세계이며, 이 육도를 윤회하는 사바세계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목적은 육도윤회의 사바세계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도윤회의 사바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또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아는 것은 내가 지금 위치해 있는 곳은 어디이며, 또 나는 왜 탄생하여 즐거움과 고통, 행복, 불행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바세계가 만들어지는 근본 물질원인은 4대(四大)이다. 4대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인데, 지는 흙이 아니라 딱딱한 성질, 즉 물질에게 딱딱한 성질을 가져다주는 에너지이다. 또 수는 물이 아니라 촉촉한 성질 즉 물질에 촉촉한 성질을 띠게 하는 에너지이다. 그리고 화란, 불이 아니라 따뜻하고 차가운 성질 즉 물질에 온도를 가져다주는 에너지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풍이란 바람이 아니라, 움직이거나 가볍고 무겁게 하는 성질 즉 물질에 운동성이나 무게를 가져다주는 에너지를 말한다.
모든 물질은 이 네 가지 요소의 합성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흙에도 지수화풍의 성질이 있는데 그것이 가지고 있는 딱딱한 성질이 지이며, 습기가 수이다. 또 온도가 화이며 내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움직임이 풍이다. 또 물에도 지수화풍이 있는데 수영을 하면서 느끼는 수압은 지이며 습기는 수이고, 온도는 화이며 물이 내면에서 움직이는 움직임은 풍이다. 또 불에도 지수화풍이 있는데 불이 벽을 뚫지 못하는 것은 불이 가지고 있는 지이며 불의 습도는 수이다. 사실 불에도 습기가 없으면 불은 꺼져버린다. 또 불이 가지고 있는 온도가 화이며 불의 움직임은 풍이다. 또 바람에도 지수화풍이 있는데 바람이 벽을 뚫지 못하는 것은 바람이 가지고 있는 지이며, 바람이 가지고 있는 습기는 수이고, 온도는 화이며, 움직임은 풍이다.
사바세계 탄생의 시작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지수화풍의 에너지만이 있었다. 이러한 상태를 공(空)의 상태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공의 상태로 있던 우주에 다른 우주로부터 중생들의 업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날아온 중생들의 업이 20겁이라는 긴 세월 동안 모이게 되면 중생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업(共業)은 거대한 에너지가 되어서 근본 물질요소인 사대중에서 풍의 에너지의 성질을 자극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주는 거대한 회오리바람과 같은 폭풍이 몰아치게 된다. 이것을 풍륜(風輪)이라 한다.
이 풍륜이 수의 에너지를 자극하여 거대한 원형의 띠를 형성시킨 폭풍 위에 비를 동반시킨 거대한 원형띠, 이것이 수륜(水輪)이다. 이러한 장대비는 지의 에너지를 자극시키게 되고 그 위로 금륜(金輪)이라는 대지가 생기게 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금륜이라는 대지의 중앙에 수미산이 치솟아 생기게 된다. 그 수미산을 둘러싼 7개의 산맥이 형성되고 그 산맥의 밖으로 동승신주, 서우화주, 북구로주, 남섬부주의 우주가 펼쳐지면서 그 밖을 짠물이 둘러싸게 되며 또 그 밖으로는 철위산이라는 산맥이 외벽처럼 둘러싸게 된다. 이러한 우주의 완성은 지수화풍의 에너지가 자극을 받아 폭풍이 시작된 지 20겁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우주의 성(成)의 상태, 다시 말하면 우주가 만들어지는 기간은 20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생성된 우주에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가 중생들의 업력에 따라 생겨나게 되고 여기에 중생들이 각기 자신의 업에 맞는 세계에 머물러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윤회 속에 살게 된다. 이렇게 우주가 생성되어서 머무는 기간 즉 우주의 주(往)의 상태는 20겁이다.
우주가 생성되어서 20겁이 지나게 되면 우주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먼저 중생들이 하나둘씩 성불하여 사바세계를 벗어나거나 사바세계의 다른 우주에 가서 탄생하기 시작한다. 즉 업장이 모두 소멸된 중생들은 사바세계를 벗어나고 이 우주와는 공업을 이룰 수 없는 중생들은 사바세계의 다른 곳으로 날아가 태어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서 중생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기간은 19겁이다. 마지막으로 우주가 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겁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즉 우주가 괴(壞)의 상태로 있는 시간은 전부 20겁인 것이다.
사바세계 속에서의 우주는 인간들의 생로병사처림 성주괴공(成住槐空)을 수없이 거듭하면서 생겼다가 머물고 또, 서서히 무너지면서 없어져 버리는 것을 반복하며, 한 우주의 성주괴공의 시간은 80겁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80겁에 걸쳐서 성주괴공을 반복하는 우주는 사바세계 전체에 있어서 티끌만도 못한 작은 부분이다. 즉 이렇게 80억겁에 걸쳐서 성주괴공을 거듭하는 우주의 세계를 1소세계(一小世界)다 하는데, 이 1소세계가 천 개가 모이면 이것을 1중세계(一中世界)라 한다. 또 이 1중세계가 천 개가 모인 것을 1대세계(一大世界)라 하고, 1대세계가 세 개가 모인 것을 삼천대천세계(三天大千世界)라 하며, 삼천대천세계는 1불(一佛)이 중생을 계도하는 세계이기에 1불국토(一弗國土)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국토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였으니 사바세계의 범위가 가히 어떠한지 우리들의 상상이 미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불교의 우주생성설은 신이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설과는 전혀 다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즉 우주 생성에 있어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에 있어 신이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설은 닭이 먼저라는 이론이고, 불교의 이론은 달걀이 먼저라는 이론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론이 모두 우리들에게는 뭔가 미심쩍은 마음을 가지게 한다. 즉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면 신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물음에 답이 있어야 하고, 또 4대요소와 중생들의 공업이 모여서 세상이 만들어졌다면 4대요소와 중생들의 공업은 또한 어디서 생겼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렇게 말한다.
고요한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고 또 바람이 가라 앉으면 파도는 없어지듯 고요한 진리의 바다에 업이라는 바람이 불면 사바세계라는 파도가 일어나고 업이라는 바람이 가라 앉으면 사바세계라는 파도도 가라 앉는다고. 그러기에 파도는 바람이 일으킨 진리의 거짓의 모습일 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사바세계는 중생이 꾸는 한 편의 꿈이기에 사바세계의 물질을 아무리 밝히려고 노력한들 밝힐 수가 없다고. 왜냐하면 하나를 밝혀내면 모르는 것이 또 생기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밝히려 하지 말고 이 사바세계로부터 나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불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불교에 있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가 만들어진 근본원인은 중생의 업이라고 하는 에너지라는 점이다.
소우주의 가장 밑에는 바람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바퀴 모양을 한 풍륜(風輪)이 있고, 그 위에는 물로 이루어진 커다란 바퀴 모양을 한 수륜(水輪)이, 그 위에는 쇠로 이루어진 커다란 바퀴 모양을 한 금륜(金輪)이 있다.
이 금륜의 한가운데 수미산(須彌山)이라는 커다란 산이 있고, 수미산을 중심으로 7개의 산맥과 그 사이사이에 8개의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 8개의 바다는 8공덕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바다를 향수해(香水海)라 한다. 향수해 밖으로 4대륙이 있는데, 그 이름이 북쪽에는 북구로주(北俱盧州), 남쪽에는 남섬부주(南贍部州), 동쪽에는 동승신주(東勝身州), 서쪽에는 서우화주(西牛貨州)가 있고 이 대륙 밖을 짠물이 둘러싸고 있다. 남쪽에 있는 대륙을 남섬부주라고 하는 것은 섬부주의 북쪽으로 가면 아홉 개의 산이 있고, 더 북쪽으로 가면 대열지라는 연못이 있으며, 더 북쪽으로 가면 커다란 산이 가로막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커다란 연못인 대열지로부터 네 개의 강이 흐르는데, 그 강을 따라서 섬부라는 아주 맛있는 과일을 맺는 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섬부주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바다 밖으로는 철위산이라는 산맥이 둘러치고 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남섬부주이다.
이러한 소세계에는 천상의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수라의 세계, 축생의 세계, 아귀의 세계, 지옥의 세계가 있다. 천상의 세계는 수미산의 중턱부터 위로 펼쳐져 있고, 인간계는 4개의 대륙에 있으며, 수라계는 7개의 산맥에, 축생계는 지상에 모두 있고, 아귀계는 철위산에, 지옥은 남섬부주의 밑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여섯가지의 세계는 중생들이 업에 의하여 윤회하는 세계인 것이다.
윤회하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삼계(三界)라 한다.
삼계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세계를 말하는데 욕계란 식욕(食慾)·성욕(性慾)수·면욕(睡眠慾)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색계란 식욕 성욕 수면욕은 없어지고 청정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무색계란 그 청정한 물질도 없어져버린 정신적인 세계를 말한다. 욕계는 천상의 욕계 6천과 인간 · 수라 ·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이며, 색계란 천상의 욕계 6천의 위에 있는 4선천이며, 무색계란 색계 4선천의 위에 있는 무색계 4천이다.
먼저 천상의 세계부터 말하면 천상의 세계는 수미산을 걸쳐서 위로 펼쳐져 있는 세계이다. 여기에는 욕계 6천과 색계 18천과 무색계 4천이 있다.
욕계 6천은 삼계의 하늘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여 수미산의 중턱에 위치한 사천왕천을 비롯해 수미산 정상에 도리천, 그리고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의 여섯 개의 하늘을 말한다.
사천왕천(四天王天)은 수미산의 중턱에 위치한 하늘세계로서 사방으로 지국천(持國天), 증장천(增長天), 광목천(廣目天), 다문천(多聞天)의 네 개의 세계가 펼쳐져 있으며 각각의 하늘에 그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있는데 이들을 4천왕이라 하기에 그 이름을 사천왕천이라 하는 것이다. 이 하늘사람의 수명은 5백세이며 이 하늘의 하루는 인간세의 50년이다. 이 사천의 왕들은 도리천의 주인인 제석천을 섬기며 팔부의 귀신을 지배하여 불법에 귀의한 이들을 보호한다.
그 다음 도리천은 수미산의 꼭대기에 있는 하늘로서 사방으로 여덟개씩, 그리고 중앙에 하나의 세계인 33개의 하늘로 이루어져 있기에 다른 말로 33천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세계는 중앙하늘세계인 선견성(善見城)에 머무는 제석천(帝釋天)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이 도리천은 반달의 삼재일마다 하늘세계 밖에 있는 선법당에 모여 법다운 일과 법답지 않은 일을 평론한다. 이 하늘의 중생들은 남녀가 음욕(淫慾)을 할 적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데, 이 하늘의 사람들의 수명은 1천세이며 이 하늘의 하루는 인간계의 1백년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인간의 6살 된 아기와 같으며 몸 빛깔이 원만하며 저절로 의복이 입혀진다.
그리고 그 위에 위치한 야마천부터는 수미산 위의 허공에 떠 있는 세계이기에 공거천(空居天)이라 하는데 공거천의 처음이 야마천이다. 야마천은 이 천상에 사람이 태어날 때가 인간의 7세 아이와 같고 얼굴이 원만하고 의복은 저절로 마련된다고 한다. 수명은 2천세이고 이 하늘의 하루는 인간세의 2백년이라 한다.
