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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비젼 (Vision)
01 재건의 명령을 받들다
◈ 한통의 전화
1994년 1월 20일, 대덕 연구 단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아파트.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찻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밖에는 겨울 칼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있었지만, 우리는 모처럼 만에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오랜 친구 손진곤 변호사였다.
“김 박사님!! 한동대라는 종합대학교가 포항에 새로 세워지는데, 내년에 문을 연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지는 그 학교에서 크리스천 과학자를 총장으로 모시려 찾고 있던 중에 김 박사님을 초대 총장으로 모시고 싶다고 합니다. 학문적 업적이나 신앙으로 보아 김 박사님이 적임자라고 저도 추천했습니다. 그 일을 맡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에게서 학교에 대한 설명을 한참 듣고 있던 남편이 말을 가로막고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고 과분한 청이지만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과학자이지 대학 행정에는 경험이 없습니다.” 완곡한 거절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남편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기도해 보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분이 무어라고 하시는데요?”
“장로님이 어떻게 기도도 하지 않고 단박에 거절하느냐 하는군. 무심코 한 그 말에 내 마음이 찔렸소.” 남편은 몹시 낭패스런 얼굴로 말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그 자리를 내어 드리지 못하는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큰 숙제를 받은 부담감으로 기도해야만 했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사람의 초청인지 분별하게 하소서.” 목사님의 설교 말씀, 성경 묵상, 기도 등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채널들을 모두 열어 놓고 귀를 기울였다. 전화를 받은 그 주일, 우리는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사도행전 9장이었다.
“어느 날 경건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악명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순종했습니다. 위대한 바울은 아나니아의 즉각적인 순종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며 순종하는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이 땅에 기독교 대학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대학과 학문의 주인인 것을 선포하는, 학문과 신앙이 하나가 된 대학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순수한 기독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대학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아나니아의 순종과 기독교 대학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목사님은 이미 우리 사정을 다 아시고 설교를 하시는 듯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 포도밭에 세워지는 대학
손 변호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포항에 내려가서 학교 건설 현장도 둘러보고 설립자도 한번 만나 보라는 그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남편은 포항행 비행기를 탔다. 남편을 배웅하며 나는 염려가 앞섰다. 변화를 싫어하며 현재 생활에 만족하던 나였기에 남편이 지금까지 해 온 연구 활동을 중단하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했던 것이다. 앞날이 불확실한 모험이라 더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에게는 과학자의 타이틀과 카이스트 연구실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혹시 내 잘못된 생각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명령하신 일을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포항에 다녀온 남편은 떠날 때보다는 가벼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설립자 이사장을 만나 보았는데 퍽 소박한 분으로 보였소. 포항 흥해에 23만평의 학교 부지를 마련한 그분은 산업 폐기물을 처리하는 기업의 회장이신데, 기독교 대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소.” 나는 남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전혀 모르잖아요. 아주버님(김호길 포항공대 초대 총장)을 보면 대학 총장 자리가 얼마나 복잡하고 골치 아픈지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우리 나라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재벌이 이사장이라면 모를까, 중소기업을 하시는 그분 사업의 흥망에 따라 학교의 미래도 좌우될 텐데, 당신 함부로 간다고 대답하지 마세요.” 1994년 1월 말, 남편이 두 번째로 한동대를 방문할 때는 나도 동행했다. 학교를 항해 달려가는 길. 포항 시가지를 벗어나 북쪽 해안 도로를 따라 차는 꼬불꼬불 한참이나 달렸다. 흰 물거품을 쏟아 내는 푸름 바다가 눈앞에 가득 밀려왔다. 소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맑고 화창한 날씨였지만. 겨울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이론 시골에 무슨 대학이 세워질 것인가.
한참 달린 끝에 차가 멎은 곳은 바다와 산과 하늘만 보이는 외딴 곳이었다. 행정 구역으로는 포항시에 속하지만 시내에서 8킬로미터쯤 떨어진 흥해읍 남송리. 학교 진입로에서 시작된 비포장 자갈길이 끝나자 한창 진행 중인 공사장 현장이 나타났다.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한 겨울의 오후 햇살이 붉은 대지 위에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포도밭에 세워지는 대학...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 곳에서 이 시대의 주역이 될 인재들이 쏟아져 나오는 풍경을 잠시 그려 보았다.
사방을 볼 수 있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학교 정면에 펼쳐진 논밭 저쪽으로 곡강 마을이라는 작은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담은 천마지 호수가 짙은 소나무 숲에 싸여 있었고, 저만치 학이 난다는 비학산과 천마산이 보였다. 공부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말라는 듯, 수도원을 떠오르게 할 만큼 평화로워 보였다. 코트 자락을 벗길 듯이 휘감겨 오는 세찬 바닷바람에 나는 비틀거렸다. 평화로는 풍경과 세찬 바람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건설 관계자는 전기, 전화, 중요 배관 등을 매설한 지하 공동구와 모든 기계를 자동화할 동력실의 중앙 관제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의 눈을 끈 것은 학교 입구에 세워질 대학 교회 배치도였다. 그것은 한동대가 기독교 정신의 바탕 위에 세월질 대학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 ‘한동’이라는 이름에 흔들리다
남편이 학교 관계자에게 물었다.
“학교 이름을 왜 하필 한동이라고 했지요? 기독교 정신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도 많이 있을 텐데요.” 나도 속으로 한동은 너무 평범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지역 주민의 관심과 참여를 불러 일으키려고 현상금 100만 원을 걸고 학교명을 공모했다고 했다. 무려 130여 개가 넘는 이름들이 들어왔다. 설립 본부 측에서 몇 개를 선정해서 이사장에게 들고 갔다. 이사장은 우선순위로 추천한 이름 대신, 비교적 아래쪽에 적힌 이름을 짚었다. 한국의 동쪽, 학문의 요람이라는 뜻의 ‘한동’이었다. 이 이름에는 드넓게 펼쳐진 흥해읍 남송리의 이 터가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젊은이들의 신앙과 학문의 요람이 되었으면 한다는 염원을 담고 있었다. 설립 본부는 학교 이름을 한동으로 정하고 응모자에게 연락을 했고 어린아이가 전화를 받고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교회에 가시고 안 계신다고 하더란다.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아버님이 뭐하시는 분이냐?”
“목사님이요.”
그분은 구룡포 어촌에서 자그마한 교회를 개척하신 우선화 목사님이었다.(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교회에서 꼭 써야 할 돈 100만 원이 필요해서 학교 이름을 응모했던 목사님 내외분은 그날도 교회에 가서 그 이름이 뽑히기를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그 이름이 이사장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목사님 내외분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동대는 하나님께서 시작부터 개입하시는 대학이란 말인가! 이 이야기에 우리는 크게 감동받았다. 한동은 더 이상 평범하거나 촌스러운 이름이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사장님은 칠전팔기 고생 끝에 환경 폐기물 처리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분이었다. 사업이 번창하자 사회에 기어할 뜻있는 일을 찾다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종합 대학을 설립하기로 했다는 그의 말에서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아직 신앙이 부족하지만, 집사람의 기도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한동대 설립을 위해 교계의 많은 분들이 기도해 주었습니다. 신앙인이요 과학자인 김 박사님을 한동대 초대 총장으로 꼭 모시고 싶습니다. 수락하신다면 저희로선 큰 영광이겠습니다.” 남편이 이사장에게 말했다.
“이사장님! 정말 순수한 기독 신앙으로 새로운 대학을 세우실 결심이십니까?” 이사장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그러한 대학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김 박사님을 모시려는 것입니다. 김 박사님의 창조 과학 강의를 들었던 목사인 제 사위도 김 박사님을 총장으로 모시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김 박사님! 기독교 정신의 명문 대학을 세우는데 힘을 다하겠습니다. 총장직을 수락해 주십시오!” 이사장의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어느덧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귀한 일에 저를 불러 주시니 영광입니다.” 나는 놀라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여기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남편은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는 정도로 내려온 것인데.... 우리는 아직도 학교의 주변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좀 더 알아보지 않고 선뜻 수락의 뜻을 비치다니....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남편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은 무슨 일이든 원칙만 분명하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성격을 지난 사람이라는 것을....
