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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始祖) 조천혁(趙天赫) 묘단비 - 소재지 : 충남 부여군 장암면 상황리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시조(始祖) 조천혁(趙天赫)은 송(宋)나라 태조의 손자이 유길(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전한다. 우리 나라에서의 연원(淵源)은 천혁이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을 지내다가 979년 국난(國難)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와 호서지방(湖西地方 : 현 부여군 임천지방)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고려 현종(顯宗) 때 강감찬(姜邯贊)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토벌한 공(功)으로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가림(嘉林 : 임천의 고호)백(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천혁(天赫)을 시조(始祖)로 하고 임천(林川)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에서 이름을 날린 지서(之瑞)가 있다. 그는 감찰(監察)을 지낸 찬(瓚)의 아들로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어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교리(郊理)를 지냈다. 충효(忠孝)로 이름을 날린 그는 1480년(성종 11) 호당(湖堂)에 뽑혀 학문을 연마했고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학문(學問)을 진강(進講)하기도 했다.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자 외직(外職)인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폭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학문에만 힘썼다. 사예(司藝)를 역임한 원경(元卿)의 아들 익(翊)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으며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하여 여러 차례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한편 3대(三代)에 걸쳐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날린 원(瑗)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조 식(曹 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언(正言)이 되어 당시 격렬한 당쟁(黨爭)의 폐해(弊害)를 상소하였으며 삼척 부사(三陟府使)를 역임한 후 승지(承旨)를 지냈다. 아들 희일(希逸)은 선조(宣祖) 때 과거에 급제하여 명(明)나라 사신 주지번(朱之番)이 왔을 때 김상헌(金尙憲)·류 근(柳 根) 등과 함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시문(詩文)으로 찬탄을 받았으며,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을 강화(江華)로 호종한 후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그의 아우 희진(希進)은 정언(正言)·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지냈고, 특히 경서(經書)에 밝았으며 문장(文章)과 시(詩)에 능하며 「단보유고(丹圃遺稿)」를 남겼다. 석형(錫馨)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과거에 오를 것을 단념했다가 인조(仁祖) 때 진사시(進士試)에 일등(一等)으로 합격하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시문(詩文)에 능해 당시(唐詩)에 정통했고 글씨는 진체(晋體)를 잘 썼다. 숙종(肅宗)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경망(景望)은 석형의 아들로, 특히 서사(書史)와 경적(經籍)에 밝았으며 서예가(書藝家)로 유명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숙종(肅宗) 때 한문소설(漢文小說)인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을 집필한 성기(聖期)와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명택(明澤)·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명정(明鼎) 등이 유명했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위인 경호(慶鎬)는 일본 정부가 준 남작(男爵)을 거절하여 동생 병호(秉鎬)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