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에 생긴 예술의 숲 소통과 창작으로 노닐기
전국의 폐교들이 진통중이다. 기능을 다한 그 큰 건물을 새로운 기능과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노력들이 전국 곳곳에서
아름다운 결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서산의 중왕리 외딴 길을 따라 가다가 막다른 길 끝에 있는 페교. 2009년도에 문을 닫은 부성초등학교 중왕분교가 애벌레나 번데기였다면, 지금의 모습은 우아한 날개짓을 팔랑대며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는 한 마리 아름다운 제비나비나 홍점 알락나비다. 2년여간의 앓이를 거쳐 우중충한 모습과 쇠락한 분위기로 다소 음습할 것 같은 학교 건물의 외관은 붉은 오렌지 빛과 진남색 청빛이 산뜻하고 강렬하게 어우러진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이 바로 얼마 전 폐교된 학교 건물을 리모델링 해서 서산을 대표하는 창작공간으로 만들어낸 ‘안견창작스튜디오’이다. 서산이 자랑하고, 서산이 내세우고 싶어하는 안견 선생의 예술혼과 기능이 다한 아름다운 폐교라는 질박한 소재를 섞어
전혀 다른 창작과 소통의 공간으로 빚어냈다.
이곳에 새로 둥지를 튼 사람은 우리 서산지역 출신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서화전각가 황석봉씨이다. 미리 전화라도 해야 마땅하거늘 또 무슨 생각으로 무작정 나선 길. 주소도 번지수도 없이 중왕리를 향해 달린다.
지곡 화천리에서 육교밑 사거리, 좌회전 신호를 받고 잠시 달리니 잡초가 운동장에 무성한 한 채의 학교가 나타난다.
아무리 봐도 사진으로 보던 그 마음부터 일렁이게 하던 그 색깔의 건물이 아니다. 지나쳐 다시 중왕리로 더 바짝 다가든다.
도성리로 내려가는 길을 지나 더 선착장 마을 께로 다가서니 좌측에 푯말 하나가 눈에 띈다. 안견창작스튜디오다. 가파른 외길을 위태하게 지나 산비탈로 올라서 다시 내려가니 참으로 아늑한 자리에 오렌지빛으로
강렬하게 빛나는 한 채의 건물이 등장한다.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며 시선을 한번에 잡아끄는 건물에 한번 움찔 놀라고, 그 건물이 들어앉은 천하명당의 자리에 또다시 길고 크게 놀란다. 몇 년 전만 해도 한동네 꼬마애들이 조잘조잘 한교실에서 공부했을 이곳. 아이들의 순박한 웃음이 떠난 이곳을 다시 채우고 있는 것은 예술을 평생의 업과 천직으로 삼아 삶 자체를 서화전각 하나로 치열하게 메꿔가고 있는 한 작가의 창작의지와 영감, 그리고 그가 오랜 세월동안 이루고 만들어 온 작품들이었다. 평생을 서예가로 살았지만, 서예가에 남지 않고 새로운 방향과 길을 열어 레드카펫을 깔고 있는 황석봉씨는 마침 부재중이었다.
그리고 현관문에 걸린 ‘월요일 휴관’이라는 작고 어여쁜 푯말은 적잖은 실망을, 그 글자밑으로 깨알처럼 적힌
‘전화주세요. 000-000-0000’문구는 실낱같은 희망과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서산 시내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라는 황작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차라리 좋다.
이곳을 혼자 차지한 것 마냥 길게 옆으로난 건물을 끼고 천천히 거닐어본다. 아까부터 사람을 보자마자 낑낑대는 강아지 한 마리는 온갖 요동 끝에 목줄을 뚫고 나와 바람처럼 달려온다. 사람이 좋던지, 사람이 그리웠던 것인지, 작지만 두툼한 흙발을 들어 연신 바지에 철벅대며 뛰어오른다. 걸음이 꼬이도록 자꾸 매달리는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건물을 반바퀴 돌아 가는 길에 옹기종기 선 항아리들.
키도 몸집도 다 다른 것이, 꼭 폐교되기전 아이들같다. 1학년 코흘리개 아이부터 제법 어른티가 나는 6학년 아이까지 한 줄로
올망졸망 세워놓은 모양새다. 아이들 곁을 그냥 스쳐 지나치지 못했듯이 시골 아이들 같은 장독 옆으로 한참을 서버린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냥 그림이다. 빈 도화지를 보면 그대로 스케치하고픈 모습이고,
사각의 틀만 갖다대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는 풍경을 가득 안고 스튜디오가 서 있다. 저 멀리 중왕리 옆을 지나며 안쪽 깊숙이 흘러나온 바다와 갯벌, 그리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 작은 언덕,
그 위에 수확의 잔챙이들이 남겨져 있는 밭과 어딘가로 끝없이 펼쳐진 너른 들. 바로 옆으로는 제법 오래된 듯한 소나무 몇그루가
운치를 더하고, 가을빛이 가지끝 잎사귀로 다 빠져 모아진 듯 천연의 가을로 빛나는 잎들과 그 밑의 낙엽들. 제법 넓은 마당보다는 조금 더 큰 운동장은 100미터 달리기도 못할 정도로 앙증맞다.