그날 우리는 관계자에게서 학교의 재무 구조와 현황, 우리 나라 사학 법인으로서는 이만하면 재정 형편이 꽤 좋은 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수준 높은 대학 교육을 하려면 훌륭한 교수진, 우수한 학생, 탁월한 교육 프로그램.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든든한 재정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계획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날 학교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대로 대학 교육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까지 주저하던 마음을 서서히 다잡으며 신설 대학에 대한 새로운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부터 우리는 끊임없는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 지시할 땅으로 가라
며칠 후, 학회 참석을 위한 미국행을 하루 앞두고 나는 남편의 심부름으로 주한 미군 대사관에 갔다. 두 달 전 이태리 플로렌스의 학회에 참석했다가 집시들에게 여권과 지갑을 송두리째 도난당했던 남편의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비자가 거부되었는데요?”
은행 환전 창구 앞에서였다. 그 말에 놀란 나는 그제야 남편의 새 여권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나는 몹시 난처했다. 남편이 내일 출국하지 않으면 학회 일정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생각다 못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미국 대사관의 한 영사에게 전화를 걸어 난감한 사정을 성명했더니, 그는 급히 대사관으로 되돌아오라고 말했다. 숨차게 대사관으로 달려갔으나, 간발의 차이로 그날의 비자 발급 시스템이 끝나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주말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동행하기로 한 나는 애를 태웠지만, 그는 오히려 느긋했다.
“할 수 없지 않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보니,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는 것 같구료. 내일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떠납시다.” 전날 출국했더라면 참석 못했을 예배. 우리는 늘 그랬듯이 앞자리에 앉아 무심히 주보를 펼쳤다.
‘부르심과 순종’(창 12:1-4)이라는 설교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이 제목일까. ‘한동대로의 부르심과 우리의 순종’으로 느껴졌다. 나는 이훈 목사님(현 캐나다 런던 한인교회)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있는 이곳은 너무 편안하고 안전하며 또한 익숙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지시하시는 곳은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요 낯선 곳입니다. 기근과 궁핍과 환난이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나의 지식, 나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을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야 할 곳이기에,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는 긴장하며 설교를 듣고 있었다. 카이스트의 만족스러운 연구 환경, 뛰어난 제자들과 졸업 뒤에도 끈끈히 이어지는 사제간의 정, 보장된 미래.... 이 얼마나 안전하고 익숙한 자리인가. 기계 대신 사람을 다루어야 하고, 연구 대신 경영을 맡아야 하는 대학 총장의 자리는 얼마나 낯선 자리인가! 신설 지방 대학의 미래가 장밋빛으로 펼쳐지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떠나라 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자유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물질, 지위, 자존심 등 너무도 많은 것으로 자신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떠난 그곳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함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떠나라고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지금 있는 곳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동행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근이나 환난이나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미지의 세계이지만, 그곳이 오히려 더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익숙했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그가 지시한 미지의 땅으로 떠난, 부르심에 순종한 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변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설교 말씀은 우리 부부에게 천둥소리였다. 한동대 이사장에게 총장직 승낙의 뜻을 비치긴 했으나, 계속 불안해하던 나. 그러한 나를 나무라시는 듯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가 지시하여 명령한 그것으로 가라!’ 고 음성을 들려주신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 역시 내 손에서 손수건을 가져갔다.
‘주님,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같은 사람에게 이런 엄청난 명령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 저희가 지금 주님의 음성을 바로 알아듣고 있습니까?’ 예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자리에서 우리 내외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았던가, 한 집사님 부부가 조심스레 물었다.
"장로님 댁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삼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집으로 오는 길에 남편이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착오로 어제 출국하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소. 오늘 하나님의 전출 명령이 났으니, 보따리 싸서 떠날 준비를 합시다. 그리스도의 군사인 우리는 모집한 분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오. 중국으로 가신 최선수 장로를 생각해 보시오. 잘하고 있던 치과 병원을 버리고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농장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분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영전이오.
언어가 같은 내 나라, 내 땅에서 새벽 이슬 같은 조국의 젊은이들을,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전공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킬 인재를 양육하는 일이 얼마나 보람된 일이오. 하나님 명령보다 내 연구 생활이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면 그게 이미 우리에게는 우상인 것이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계획을 연기시키면서 그날의 설교를 통해 한 번 더 확실하게 우리를 부르셨던 것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16:1)
◈ 주님,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세요
사람 마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간사한지! 집에 오자 설교에서 받았던 은혜는 싹 가라앉고 커다란 모험 앞에 또다시 염려가 몰려왔다. ‘학교 법인의 기업이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이라면 몰라도...’ 나는 줄곧 그 점이 맘에 걸렸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모험을 이런 상황에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까? 나는 주님 앞에 또 엎드렸다.
1979년, 12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할 때는 남편이 망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매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주님의 출전 명령을 회피하며 하나님의 응답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
“여보, 어제는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대중적으로 이야기하셨잖아요. 한 번만 더 우리 귀에 떠나라고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겁 많은 기드온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것을 확인하기 위해 양털 솜이 이슬에 젖게 해 달라고 했다가 또 마르게 해 달라고 했다가 억지를 부렸잖아요.” 나는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아무 말이나 쏟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푸념도 들으셨다. 며칠 후 박종렬 집사(현재 온누리교회 부목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대언의 말씀을 해 주셨다.
“앞으로 느레미야서를 계속 묵상하십시오. 여러분도 느헤미야가 겪었던 것처럼 반대와 방해의 영적 전쟁들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한동대를 통해 하나님의 귀한 인재들이 쏟아져 나와 시대적 소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느헤미야와 같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눈물과 기도의 무릎으로 가야 할 길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나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 수 없었다.
느헤미야! 유다 사람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포로로 끌려가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이 되어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조국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은 모두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그는 조국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19세기 말, 세계 열강들의 세력 다툼 가운데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던 그 때,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교사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선물로 주셨다. 순교를 자칭했던 푸른 눈의 선교사를 통해 구원과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시며 36년 일제 강점기 동안 기도하게 하신 주님은 36년의 광야를 광복으로 갚아주셨다.
그러나 은혜를 등진 우리 민족은 반목하고 서로 찔러 피를 흘리며 하나님께 죄를 얻고 6.25의 비극을 만나지 않았던가. 주님께서 또다시 극심한 가난에서 우리 민족을 건져 내시고 일어서게 하셨건만, 지금은 방자함, 타락, 물질주의, 우상 숭배 등의 죄악이 넘치게 되었으니, 느헤미야 때처럼 이 시대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벽이 무너진 게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우리 민족을 포기하실 수가 없어, 이 민족의 무너진 신앙의 성벽을 재건하라 하시며 21세기 문턱에서 한동대를 세우시려는 것인가! 건축이나 설계에 전혀 경험이 없던 느헤미야를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해 택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기독 신앙의 바탕 위에 세워지는 한동대의 총장으로 과학자인 김영길을 택하신 것일까. 그가 대학 경영에 경험이 없는 연구밖에 모르는 사람인 것을 더 잘 아시련만! 그렇다면 한동대도 앞으로 느헤미야처럼 도비야와 신발랏과 아라비아 사람, 암몬 사람, 아스돗 사람들과 같은 끈질긴 반대자들에게 부딪히게 된다는 것일까.(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대언이었던 셈이다. 남편은 한동대 총장직을 맡고 나서 학교의 진행 과정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늘 느헤미야서를 탐독했다. 느헤미야서를 믿음의 지도로 삼고 느헤미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원칙과 하난미의 방향을 찾으며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해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02 김 느헤미야의 탄생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내 나이 스물일곱이 되자, 부모님의 근심은 더 이상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위로 오빠 하나뿐인 외동딸이었다. 아버지는 자유당, 공화당, 민주당, 이렇게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어도 평생 군수로 정년 퇴임을 하신 공직자셨다. 그가 재임했던 고을마다 송덕비를 세우려는 칭송을 받으며, 오직 청렴 한 가지로 공직을 수행하신 분이셨다.