야마천의 위에는 도솔천이 있다. 수미산의 꼭대기에서 12만 유순의 거리에 있으며 7보로 된 궁전이 있고 한량없이 많은 하늘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은 외원(外院)과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졌는데, 외원은 욕계의 하늘이고 내원은 이 세상에 오실 부처님이 머무시는 곳이니, 곧 부처님의 정토인 것이다. 지금 여기에는 미륵부처님이 되실 미륵보살님이 살고 계신다. 그리고 도솔천은 아래에 있는 사천왕천. 도리천, 야마천이 욕정에 잠겨있고 위의 화락천, 타화자재천은 들뜬 마음이 많은데 반하여 욕정 깊이 잠기지도 마음이 너무 들뜨지도 않은 상태로 있으면서 오욕락에 만족한 마음을 내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수명은 4천세이며 이곳의 하루는 인간계의 2백년이다.
그 위에는 화락천(化樂天)이 있는데 모든 것들을 자신이 창조하여 즐기기 때문에 화락천이라고 한다. 또 이곳의 사람들의 몸은 항상 광채가 나며 수명은 8천세라 하고, 이 하늘의 하루는 인간계의 8백년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마주 보고 웃으면 음욕의 목적이 달성되며, 아이는 남녀의 무릎 위에서 변화하여 나타나고, 그 크기는 인간의 12세쯤된 아이만 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는데 욕계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늘이다. 또 이곳은 욕계를 지배하는 마왕(魔王)이 있는 곳이다. 이 하늘은 남이 창조한 것도 자유자재로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까닭에 타화자재천이라 한다. 이곳은 마주 쳐다만 보아도 음욕이 만족되고 아들을 낳고 싶다고 생각만 하여도 아들이 무릎에서 나타난다. 이곳의 수명은 1만 6천세이며 이곳의 하루는 인간계의 1천6백년이다.
이러한 욕계의 여섯 개 하늘은 식욕, 성욕, 수면욕이 언제든지 충족되어지는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 갈 수 있는 이들은 복을 많이 받은 그러한 이들이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계 6천은 성욕, 식욕, 수면욕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에 이곳의 가장 높은 하늘인 타화자재천의 왕은 욕계 전부를 지배하며, 그 이름은 마왕(魔王)이다.
마왕은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을 가지고 불법을 공부하려는 이들을 방해한다.
욕계 6천의 하늘 위에는 색계 18천이 있는데, 이 하늘은 인간세의 복락으로는 갈 수 없고 선정(禪定)을 닦았으나 완벽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가는 세계이기에 사선천(四禪天)이라고도 한다. 사선천은 초선천(初禪天)과 이선천(二禪天), 삼선천(三禪天), 사선천(四禪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선천에 하늘이 셋, 이선천에 셋, 삼선천에 셋과 사선천의 아홉을 합쳐서 전부 18천이 되어 색계 18천이라 하는 것이다.
초선천의 첫번째 하늘은 범중천(梵衆天)이며 이곳은 대범왕이 이끄는 하늘사람들이 살고 있어 범중천이라 한다. 이곳 사람의 수명은 반겁이다. 또한 두번째 하늘은 대범천(大梵天)이며 세번째 하늘은 범보천(梵輔天)인데, 이 하늘의 중생들은 모두 색계 초선천의 주인인 대법천왕을 돕고 있는 신하들이다. 천왕은 중앙의 높은 곳에 있으며 천왕이 어디를 가고자 할 때는 반드시 이들이 앞에 가면서 천왕의 이익을 생각한다. 이 천중의 수명은 1겁이다.
이선천의 첫번째 하늘은 소광천(小光天)이다. 광명을 놓는 것이 적으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또 두번째 하늘은 무량광천(無量光天)이라 하는데, 이 하늘에 태어나면 몸으로 광명을 놓는 것이 한량 없다하여 이렇게 부른다. 그리고 세번째의 하늘은 광음천(光音天)인데, 이 하늘의 중생들은 음성이 없고 말할 때는 입으로 광명을 내어 말을 하므로 광음천이라고 한다.
삼선천의 첫번째 하늘은 소정천(小 天)이다. 이곳에서의 마음상태는 즐겁고 청정하지만 그 정도가 삼선천 중에서는 가장 약하다 하여 이렇게 이름한다. 그리고 두번째 하늘은 무량정천(無量 天)이라 하는데, 이곳은 마음상태가 즐겁고 청정하기가 헤아릴 수 없다 하여 이렇게 부르며 이곳의 수명은 32겁이다. 또 세번째의 하늘은 변정천(遍 天)이라 하는데, 이 하늘은 밝고 깨끗하며 쾌락이 가득 찼다는 뜻으로 이렇게 이름한다. 이곳 중생들의 나이는 64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선천의 첫번째 하늘은 무운천(無雲天)이라 하는데, 구름 위 구름없는 곳에 있다 하여 이렇게 이름하여. 두번째 하늘은 복생천(福生天)인데 이곳은 수승한 복으로 인하여 태어나므로 이렇게 부르며 이곳의 수명은 250겁이다. 또 세번째 하늘은 광과천(廣果天)으로. 이곳은 범부가 사는 하늘 중에서는 가장 좋은 곳으로서 이곳에서의 수명은 3겁이다. 또 네번째 하늘인 무상천(無想天)은 광과천의 가운데 있는 하늘로서. 이 하늘에 태어나면 모든 생각이 없어지므로 이같이 이름한다. 다섯번째 하늘인 무번천(無煩天)은 욕계의 괴로움과 색계의 즐거움을 모두 여의고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렇게 이름하며, 여섯번째 하늘인 무열천(無熱天)은 마음이 의지하는 곳과 머무는 곳이 없이 깨끗하고 자유로워서 뜨겁게 번뇌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와 같이 이름한다. 또 일곱번째 하늘인 선현천(善現天)은 이곳에 사는 이들의 착하고 묘한 과보가 나타나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여덟번째 하늘인 소견천(善見天)은 사방을 봄에 있어서 장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그리고..마지막으로 아홉번째 하늘은 색구경천(色究竟天)이다. 이 색계 18천을 지배하는 왕이 범천(梵天)이다.
이 색계 18천의 위에는 무색계 4천이 있다. 무색계는 선정을 닦아 완벽한 경지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색계보다는 높은 경지에 이른 이들이 가는 세계이다.
이러한 무색계의 제일천은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인데 물질인 이 육신을 싫어하고 끝없는 허공의 자재함을 기뻐하며 허공이 끝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수행하여 태어나는 곳이므로 공무변처천이라고 한다. 두번째 하늘은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이며, 세번째 하늘은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으로, 식무변처천에서 연이 되는 바가 아주 없는 줄을 알아 무소유인 것을 깨달으면 태어나는 하늘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하늘인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은 삼계의 가장 위에 있는 하늘이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하며, 이 하늘에 나는 사람들은 아래 세계와 같은 거친 생각은 없지만 세밀한 생각은 없지 않으므로 이렇게 말하며, 외도들은 이 세계에 가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곳도 윤회의 세계 중 하나이다.
어쨌든 이러한 천상의 세계들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선정을 닦든가 착한 일을 많이 하든가 하여서 가는 세계인 것이다.
천상(天上) 밑에 있는 세계는 인간계(人間界)이다. 천상계는 선(善)만이 있고 수라·축생·아귀·지옥계는 악(惡)만이 있는 세계이나, 인간계에는 선(善)과 악(惡)이 공존하기에 인간계만이 부처가 되는 수행을 할 수 있는 세계이다. 또 천상·수라·축생·아귀·지옥계는 업을 받기만 하는 세계이지 새로운 업을 지을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계는 업을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기에 인간계에 태어났을 때 남은 잔업을 전부 소멸시킬 수 있다면, 성불할 수 있고, 만약 그렇지 못하고 새로운 업을 많이 짓는다면 그 업보로 인하여 다시 윤회를 하면서 그 죄업을 다 받고 난 뒤에 잔업을 가지고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계에 태어나는 것은 육도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라계(修羅界)란 수미산을 둘러싼 7겹의 산맥과 또 그 사이에 있는 팔해(八海)의 해변이나 해저에 있다고 하며 천상과 같은 신의 일종이다. 수라의 여자는 대단한 미녀인 반면 남자는 대단한 추남이라 한다. 수라계에는 천상세계와는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미녀가 있는 반면 맛있는 음식이 없고, 천상계는 수라계의 여자에 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미녀는 없으나 맛있는 음식은 있어서 천상계와 수라계의 중생들은 항상 질투하여 싸움을 한다. 이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켜 싸우는 곳을 아수라장이라고 하는데 그 장소는 천상의 신이 수라계에 쳐들어 와서 생기는 곳이기에 수라세계 속에 위치한다. 이와 같이 수라계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장소이기에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에는 인간계를 살아가며 선과 악을 분별하면서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서 악인이 참회하는 것을 용서할 줄 모르고 남들을 미워한 이들이 가서 태어나 그 업보를 받는 세계이다.
축생계(畜生界)란 짐승들의 세계이다. 네 발 달린 짐승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까지도 모두가 축생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축생계는 인간계와 공존하는 세계이지만 향수해에 산다는 용이다 수미산의 정상에 산다는 금시조와 같이 인간계와 공존하지 않는 축생도 있다. 하지만 용이나 금시조처럼 전설적인 축생은 엄밀히 말하면 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축생계에는 인간계에 살면서 지신의 양심을 속이며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명 속에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이들이 가서 태어나 그 업보를 받는 세계인 것이다.
아귀계(餓鬼界)란 인간계 살아가면서 욕심을 부린 이들이 가서 그 업보를 받는 세계인데 아귀란 목구멍이 바늘 구멍만하고 배는 남산만한 귀신이어서 바늘 구멍보다 큰 것을 먹게 되면 목구멍이 막혀서 죽어 버리기 때문에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 세계이다,
마지막으로 지옥(地獄)은 남섬부주를 밑으로 2만유순 내려가면 무간지옥(無間地獄)이 있는대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가 2만유순이라고 한다. 그 위로 1만9천유순 가운데에 층층이 등활지옥(等活地獄), 흑승지옥(黑繩地獄). 중합지옥(衆合地獄). 규환지옥(叫喚地獄).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 초열지옥(焦熱地獄), 대초열지옥(大焦熱地獄)의 7개 지옥이 있어 이것을 무간지옥과 합쳐서 8대지옥이라 하며 또 팔열지옥(八熱地獄)이라고도 한다. 이 팔열지옥은 각 지옥마다 사방에 네 문이 있고 그 문 밖마다에는 네 개의 작은 지옥이 있다. 이곳은 8대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끌려가 그 남은 죄를 받는 지옥이라 하여 십육유증지옥(十六遊增地獄)이라 한다. 근본 지옥인 팔열지옥까지 모두 합하면 136지옥이 있는 것이다.
또 팔열지옥 주변에 가로로 알부타지옥, 니라부타지옥, 알차타지옥, 확확파지옥, 호호파지옥, 올발라지옥, 발특마지옥, 마하발특마지옥의 팔한지옥(八寒地獄)이 펼쳐져 있고 이 지옥들은 염라대왕이 다스리고있으며 지옥중생에게 여러가지 고통을 준다고 한다. 또 이러한 지옥과는 달리 우리들이 사는 산과 골 사이에, 그리고 인간들이 사는 사회속에 고독지옥(孤獨地獄)이 산재하여 있다고 한다.
