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龍宮)김씨
용궁(龍宮)은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에 속한 지명으로, 신라 시대에 축산현(竺山縣)·원산현(園山縣)으로 불리웠으며, 고려 초에는 용주(龍州)라 하다가 서기 1012년(현종 3) 용궁
현(龍宮縣)으로 개칭되었다. 용궁 김씨(龍宮金氏)의 시조(始祖) 김존중(金存中)은 신라 경순왕(敬
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 손으로, 누대(累代)에 걸친 전통적인 왕사(王師 : 임금의 스승)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소과(小科)인 남성시(南省試 : 고려 때 진사를 뽑던 국자감시를 달리 이르던 말)를 거쳐 인종(仁宗) 때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태자시학(太子侍學)이 되었다. 서기 1146년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내시원(內侍院)에 들어가 한림원(翰林院)에 겸직, 좌정언(左正言)·지제고(知制誥)를 거쳐 왕명(王命)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宿衛) 및 군기를 맡아보던
관청인 추밀원(樞密院)의 좌우승선(左右承宣)에 올랐고, 이어 전조(銓曹 : 이부와 예부를 통합한 관청)를 겸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선권(選權)을 장악하였다. 뒤에 태자 소부(太子少傅)가 되어 한충내보공신(翰忠內輔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부상서(吏部尙書)·정당문학(正
堂文學) 등을 거쳐 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를 제수(除授) 받고 용궁군(龍宮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김존중(金存中)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용궁(龍宮)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신종(神宗 : 제 20대 왕, 재임기간 : 1197 ∼1204)때 예부 전서(禮部典書)를 지낸 지철(之鐵),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지록
(之錄)형제와 대장군(大將軍) 우(祐)가 유명했으며, 우(祐)의 아들 진(璡)은 1361년(공민왕 10)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상장군(上將軍) 이성계(李成桂)의 원군(援軍)과 합세하여 박 의(朴 儀)의 모반군(謀叛
軍)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을 세워 민부전서(民部典書)에 올랐다. 조선 세종(世宗) 때 창령 현감(昌寧縣監)을 지낸 전(全)과 판관(判官) 직(直)은 한성부윤(漢城府尹) 견호(堅浩), 원주 목사(原州
牧使) 옥광(玉光), 의령현감(宜寧縣監) 견수(堅壽) 등과 함께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며, 태백(太白)은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와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추증되었다. 한편 훈(勛)의 맏아들 황(璜)은 임란이등공신(壬亂二等功臣)으로 고창 현감(高敞縣監)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戰死)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공조 참판(工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며, 필재(弼載)는 한성부 좌윤(左尹)을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낸 득유(得酉)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중원
(重元)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낸 광백(光百), 부호군(副
護軍) 종호(鐘壕)·종복(鍾復)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외 순조(純祖) 때의 성리학자(性理學
者) 호성(昊星)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홍권(弘權)이 유명했고, 국현(國鉉)은 항일 투사(抗日鬪士)로 명성을 날려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궁김씨(龍宮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327가구, 14,8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댓글 세기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대부분이 용궁 김가 인줄만 알지 역사의 흐름은 잘모르죠 그리고 깊이알라카지도 않는게 현실이니까요 가끔 시제에 참석 하시어 옛어른들의 업적 그리고 후손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수있도록 배려를 좀 해주세요 대가없이 베푸는 맘으로 말입니다
저는6학년인데요용궁김가입니다.전 시조가 김알지 인줄만 알았는데 김존중[할아버지?]더군요...정말 잘 알았습니다. 저의 본관에 대해서 잘안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