어머니는 경상도 양반 가문을 자랑하는 대가의 따님답게 그 삶이 반듯했으며 우리 남매에 대한 어머니의 가르침은 자애롭고도 엄했다. 외가인 경상북도 성주군 훨향면 한계 마을은 원래 보수적인 고장이기도 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르침은 아녀자의 몸가짐에서부터 어른 앞에 앉고 서는 예의범절이 엄했다.
“자신에게는 인색하되, 이웃에게는 넉넉하고 후하게 하라.” “가난한 이웃을 위한 쌀 한 말은 아깝지 않지만, 쌀 한 톨은 귀히 여겨라.” 밥그릇에 밥풀 하나라도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을 정도로 어머니의 근검절약은 무서웠다. 아무리 못쓰게 망가진 물건이라도 어머니의 손에서는 신기하게 살아났다. 그렇게 보수적인 분들이 딸자식을 서울로 유학 보내셨다. 이화여자대학이 기독교 대학이요 여자 대학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을 마치고 나서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내 의지를 꺾으려 하지는 않으셨지만, 유학 가기 전에 결혼해야 한 다는 것이 전제 조건이었다.
내가 이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던 1969년의 일이었다. 김종길 교수님(고려대 영문과)이 연구실로 찾아오셨다. 경상도 양반의 보수성을 단단히 지녔으면서도 영시 강의를 멋지게 하는 그분은, 빙긋이 웃으며 사진 한 장을 책상 위에 내놓았다.
“내 친척 동생이오. 이 사람은 서울 공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지금 미국 뉴욕의 렌설리어 공과대학(RPI,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에서 박사 학위 과정 중에 있어요.” 나는 사진을 정면으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그 셋째 형인 김호길 박사(당시 미국 매릴랜드 대학 교수)가 마침 소련 핵물리학회 초청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소련을 방문하게 된다는군요. 박 대통령이 김 박사에게 소련을 방문하기 전에 서울에 먼저 들를 것을 특별히 요청하셔서 일주일 동안 귀국하게 된답니다. 이번 기회에 동생 대신 김호길 박사를 한 번 만나 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김 선생도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으니, 신랑감으로 김영길 군이 어떨지 생각해 보세요.” 그가 돌아간 뒤에야 책상 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덕수궁에서 찍었다는 신랑감의 사진을 뚜렷하지 않았으나, 안경을 낀 모습이 순박해 보이긴 했다.
그해 6월, 서울에 도착한 김호길 박사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나를 만나러 고려대 연구실을 찾아오셨다. 김종길 교수님이 함께 했지만, 거북한 자리였다. 신랑이 될 사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묻지 못한 채 일방적인 선을 보인 것이다.
김호길 박사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얼마 후 나는 김영길이라는 이름이 적힌 항공 우편 한 통을 받았다. 나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다. 얼마나 공을 들려 편지를 썼는지 글자 하나하나가 단정했다.(나중에 알았지만 그의 글씨는 워낙 악필이어서, 카이스트 제자들은 그의 흘린 글씨체를 알아보기까지 한 학기가 걸린다고 했다.) 영아 양 보십시오. 처음 쓰는 편지라 무엇을 써야 할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우리 집안에 대해서는 대략 아실 줄 생각됩니다만, 저는 1967년도 도미하여 그해 9월부터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금속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올 가을 학기부터 뉴 주 트로이에 있는, 1824년 세워진 미국 최초의 공과대학인 렌설리어 공과대학에서 재료공학 분야로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아는 집에서 부르는 내 아명이었다. 며칠 뒤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갑작스러운 편지에 많이 놀라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지난번에 보낸 편지는 잘 받아 보셨는지요? ... 가을 학기 등록을 마치고, 오늘 첫 강의를 받았습니다. ... 요즘, 영아 양의 회신을 무척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쯤 오려나 매일 편지함을 열어 보고는 합니다. 지난번 주소는 학교 실험실 주소였고, 앞으로는 이 주소로 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다시 세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그의 집안을 잘 알고 계셨던 부모님은 사윗감으로 적극 찬성하며 빨리 답장을 쓰라고 나를 재촉하셨다. 답장을 선뜻 쓰지 못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첫 번째 편지를 썼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알던 내가 단 하나가지 조건을 제시한 편지였다.
“저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혹시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같은 신앙을 가진 분과 결혼을 하겠다는 생각을 늘 해 왔습니다.” 그 편지를 띄우고 나서, 연거푸 한 주일에 한 번씩 오던 그의 편지는 한동안 끊어졌다. 한 달 가까이 소식이 없자 조금 후회스러웠다.
‘첫 편지에 내 의사를 너무 강하게 표현했나? 조금 더 친해진 후에 신앙 이야기를 할 걸 그랬나? 전통 유교 가문에서 자란 그에게 갑자기 기독교를 강요했으니 부담스러웠겠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까.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주신 편지 받고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신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자라면서 지금까지 교회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했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아 양의 편지를 받은 뒤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저도 앞으로 연구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앞으로 가정을 지켜 주시는 신이 있다면, 저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학도인 그는 하나님도 연구하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적어도 기독교에 대한 거부 반응은 없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의 편지는 과학도답게 단순하고 담백했지만 행간과 글씨 속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용과 글자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인 그의 편지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때로는 하루에 두 통씩 한꺼번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곰하게 그려 넣듯이 쓴 글자와, 나날이 새로운 디자인의 우표가 붙여진 편지 봉투를 보면서, 나는 그의 정성스러움에 감동하곤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편지를 무척 쓰기 싫어하는 그가, 박사 과정 논문을 준비하느라 밤새워 공부하면서도 그렇게 자주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에 대한 답례로 나도 새로 발행되는 기념 우표를 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울 중앙 우체국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우표를 수집하는 취미까지 생겼다.
원래 제 글씨가 명필(?)인 데다 생각이나 마음을 글로 적는 데는 서툴러서 지금 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제 마음은 영아 양으로만 가득 찬 듯 합니다. 보내 주신 영아 양의 사진은 책상 위에 꽂아 놓았습니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어오며 깊이 생각했습니다. 저는 영아 양과 꼭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한 번도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일은 없지만, 형님들의 이야기와 보내주신 사진을 보면 볼수록, 제 일생의 반려자라고 생각됩니다. 저에 대한 생각과 기대는 어떠하신지 퍽 궁금합니다.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일이 없기에 그만큼 꿈이 아름답고, 기대에 차 있으며 보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안고 있는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의 공부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고생이 따르겠지만,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고 도와 가며 아름다운 앞날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회신 고대합니다.
그해 가늘, 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청년에게서 그렇게 청혼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청혼을 받아드렸다. 그에게서 부지런한 편지가 왔고, 국제 전화도 자주 걸려 왔다. 그때만 해도 국제 전화를 걸려면 전화국에 신청을 하고도 끝도 없이 기다려서야 겨우 연결되던 시절이었다. 때로 어머니와 숙모님은 우리의 전화를 엿들으며 무척 재미있어 하셨다.
“요즘 세상에 사진만 보고 결혼한다는 사람이 어디 있냐! 이건 대단한 모험이야! 신랑 형님에게 대신 선 보이고 결혼한다니, 너 정신 있는 거니?” 친구들은 어이없어 하며 핀잔 섞인 충고를 했다. 그러나 어쩐지 내 마음은 편안했다.
겨울도 그렇게 가고 새해가 되었다. 1970년 6월 8일, 그가 귀국하기 전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무렵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던 정비석 씨의 소설 <산유화>가 머리를 스쳐 갔다. 신부가 면사포에 웨딩드레스까지 맞추어 놓고, 결혼식 전날 도망가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예식장 예약하고 청첩장까지 다 돌린 마당에 혹시 내일 만날 신랑이 너무 실망스러워 달아나고 싶어지면 어쩌나 생각했다.