이 지옥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무간지옥은 남섬부주 아래 2만유순 되는 곳에 있는 몹시 괴롭다는 지옥으로, 괴로움을 받는 것이 끊임없으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이곳에 가는 이는 5역죄를 지은이나 부처님의 시주물을 훔친 이들이 가서 태어나는 곳이다. 5역죄에는 소승의 5역죄와 대승의 5역죄가 있는데 소승의 5역죄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깨달음을 얻은 이를 죽이고, 불교신도들의 화합을 해치고, 부처님의 몸에서 피가 나게 한 죄를 말한다.
대승의 5역죄는 절이나 탑을 부수거나 경전을 불사르고. 불교를 비방하여 경전을 우습게 여기며, 스님들에게 욕을 하고 부려먹으며, 소승의 5역죄를 지으며, 인과의 도리를 믿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 이 지옥에 떨어지면 옥졸이 죄인을 붙들어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진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 속에 죄인을 넣어 몸을 태우며 야차들이 큰 쇠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 쇠로 된 매가 죄인의 눈을 파먹는 등 여러가지의 극심한 형벌을 받는다고 한다. 이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남은 죄를 받기위해 끌려가는, 이 지옥에 붙은 16소지옥은 등활지옥 등과 같은 고통이 있다고 한다.
그 다음 무간지옥의 위에 있는 지옥은 대초열지옥이다. 맹렬하게 불타는 쇠로 된 성이나 쇠로 된 방, 또는 쇠로 된 누각에 들어가 가죽과 살이 타는 고통이 극심하여도 죄가 소멸될 때까지 죽지도 못한다. 이 지옥의 수명은 1만6천세인데 인간의 1천6백세가 타화자재천의 1일이고, 타화자재천의 1만6천세가 이 지옥의 1일이다.
그 다음의 초열지옥은 뜨거운 철판 위에 몸을 눕히고 벌겋게 달군 철봉으로 치며 큰 석쇠 위에 올려놓고 뜨거운 불로 지진다. 또 큰 쇠꼬챙이로 몸을 아래로부터 꿰어 불에 굽는 고통 등을 받게한다고 한다.
그 다음 대규환지옥은 고통이 등활지옥, 혹승지옥, 중합지옥, 규환지옥의 네 배나 된다고 한다. 이 지옥의 수명은 8천세인데 인간의 8백세가 화락천의 1일이며, 화락천의 8백세가 이 지옥의 1일이다.
그 다음의 규환지옥에서 죄인을 끓는 큰 가마솥에 넣기도 하고, 뜨거운 쇠집 속에 들어가게도 하는데 그 고통이 말도 못하여 울부짖는다고 한다.
그 다음의 중합지옥은 죄인들을 대철위산 사이에 놓으면 두 산이 합쳐지면서 눌려 죽는다. 또 큰 쇠통 속에 넣고 눌러 짜는 등의 고통이 있는 곳이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남섬부주에서 가장 가까운 지옥이 등활지옥이다. 이곳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서 로 할퀴고 찢으며 옥졸들도 쇠몽둥이를 가지고 죄인을 때려부수고 칼로 살을 찢는다고 한다. 죄인이 죽으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서 살아나게 되며, 혹은 옥졸이 쇠갈퀴로 땅을 두드리며 살아나라고 외치거나 혹은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살아나서 다시 같은 고통을 받으므로 등활지옥이라 한다. 이곳은 살생을 한 이가 가는 지옥이다.
그 다음 팔한지옥을 살펴보면, 알부타지옥은 몸이 얼어 부스럼이 생기고 부르튼다고 한다. 니랄부타지옥은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피부와 살에 생긴 상처가 헐어 피고름이 홀러 나온다 한다. 확확파지옥은 너무 추워서 혀가 굳어 확확 하는 소리만 낸다고 하며, 호호파지옥은 너무 추워서 오로지 호호 하는 소리만 낸다고 한다. 올발라지옥은 올발라를 청련화라 번역하는데 이 지옥은 추위가 너무 극심하여 전신이 퍼렇게 멍들어 쪼개져서 청련화와 같이 된다는 지옥이며. 발특마지옥은 발특마를 홍련화라 번역하는데 너무 추워서 몸이 얼어 마치 홍련화와 같이 된다는 지옥이다. 마하발특마지옥은 마하발특마를 대홍련화로 번역하는데 이 지옥은 너무 추워서 피부오아 몸이 찢겨 갈라져 마치 대홍련화와 흡사하게 되므로 이와 같이 이름한다고 한다.
그 다음 고독지옥은 팔열지옥이나 팔한지옥과 같이 일정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이나 산 또는 인간들의 생활 속에 있으며 일시적으로 고통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옥들은 대부분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자신의 부인이나 남편 이외의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가지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또 술을 마시고 취해서 술주정을 하거나, 마약등의 환각제를 사용하여 이성을 잃어버리는 행위를 한 경우에 가는 곳이라고 한다. 이 중 무간지옥은 5역죄를 지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 한다.
제8강 윤회의법칙
이상으로 사막의 비유에서 사막에 해당하는 사바세계와 또 그 세계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세계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어떠한 법칙에 의하여 중생들은 이 세계를 윤회하는 것일까?
윤회란 천상·인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세계를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여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윤회의 세계에 있어서 천상계, 수라계, 축생계, 아귀계, 지옥계는 인간계에서 지은 업보를 받기만 하는 세계이다. 즉 윤회를 하게 하는 그 근본의 에너지는 인간계에서 지은 업인 것이다.
업이란 행위를 말한다. 그렇기에 착한 행위는 선업이 되고, 나쁜행위는 악업이 된다. 윤회의 세계에 있어 천상은 인간계에서 한 착한 행위 즉 선업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어떠한 즐거운 일이 생긴다해도 그것을 다 받을 수 없을 때 죽어서 가는 세계이다. 수라의 세계는 화를 낸 업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그 결과를 다 받을 수 없기에 죽어서 가는 세계이며, 축생의 세계는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그 결과를 다 받을 수 없어서 죽어서 가는 세계이며, 아귀의 세계는 욕심을 부린 업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그 결과를 다 받을 수 없어 죽어서 가는 세계이다. 지옥은 나쁜 행위 즉 악업을 지은 것이 너무 많아서 인간계에서는 그 결과를 다 받을 수 없어서 죽어서 가는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계를 제외한 육도윤회의 세계는 업장을 소멸하기 위한 세계일 뿐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계에 있어서의 죽음은 자신이 지은 업이 인간계에서는 다 받을 수 없어서 맞이하는 것이거나 또는 거지가 왕이 되어 받을 수 있는 선업을 지었기에 거지로서는 그 선업을 다 받을 수 없는 경우에 왕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죽는 것처럼 지금 자신이 지은 업이 인간계에서 받을 수 있는 업이기는 하나 현 상황에서는 다 받을 수 없는 경우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인간계에서 받는 업의 수치는 100을 넘을 수 없다는 가정하에 예를 들어보자.
갑이라는 사람이 인간계에 올 때 업의 수치가 선업이 90이었고, 화를 낸 업이 80이었고,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70이었고, 욕심낸 업이 60이었고, 악업이 0이었다고 하자. 그러면 갑은 악업이 0이기에 지옥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갑은 선업이 90이니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집에서는 태어나나 화를 낸 업이 80이니 항상 무엇인가에 의하여 쫓기는 불안한 집안이거나 전쟁 중인 국가에 태어날 것이다. 또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70이니 아집이 강한 이기주의자가 많은 집이나 국가에 태어날 것이며. 욕심을 낸 업이 60이니 가지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지지 못하는 집안에 태어나서 삶을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갑이 선업을 10을 더 지으면 선업이 100이 되어서 천상에 가기 위하여 죽음을 맞이하여야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악업을 70정도 지었다고 하여 보자. 그러면 인간계에서 이 사람이 가지고 온 업에 의하여 형성된 환경에서는 도저히 거기에 해당하는 고통을 받을 수 없기에 죽음을 맞이하여 다시 그 업에 맞는 환경을 가지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또 을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인간계에 올 때 업의 수치가 선업이 0이고, 화를 낸 업이 10이며,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20이며. 욕심을 낸 업이 30이며. 악업을 지은 것이 40이라고 하여 보자. 그러면 을은 선업이 0이니 천상에서 살다 왔을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낸 업이 10이니 조금은 불안이 있으나 상당히 평화로운 가정이나 국가에 탄생할 것이다. 어리석은 짓을 한 업이 20이니 다소 이기주의는 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남을 이해해 주고 남을 돕고 사는 국가나 가정에 태어날 것이며, 욕심을 낸 것이 30이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지는 못한다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만족할 것이며, 또 악업이 40이니 적당히 가난한 집에 태어나 삶을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을이 만약 선업을 70정도 짓는다면 인간계에서는 받을 수 있으나 자신이 타고 태어난 환경 속에서는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또, 다른 업을 100의 수치가 되게 짓는다면 그 업에 맞게 태어나기 위하여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또 병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은 선업을 100을 지어서 죽어 천상에 갔으나 악업을 90정도 지냈다고 하여 보자. 그러면 이 사람은 천상에 가서 태어나 그 복을 받고 다시 인간으로 올 때는 아주 가난한 집에 태어날 것이다.
또 정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악업을 100을 지었으나 선업을 90을 지었다면 이 사람은 지옥에 태어나 악업을 다 소멸시키고 인간으로 태어날 때는 아주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처럼 병이 을보다 더 선업을 많이 지었건만 이 다음 생에 태어날 때 태어나는 환경은 더 열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병이 천상에서 왔기에 그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줄 수 있고 또 정은 지옥에서 왔기에 그 부잣집을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축적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심성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법칙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윤회를 하게 하는 그 원동력은 업이다. 이 업에 의하여 중생들은 끊임없이 윤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등에 짊어진 업장이 자신이 사막을 건너기 위한 양식임도 모른 채 그냥 짊어지고 가는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이 윤회를 끝낸다는 것, 그것은 곧 업장이 모두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윤회 속에 살면서도 업장소멸의 길을 알았다는 것, 그것은 다시 윤회에 떨어지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자리에 있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업장을 소멸시키는 길을 알고 윤회 속에서 불퇴전의 자리를 확보한다는 것, 즉 등에 짊어진 양식을 먹으면서 사막을 건넌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업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제9강 업과 연이(인연)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상으로 제3장에서 사막의 비유에 있어 사막을 건너는 이의 머리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며 그를 인도하는 별에 비유된 부처님과 사막에 비유된 사바세계를 윤회하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등에 양식을 짊어지고 사막을 건너면서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양식이란 우리들의 업장을 말한다. 사막을 건넌 이는 이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업장이 사라지면 사막을 건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버렸다고 사막을 건넌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서 사막을 건너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업장을 양식으로 삼아서 사막을 건넌다는 것은 어떠한 삶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업이라 하였을 때에 우리들은 죄를 지은 것을 흔히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은 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업(業)이란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도 농사짓는 행위는 농업이라 하고. 장사하는 행위는 상업이라 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하는 행위는 직업이라 부르지 않는가? 즉 우리들이 일상생활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행위를 다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들은 생각을 통하여 좋거나 싫거나 또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이러한 감정은 아집(我執=자기 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좋은 것은 받아들이려 하고 싫은 것은 배척하려 하며,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치 카메라가 렌즈를 통하여 사물을 받아들여서 필름에 기록하듯이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전부 기록이 된다.