남자애 서넛, 동생인 듯 친구인 듯 작은 여자아이 하나 껴서 공차기하며 뜀박질도 해댔을 그 작은 운동장 한가운데 서 건물을 올려다본다.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낯선 건물이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지곡에 있는 안견기념관과도 가까운 이곳 중왕리에 안견의 예술혼을 담아 많은 이들을 불러 모아 예술로 소통하고 예술로 노래하게 할 창작스튜디오를 차려내니, 말끔한 새 교복을 차려입고 선 단발머리 소녀를 보는 까까머리 소년의 마음도 들어버린다.
황석봉 작가는 이곳 안견창작스튜디오의 건물은 그림의 기본이 되는 선과 점, 면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황석봉, 예술 숲에서 노닐다’는 글씨 또한 황작가가 썼고, 색과 건물 전체의 디자인 역시 본인의 생각을 곳곳에 담아났다.
언뜻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들여다봐도 눈에 들어오는 알파벳 A의 형상을 딴 것은 ART의 A의 컨셉을 딴 것이라고. 서산시에서 폐교 전부터 준비해 와 이런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낸 안견창작스튜디오의 운영자는 공모에 의해 선발되었다.
수많은 응모자중 발탁된 황작가는 여러모로 보나 이곳과 잘 어우러지고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다. 제 몸을 불사르듯 예술이라는 대상에 평생의 삶과 전부를 건 모습이 비슷하고, 그 예술을 예술 그 이상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시대를 달리하지만 비슷한 느낌이다. 창작스튜디오 곳곳은 그의 그런 예술혼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작업실 한 켠 유리장에 가득 진열된 여러 재료를 이용한 직인들과 전각 작품들, 그가 젊은 시절과 지금까지의 중장년을 통털어
매만져온 온갖 성과물들이 잡지와 전시회 카달로그, 책, 상품 등으로 진열되어 있다. 작업실 바로 옆은 아담한 전시실로 만들어져 있는데, 지금은 황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들이 상설 전시중이다.
언제나 이곳을 찾으면 이 시대의 가장 굵은 획을 그으며 살아가고 있는 한 작가의 터질듯, 넘칠 듯한 예술 세계에 흠뻑 물들게 될 것 같다. 전시실 바로 옆은 역시나 아담한 강의실이다. 내년부터는 이곳에서 1학기와 2학기로 나눠 강의를 펼친다.
금요반(해서/구성궁예천명)과 토요반(전서/오창석석고문)으로 나눠 3월과 8월에 개강하고, 6월과 12월에 종강한다. 황작가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이미 14년간 서예아카데미를 성공적으로 열며 서예에 관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해냈다.
같은 프로그램 그대로 이곳 안견창작스튜디오에서 지역사람들에게 다시 못올 좋은 기회의 장을 마련하려 한다.
이미 시하고 협의가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라 바로 수강생 모집에 들어갈 참이다. 황석봉 작가는 “시작 단계의 서예는 글자의 의미가 크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넘어서게 되면 어느 경지부터는 그것이 글자를 넘어선 하나의 혼과 정신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 기술과 기능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분명히 있고, 그 이상을 넘어섰을 경우에 서예와 글자에 또다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다. 알듯 모를 듯 알쏭달쏭하지만,
하나하나 그의 작품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는 여러자의 글자를 쓰는 것보다는 한 자 정도의 글자를 쓴다. 많아야 두글자다.
그 글자를 글자에 갇히게 하지 말고 조형적으로나 회화적으로 풀어내고 싶은 것이 그의 작업이고, 그의 의지다. 오랜 삶의 성찰에서 비롯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마련된 작가와의 만남 시간을통해 잘 우러난 한잔의 보이차처럼 음미할 수 있다. 그는 퍼포먼스 작가로도 유명하다. 웅진식품의 아침햇살 성공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서 웅진식품 사옥 앞 마당에
200여미터의 실크천을 깔아두고 두시간여 광기에 사로잡힌 글자의 살풀이를 해냈다.
그 다음에는 웅진식품의 초록매실 출시성공을 축하하기 위한 광양 매실마을 도로를 차단하고 신작로에 온통 실크천을 깔아
한바탕 몸짓을 천위에 풀어냈다. 이 모습은 헬기를 이용해 공중에서 그대로 촬영되며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규모이거나, 소규모이거나 그는 규모를 따지지 않는다. 주어진 자리와 시간에 충실할 뿐이다.
지금 안견창작스튜디오 역시 이제 앞으로 그가 펼칠 퍼포먼스가 완만한 느림으로 시작되었다.
언제 또 질풍처럼 달려 광기의 언어를 쏟아내며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창작의 영감을 어떻게 자극해댈지 아직은 아무도 모를 일. 서산시 지곡면 중왕리. 학교와 학생들이 떠나간 그 공허한 공간에 그 넓이와 길이를 잴 수 없는 하얀 실크천이 깔린다.