신랑을 처음 만나는 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공항에 갔다. 사진으로만 본 사위를 맞이하려는 어머니도 적잖이 긴장하시는 기색이었다. 집안에 대해서는 서로 샅샅이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하나뿐인 사위가 어떤 인물인지 몹시 궁금해 하시는 듯했다.
“어머니 저기 와요. 저 사람이에요.”
“제 신랑이라고 단박에 알아보네!”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초여름에 겨울 양복을 입고 까만 뿔테 안경에 비쩍 마른, 덥수룩한 장발의 그는 영락없는 촌사람이었다. 결혼식을 엿새 앞두고, 박사 학위 자격 시험을 끝내자마자 귀국하느라 이발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했다. 지난겨울, 약혼 기념으로 겨울 양복을 한 벌 맞추어 보냈는데, 그는 그 양복을 착실하게 입고 귀국한 것이다.(나중에 들으니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는 사람끼리 쉽게 알아보려면 그쪽에서 보낸 준 양복을 입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입고 온 것이라 했다.) 그만큼 절대로 한눈팔 줄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신랑이라면 모름지기 허여멀겋고, 살도 투덕투덕 올라 신수가 훤한 젊은이여야 한다고 생각하던 어머니는 적잖이 실망사진 눈치였다. 비쩍 말라서 그런지 머리가 유난히 커 보이는 그는 미국 생활이 4년이 넘는다는데 세련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 마음에 드세요?”
나는 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네가 마음에 든다면 내사 괜찮지 뭐...”
어머니의 시원찮은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비록 촌티 나는 그였지만, 나는 벌써 그 사람을 내 마음 안에 접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결혼식 준비 때문에 대구로 먼저 내려가시면서 내게 당부하셨다.
“얘야, 아무래도 신랑 예복은 감색으로 맞춰야겠다. 검은 색을 입으면 더 말라보이는기라. 그리고 얼른 이발부터 해야겠다.”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마주 앉았다. 편지로는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 미국에서 전화가 걸려 오면 그렇게 반가웠는데..., 막상 단둘이 마주 앉아 있으려니 서로 바라만 볼 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갑갑한 장면이 반전되기를 기대하며 시선을 건네자니, 미국 동전 세 닢이었다. 10센트짜리 하나, 5센트짜리 하나, 그리고 25센트짜리였다.
“이것은 말이오, 구리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 동전은 니켈 합금인데....” 그는 그 일을 중대사로 들고 온 사람처럼 진지하게 설명했다.
‘누가 금속공학 전공이 아니랄까 봐 첫 상면에서 겨우 미국 동전 설명이람.“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다음날 저녁, 청운동 오빠네서 그를 초대했다. 저녁상을 물린 후, 오빠는 슬며시 일어섰다. 잠시 뒤 오빠의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어머니, 신랑이 어제보다 오늘은 훨씬 낫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한 사흘 한국 음식 잘 먹으면 ?도 오르고 훤해질 겁니다.” ‘당사자가 듣는 줄도 모르고... 저렇게 큰소리로 말하다니...’ 하기는 이발을 말쑥하게 한 그는 어제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대구로 내려가서 역에 마중 나온 장모를 뵙자, 그는 웃음 띤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좀... 괜찮습니까?”
뜻밖의 인사에 어머니는 당황하셨으나 공항에서보다 훤해진 그의 모습과 활달한 인사가 마음에 드시는 듯, 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셨다.
“네가 벌써 고자질 했구나? 제 신랑이라고...”
6월 15일, 대리 선을 보이고 편지와 전화만으로 마음을 주고받은 지 1년 만에, 우리는 그렇게 결혼을 했다.
◈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
남편의 고향은, 지금은 임하댐으로 수몰된 지역, 경북 안동 지례 마을이다. 그의 12대 할아버님 표은공은 병자호란 후에 벼슬길을 단념하고 경북 8경의 하나였단 기암절벽의 도연 폭포 근처 동네에 낙향하여 학문을 닦으시며 제자를 기르셨다고 했다.
아버님은 열두 살 때부터 조부 수산공 아래서 유교의 철저한 효우 교육을 받으신 덕으로 안동에서 대표적 문화 인사로 추앙을 받고 계셨다. 그분은 한학을 공부하셨으나 심산유고에 자녀들과 동네 아이들을 위해 초등학교(그 당시 간이 학교)를 세우셨고, 자신이 세우신 학교의 교장으로 평생을 근무하셨다. 그분이 학교 울타리를 무궁화나무로 심어 놓으신 바람에 지례 마을의 길산초등학교는 해방 당시 우리 나라에서 무궁화를 가진 유일한 학교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남편이 자랄 때만 해도 지례 마을은 사방 30일을 자전거도 탈 수 없어서 걸어서 들어가고 걸어서 나와야 했다고 한다. 그는 기차나 자동차, 그리고 큰 신작로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라고 했다.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먼저 봤던 그는 앞으로 어른이 되면 멋진 비행기를 만드는 과학자가 되리라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팔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위로 세분의 형님과 누님, 그리고 아래로 세누이가 있었다. 나를 선 본 자리에서 어머님은 아들을 “성품이 성자 같은 사람이제. 누군지 복 많은 사람이 걔 색시가 될 기라고 말했지. 하지만 공부밖에 모르니 공부 아니면 할 게 없는 사람이라...” 하고 말했다.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 시댁의 가훈이다. 숙맥불변,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세상 이치에 어두운 숙맥이 되기로 작정한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처세술이 능하고 영리하되 인간성이 못된 사람보다 좀 어리숙해도 어진 사람으로 살 것을 시댁 식구들은 평생의 가르침으로 받고 살았다. 집안 식구들이 모이면 자신들의 ‘숙맥기’를 유쾌하게 인정하며 줄거워했다. 서로의 실수들을 너그럽게 격려하는 훈훈한 인심들을 지닌 분들이었다. 유순하고 낙천적인 가족 분위기에서 자라서인지 남편은 성품이 늘 너그러웠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혼 후 남편은 주말마다 교회에 출석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 남편은 내게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정혼한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잉태했다고 하면 되지, 하필이면 성령으로 탄생했다고 하니, 이런 모순과 억지를 어떻게 믿겠소. 또 물이 포도주로 어떻게 순식간에 변한단 말이오? 물을 배달하는 동안 알코올로 화학 방정식이 바뀌고 말았으니...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도 분수가 있지. 지금까지 상온에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난 적이 없어요. 이런 기적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연구를 한단 말이오? 이번에는 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양적인 팽창이 일어났으니,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보다 더 기막힌 기적이군! 이것은 과학의 기본 법칙인 ‘질량 보존의 법칙’에 어긋나오. 성경은 처음부터 이런 논리적 모순뿐이니 우리 같은 사람은 믿기 힘드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대구 대봉제일교회)에 다녔던 나는 복음에 철저하신 이성택 목사님(나중에 평안교회 원로목사, 전 한기총 회장)을 존경하시며 교회 일에는 모범생처럼 항상 열심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답할 성경 지식이 없던 나는 대답이 궁해질 때마다 협박하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과학 법칙을 가지고 그렇게 자꾸 따지면 하나님 기분이 썩 좋지 않으실걸요, 성경은 무조건 믿어야 되요. 무조건!” “그렇지만 납득할 수 없는 사실 외에 성경에서 받아들일 것도 많아요. 기독교의 도덕률은 어떤 타종교보다 한 차원 높은 것 같소. 나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은 유교에서는 들어보지 못했소. 이왕이면 도덕적으로 한 차원 높은 기독교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게 좋으니 교회는 계속해서 나가겠소.” 박사 학위를 마친 남편이 미국 항공우주국(NASA) 루이스 연구소에 있을 때였다. 그 즈음 우리가 출석하던 클리블랜드 한인 교회의 몇몇 교우들 사이에서는 ‘김영길 박사에게 믿음을 달라’는 중보 기도가 이어졌다. 그를 위해 금식 기도를 시작한 교우도 있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내가 시장을 보는 동안 남편은 슈퍼마켓 한쪽에 있는 서가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책 한 권을 들고 계산대로 왔다. 할 린지의 <유성 지구의 대 해방>이라는 책이었다. 그날 저녁 남편은 식사도 잊은 채 골똘히 그 책을 읽었다.