불교에서는 카메라의 렌즈에 해당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眼=눈). 이(耳=귀), 비(鼻=코), 설(舌=혀), 신(身=몸)의 마음을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라 하며 그것을 가지고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의(意=생각)의 마음을 의식(意識)이라 한다. 그리고 의식이 분별한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 그러한 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서 생기는 것이기에 아집이라 하는데, 이것을 전문불교용어로 마나야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을 알라야식이라 한다.
업이란 우리들이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느끼고 또 그것을 가지고 싫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집착하고 거부하는 행위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마나야식의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필름에 찍히어 남게 되듯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알라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것을 업장(業藏=업의 창고)이라 하는 것이다.
즉 업이란 행위를 말하며 그것이 저장되어져 있는 상태를 업장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착한 행위를 선업(善業)이라 하고 나쁜 행위는 악업(惡業)이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선업과 악업을 짓는 것은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써 짓는다고 한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행위는 몸으로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다 업을 짓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착한 행위 즉 선업은 즐거움이 과보 즉, 낙과(樂果)를 가져다 주고, 악한 행위 즉 악업은 괴로움의 과보 즉, 고과(苦果)를 가져다준다. 이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그런데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를 악업이 괴로움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선업을 짓거나 악업을 지은 즉시 그러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착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즉시 즐거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악한 행위를 하였다고 그 즉시 고통의 결과가 오는 것도 아니다. 마치 땅에 씨앗을 뿌렸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싹이 트여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토양이니 햇빛이니 수분이니 하는 조건들이 맞아야 싹이 트는 것처럼, 우리가 한 착한 행위나 나쁜 행위도 그것이 즐거움과 고통으로 찾아올 수 있는 조건을 만나야 즐거움이나 고통의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선업이 즐거움의 결과로 나타나고 악업이 고통의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그 조건은 무엇인가? 선업에 있어서는 선업과 만나는 것이 그 조건이며, 악업에 있어서는 악업과 만나는 것이 그 조건이다. 이와 같이 같은 업(同業)끼리 만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緣)이라고 하는 것이다.
악업은 반드시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반드시 선업끼리 만나는 것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철칙이다. 이러한 법칙을 불교에서는 동업중생(同業衆生)의 법칙 또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법칙이라고 한다. 즉 즐거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선업이었기에 토(土), 즉 만나는 환경도 선업으로 만날 수 있었고, 또 고통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신(身)이 악업이었기에 토(土)인 환경도 악업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인연의 기본법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은 악업끼리 만나고 선업은 선업끼리 만나는 것을 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끼리 만나면 즐거움이 결과가 따르고 악업끼리 만나면 고통의 과보가 따른다.
그런데 선업이나 악업관계는 만나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서 얻은 결과가 즐거움이면 선업의 관계이고, 괴로움이면 악업의 관계이다. 즉 상대방을 도우려고 한 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선업관계이겠지만 상대방을 도우려고 한일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악업관계이다. 또 상대방을 해하려고 한 일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악업관계이지만 거꾸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한다면 그것은 선업관계인 것이다.
어느 곳에 설렁탕집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굉장한 구두쇠라 뼈를 여러번 재탕하여 설렁탕을 만들었기에 이 집에서 만든 설렁탕은 맹물과 같았다. 그러니 그 집에 손님이 모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장사가 안되자 주인은 주방장이 음식솜씨가 없다며 주방장만 탓하고 월급도 제때에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주방장은 일부러 그 집울 망하게 하려고 국물을 진하게 끓이고 또 밥과 김치 등도 손님들에게 많이 퍼 주었다. 그런데 그 집이 망하기는커녕 맛있는 집으로 소문이 나서 주인은 거꾸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주방장은 앙심을 품고 일부러 주인에게 해를 주려고 하였지만 주방장이 한 행위는 거꾸로 주인을 도와주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주방장과 주민과의 관계가 선업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번잡한 러시아워 시간에 지하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가 계시기에 그 할아버지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갔는데 할아버지는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경찰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지었고 그 누명을 이 사람이 쓰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살인 누명을 쓰고 1년간을 복역한 후에 무죄로 판명이 나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은 이미 파탄이 났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서 승소하였지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가정을 파탄시킨 대가치고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시는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돕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한 이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나쁜 결과가 찾아와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그 할아버지와 이 사람의 관계가 악업관계였기에 그랬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악업인지 선업인지는 그것의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 행위자체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악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세에 따라 선업으로 받을 수도 있고 선업이라 하더라도 악업으로 받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친구와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친구가 칼에 맞아 죽어 있었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하였더니 경찰에서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다 야속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재판장에 들어서면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세상이 다 싫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형무소에서 행하는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스님에게서 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재판날 그는 "이곳에서 어느 스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제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친구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죽인 것은 제가 아닐지라도 저의 업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친구로 두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마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 하여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재판장이 숙연해졌다. 그 후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그의 삶은 이전보다 더 충실한 삶으로 바뀔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친구와의 만남은 형무소에 복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악업의 관계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계기로 부처님을 만나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친구의 관계는 결과적으로는 선업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업관계와 악업관계는 그 결과를 가지고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결과가 생기기 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업이 알라야식에 저장되어져 있을 때의 상태는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닌 무기(無記=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행위)로써 저장되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모든 연이란 악업의 인연이 아니면 선업의 인연이다. 선업의 인연이었다면 은인일 것이고 악업의 인연이었다면 원수일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만남에 있어서도 선업이 아니면 악업이라는 관계가 분명하게 결정되어져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업과 악업관계가 적당히 섞여져서 만나는 것이다. 즉 어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었다 하였을 때 그 관계가 반드시 선업이나 악업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로 만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업과 악업이 적당히 섞여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연이라고 한다. 그 연이 깊으면 짚을수록 가장 가까운 인연인 부모나 형제 또는 부부가 되어 만날 것이다. 그러기에 속담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옷깃만 스치는 관계라 하더라도 그 사람과는 선업과 악업이 섞여져 있는 관계이기에 만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10강 업장소멸하는 방법은
업장소멸이란 지금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고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지은 업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은 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스스로가 받는 수 밖에는 없다. 이를테면 선업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선업관계는 크게 두 가지가 될 것이다. 그 관계란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관계와, 은혜를 베풀었기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관계일 것이다.
이를테면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고 하여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선업관계이다. 왜냐하면 도울 수 있는 연을 만난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에 지금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를 돕는다는 것은 전생(前生)에 자신이 지은 선업관계를 소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덕분에 나는 전생에 지었던 선업을 하나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행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은 선행을 했다는 마음이 남게 되어 새로운 선업을 다시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도운 것이 아니라 그 덕분에 나는 선업을 하나 소멸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선업은 받았으나 새로운 선업을 짓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업장소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행위가 바로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더라도 그 관계는 전생에 내가 도와주면서 만들어진 선업을 받아 소멸시킨 것이니 그 또한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 주신 그러한 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자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신세를 졌어도 그분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업장소멸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내가 지금 신세 지은 것과 같이 나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들을 도우려는 나의 마음 그것 또한, 선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선업을 짓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또한 공덕이 되는 것이다.
악업관계 또한 그러하다. 내가 그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아니면 그이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는지 이 두 가지 악업관계에 의하여 만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잘 해주려고 하여도 그 결과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관계가 될 것이다. .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악업을 소멸시켜 준 사람이다. 그러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원망과 분노 속에서 그를 본다면 이것 또한 악업을 받고 또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 진실은 밝히려고 할지언정 누가 그르네, 누가 옳네 하는 시비를 가려서 원망과 분노 속에서 살지 말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일 때에 악업을 받았으되 새로운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 된다.
그 다음 내가 아무리 잘 해주려고 했어도 그 결과가 그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고 그에게 원망을 사게 되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원망만 한다고 억울해 하고 그를 미워만 한다면 그것 또한 악업을 받으면서 또 새로운 악업을 짓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 또한 업장소멸을 시켜준 감사한 인연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분노와 억울함을 동정할 줄 알고 감사로써 참회하는 것, 이것이 업장소멸하는 공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업장소멸하는 마음가짐과 행위를 우리는 공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덕이란 우리들이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행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단순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 감사와 참회의 마음, 이것이 곁들여져야만 그 행위가 공덕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을 소멸함에 있어서는 그 업이 찾아왔을 때 피하지 않고 받아서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 근본이며 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것을 잘 가르쳐 주는 말이 바로 부처님의 삼불능이다. 이것은 부처님도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말하는데 첫번째는 정해진 중생의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없으며, 둘째는 연이 없는 중생을 구원할 수 없으며, 세째는 삼계를 다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이것을 자세히 설명해 보면 첫째. 정해진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없다는 말은 배가 고픈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대신 밥을 먹어 줄 수 없고, 병든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병이 들 수 없듯이 업을 받는 중생을 대신하여 부처님이 업을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배고픈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밥을 먹어 줄 수 없지만 배고픈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주고, 병든 아들을 대신하여 어머니가 병이 들 수는 없지만 병든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듯이, 부처님도 업을 받는 중생을 대신하여 업을 받아 줄 수 없어도 업을 받는 중생과 항상 함께 하면서 그를 보살피는 것이다.
