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리 (橋梁)
우리 고장의 하천 중에서 대천, 덕천, 대리천은 마을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물길을 건너기 위한 징검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면서 나무와 흙으로 된 다리를 놓기에 이르렀다.
이 나무다리는 그 보존 연한이 짧고 특히 대 홍수때는 떠내려가기까지 하였는데 8·15 광복 이후 콩크리트 다리가 놓여지기 시작하였다.
낙동강에는 1933년 강을 가로 지르는 선진(先進) 공법의 구포다리가 가설되어 향토의 명물이 되어왔다.
현재 우리 고장에 소속된 낙동강 다리는 3개에 이르고 있으며 하천마다 다리가 가설되어 있다.
(1) 대리 (大里) 다리
구포의 시랑골 쪽에서 흘러내린 하천(河川)이 소당 폭포에서 떨어져 내려 큰 대리와 작은 대리마을을 관통하여 흘러내리면서 이곳에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는데 그때 수로(水路)를 정비하면서 아래 쪽 작은대리에서 위쪽 큰 대리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를 놓게 되었다.
옛날의 다리는 흙과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큰 비가오면 떠 내려 가기도 했는데 뒤에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되었고 현재는 하천이 복개되어 있어 옛날의 자취가 묻혀 버렸다.
(2) 시장 껌정 다리
조선시대 대리에 제방을 설치하여 큰 물길을 둑 밖으로 흘렀으나 대리천의 본류는 작은 물줄기로 남아 1933년에 들어선 구포의 새시장터와 주택사이로 흘러 강으로 유입되었다.
구포의 철도 건널목에서 중앙통을 지나 새시장으로 가기위해 이 하천을 건너던 다리가 껌정다리이다.
목조로 된 이 다리가 잘 썩지 않도록 검정색 칠을 하였기 때문에 껌정다리란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대리천 소하천도 복개가 되었는데 현재의 약초상 골목으로 들어가는 복개천 입구가 옛날의 검정다리가 있던 자리이다.
(3) 만화교 (萬華橋)
구포 대리에서 새시장 쪽으로 대리천의 소하천이 흐르는데 제방 7호 수문 앞 배수장이 있는 곳에서 구포연동 쪽으로 연결시켜 주는 다리가 만화교(萬華橋) 이다. 이 다리는 1950년대에 현대식 콩크리트로 가설 되었는데 당시 구포 출신의 기업인 오명구(吳命九)씨가 모친의 회갑기념으로 놓았던 다리로서 널리 알려졌다. 만화교란 이름은 구포 안 동네에서 만덕,화명 쪽으로 가기 위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이 담겨있다. 현재 하천이 복개가 되어 다리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4) 덕천교 (德川橋)
구포에서 화명, 금곡쪽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다리이다.
대리천과 덕천 냇물이 합쳐지는 철도 굴다리 위쪽 하구지역에 다리를 놓았는데 여기서 구포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제방 7호 수문을 거쳐야 했다.
현재의 다리는 옛날에 있었던 다리보다 다소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데 화명, 금곡 쪽으로 가는 차량들의 간선로가 되고 있다.
(5) 구포고가교 (龜浦高架橋)
구포역 앞 간선도로에서 덕천 교차로 쪽으로 넘어 가기위한 고가도로가 구포고가교이다.
1973년 만덕터널이 뚫리고 남해고속 도로가 개통될 때 만덕에서 구포를 거쳐 사상 산업도로로 연결되는 교통로로서 경부선 철로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 다리를 놓게 된 것이다. 구포고가교의 길이는 585m이다.
(6) 대천교 (大川橋)
8·15 광복전만 하더라도 화명동 대천마을의 양달과 음달사이로 흘러내리는 대천(大川) 냇물을 건너기 위해서는 개천에다 징검돌을 놓아 다닐수 밖에 없었다. 1948년 대천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 대동회(大同會)에서 의논하여 다리를 놓기로 결의하였고, 이 방면에 기술이 있는 마을 사람에게 의뢰하여 다리를 가설하게 된 것이다.
(7) 화명교 (華明橋)
화명동 대천(大川) 냇물이 양달, 음달 마을 사이로 흘러 하류쪽에서 용동천 냇물을 받아 넣고 다시 강으로 흐르는 길목에 위치한 다리가 화명교이다.