“저녁 준비 다 되었어요.”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오.”
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영혼에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온 나를 옆에 앉으라고 했다.
“여보! 나는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왜 그분이 사람이 되기 위해 성령으로 탄생해야 했는지, 2천 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 이제야 알았소.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오! 그 분이 죄인인 나를 대신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오! 예수님은 내 죄에 대한 보석금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소.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비과학적이라기보다 초과학적 사건이기 때문에 화학으로 증명할 대상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오. 또한 성경의 기적 사건들이 과학 법칙을 초월한 것 같이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도덕률을 초월하고 있소.” 그 말을 들으며, 어릴 적부터 들어왔단 조각 조각난 성경 지식이 퍼즐 맞춰지듯 확 연결되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니! 지금까지 나는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어요. 나는 이제까지 교회를 수십 년 다녔어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봅니다. 오늘 당신의 성격 공부가 최고예요!”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 생황을 했건만 ‘진리’에 무지했던 나, 종교적인 습관만 몸에 밴 허울뿐인 교인이었던 나는 그날 밤 비로소 거듭났던 것이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는 말씀은 우리 부부를 두고 한 말씀이었다. 처음으로 우리는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했다.
“주님, 어찌하여 오늘 저녁 이 진리를 우리 부부에게 동시에 깨닫게 해 주십니까! 저희들의 삼과 가정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소서.” 나는 감사하고 있었다. 좋은 환경과 자애로우신 부모님 밑에서 순조롭게 성장하고 행복한 결혼을 한 것을, 미국에서 남편이 학위를 마치고 꿈꾸던 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것을, 그리고 건가하고 귀여운 남매의 어머니가 된 것을, 이 모든 것을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인생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근본에 대해서는 눈뜨지 못하고 있었다. 영혼의 장님이 눈을 뜨게 된 순간,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감사의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그것은 기쁨의 샘물이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거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밤하늘 신비할 만큼 새롭게 보였다. 밤하늘도, 저 별들도 이전에 보던 별이 아니었다. 가만가만 숲을 흔드는 바람의 속삭임도 새로웠다. 숲 건너 반짝이는 등불들도 더없이 따뜻했다. 온 천지가 새로웠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 술을 버리고 생수를 마시다
남편은 애주가였다. 대학 시절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주량의 애주가로 기억하고 있다. 시댁의 광에는 매달 제사를 지내기 위해 늘 향긋한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 술 맛을 익혀 온 남편은 술 예절을 어른들께 배웠다며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 워싱턴 형님 댁에 다녀오면서 조니워커를 한 박스 샀다. 워싱턴이 뉴욕보다 술값이 싸기 때문이었다.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던 남편은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 실려 있는 술병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깨지지 말고 집에까지 잘 가자.” 우리 집에는 칵테일 만드는 각종 책자들, 계량 기구들이 있었다. 거실 한쪽에는 술을 진령해 두는 미니 홈 바까지 갖춰 놓았다. 식사할 때 그는 가끔 향기 나는 달콤한 칵테일을 나에게 권했다. 나도 그 맛을 즐길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뒤 그 많은 술병들과 그의 술 취미가 마음에 걸렸다.
“주님, 이 사람 술 좀 끊게 해주세요.” 라고 내가 기도하자 그는 반발했다.
“나는 ‘아멘’하지 않겠소. 왜 그런 걸 하나님께 고자질하지?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주정을 하거나 실수한 적이 없지 않소? 성경 어디에 술 먹지 말라고 했소? 바울도 디모데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소? 다시는 하나님께 이르지 마시오.” 할 수 없이 나는 남편 몰래 하나님께 일러바쳤다. 어느 날 교회 친구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갖다 주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경주하는 사람입니다. 무거운 옷을 걸치고 높은 구두 신고 달리는 사람 있습니까? 팬티만 입고 맨발로 가벼운 차림으로 달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즐기던 유익하지 못한 취미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두꺼운 옷을 걸치고 양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 그날 저녁 슬그머니 이 테이프를 틀었다. 설교를 듣던 남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벌떡 일어나 흠 바로 갔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여보, 마시던 것들만 버리고 새것은 그냥 두세요. 다른 집에 초대받아 갈 때 갖다 주게요.” 아까운 맘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꺼리는 걸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주겠소?”
그는 그 많은 술병을 차례 차례로 싱크대에 거꾸로 꽂았다. 콸콸콸 술이 쏟아져 내렸다. 우리에게 생수의 강이 터지고 있었다. 고이 모시던 술병을 다 버린 후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다음부터 남편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람의 의지나 힘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취미와 입맛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귀국 후, 남편의 옛 술친구들이 변해 버린 그를 보자 몹시 실망했다.
“미국 가서 예수 믿고 오더니 사람이 맛이 갔어. 예수 때문에 영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군.”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은 예수 믿고 수지맞는 사람이에요. 옛날처럼 술을 계속 마셨다면 아마 지금쯤 코끝이 빨개졌을걸요.”
◈ 귀국의 소원
나사에서 연구 생황을 하던 남편은 세계 최대의 니켈 회사인 인코(INCO) 중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살던 동네는 뉴욕 북쪽, 숲과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동네였지만, 한국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는 매우 적적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점점 영구 귀국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친정 아버님께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귀국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가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내 생각을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연구 경험을 좀 더 쌓은 다음 귀국할 생각이오. 하나님의 뜻이 어떠신지 당신이 기도해 보시오.” 그는 오히려 내게 숙제를 주었다. 나도 미국에서의 편한 생활과 아이들의 교육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때 카터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에 전쟁 소문이 무성했고 우리들은 잠시 귀국을 망설였다. 우리가 머뭇거리자 친정 어머니께서 편지를 보내셨다.
“패망한 월남을 보고 있지 않느냐? 나라가 어려운 때일수록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귀국하여 나라에 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마침내 남편은 인코 연구소에 사직 의사를 밝혔다. 같은 연구실의 상관인 하워드 메릭 박사는 극구 만류했다.
“당신이 너무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어서 향수병에 걸린 것 같소. 한 달 동안 귀국 휴가를 다녀오든지, 6개월 동안 휴직하고 한국에 다녀오면 어떻겠소?” 버클리 대학에 있던 사숙도 우리의 결정을 말렸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이거나, 미국과 한국의 어떤 조건도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1979년, 남편은 유치 고학자로서 영구 귀국, 한국과학원(카이스트의 전신) 재료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느끼는 감회는 새로웠다. 12년 전 해외여행지정액 150달러를 가지고 떠난 유학길.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려 보았다. 박사 학위도 받고 나사와 인코에서 7년여 동안 연구 경험을 쌓고, 아들과 딸(당시 호민 9세, 종민 7세)을 거느리고 돌아오게 되었다.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유학 생활, 지도 교수 노먼 스톨로프 박사와 훌륭한 동료 과학자들, 그리고 미국 정부에도 감사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제일 먼저 감사드렸다. 새로운 인생관과 가치관, 변화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우리는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 홍릉 과학 단지의 새로운 만남들
새로운 만남이 홍릉 과학 단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릉 과학 단지의 크리스천 비율이 전국에서 제일 높았던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상당수의 유지 과학자들이 유학 시절 크리스천이 되어 귀국했던 것이다.(그때의 만남들이 한국 창조과학회의 태동을 예비하고 있었다.) 우리 아래 집에는 민성기 박사(당시 국방과학연구소)네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국말이 서툰 딸 종민(현재 뉴욕 KPMG 경제 자문)이가 아직 볼에 젖살이 통통한 네 살짜리 꼬마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마미! 얘가 한국말 참 잘해.”
그 꼬마는 민 박사의 딸 아린(현재 인디애나 대학, 기악 전공)이었다. 그날부터 두 여자 아이는 아랫집과 윗집을 분주히 오가며 친하게 지냈다. 아린 엄마 이찬해 교수(연세대 작곡과)와 나도 아이들처럼 친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린 엄마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나요? 거듭난 그리스천인가요?” “미국 유학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까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해 겨울 방학 우리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예수님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우리에게 민 박사가 말했다.