어떤 중생이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든데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든 피투성이가 된 생명체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생명체를 보고 외쳤다. "도대체 너는 누구인데 남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거야. 이 지옥의 고통에서는 나의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든데 왜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거야. 놔!" 그러자 그 생명체가 대답하였다. "나는 너의 옷자락을 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구제하여야 할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놀라서 물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부처라면 나를 구제해야지 그 몰골을 하고 어떻게 나를 구제한단 말이야" 그러자 그 생명체가 말했다. "내가 너를 업고 저 업장소멸의 길로 가는데 내가 가자고 하는 길은 네가 업장을 소멸하여야 할 길이기에 험난해 보이고. 지옥의 길은 휘황찬란하게 보이니까 너는 내가 너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려는 줄 알고 나를 악마 취급하여 두들겨 패서 이와 같은 피투성이로 만들지 않았느냐. 하지만 나의 생명은 너를 구원하는 것이기에 내가 만약 너를 포기하게 되면 나도 죽게 된다. 이렇듯 내가 잡고 있는 너의 옷자락은 나의 생명줄이기에 너의 옷자락을 놓을 수 없다"
마치 불에 타는 집에 있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불 속에 들어간 구조대가 그를 업고 나오면서 그가 겪는 뜨거움을 대신할 수 없듯이, 업장의 불길에 휩싸인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로 부처님이 뛰어들어 오셔서 중생을 업고 나가면서 그가 겪어야 할 업장의 고통을 부처님이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중생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겁내지 마라. 내가 있다"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삼불능의 첫번째인, 정해진 업은 소멸시켜 줄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다음 둘째, 인연없는 중생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부처님은 그 중생이 인연이 없다고 포기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을 때까지 때를 기다리시며 버리시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 단순하게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자기의 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방편을 사용하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연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째, 삼계의 중생을 다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부처님의 생명은 중생구원에 있다. 그렇기에 중생이 다 구원되어 더 이상 구원할 중생이 없게 되면 부처님의 생명 또한 끝인 것이다. 삼계에 있어서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어야 부처님도 이 사바세계에 함께 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삼계의 중생을 다 구원할 수 없다는 뜻은 부처님은 이 사바세계에 계시면서 마지막 한 명의 중생까지 다 구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불자가 있었다. 절을 창건할 정도로 신심도 대단하였고 법회에는 반드시 참가하여 기도도 열심히 하는 불자였다, 이 불자가 병이 들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카톨릭을 믿는 아들이 "어머니. 영세를 받으셔야 천국에 갑니다" 하며 간곡하게 권하자 영세를 받고 임종을 하였다. 그런데 이 불자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돼서 불자의 남편이 병을 얻어 누워 있다 3년이 안되어 돌아가셨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영세를 권하였던 아들도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하였다. 그러면서 집안의 가세는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가족들은 "어머니가 불교를 믿었는데 영세를 받으셔서 그렇게 되었으니 어머니가 평소에 다니시던 절에 가서 천도제를 지내드리자"고 의견을 모아 천도제를 지내드렸지만 집안의 형편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경에 놓이게 되면 누구나 이 집안의 가족들처럼 부모님이 좋은 데로 못 가셨기 때문이거나 어머니가 다른 종교를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사고가 발생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죽은 후에 가야 할 곳이 확실하게 결정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종교를 바꾼 이 불자님의 신앙생활은 뭔가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즉 바른 신앙생활이었다기 보다는 미신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하게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선업과 악업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선업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백배 천배 노력해야 할 일도 나는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악업을 받을 적에는 남들은 손쉽게 하는 일도 나는 백배 천배 노력을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즉 선업을 받을 때에는 행복이 찾아오고, 악업을 받을 때에는 불행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선업이든 악업이든 다 받아서 소멸시켜야 한다. 인생이란 선업이 끝났으면 악업이 찾아오고 악업이 끝나면 선업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자님은 선업만 받고 악업은 받지 않기 위하여 점을 쳐서 미리 악업이 찾아올 것을 알아 부적이나 쓰고, 부처님 전에 "우리 남편, 우리 자식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빌 줄이나 알았지 악업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불자님의 일생은 선업을 지으면 짓는 즉시 다 받아 없애면서, 악업은 축적하여 사는 일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업에는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이란 것이 있다. 공업은 환경과 만나는 인연을 결정시켜 주는 업이며 불공업은 자신을 결정시켜 주는 업이다. 즉 가족은 가족으로서 공업이 있기에 만난 것이고, 서울에 같이 사는 것은 서울 사람으로서 공업을 가졌기에 서울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한국사람으로서 공업을 가졌기에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지구에 같이 사는 생물은 지구에 산다는 공업을 가졌기에 지구에 태어나 같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태양계에 태어나서 같이 사는 생물들은 모두가 태양계라는 공업을 가졌기에 같이 모여 사는 것이다. 이렇게 공업은 자신의 탄생 또는 환경을 결정시켜 준다. 그리고 불공업은 자신의 육신을 결정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공통된 업이 가장 많이 포함된 것은 아버지일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우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공업은 가장 효심이 깊은 아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 아들이 돌아가시려는 어머니에게 영세를 받도록 도와드린 그 아들일 것이다. 즉 진심으로 어머니가 천국에 가시기를 바라는 효심에서 어머니가 영세를 받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업은 그 아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교통사고를 당해 명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점이나 부적을 쓴다거나 기복적인 신행생활은 중생들에게 커다란 고통의 결과를 가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업이란 것은 자신의 환경과 육신만을 결정시켜 줄 뿐 자신의 의지까지도 결정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즉 지금의 자신 환경과 육신 또는 모든 인연은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는 지금의 자신이 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지금의 환경을 극복해낸다면 그 사람의 삶은 운명적인 삶이 아니라 얼마든지 개척되어질 수 있는 삶이다. 미래의 예언자, 다시 말하면 사주팔자나 점쟁이들이 말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의 삶은 별볼일 없는 삶이 된다.
업을 극복하는 삶이란, 다시 말하면 업장을 소멸시키는 삶이란 사주팔자를 바꾸고 점쟁이들의 점괘가 맞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가 점을 부정하는 이유가 있다. 불교는 점쟁이들의 점괘나 토정비결 같은 것들이 맞지 않아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주팔자를 바꾸면서 그러니까, 개척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것들에 의지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업장소멸의 삶이란, 과거나 전생에 지은 자신의 업에 의하여 결정된 지금의 환경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여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가 업에 의하여 결정되어진 자신의 환경을 극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복은 부처님이 자신의 선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단약임을 알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행은 부처님이 자신의 악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쓴약임을 알아,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지 않으며, 불행이 찾아와도 극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행복이 찾아와도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신행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날 필자에게 어떤 이가 찾아와서 올해 삼재가 들었으니 부적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필자는 물어보았다. "올해 그냥 삼재를 받으시렴니까, 아니면 다음에 삼재가 또 찾아올 때 올해 것까지 다 모아서 받으시렵니까?"
우리가 부처님에게 기도할 때에 발원을 한다면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빌기보다는 "우리 가족이 업을 받음에 있어서 피하지 않고 받아 이길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또 항상 보살피는 부처님이 옆에 계심을 믿을 수 있도록 하여주십시오" 라고 발원을 하여야 할 것이다.
제11강 수행에 대하여
우리가 공덕을 지을 수 있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착한 행위를 하고서도 어찌 그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있으며 또 그러한 행위를 받은 상대에게도 아무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억울함을 당하였어도 어떻게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또 행복을 부처님이 주신 단약이라 하며 집착하지 않고, 불행을 부처님이 주신 쓴 약이라 하며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수행을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세가지로 분류되어진다. 수학(修學)과 수도(修道)와 수행(修行)이다.
어떤 이가 부산을 가야 하는데 가는 방법을 모르며 또한 어디 마땅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가정하여보자. 그렇다면 그 사람은 우선 지도를 가지고 부산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도를 보는 법을 모른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지도를 보는 법을 우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서 부산으로 가는 길을 찾으며 또 자동차를 분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운전을 하여 부산으로 가야 부산에 도착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가 되려는 이는 부산을 가려는 이가 지도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우선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가를 배워야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학문을 닦는다 하여 수학(修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법을 배웠으면 부산을 가려는 이가 지도를 보면서 부산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자동차를 준비 하듯이 그것을 실천하면서 부처가 되는 길을 확실하게 찾아야 한다. 이것을 부처가 되는 길을 닦는다 하여 수도(修道)라고 한다. 이 수도가 다 끝났으면 길이 통하였다 하여 도통(道通)하였다 한다. 그리고 나면 실지로 그 길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야 하듯이 수도를 통하여 안 실천을 통하여 부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행을 닦는다 하여 수행(修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삼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데 불교의 삼매에 대하여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불교의 삼매와 요가의 삼매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여 보겠다.
우리에게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가 있다. 본능적인 자아는 인간으로써 가지고 있는 번뇌에 이끌리는 자아이며 지성적인 자아는 교육이나 종교를 통하여 번뇌에 의하여 이끌리는 본능적인 자아를 제어하여 억제하여야 할 것은 억제하고 권장하여야 할 것은 권장하는 역할을 하는 자아이다.
요가에 있어서의 삼매는 지성적인 자아를 최고의 단계(자와 타가 초월되어 자아에 대한 인식이 없는 단계)로 끌어 올린 후 그것이 본능적인 자아를 완전하게 억제함으로써 본능적인 자아를 소멸시켜 지성적인 자아만을 가지게 한 후 궁극적으로는 그것 조차도 초월하여 버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지성적인 자아를 업그레이드시킬지언정 그것을 가지고 본능적인 자아를 완전하게 제어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갈등 그 자체를 근본번뇌에 의하여 발생되어지는 번뇌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 있어서의 삼매는 자아이면서도 자아를 초월한 그리고 본능적인 자아도 아니고 지성적인 자아도 아닌 그러한 자아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객관적으로 관(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는가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미국의 한 정신과 병원에서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임상 사례인데 술에 취하여 항상 주정을 부리는 이는 술이 깨면 자기 자신이 부린 추태에 대하여 후회하고 반성하면서도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이러한 사람에게 그 사람이 술에 취해서 하는 행동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그 다음날 보여주면 추태를 부리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가 쳐다보면서 그 다음부터는 술에 취해도 똑 같은 추태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삼매에 있어서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와의 갈등을 자아가 초월되어진 자아가 관함으로써 똑 같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것은 그것에 대한 번뇌가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똑 같은 갈등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지혜가 발생해서 인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바라밀이란 의식되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반야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반야바라밀이란 자기자신에게는 의식되어지지 않은 상태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에게는 지혜인지 무엇인지 조차도 인식되어지지 않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맞추어 수학과 수도와 수행을 설명하여 보면 수학은 우선 왜 성불하여야 하는가를 알고 그 방법을 알기 위하여 삼법인 12연기 사성제 팔정도 나아가 37보리분법 등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도란 여러 수행방법을 통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기능을 가진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가 형성되어져서 그 자아가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을 때 불교에서는 삼매에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삼매는 끊어지는 법이 없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지는 삼매이며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은 이 반야바라밀에 의하여 일상생활 그 자체가 수행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행이라 할 때는 수도의 과정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기에 수행이 바로 수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반야경]을 읽어보면 제불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성불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반야용선을 타고 고해의 바다를 건넌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수행을 분류하면 수학과 수도와 수행으로 분류가 되는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수도이다. 이 수도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와의 갈등을 끊임없이 관할 수 있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를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방해요인이 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들에게 삶, 건강, 젊음, 부귀영화 등의 즐거움에 집착하게 만드는 요인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의 번뇌이다.
첫 번째 요인을 없애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출가(出家)를 요구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요구하는 출가는 가출과는 다르다. 가출이란 이러한 환경을 스스로 회피하는 것이지만, 출가란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출가를 번뇌화택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여 가정을 버리고 홀로 되는 것 보다도 마음의 출가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켜야 한다. 계율(戒律)이란 계(戒)와 율(律)을 말하는데 계란 자신과 부처님과의 약속을 말하며 율이란 불교의 승단 즉 단체가 원활하게 운영되게 하기 위한 단체의 규정이 그것이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이 계와 율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사용되는 계 중에는 계라고 하기보다는 율에 가까운 것도 많이 있다. 그래서 흔히 계와 율을 구분하지 않고 계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시정되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계에는 대승불교에서는 승려에게는 보살계가 있으며 신도에게는 십중대계가 있고 소승불교에서는 승려에게는 비구, 비구니, 식차마니, 사미, 사미니계가 있으며 신도에게는 5계가 있다. 이러한 계들은 계라고 할 수 없는 율에 가까운 것도 많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계율이라고 부르지만 편의상 계라고 하여두자. 그런데 독자들은 부처님과 자신의 약속은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대로 하면 되지 이렇게 정해 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계는 승려로써 또는 불교신도로써 이러한 정도는 최소한 부처님과 약속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취지에서 모델로 정해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정해져 있는 계를 받았다 하여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과 자신과의 약속을 정하는 의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자신이 따로 약속을 정하고 그것을 지킨다면 그것이 계를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어겼다고 하여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신행생활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계를 지키지 못했음을 참회하는 포살법회와 자자법회가 있는 것이다.