이 다리는 1933년 4월 구포면의 장익원 면장시절 금곡, 양산 쪽으로 도로를 내면서 나무다리를 놓게 된 것이 시초이다.
현재는 양산 쪽으로 가는 간선도로가 연결되는 중요한 다리로서 존재하고 있다.
(8) 구포교 (龜浦橋, 낙동장교)
구포교(龜浦橋)는 가설 당시는 낙동장교(洛東長橋)라고 했다. 이 대교(大橋)는 1930년 9월 13일 착공되어 1933년 3월 7일 준공되었으며, 다리 길이1060m, 폭(幅) 8.4m(중앙차도 5.4m, 좌우인도 각 1.5m)의 게루바 식 판형교로 교각(橋脚) 56각(脚))이다. 당시 김해군 대저면 사덕리와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를 잇는 다리로서 그때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으므로 낙동장교(洛東長橋)라는 명칭(名稱)이 붙여졌다고 한다.
공사 동원 총인원은 7,760명, 공사비 70만원으로 국고보조(國庫補助) 40만원, 도지방비(道地方費) 19만원, 지방지원부담(地方支援負擔) 11만원이 소요되었다.
원래 구포 다리는 하단(下端)에서 명지(明旨)쪽으로 놓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일제(日帝)는 그 당시 해군기지(海軍基地)였던 진해(鎭海)와의 긴밀한 교통 연락을 위해 만들 목적이었는데 그것이 하단에서 구포쪽으로 옮겨 가설하게 된 것이다.
이 다리는 나룻배로 왕래하던 구포와 김해를 육로(陸路)로 연결시켜 주었고, 부산과 경남을 잇는 관문으로서 6·25동란 때는 전쟁물자 수송에 큰 몫을 하였다. 세월의 흐름속에 교각(橋角) 일부가 침하(沈下)되어 1957년 이후 19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78년부터는 2.5t 이상 대형차량의 통행을 제한하였는데 현재는 대저쪽으로 가는 일방통행의 소형차량이 운행되고 있다.
(9) 구포낙동강교 (龜浦洛東江橋)
북구지역의 시외교통 소통을 위한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것이 만덕터널 개통과 구포 낙동강교 가설이었다. 1972년 1월 20일에 착공된 역사적인 남해고속도로 공사는 만덕동(萬德洞)을 기점으로 시작 되었으며, 이것이 구포(龜浦)와 연결되었다. 남해고속도로의 공사 중에서도 으뜸가는 공사는 덕천동 의성마을과 대저1동 출두리 사이에 가설된 구포낙동강교이다. 구포낙동강교는 1972년 2월에 착공하여 20개월만에 완공을 본 다리로서 길이 1,336m로 단일교량으로는 그 당시 전국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폭 11.7m 2차선으로 된 이 다리의 건설비는 18억 6백만원으로 남해고속도로 공사비의 5%에 해당하는 공사비가 소요되었으며, 공법(工法)에 있어서도 교각 4개를 한 단위로 해서 위에 교반을 얹은 이른바 4경간연속법(俓間連續法)이다. 이 공법은 이 교량의 큰 특징이며, 이로 인하여 교면의 두께를 30%이상 절감케하였다. 남해고속도로와 함께 이다리도 1973년 11월 14일 개통되었다.
(10) 구포대교 (龜浦大橋)
북구 구포와 강서구 대저동을 연결하는 구포대교는 1990년 11월에 착공해 만 5년 2개월 만인 1996년 1월 완공되었다. 구포대교는 길이 954m, 폭 30m, 왕복 6차선으로 된 본교와 길이 2천868m, 폭35m의 접속도로 및 진출입 램프 3개로 구성되어 있다.
구포대교가 개통됨으로써 그 동안 옛 구포교로 연결되던 부산의 북구와 강서구의 통행이 훨씬 원활하게 되었으며 이 일대의 교통체증 해소에도 큰 도움을 주게 됐다. 특히 구포대교가 백양로와 직접 연결되면서 강서구 대저동에서 사상구 모라동 간의 거리가 5분으로 단축되어 서부산권 시대 발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구포대교 기념탑>
<구포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