“위 층 종민이네가 이사 온 후부터 우리 집사람이 좀 이상해졌어요.” 어느 날, 아린 엄마가 진이 엄마 이경숙 교수(현재 숙명여대 총장)를 전도하자고 했다. 그 다음부터 우리 세집은 같은 교회(새서울교회, 조병호 목사)에 다니며, 주일마다 깊은 교재를 나누었다. 이후 이찬해 교수와 이경숙 교수 그리고 나, 우리들 셋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자매가 되기로 언약을 맺었다. 복음이 맺은 귀한 만남이었다.
귀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몇몇 분이 나를 찾아와 연구 단지 안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비영리 유치원의 책임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유치원 학부모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 일을 맡기로 했다. 유치원에서 무척 똘똘한 채린(현재 서울 아산명원 비뇨기과 의사)이 엄마가 누군지 궁금해하던 어느 날, 그 꼬마의 엄마 김해리 교수(서울대 식품영양학과, 창조과학회 2대 회장 송만석 박사의 아내)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신앙계>(1979년 10월호)에 실린 김영길 박사님과 최완기 <신앙계> 편집국장(현재 미국 센트루이스 순복음교회 담임 목사)과의 인터뷰 내용을 읽다가 유치원의 김 선생님이 김 선생님의 사모님 같아서 전화를 드립니다.” 키가 크고 눈이 서글서글한 김해리 교수와 나는 그날 저녁 식사도 잊은 채, 텅빈 유치원에서 신앙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날 늦게 집에 들어갔을 때 집을 지척에 두고도 가족을 까맣게 잊은 나에게 남편은 처음으로 무척 화를 냈다. 집에서는 오후부터 행방불명이 된 나를 찾느라고 친척집과 파출소까지 연락을 해 두고 온 식구가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무식하면 용감하다
1980년 민족 복음화 행사 중에 창조과학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던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는 한국 측 창조론 강사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세 분의 생물학자 장로님들을 찾아가 부탁했으나 한결같이 진화론을 반박하는 강사로 나서기가 난감하다고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대 화학가 대학원생이었던 CCC의 심영기 간사(현재 인제대 교수)는 <조선일보>의 칼럼을 읽고 즉시 회영상 박사(고려대 화학과 교수, 숙대 이경숙 총장 남편)를 찾아왔다. 그러나 최 박사는 과학원의 김영길 박사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저는 그 주제의 적합한 전공자가 아닙니다.” 라고 남편도 거절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강청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즐겨하던 남편이 말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한다면, 저라도 하나님의 명령 즐겨하던 남편이 말했다.
졸지에 엄청난 숙제를 받은 남편은 CCC에서 준 한 아름의 미국 창조과학회(ICR) 서적들을 열심히 읽어 나갔다. 남편은 내 이마를 만져 보며 말했다.
“당신 이마는 각도의 경사가 직각에 가까우니, 당신 조상은 원숭이는 아닌게 틀림없군.” 진화론에 의하면 원숭이에 가까울수록 이마의 기울기가 심하고, 사람의 이마는 수직에 가깝다고 했다. 그는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창조론을 더욱 확신했다.
“창조론은 믿음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는 비과학적인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인 타당성을 갖춘 이론이오. 가설에 지나지 않는 진화론을 믿으려면 창조론을 믿는 믿음보다 큰 믿음이 필요하군.” 1980년 8월, 사흘에 걸쳐 “창조냐, 진화냐” 세미나가 열렸다. 남편의 준비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도 설레였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정동 CCC 회관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사흘 동안 4천 명이 넘는 인파가 참석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열기가 대단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만 가르치던 창조론을, 교회 밖에서 과학적으로 고찰한 우리 나라 최초의 세미나였던 탓이다. 진화론이 인류 기원에 대한 가설에 불과한 것을 밝히고,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복음으로 연결한 사흘 동안의 세미나는 교계와 학계에 커다란 파문과 도전을 던지며 성황리에 끝났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981년 1월, 전정련 회관에서 300여 명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한국 창조과학회를 창립했고, 남편은 창조과학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전국 교회와 대학에서 과학자의 입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해 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현재 교육인적자원부 사단 범인으로 정식 등록된 한국 창조과학회 회원은 약 2천여 명에 이른다.) 한국 창조과학회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했으며, 복음 증거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김준곤 목사님(CCC 총재)은 “한국 교회사에 획을 그은 세 가지 사건을 든다면, 1885년 아펜젤로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통해 복음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 성경이 한국말로 번역된 것, 그리고 진화론의 허구에 도전하는 한국 창조과학회의 탄생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 나는 외치는 소리오
남편이 창조과학회 활동을 시작하자 학문적인 공방이 끊이지 않았다. 한 일간지에는 과학의 총 본산지인 흥릉 과학 단지에서 지금까지 정설로 되어 있는 진화론을 유치 과학자로 갓 귀국한 비전공자 김영길 박사가 부정하고 있다는 비판적인 언론 기사가 실렸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을 사이비 과학자라고 공격하지 않도록 한국에서 연구 업적이 나올 때까지 당분간 좀 자제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데, 내가 외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저 돌들에게 명해서라도 창조주를 고백하게 하실 거요.” 그 무렵 뜻밖에도 미국 나사에서 발명상(NASA TECH BRIEF AWARD, 1981년)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사와 인코 합동 연구 프로젝트인 초대열 합금이 실용화된 공로였다. 나사 재직시에 이어 두 번째로 받는 상이었다. 나사 재직시에 이어 두 번째로 받는 상이었다. 곧이어 미국 산업발명연구상(IR 100 Industrial Research AWARD)도 수상했다. 참으로 절묘한 시점이었다. 김영길이라는 과학자가 과학과 종료를 혼동하는 실력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상급이요 방패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3년, 남편은 풍산금속과 공동으로 반도체 신소재 리드프레임(PMC-102)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리드프레임은 기전의 세계 반도체 시장을 점령하던 미국의 올린사 제품보다 열전도나 성능 면에서 월등하다고 했다. 또 리드프레임은 1987년 독일의 스톨버거사와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건국 이래 우리 나라 최초의 ‘선진국 기술 수출 1호’라는 신기록을 남겼다. 1986년 미국의 모토롤라, 테사스 인스트루먼트 등에서도 반도체 구리합금 신소재를 사 갔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한국의 반도체 소재가 미국 시장을 개척하게 된 것이다. 이 연구로 남편은 국민훈장 동백장과 세종문화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과학자로서 분에 넘치는 상복이었다.
국내 신문들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고 그를 소개했다. 한국에서 개발된 반도체 소재가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KBS 라디오의 산업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송될 정도로 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1987년 과학기자클럽이 주는 ‘올해의 과학자 상’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창조론에 비판적이던 기자들도 우호적인 친구로 변했고, 그의 연구 활동을 꾸준히 취재해 주었다.
“내가 잘나서 상을 타는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창조과학 사역을 담대하게 하라고 내 어깨에 훈장을 하나씩 달아 주시는 것이오.” 남편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미국에서보다 연구 여건이 부족한 한국에서 오히려 더 많은 지혜와 축복을 주셨다. 남편은 “창조론을 믿을수록 과학자는 더 열심히 연구해야 합니다. 과학자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무궁무진한 피조 세계를 하나씩 발견하고,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라며 강조하는 것을 늘 잊지 않았다.
그 무렵 남편은 주중에는 연구에 몰두하고 주일이면 창조과학 세미나로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주께 드린 시간을 연구의 축복으로 되돌려주셨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 22:29) KBS <11시에 만납시다> 프로그램에 남편이 출연했을 때였다. 녹화를 끝내고 남편은 곧바로 캐나다로 출장을 떠났다. 방영되는 그 시간, 텔레비전 앞에서 나와 아이들은 방석을 끌어안고 있었다. 남편이 혹시 실수라도 하면 방석으로 얼굴을 가릴 작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시장을 개척할 때의 에피소드를 나누던 그는 대담자 김동건 아나운서보다 더 크게 어깨까지 흔들며 웃었다. 우리들은 그만 방석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말했다.