율이란 단체가 운영을 원활이 하기 위하여 정해놓은 규범이기에 종단으로 본다는 종헌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법률 또는 규칙이나 시행령 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어겼다고 하여서 반드시 신행생활이 잘 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단체를 운영함에 고충이 따르는 관계로 강제성을 가진다. 그리고 처벌하기 위하여 대중공사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수학을 하여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들을 습득한 후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만들기 위하여(삼매를 체득하여 반야바라밀을 얻기 위하여) 수도에 들어가게 된다.
수도하는 방법을 크게 나누면 네 가지가 된다. 참선(參禪). 간경(看經). 주력(呪力). 염불(念佛)이 그것이다.
참선이란 요가 수행법 중 명상법을 도입시켜 완성된 방법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위빠사나선과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默照禪)이 그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소승불교국가인 동남아지역에서 행하여지는 참선법인 관계로 그 쪽 지역에서 완성된 것 같고 간화선이나 묵조선은 중국에 와서 완성되었다.
위빠사나에 있어서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조식법(調息法)이 사용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요가의 명상법처럼 숨쉬기를 통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그 후에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간화선이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화두(話頭)라는 것을 사용한다. 화두란 말 그대로 말머리인데 우리가 말을 시작할 때 처음으로 꺼내는 말을 말머라고 하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정신을 통일시키는 게기가 된다는 의미에서 말머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란 의심덩어리를 말하는데 이를테면 어떤 이가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그러자 조주선사는 말씀하셨다. "없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부처님의 경전인 「열반경(涅槃經)」을 보면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 터인데 왜 조주선사는 없다고 하였을까? 하여 무(無)를 가지고 참구한다는 무자화두는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화두이다. 또 요즘 스님들이 잘 사용하는 "이 뭣고" 화두는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경상도의 사투리로서 밥 먹고, 생각하고, 돌아다니며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라고 참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의심덩어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머리로 분별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동일하게 하는 수단으로써 사용하는 것이다. 의심덩어리로 정신이 통일되면 화두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가 되어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를 관하게 된다. 이것을 선가에서는 자나 깨나 일상생활에서도 화두를 놓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화두를 참구해서는 안되고, 화두에 의하여 내가 참구되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묵조선이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기 위한 전단계로서 위빠사나나 간화선처럼 조식법이나 화두를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작정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그러한 자아가 형성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도과정을 거치면서 자아를 초월한 자아가 형성되어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게 되는 횟수가 많아지다가 그러한 자아가 없어지지 않고 항상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24시간 365일 지속되면 일상생활 모든 것이 삼매가 되는 것이기에 반야바라밀이 항상한다. 그렇게 되면 잠을 자는 것은 와선이 되고 걷는 것은 행선이 되며 앉아 있는 것은 좌선이된다. 그래서 항상 선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상태가 수행의 마직막 단계인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간경이란,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연구하고 실천함으로써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자아를 초월한 자아가 되어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경전을 읽지 않아도 경전과 항상 함께하게 되어 24시간 365일 경전과 함께 하게 되며 생활 속에서도 새로운 경전을 발견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반야바라밀이 항상하여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수행에 들어가게 되어 반드시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력이란,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과 입을 부처님의 몸과 마음과 입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그 방법은 헤아리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대표적인 것으로서 삼지과밀이 있는데 삼지과밀이란 몸으로는 인드라(부처님의 수인)을 하고 마음으로는 만다라(부처님의 세계)를 생각하며 입으로는 다라니(뜻 풀이는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으나 뜻을 풀이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 나라의 신비스러운 언어라고 하는데 이 중 그 길이가 짧은 것을 흔히 진언이라고 한다)를 외는 것이다. 또 티벳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은 입으로는 다라니나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면서 마음으로는 만다라를 생각하면서 몸으로는 만다라를 그리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사경(경전을 옮겨 쓰는 행위)이나 사불(부처님의 모습을 옮겨 그리는 행위)가 있다. 또 일반적으로 기도라는 이름으로 스님과 신도들 사이에서 행하여 지는 몸으로는 뱍팔배나 천팔십배 등을 하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마음을 통일하여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행하여 지는데 이런 것들이 다 주력 수행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진언이나 다라니을 외움으로써 부처님과 하나인 입이 되고 몸으로는 인드라를 하거나 만다라를 그리거나 사경이나 사불 또는 절을 함으로써 몸이 부처님과 하나 되고 마음으로 부처님의 세계인 만다라를 생각하거나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함으로써 부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탄생되어지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통하여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와의 갈등을 관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항상 관할 수 있게 되면 항상 반야바라밀이 함께하게 되고 수행에 있어서 수도의 단계가 끝나 수행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어 반드시 성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염불이란, 자신을 구원하시고자 원을 세워 극락세계를 만드시고 그분의 명호를 외우는 이들은 모두가 극락세계에 탄생하게 하시어, 업장을 다 소멸시켜 성불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아미타부처님을 신앙하는 것인데 여기에 있어서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와의 갈등을 아미타부처님이 항상 관하신다고 믿는 거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아미타부처님의 옆에는 눈이 천 개 손이 천 개인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님이 계셔서 내가 볼 수 없는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까지도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믿기만 한다면 수도라는 단계가 필요없게 되고 바로 반야바라밀이 증득되어서 성불도에 이루게 된다.
이상의 참선, 간경, 주력, 염불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것을 용수보살(龍樹菩薩)은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이라는 저술의 <이행품(易行品)>에서 성불로 가는 수행의 길을 두 개의 문으로 나누어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을 설명하고 있다. 난행문이란 어떤 목적지까지 가는데 육로를 이용하여 어렵게 걸어 가는 것이고, 이행문이란 뱃길을 통하여 쉽게 가는 것이라고 용수보살은 설명하고 있다.
또 중국의 담란대사(曇鸞大師)는 [무량수우바리사원생게주(無量壽優婆提舍願生偈)]라는 저술에서 자력문(自力門)과 타력문(他力門)으로 나누고 있는데 자력문은 성불도를 향하여 자기 힘으로 가는 방법이며 타력문이란 부처님의 힘을 빌어 가는 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도탁선사(道棹禪師)는 [왕생요집(往生要集)]이라는 저술에서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으로 나누고 성도문은 행하기 어려워 성민만이 가는 곳이고 정토문은 행하기 쉬워 범부들도 가는 곳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용수보살이 난행이라 하고 담란대사가 자력이라 하고 도탁선사가 성도문이라 한 것은 참선, 간경, 주력의 수행법을 말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힘든 수도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수보살이 이행이라 하고 담란대사가 타력이라 하고 도탁선사가 정토문이라 한 것은 염불수행법을 말한다. 왜냐하면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는 아미타불이기에 아마타불을 믿음으로써 수도의 과정이 끝나는 것이기에 믿음으로 그 어려운 수도의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참선이나 간경이나 주력수행을 통하여 본능적인 자아와 지성적인 자아의 갈등을 관하는 자아를 초월한 자아를 형성시킨 다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참선, 간경, 주력의 수행을 믿기는 쉬우나 행하기가 어렵다하여 난행이신(難行易信)이라 한다. 그리고 염불 수행을 행하기는 쉬우나 믿기가 어렵다고 하여 이행난신(易行難信)이라 한다.
그리고 조사스님들은 자력수행법과 타력수행법의 장점과 단점을 보안하기위하여 병행하는 수행을 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참선수행을 하면서도 함께 염불수행을 하였고 간경수행을 하면서도 염불수행을 함께 하였고 주력수행을 하면서도 염불수행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고 우리나라의 원효성사(元晩聖師)는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라는 저술에서 정토종(淨土宗)은 범부는 물론이요 성인도 함께 성불하는 가르침*이라고 하고 있다. 얼른 이해가 안가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염불이 범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하기 쉬운 방법이면 성인은 더 하기 쉬운 것일 터이니 *성인은 물론이요 범부도 함께하는 성불의 가르침*이라고 하여야 맞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범부는 자신이 범부임을 자각하는 사람을 말하고 성인은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성도문을 통과한 자만이 정토문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염불은 수행법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염불은 참선, 간경, 주력 수행을 통하여 수도가 끝난 이들이 가는 길이 염불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선, 간경, 주력은 수도이고 이러한 수도의 과정을 거친 이들은 걷는 수행의 길이 염불수행인 것이다.
그러나 근기가 수승한 이들은 수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바로 수행의 길인 염불수행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근기가 수승하다는 것은 자아가 그다지 강하지 않고 부처님을 쉽게 믿을 수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 수행은 불교의 근본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다음 장 본원염불에서는 염불수행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봄으로써 불교의 근본 신앙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제12강 극락세계
"이제까지 불교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불교가 목적으로 하는 성불의 의미 우리가 살아가는 사바세계와 윤회의 의미 그리고 사바세계를 살게 하는 우리들의 업장, 나아가서 그 업장들을 소멸시키고 성불에 들어가기 위한 불교의 수행법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번 장에서는 염불수행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불교의 근본신앙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불교의 근본 신앙인 염불의 핵심은 살아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고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 죽은 후에 극락세계에 태어나 업장을 소멸하고 성불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근본 신앙인 염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극락세계가 어떠한 곳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극락과 정토와 불국토를 구분하여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경전은 없다. 이러한 용어들이 혼잡스럽게 섞이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지금 극락과 정토와 불국토라는 용어를 새로운 개념으로 구분하려고 하는 것은 용어는 혼잡하게 사용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개념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 개념을 구분하지 않는 한 부처님의 세계들을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필자가 앞으로 정의하려는 극락이 경전에서는 정토나 불국토라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정토라고 정의하려는 개념이 불국토라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 불국토라고 정의하려는 개념이 정토라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여 필자가 정의하려는 극락과 정토와 불국토의 개념이 구분이 안되어져 있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과 용어를 구분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7개의 산맥과 바다에 그리고 4개의 대륙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우주를 1소세계라 하며 이 1소세계가 1,000개가 모이면 1중세계라 하고 1중세계가 1000개가 모이면 1대세계라 하며 1대세계가 3개가 모이면 삼천대천세계라 하는데 이 삼천대천세계가 1분의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시는 범위라 하여 1불국토라 한다. 부처님에는 과거불과 현재불과 미래불이 있는데 과거불이란 과거에 이 세상에 오셔서 중생들을 제도하시고 가신 부처님을 말하며 현재불은 현재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 부처님이며 미래불은 현재불 다음에 이 세상에 오셔서 중생을 제도하실 부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국토를 현재불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 곳이라 정의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불은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많이 계시다. 그렇기에 불국토 역시 항하의 모래알 같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 중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불국토에 있어서의 현재불은 석가모니불인 거이다.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불국토의 과거불은 과거 7불이며 미래불은 미륵불이다. 그런데 『법화경(法華經)』에서는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의 불국토를 영산정토라 표현하고 있는데 어쨌든 여기에서는 현재불이 중생을 구제하시는 곳이니 불국토라 정의하겠다.
정토는 미래불이 머무는 곳을 정토라 정의하겠다. 미래불인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열반하신 후 56억 7천만년 후에 이 땅에 오신다 하며 지금은 도솔천 내원궁에서 이 땅에 오실 시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토란 도솔천의 내원궁이 되며 또 다른 불국토에 있는 미래불들이 머무는 곳이 다 정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토의 특징은 무엇인가.
