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河)씨의 유래
진양하씨가 본관을 진양으로 한 것은 하진의 9세손 하즙이 진천부원군에, 10세손 하윤원이 진산부원군에 봉해지고, 하공진의 11세손 하륜이 진산부원군에 추봉되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진산, 진천은 모두 진양의 별호이다).
사직공파(司直公派)
고려 정종때 사직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여 하진, 하영상(永尙), 하맹공(孟恭), 하원경(元慶), 하백부(白富), 하의(義), 하보(保), 하직의(直倚), 하즙(楫), 하윤원(允源), 하자종(自宗)으로 이어지며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演:文孝公)을 중시조로 하며 자종은 연의 부친이시다. 하연과 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워던 같은 시대의 정승이었으나 서로 계보를 상고(詳考)할 길이 없었던 것 같다.
단계공파(丹溪公派)는 고려 때 주부를 지낸 하성(河成), 하희보(希甫), 하공정(公正), 하현(玄), 하윤(胤), 하지백(之伯), 하담(澹)으로 이어지며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인 단계 하위지의 집안으로 흔히 단계하씨로 알려져 있으며 담은 위지의 부친이시다.
◈ 단계공파
사직공 6세조이신 참지공 하의(河義) 할아버님의 동생이라고 밝혀져 사직공파로 복원되었다◈◈
시랑공파(侍郞公派)
고려 현종 때 상서공부시랑을 지낸 하공진(拱辰)을 시조로 하여 하공진, 하칙충(則忠), 하탁회(卓回), 하정재(挺材), 하남수(南秀), 하소(邵), 하부심(富深), 하식(湜), 하시원(恃源), 하윤린(允潾)으로 이어지며 하공진(河拱辰)은 진주 출생으로, 거란군에게 잡혀갔다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요(遼)나라 왕 성종(聖宗)의 국문을 받고 항사(抗死)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태종때 영의정을 지낸 하륜(崙:文忠公)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윤린은 륜의 부친이시다.
진양하씨(晋陽河氏)의 한 파는 사직공파(司直公派)요, 한 파는 시랑공파(侍郞公派)인데 또 한 파가 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하안린(河安麟)을 중조(中祖)로 하는 운수당 하윤(雲水堂河潤)은, 하안린의 후손 쌍오정 하징(雙梧亭 河徵)의 수기(手記)에 시랑공이 시조이나, 중간에 계대(系代)를 잃었다 하였으므로 시랑공파에 속함이 나타났고, 사육신 단계공(丹溪公) 하위지(河緯地)선생의 후손들은 따로 파보를 만들었으나 사직공파에 복원되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진양 삼파(三派)중 하나라고는 볼 수가 없다.
문효공의 경태보 서문(景泰譜序文)에서도 시랑공에 대해서는 동원이나 분파가 확실하지 못하다는 말씀을 했으나 단계공 부자 분은 당시에 같이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으되, 분파의 같고 다름에 언급하지 않으셨으니 그 집은 말할 것도 없이 매우 가까운 집안이므로 그리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단계공 실기에 있는 그의 연보(年譜)를 보면 『선생의 조고(祖考) 이상 윗대는 진주에 사셨다. 선고 군사공이 처음으로 선산 영봉(善山迎鳳)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에 와서 선생이 나셨다. 상고하건데 영봉리란 선산부의 서문 밖에 있다. 시내를 단계(丹溪)라 하고 마을을 적촌(赤村)이라 적었으니 이것은 그 단(丹)과 적(赤)이 우연히 진주 속현(屬縣)인 단성(丹城)의 고호(古號)와 같으니 이것을 따서 향관(鄕關)의 그리움을 읊은 것이다』 라 했다. 이 실기를 보면 그의 고향은 단성이 틀림없으며 단성은 바로 사직공파의 발상지인 것이니 사직공파와 동원 동족으로 한곳에 살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생각컨데 문효공 경태보 (景泰譜)가 상하 두 권이라 하였으며 그의 선고 좌의정부군에 이르기까지 중앙과 지방에서 벼슬을 차례로 하시었고 자손이 많으셨다 하셨으니 경태보에 올린 내용이 현재 전해 내려오는 문효공 직계와 문효공 구종형제(九從兄第) 분만은 아닐 것이며 방계의 집안도 다 수록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경태보가 상하 두 권이라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도 그 분량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미루어 볼 때 단계공 윗대도 경태보에는 가까운 친척으로 수록되었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그 뒤에 모헌공(慕軒公)께서 만력보를 수보하면서 서문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직계중심으로 재편을 하고 문효공 형제분 자손이외에는 모두 제외를 시켜 버려 이때에 탈락된 친족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교통의 불편함과 인쇄술의 어려움 등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이해가 되나 하여간 그 뒤에 수보를 거의 이 만력보에 의거 했으니 당시에 탈락된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그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이니 단계공 집안이야 그 때 이미 멸문의 화를 입었으니 만력보에 수록이 될 리가 있겠는가.
후대에 와서 사직공파의 6세(世)의 의자(義字)와 단계 선생의 윗대의 성자(成字)를 형제분으로 복원을 해 본 것은 글자의 '戈'이 같을 뿐 아니라 대수도 맞기 때문에 그렇게 복원(復元)을 한 것이다. 고려사기에 보면 고려시대에 현재의 사직, 시랑 양파의 족보상에 나타나지 않는 명현들이 많이 있으니, 벼슬에는 하흥휴(河興休), 공훈에는 하주려(河周呂), 절의에 하경택(河景澤), 문장에 하천단(河千旦)의 여러분이 계셨고 , 그 밖에도 하충제(河忠濟), 하수홍(河守洪), 하언석(河彦碩), 하칙보(河則寶), 하유원(河有源), 하사청(河斯淸), 하예(河汭)의 여러분이 계셔 모두 당시에 이름이 높이 알려졌으며 밀직사 하복장(河福莊)은 곧 고헌공(苦軒公)의 장인이다. 지금은 세파중의 한 파는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실증이다
첫댓글 첫째줄 10세손 하윤린은 하윤원으로 진양부원군은 진산 부원군으로 고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