“당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웃으시던데요!” “카메라를 인식하면 안 되지! 담당PD가 카메라를 절대로 의식하지 말라고 내게 미리 말해 줬어!” 정색하는 그를 보며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남편이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도 남편은 텔레비전에 수업이 출연했지만 절대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다.
창조과학회가 생긴 이후로 쏟아지는 세미나 요청에 남편은 원하는 곳이라면 산골 어디라도 달려갔다. 한 주일 집회가 두세 차례 잡혀도 남편은 그런 일정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정욱 박사(현재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남편에게 물었다.
“나는 창조과학 강의를 하루에 똑같은 내용으로 두 번씩 하면 재미가 없어요. 그런데 김 박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매번 똑같은 내용으로 전해도 제 자신이 은혜를 제일 많이 받습니다. 제 이야기라면 몰라도 하나님의 창조를 선포하기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마이크가 아무리 똑같은 소리를 전해도 지루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지요.” 남편은 자신의 사명을 세례 요한처럼 외치는 ‘소리‘라고 했다. 어느 날, 강연을 하고 온 그에게 물었다.
“오늘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그건 왜 묻소? 마이크가 소리만 전달하면 되지. 사람이 몇 명 왔는지 세는 것 봤소? 소리는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고 사명만 다하고 사라지는 것이라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소리오! 혹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할까 봐 늘 두렵소. 강의한 후엔 더욱 조심해야 한다오. 자칫하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있거든 내 속에 은근히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으려는 욕심을 있기 때문이지.”
◈ 증거자의 자세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네가 누구냐?”
그들의 저의는 요한이 무슨 권위로 세례를 주는지
요한의 교권적 신분을 알고자 함이었다.
하나님 일 한다고 하면서 형식과 권위에만 관심이 많은 자들,
영혼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인기만 염려하는 불순한 자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단호히 자신을 부인했다네
그는 사람들이 혹 자신을 그리스도로 오해할까 봐
자기에게 관심을 가질까봐 자신이 높임을 받을까 봐
자기가 존경을 가로챌까 봐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도적질할까 봐
참으로 그는 못 견뎌 했다네
나는 그의 깨끗한 인격을 흠모하네
내 허약함과 허물을 감추려 함으로
나는 얼마나 속박받고 있었는가
언제나 칭찬 듣기 즐겨함으로
인정받고 싶은 나의 숨은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내 모습
오! 주님 또 한번 참회합니다.
용서하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이 시는 1984년 남편이 UCLA 교환 교수로 있던 1년 동안 김동명 목사님(로스앤젤레스 침례교회)에게서 요한복음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 내가 쓴 시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심정에 대해 잊혀지지 않는 많은 교훈을 배웠다.
◈ 내 자식이듯 내 동생이듯
결혼하기 전만 해도 내 꿈은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난 뒤 나는 공부에 대한 우선순위를 내려놓았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셨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남편은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뉴욕 주립 대학(SUNY, 뉴 폴즈 캠퍼스)으로 내 손을 끌고 갔다. 남편의 손에 이끌려 입학하게 된 특수교육학과 대학원에서 학문을 다시 접할 수 있었지만, 나는 박사 학위를 끝내지 못하고 귀국했다.
귀국한지 1년이 지났을 때, 스승인 추국희 교수님(이화여대 특수교육학과)이 봄 학기부터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맡으라고 하셨다. 무척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 내가 맡은 첫 번째 과목인 ‘특수 교육 교재 개발’을 잘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장애 아동 개인의 특성에 맞는, 교사가 만들어야 할 교재의 이론과 실재를 가르치는 과목이었는데, 미국은 상업용 교재가 풍부하지만 우리의 특수 교육 현장은 교재가 형편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추 교수님은 망설이는 나를 나무라셨다.
“시간이 충분히 있으니 지금부터 준비하면 되지, 다른 사람은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해 애쓰는데 너는 여전히 소극적이구나!”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복음 전하는 도구로 저를 부르신다면, 필요한 서적을 구해 주세요.”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갔지만 여전히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하루는 문서 선교에 열심인 미국인 친구 웨슬리 웬트 워스 씨가 우리 집에 다니러 왔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는 용산(미8군) 서울국제학교에서 특수 교사로 있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웨슬리의 친구는 풍부한 시청각 자료들과 함께 열한 권의 책을 내 앞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책은 필요한 사람의 것이니, 필요하면 모두 가져다 보세요.” 학교 측에 내 최종 의사를 밝히기 전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 셈이었다. 나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설렘으로 그해 겨울을 보냈다. 하지만 개강일이 다가오자 나는 또다시 하나님의 확인을 받고 싶었다.
“주님, 내일 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두 사람만 만나게 하신다면, 이 시작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증거로 삼겠습니다.” 이튿날, 신입생처럼 긴장된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데, 남편이 말했다.
“마침 잘됐소. 당신 학교 가는 길에 ‘이대 학보사’에서 부탁한 내 원고를 직접 전해 줘요.” 학교에 도착한 나는 학과 사무실에서 학보사로 전화를 했다. 내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대학원생 조교 강순구 양이 말했다.
“선생님의 사부님이 과학원의 김영길 박사님이신가요?”“그래요”
“할렐루야! 선생님, 장혜성 언니와 저는 예수님을 믿는 교수님을 우리 학과에 보내 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해 왔어요. 하나님께서 저희 기도를 들어주셨어요!”이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랴!
“주님,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종장 시간에는 꼭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해부터 14년 동안, 한 번도 결강이나 지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내 건강과 환경을 지켜 주셨다.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학생들에게 한 가지 확실히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책임감과 성실함’이었다. 자기 일에 책임지는 사람, 성실과 열심히 사는 삶은 어떤 실력보다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때로 수업 시간에 채 되지 않아 강의실로 들어가면 학생들이 불평하기도 했다.
“선생님, 시간이 안 됐는데요?”
“미안해요, 아직 1분 남았군요. 하지만 나 한사람이 1분 늦게 들어오면, 여러분 70명의 시간을 70분 낭비하게 됩니다.” 드디어 종강 시간, 나는 마치 마지막 이 한 시간을 위해 한 학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시험 준비로 여념이 없던 학생들도 내 진지한 이야기에 고개를 들고 차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러분, 한 학기 동안 배운 학문과 지식으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은 무기가 아니고 사람입니다. 어떤 훌륭한 교재나 지식보다 교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더욱 성실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교사가 무능해서 잘못 가르쳐도 아무도 교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그 아동의 장애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특수교육은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학문입니다. 장애 아동을 가르치다 보면 좌절할 때가 많을지라도, 여러분은 이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는 학문을 전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눅 14:13-14)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사랑, 이성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게 되면, 우리의 생은 놀랍게 변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쑥스러워하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십시오.“그러고 나서 내가 애송하는 시를 학생들에게 읽어 주었다.