중생들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업장을 다 소멸하여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지은 업은 받아서 소멸하여야 하며 새로운 업을 짖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불국토는 현재불이 설법을 통하여 이제가지 지은 업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과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짖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중생들을 교화하고 계시는 곳이다. 이에 반하여 미래불이 머물고 계신다는 정토는 이제까지 지은 업은 소멸시켜 줄 수 없지만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짖지 않게끔 함으로써 업장이 늘어남을 막아주고 미래불이 이 땅에 오실적에 같이 내려와 중생들을 교화하면서 이제까지 지은 업을 다 받아 소멸하게 함으로써 성불시켜 주는 곳이다.
이에 반하여 극락은 새로운 업을 짖지 않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이제까지 지은 업도 다 받아 소멸되게 함으로써 극락에 왕생하면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오지 않아도 극락세계에 왕생한 것 만으로도 성불할 수 있게 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구원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실지로 불국토의 현재불이나 정토의 미래불 모두 중생들에게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권유하고 계신다.
극락세계가 생긴 인연에 대하여 설하여진 경전은 『무량수경(無量壽經)』이다. 『무량수경』에 근거하여 극락세계가 생기게 된 인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우주 어딘가에 있는 어느 불국토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그 불국토에는 과거 53불이 차례로 출현하시어 중생을 구제하시다가 53번째의 부처님이신 세자제왕(世自在王)부처님이 현재불로써 중생을 구제하실 대의 일이었다. 현재불인 세자재왕불이 머무시던 나라의 국왕이 국가와 재물과 지위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셨다. 그리고 이름을 범장(法臧)비구라 하셨다.
법장비구는 자신만이 부처가 되는 길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어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들의 정토는 많으나 모두가 과거에 지은 업장을 소멸시켜 주는 장치가 없기에 완벽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새로운 업을 짖지 않게 해 줄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지은 업장도 다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정토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방법을 그 당시 그 불국토의 현재불이신 세자재왕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곳이 완성된 곳도 없고 시도하여 본 부처님도 없으시기에 세자재왕불은 법장비구가 세운 서원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방(十方) 불국토의 제불여래 아무도 그것을 모르심을 관하시고서 법장비구의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법장비구를 데리고 현재불이 중생을 구제하시고 계시는 210억의 불국토를 보여주면서 그러한 정토를 만드는 방법을 찾도록 협조하여 주었다. 210억이 불국토를 모두 돌아 본 법장비구는 5집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그 중에서 가장 수승한 방법을 48가지를 선택하시고 그러한 정토를 만드는 수행에 들어간다. 이때 이분의 이름을 법장보살이라 부르게 된다.
이윽고 헤아릴 수 없는 무수억겁을 수행한 끝에 지금부터 10겁 전에 법장보살은 48원의 서원을 모두 성취하고 만인이 성불할 수 있는 정토를 만들어 부처님이 되시니 그 이름을 아미타불이라 하고 그 정토를 극락세계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정토가 완성되자 모든 불국토의 현재불들과 모든 정토의 미래불들은 모두가 중생들에게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완성되었음을 알리고 중생들에게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도록 권유하시게 되었다.
이것이 극락세계가 탄생되어진 인연이다. 법장보살이 세운 시원은 대단히 큰 서원이었다. 스스로 성불할 능력이 있는 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불할 수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한 명도 빠짐없이 구원하겠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원은 모든 부처님들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실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세자재왕불은 법장비구에게 다른 부처님들이 중생을 구제하시고 계시는 현장을 보여주기 위하여 210억이 불국토를 함께 다니셨던 것이다. 210억이라는 숫자는 모든 부처님들의 불국토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불국토는 다른 부처님들이 모든 중생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서원과 실천방법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시는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법장보살은 48가지의 서원을 5겁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생각하고 생각하여 선택해 한 명의 중생도 빠짐없이 구원될 수 있는 서원을 완성하신다. 그러기에 법장보살이 세운 서원은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이 포함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불 여래들의 서원을 48가지로 단축하면 아미타불의 48원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네 가지로 단축하면 사홍서원이 된다. 또 이 사홍서원을 하나로 단축하면 제18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노래할 때 18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미타경(阿彌陀經)』에 보면 아미타불의 극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의 불국토를 지나가면 있는 세계라고 한다.
앞의 제 4장 불교의 세계관에서 설명하였듯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소세계라 하였을 때 이 소세계가 천이 모여야 1 중세계가 되고 또 1 중세계가 천이 모여야 1대세계가 되며 1 대세계가 3개가 더 모여야 3 천대천세계가 되며 이 3 천대천세계를 1불이 중생을 구제하시는 범위라 하여 1불국토라 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0만억의 불국토라는 거리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이다.
그러기에 극락세계는 우리가 우주선 등의 어떠한 물체를 타고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로지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생각하였을 때 극락세계는 10만억의 불국토를 지나야 한다는 말은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또 그 만큼 아미타불로 향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문이 얼마나 굳게 닫혀져 있는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서쪽이리는 방위 역시 동서남북의 방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지는 곳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다. 즉 우리가 사는 세계는 육도윤회의 세계이니 육도윤회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해가 동쪽에 뜨는 것처럼 동이라는 방위로써 표현한다면 한참 육도윤회를 하고 있는 상태는 위가 될 것이고, 육도윤회를 마치는 것은 서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서라는 방위는 육도윤회를 벗어나 다시는 육도윤회의 세계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였을 때 동서남북 상하를 가리지 않고 육도윤회의 사바세계를 벗어난 곳이 바로 극락세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극락의 반대말을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에서 생각한다면 극락세계의 반대말은 지옥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하는 사바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반대말은 육도윤회 중 천상이 지옥의 반대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극락세계에서는 어떻게 하여 이제까지 지은 업은 모두 소멸시킬 수 있으며 또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일까.
이제까지 지은 업을 모두 소멸시키려면 다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극락세계에 중생이 태어나면 연꽃 속에 태어나게 된다. 연꽃 속에는 그 중생이 받아야 할 업에 따라 업을 받을 수 있도록 사바세계와 같은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다만 사바세계와 다른 점은 사바세계는 업에 의하여 만들어진 환경 속에서 업을 받아 소멸시킬 수도 또 새로 만들 수도 있지만 극락세계의 환경은 업을 받아 없애기 위해서만 부처님의 위신력의 방편에 의하여 만들어진 환경인 관계로 업을 새로 지을 수는 없다. 오로지 받아 소멸시킬 뿐이다.
다시 말해서 사업이 부도가 내고 부인과는 이혼을 하고 가족은 다 뿔뿔이 흩어져 자살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하면서 극락을 발원하여 염불을 하였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러면 이 사람도 극락에 태어난다. 그러나 극락 속에 태어난 연꽃 속에 부도가 나고 이혼 당하여 가족이 뿔뿔이 다 흩어진 상태의 환경이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바세계에서야 자신의 업에 의하여 만들어진 환경이지만 극락세계는 업장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만들어진 환경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연못 한 가운데서 종이 울리면 연꽃이 열기고 그 밖으로 나와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누각으로 가서 법문을 듣는다. 모든 괴로움은 부처님이 악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쓴 약이고 또 즐거움은 선업을 시켜주시기 위한 단약이니 가리지 말고 잘 받으라고. 그 법문이 끝나면 다시 연꽃 속으로 들어가 업을 받으며 소멸시키는 것이다.
지금 환경이 괴로운가? 고통스러운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 여기가 극락의 연꽃 속일지도 모른다. 생을 마치고 죽는 순간이 극락의 한나절 이어서 연꽃이 피고 법문을 들으러 연못 한가운데로 나갈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마음먹기에 따라 예토도 극락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예로부터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지은 업은 그렇게 소멸시킨다 하더라도 새로운 업은 어떻게 안 지을 수 있게 하여 주는가. 업이란 우리 행위 그 자체가 업이기 때문에 우리 생활 그 자체가 업을 짖는 행위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락에서는 음식을 먹는 것도 생각으로 먹는다. 그리고 옷을 입는 것도 생각으로 입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만 하여도 그 음식을 실컷 먹는 것이 되며 그리고 입고 싶은 옷을 생각만 하여도 몸에 입혀지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업을 지을 리가 없는 것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하면 이러한 극락세계에는 오역의 죄를 지은이라 하더라도 임종시에 "나무아미타불"의 염불만 한다면 갈 수 있다. 또 수행력이 높은 큰스님이라 하더라도 육신을 버릴 때까지 숨되 쉬었을 것이고 생각도 하였을 것이고 음식도 먹었을 터이니 업장을 완벽하게 다 소멸시켰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극락세계에 가서 조금 남은 업이라도 다 소멸시켜야 완벽한 성불을 이룰 수 있다.
그러니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에는 오역의 죄를 지은이와 같이 소멸시켜야 할 업장이 많은 이와 수행력이 높은 큰스님과 같이 소멸시켜야 할 업장이 아주 적은 이가 함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을 모두 같은 곳에 수용시킨다는 것은 유치원생과 대학원생을 한 교실에서 카르키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극락세계는 9품으로 나누어 중생들을 접인하는 것이다. 9품이란 업이 가장 가벼운 상품상생에서 시작하여 상품중생. 상품하생, 중품상생, 중품중생, 중품하생, 하품상생, 하품중생, 하품하생의 아흡 가지의 세계를 말한다. 하품하생에 태어나는 이는 무간지옥에 갈 5역죄를 지은이가 마지막 임종시 모든 것을 참회하고 선지식을 만나 "나무아미타불" 하려고 마음을 일으키기만 하여도 갈 수 있는 세계이며 최 상승의 상품상생은 수행력이 높은 큰스님과 같은 분들이 가서 업장을 소멸시키는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하품하생이 극락세계의 1학년이라면 상품상생은 졸업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9품의 세계에는 각각의 연못이 있어 그 안에 연꽃이 피어 있는데 극락세계 태어나는 중생들은 이 연꽃 속에서 업장을 소멸시키는 생활을 하게 되는 곳으로서 연꽃 속에는 그 중생이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는 그 중생에게 맞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꽃이 각양각색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의 업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극락세계에 태어날 중생들이 임종을 하게 되면 연꽃 속에 태어나게 되는데 이 연꽃 속에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모든 세계와 똑같은 환경이 구비되어져 있다. 만약 빚쟁이에 쫓기어 죽은 사람이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자신이 태어난 연꽃 속에도 그 빚쟁이들이 있다. 그래서 같은 곤경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빚쟁이에게 쫓겨야 하는 업을 지었기에 그러한 곤경에 빠지게 된 것이어서 그 업을 받지 않으면 업은 소멸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극락세계의 자신의 연꽃 세계 속에는 그러한 업을 받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빚쟁이들이 있는 것이다.