황석봉 작가와 이곳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풀어낼 퍼포먼스가 이제부터 시작이 되었다. (☎660-3378)
새가 떠났던 둥지로 다시 찾아들듯 63세의 나이에 다시 서산으로 찾아든 황석봉씨는 등잔불밑이 어두운 격이다.
정작 그가 태어난 고장에서 보다 그 밖에서 더 크게 인정받고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웅진식품의 대표적 상품인 아침이슬의 수묵화를 만들어냈고, 우리가 흔히 아는 백세주와 장쾌삼 등의 너무나 독창적인 글씨를
디자인한 사람이 바로 그다. 서산시장과 의왕시장 직인을 만들기도 했으며, 3천년 서예의 역사보다 더 오랜 전각(돌에 글자를 파는 일)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사는 우리지역 출신 서화전각가이다. 그런 그가 얼마전 중왕리에 새로 문을 연 안견창작스튜디오의 주인장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서산시에서 폐교된 분교를 매입해 창작과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문을 연 ‘안견창작스튜디오’의 위상과 역할에 제대로 걸맞는
사람이 딱 맞는 옷을 입듯 그 자리의 주인이 된 것. 1949년 서산의 성연의 예덕리에서 태어난 황석봉씨는 초등학교 3학년 고관절골수염을 앓게 되어 다니던 학교를 3년 휴학하게 된다. 그 3년의 기간동안 한문선생을 모셔다가 배우기 시작한 한문공부. 서울에서 서예를 전공하며 대학을 다녔던 그는 어릴적 남아있었던 한줄기 서예에 대한 정서가 발동되는 듯 하다가 스스로도 걷잡을 수 없는 광기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서예의 대가를 수소문하고 찾아, 찾아 헤매다가 학남 정환섭선생을 만나게 되어 무릎제자로 들어간 그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10여년을 서예와 만나오다가 35세에 국내 최연소로 국선 입상을 3년연속으로 이루게 된다. 그 뒤를 이은 국전 6회, 미술대전 특선 3회, 국내외 개인전 29회 등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그를 대표해주는 형식적인 수식어에 불과하다.
황석봉이라는 세글자의 이름에 담긴 그의 문자에 대한 뿌리깊은 자기성찰과 서예에 대한 평생을 다한 삶의 과정과 깊이는
그 어느 깊은 우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다는 평가.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깊은 샘물처럼, 그의 머리와 마음에서 손끝을 타고 붓끝으로 뻗어나오는 서화의 세계는 피카소의 그림세계 만큼이나 독창적이다. “공무원으로도 일하고, 대기업에도 근무했었어요. 결혼하고 3개월만에 사표를 냈어요.
누가 보아도 무모하고 무책임해보일 수 있는 일이었기에 아내에게는 정말 미안했어요. 아기생기고 하면 결단을 못내릴까봐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고픈 맘이였지요, 눈 질끈 감고 사표를 내고 지금껏 이렇게 살고 있네요.” 서예전각으로 출발했지만, 일반적 의미의 서예가와 전각가로 머물지 않고 있는 그는 문인화, 유화, 부조, 입체 등의 장르를 섭렵하며 결국 서예전각안에 그 모든 것들을 담아내고 있다. “저한테는 아무래도 안주하거나 만족하는 습성이 없나봐요. 갈수록 한문세대는 줄어드는데,
이런 시대에 서예는 무슨 글자인지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계를 안고 갈 수 밖에 없어요. 검은 것은 글씨, 흰것은 종이라는 식으로 남아서는 결국 서예가 갈곳은 박물관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현대서예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그 길을 열어가게 된 이유이다. 90년대 현대서예협회를 창립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만들어낸 ‘현대서예’는 서예의 뿌리는 가지고 있되, 모든 것을 담아내고 끌어들일 수 있는 것, 견고하게 이어져 온 3천년 전통서예의 틀을 깨고 현대적 조형을 추구하며 문자에 조형성을 부여해 온 그것. 수십년간 목숨을 다하듯 연마해온 기법을 바탕으로 정신과 혼,
창작의 영감을 담아 한 자, 한 자 문자에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최연소 국선 입상을 시작으로 문자를 초월하여 조형언어로 이뤄지고 있는 그의 새로운 일은 어찌보면 전통에 반기를 든 객기로 보일 수도 있고, 무모한 시도로 남을 수도 있지만, 그는 이미 크고 넓은 작품 세계를 통해 읽는 서예가 아닌, 보는 서예, 느끼는 서예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서예가 지켜야 할 규범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 줄타기를 하듯 참 아슬아슬한 일이건만, 그의 걸음은 단호하다. 문자로서의 의미를 초월해 생명력을 불어넣은 그의 글자와 서화들은 우리를 진정 보게 하고, 또 붙들어 느끼게 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피비린내나는 광란의 전쟁을 그 어떤 그림보다 더 깊게 담아내듯, 그의 서화 세계는 그 무엇으로도 단정할 수 없는 힘과 예술을 담아내고 있다. 진정 그 표현이 다를 지언정 예술이라 함은 무릇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