극락세계는 일곱 가지 보물로 이루어진 나무와 일곱 가지의 그물과 일곱 가지의 계단이 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연못이 있으며 이곳에는 중생들이 각자의 업을 받아 소멸시키게 하기 위해 중생들이 업이 변화하여 생긴 각양각색의 연꽃들이 피어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누각이 있고 그 누각에는 종이 매달려 있다. 하루에 세 번씩 문수보살님이 종을 치면 연꽂 속에서 중생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모양이나 복식은 9품연화의 세계가 각각 다르지만 한 세계에서는 같다. 이들은 누각에 모여서 문수보살님의 법문을 듣고 환희심을 낸다. 그러면 하늘에서는 만다라꽃이 내리기 시작하고 중생들은 그 꽃을 주워서 다른 불국토를 다니며 부처님들꼐 공양을 올리고 산책을 즐기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는 새소리와 볼을 스치는 기분 좋은 바람소리, 그리고 누각의 처사에 매달린 퐁경소리들을 즐긴다. 그런데 이 소리들은 모두가 부처님의 법문으로서 중생들에게 항상 커다란 깨달음을 주게한다.
그리고 난 후 중생들은 다시 연꽃 속에 들어가 업을 받는데 사바세계에서는 선업을 받으면 행복하고 즐거워 희희낙락하고 악업을 받으면 불행하여 고통스러워하면서 헤어날 줄을 몰라 다시 업을 지었지만, 이곳에서는 하루에 세 번씩 법문을 듣는 까닭에 선업을 받아 행복이 찾아오면 부처님이 선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신 단약으로 알아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악업을 받아 불행이 찾아오면 부처님이 악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신 쓴약으로 알아 고통에 빠지지 않으며 업장을 소멸시켜 나가는 것이다.
극락세계에 태어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아미타 부처님의 구원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서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나약한 믿음이 아니라, 지옥을 잘 업이라면 지옥을 가서라도 자신의 입장을 다 소멸시키겠다는 참회에서 비롯된 강인한 믿음이다.
그 다음은 극락세계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강한 욕망이다. 이 욕망은 지옥이나 육도윤회가 두려워서 극락세계에 태어나야겠다고 하는 이기주의적 책임회피적 욕망이 아니라 육도윤회의 세계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기에 반드시 그곳에서 나와 극락세계에 가 자신이 지은 입장을 다 소멸시키겠다고 하는 강인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욕망이어야 한다.
그 다음은 기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 기뻐하는 마음은 아미타부처님이 극락세계를 만들어서 나를 점인하지 않으시면 나의 육도윤회의 여행은 끝이 없었을 것을 생각할 때, 나를 대신하여 수고를 하여 주셨고 내가 성불할 때까지 도와주시고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된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집중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 누구나 다 극락세계에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무량수경』에서는 이러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10번 하라 하였고 『아미타경』에는 7일을 하라 했으며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에서는 5역의 죄를 지은이라 하더라도 임종 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려고만 하여도 극락에 태어난다고 하였으니 경전이 말하는 바가 다 다르다. 하지만 이것은 "나무아미타불"을 얼만큼 불렀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불렀는가 하는 아미타불을 믿는 신심이 더 중요함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무아미타불"을 하더라도 믿음이 없이 그냥 입으로만 하였으면 극락세계에는 태어나지 못하고 극락세계의 변방에 태어나 견고한 믿음을 갖춘 후에 극락으로 간다고 『무량수경』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이다.
제13강 불교의 신앙(마지막 강의)
불교의 역사관(歷史觀)에는 삼법관(三法觀)이라는 것이 있다. 삼법관이란 불교의 발전과정을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역사관인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의 시대를 정법(正法)과 상법(象法)과 말법(未法)으로 분류한다. 이 시대들을 연대별로 구분하는 방법에는 정법 5백년, 상법 5백년, 말법 1만년 그리고 정법 5백년, 상법 1천년, 말법 1만년 또는 정법 1천년, 상법 5백년, 말법 1만년 그리고 정법 1천년, 상법 1천년, 말법 1만년으로 나누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 정법 5백년, 상법 1천년, 말법 1만년이라는 설이 가장 일반화되어 있다.
정법이란 부처님의 말씀이 있고 수행하는 이가 있고 깨달음을 얻는 이가 있는 시기이다. 상법이란 부처님의 말씀도 있고 수행하는 이도 있지만 깨달음을 얻은 이가 없는 시대이고, 말법이란 부처님의 말씀은 있지만 수행하는 이도 깨달음을 얻는 이도 없는 시대를 말한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말법이란 불법이 쇠퇴하여 가는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말법에 있어서 부처님의 말씀만 있고 성불하는 이가 없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말법에 부처님의 말씀만 있다는 것은, 말법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성불하는 그러한 시대가 말법이라는 것이다.
즉 정법이란,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도 성불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의 수행에 의지하여도 성불할 수 있고 부처님의 말씀이나 자신의 수행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성불할 수 있는 시기이다. 또 상법이란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도 성불할 수 있고 자신의 수행에 의지하여도 성불할 수 있지만 부처님의 말씀이나 자신의 수행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성불할 수 없는 시기이다. 그리고 말법이란,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서만 성불할 수 있는 시기이고 다른 방법으로는 성불할 수 없는 시기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법의 신앙심은 행복은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 의지하여도 얻을 수 있고 또 어떠한 종교에 의지하지 않아도 자신이 노력함에 따라서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상법의 신앙심은 행복은 불교를 비롯한 어떠한 종교든지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말법이란 행복은 오로지 불교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에 입문한 이의 신앙은 정법의 마음에서 상법의 마음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말법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첫째 염불은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여야 한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선업과 악업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된다. 예를 들면 기쁜 일, 분노와 원망을 가지게 하는 일, 절망적인 일 등 말이다. 기쁜 마음이 생길 때에는 그 기쁨 마음 그대로 분노와 원망이 내 마음을 가득 차게 했을 때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찬 마음 그대로 그리고 절망적일 땐 절망적인 마음 그대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노와 원망의 마음을 누르고 억지로 기쁜 마음을 내거나 기쁜 마음을 자제하면서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또 절망적인 마음을 희망적인 마음으로 바꾸어서 염불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는 염불이지 부처님께서 나를 부르는 염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에게 불리어지는 염불을 하여야 기쁜 마음에 침착함이 생기고 원망과 분노의 마음에 용서의 마음이 생기고 절망의 마음에 희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둘째 업장을 피하려는 마음이 아니고 받으려는 마음에서 염불하여야 한다.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은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하여 생기는 일들이다. 그런데 "내가 지은 이 업을 어떻게든지 받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마음에서 염불한다면 이것은 염불의 근본취지와 너무나도 어긋나 있는 기복적인 염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은 업이라면 내가 모두 받아 낼 수 있는 장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나 "이 업을 받는 곳에 항상 부처님이 함께 하심을 알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는 마음으로 염불하여야 하는 것이다.
셋째 가장 고마울 때 또 가장 증오스러울 때 나오는 것이 염불이어야 한다.
우리들의 이웃 중에는 중오하고 싶은 인간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할 욕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로 염불하는 자에게 있어서 가장 심한 욕은 염불이 되어야 한다. 미운 이를 향하여 염불하여 보라. 우리가 화가 날 때 그때는 아마 미타정근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근하고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화가 가라앉을 것이다.
또 가장 감사하고 싶을 때 감사의 말 중 가장 좋은 말이 염불임을 알고 염불할 적에 이렇게 염불행을 할 때 나와 만난 악연도 나에게 염불을 시키는 은인이요, 선연도 나에게 염불을 시키는 은인이 될 것이니 삶 그 자체가 업을 만들지 않는 공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살고 있음을 믿고 부처님에 의하여 자신이 하는 행동이 전부 관되어짐을 생각하여 이러한 자신을 부처님이 구원해 주겠노라고 서약하고 노력하는 것에 감사하여 염불하는 것이 바른 염불법인 것이다.
이렇게 염불하는 이에게는 찾아오는 세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제불보살들과 신장들의 보호를 받는 이익.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은 『무량수경』의 48원 중 17원의 "제불칭찬원(諸佛稱讚願)"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육방찬(六方讚)"에 나와 있듯이 제불여래의 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염불을 하면 제불여래와 불법을 지키는 여러 신장들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염불자는 제불보살과 신장의 보호를 받는 다는 설화가 있어서 소개하여 보겠다.
어떤 이가 친구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친구가 죽어 버렸다. 그래서 묻어주고 마을로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과 친구의 처가 그가 친구를 죽였다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억울한 사나이는 친구의 무덤에 가서 하소연을 하니 친구의 영혼이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설명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겠노라 하여 친구의 영혼과 걷던 중 항상 하는 입버릇으로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을 하였다. 그러자 친구의 혼이 갑자기 사색이 되면서 "네가 염불할 적마다 신장들이 나타나서 무서우니 염불 좀 하지 마라"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 사나이는 염불수행에 더욱 정진하였다 한다.
어쨌든 염불은 제불여래의 원에 의하여 중생구제의 방편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염불을 하는 이는 제불보살들의 보호는 물론이요, 제불여래를 호위하는 신장들의 보호도 받게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지옥으로 간다 하여도 제불여래와 신장들의 보호 속에 받는 지옥고이므로 그 지옥의 고통도 제불보살과 신장들의 보호를 받으며 업장을 녹이는 즐거움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건장하고 부유한 젊은 영혼을 가지는 이익
육신의 병은 그것이 아무리 죽을병이라도 죽으면 없어진다. 또 아무리 찢어질 듯한 가난이라도 죽으면 없어진다. 또한 우리들 신체의 장애도 죽으면 없어진다.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재물, 명예, 사랑 등도 죽으면 모두가 없어지고 만다. 하지만 영혼이 병이 든 사람은 죽어도 환자이고, 영혼이 장애인인 이는 죽어도 장애인이며, 영혼이 가난한 이는 죽어도 가난하다. 그러나 영혼이 건강하고 부유한 자의 건강과 부유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이 우리에게 주려는 것은 육신의 건강이나 육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다. 우리 영혼의 건강과 부귀영화인 것이다. 염불하여 얻는 육신의 부귀영화와 건강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하여 얻는 두번째 이익은 건강하고 부유하고 또 젊은 영혼을 가진다는 것이다.
셋째, 죽어서 극락에 가는 이익.
『무량수경』의 제18원인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은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부르면 극락으로 왕생시켜 주겠노라는 부처님이 서약하고 계시며,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下品下生)은 오역죄를 지은이라 하더라도 임종 때 선지식을 만나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면 극락으로 왕생시겨 성불시키겠노라고 부처님께서 약속하셨다. 또 이 경의 유통분(流通分)에는 위제히 부인이 감옥에서 염불하여 아미타여래를 친견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무아미타불"하면 극락왕생한다고 설하고 계시니 만약 "나무아미타불"하여 극락왕생할 수 없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럴 리는 추호도 없을 것이다. 염불하여 극락왕생한 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없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발징화상이나 엄정스님. 염불사스님, 포천산의 다섯 비구, 욱면 등 무수히 많고, 중국의 『왕생록』에 전해져 내려오는 실례도 상당히 많다.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표꼬닌덴(妙好人傳)』책을 보아도 그 실례가 많이 열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은 반드시 극락왕생을 보장받는 것이며, 이는 사후세계까지도 부처님과 함께 살도록 보장된다.
이제 우리는 불교가 어떠한 가르침이며, 부처님이 어떠한 분이며, 우리는 어느 위치에 있고, 우리가 신앙하는 부처님은 누구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불교를 안다는 것은 어떠한 불교의 용어나 그 철학을 알아야 불교를 아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야 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듣고 사색함으로서 부처님 마음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불교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이란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이보다 깊은 것이 경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신앙하는 데 있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경전에 의거하여 그러한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