사랑하는 친구야
잘 있었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말하고 싶어 이글을 쓴단다. 어제 나는 네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 나도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널 기다렸단다. 저녁 때 나는 네가 하루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황혼을 너에게 선물했지. 네가 좀 쉴 수 있도록 시원한 산들바람과 함께... 그런데 넌 내게 오지 않더구나. 정말이지,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어. 난 네가 잠드는 것을 바라보며, 네 이마를 가만히 만지고 싶어서 내 얼굴과 베개 위로 달빛을 쏟아 부었지. 그리고 다시 너를 기다렸어. 네가 깨면 서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난 너를 위해 선물도 많이 준비했단다. 하지만 넌 오늘도 늦게 일어나, 바삐 나가더구나.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그래도 난 널 사랑해. 내 눈물이 빗물에 섞여 내리고 있단다. 그런데 너는 오늘 무척 슬퍼 보이는구나. 그것이 또 날 아프게 하는구나. 나도 그런 네 마음을 알거든. 내 친구들도 여러 번 날 실망시키고 아프게 했기에... 하지만 난 널 변함없이 사랑해. 만약 네가 “내가 널 사랑해!”하는 내 말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인다면! 파란 하늘에서도, 잔잔한 푸른 초장에서도 네게 말했어. 나뭇잎들과 아름다운 꽃들을 통해서도 난 너에게 속삭였어. 산속에 흐르는 시냇물을 통해서도 내 사랑을 너에게 전했었지. 새들에게도 너에 대한 내 사랑을 노래하게 했어. 난 너를 따뜻한 햇살로 옷 입히고, 자연 속의 꽃 내음으로 네 주위를 향기롭게 했단다. 너를 향한 내 사랑은 대양보다 깊고, 네가 가진 어떤 간절한 소원보다도 더 크단다. 내가 얼마나 너와 이야기하고 싶은지, 너와 동해하고 싶은지, 네가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란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어. 난 너를 도와주고 싶어. 나의 아버지에 대한 것도 너에게 알려 주고 싶고... 내 아버지 역시, 널 돕고 싶어 하신단다. 친구야, 언제든지 날 불러줘, 그리고 내게 말해 주렴. 제발 좀 나와 이야기해 보자. 날 잊지 말아 줘. 난 너에게 전해 줄 것이 너무 많은데... 그래, 이제 더 이상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나를 선택하든 거절하든 그건 네 자유니까. 그렇지만 나는 널 여전히 기다릴 거야. 왜냐하면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너의 친구 예수로부터(작자 미상)
내 이야기를 듣던 한 학생이 눈물을 흘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였다. 나는 그 학생을 보지 않으려고 한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그날 종강 수업을 마쳤다. 며칠 지나서 집으로 편지 한 통이 왔다.
“그날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잠자던 제 신앙이 다시 깨어났습니다.” 강의 시간에 흐느끼던 그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졸업한 후에도 “선생님을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은 감격을 제가 담임하는 학생들과 나누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며 특수학교 교사가 되어 종종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박영미는 현재 호수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특수교육을 공부하며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선생님, 어제는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반은 처음 학교에 오는 꼬마들 신입 반입니다.
아주 커다란, 스무 살이 넘은 녀석부터 이제 여섯 살이 된 꼬마에 이르기까지 얼굴이 다르고, 이름도 다른 녀석들이지만, 또 한 해 동안 웃고 울어야 할 새 식구들임이 분명했습니다. 처음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외톨이가 된 영표가 풀이 죽어 있어서 마음이 아팠는데, 수업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에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제 손을 잡아 주는 순간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던지요. 엊그제 엄마가 그 녀석을 이곳에 맡기시면서 많이 우셔서, 그래서 저도 따라 울 뻔해서 더더욱 측은하고 가여웠던 녀석이었습니다.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연합니다.
키는 150센티미터의 큰 녀석인데 듣지 못하고 삼키지를 못하는 녀석이 있습니다. 오늘 급식으로 우유를 나누어 주었는데 너무나 먹고 싶어서, 컵을 입에 댔지만 바닥에 흘러서 한 모금도 먹지 못하던 녀석이었습니다.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가난한 마음들을 지닌 우리 열세 명의 꼬마 천사들을 위해서. 게으름 피우지 말고 내 자식이듯 내 동생이듯 보살피고 사랑하며 한 해를 지내야겠습니다. 믿고 의지할 친구가 되어 언니가 되고 선생님이 되어서 가슴속 깊이 새어 나오는 따스함을 함께 나누며 한 해 동안 무얼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많이 기도해야겠습니다.
샬롬! 1987년 3월 3일 박영미 드림.
가족이라는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
◈ 얘야, 용왕님보다 예수님이 높으냐?
1979년, 귀국 직후 며칠 동안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남편은 어머님을 간곡히 전도했다.
“어머니! 성경에서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해요. 어머니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암, 죄인이구 말구 사람처럼 악한 것은 없지! 밭에 나는 것 다 뽑아 먹고, 바다에 나는 건 다 건져 먹고, 날아다니는 것 잡아먹고 그래도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악한 말이 나오니 죄인이고말고! 밤중에 길 가다가 짐승보다 사람 만나는게 더 무섭거든! 그것만 봐도 사람이 죄인이지! 나도 물론 죄가 많지! 암 죄가 많고 말구!” 어머님은 순순히 자신도 죄인임을 시인하며. 그날 밤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하지만 그냥 믿어 버리기에 아무래도 미슴쩍으셨는지, 어머님은 잠시 귀국한 셋째 아들에게 은밀히 물으셨다.
“얘, 호길아! 네 생각에는 용왕님이 높으냐, 예수님이 높으냐?” 나는 거실에서 모자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시숙이 어떤 대답을 하실지 궁금했다. 어머님은 셋째 아들의 대답을 진지하게 기다리시는 듯했다. 어머니의 어린아이 같은 질문에 시숙은 한참 껄껄 웃으시더니, “어머니! 예수님은 큰집이고 용왕님은 작은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이왕 믿으려면 큰집을 믿는 게 낫지요” 하고 말했다. 농담 섞인 아들의 대답에 어머님은 그제야 안심이 되시는지, “얘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고맙다.”하고 말씀하셨다.
얼마 후 서울에 오신 어머님은 세례를 받는 자리에서 두 손 모으고 합장하듯 목사님께 정중하게 인사했다.
“목사 양반, 참 고맙습니더!”
연로하신 어머님은 교회에 나가지는 못하셔도 틈틈이 성경을 읽으시며 매일 기도하셨다. 그해 겨울 방학에 고향에 다녀온 대학생 조카딸이 말했다.
“작은 어머니, 이번 정월 대보름에도 할머니께서 용왕 먹인다고 음식을 차려 강가에 다녀오시던데요.” 얼마 후 서울에 오신 어머님께 나는 여쭤 보았다.
“어머님! 예수님 믿으신다고 세례도 받으셨는데 아직도 용왕님을 섬기시면 어떻게 해요?” 어머님은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낭패스런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누가 너에게 그 말을 다 일러 주든? 아이구 얘야, 사람도 갑자기 절박하게 끊으면 섭섭해한단다. 내 강가에 가서 용왕에게 내년부터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작별했다. 그것이 마지막인기라.” 어머님은 1년 후 집에 모시던 성주 단지도 과감히 버리셨다. 그러곤 매일 아침 두 손을 모으고 정성스럽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한마디 한마디 뜻을 음미하듯 천천히 외우셨다. 그러다가 중간 대목에서 잊어버리면, “아이구, 하나님 미안합니다. 내가 또 깜빡 잊어버렸으니 처음부터 다시할랍니다.” 하시곤 옛날 내방 가서 곡조를 읊으시듯 기도하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니임, 아-버-비이---이--름--이 거-룩-히여어기임을 받-으-시-오-며....” 하루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었을 때,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길아! 성경을 읽어 보니 네가 요셉 같더라! 오랜 외국 생활을 하던 요셉이 나라와 집안에 복덩이가 되었더라. 너도 그럴 것이라!” 우리는 어머님이 성경을 이해하시는 것이 기뻤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 목사님, 큰 사업 하십니다
1986년 10월,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다녀오신 시아버님의 얼굴에 어쩐지 수심이 있어 보였다. 며칠이 지난 후, 아버님은 털어놓으셨다.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잠실 경기장으로 가는데 운전 기사가 말을 건네더라고 했다.
“시골에서 폐막식까지 구경하러 오신 할아버지, 참 행복해 보이십니다.” “암, 모두들 날보고 복 많은 사람이라고 부러워들 하지!” “그런데 할아버지 예수를 믿으십니까?”
“나는 안 믿지만 우리 넷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다 믿지.” “지금 할아버지가 경기장에 입장하시는데 본인 입장권이 없으면 못 들어가시잖아요? 마찬가지로 가족이 다 믿어도 할아버지 본인이 예수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할아버지 연세도 높으신데, 어서 예수 믿고 천당 가는 입장권을 준비하셔야지요.”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설명을 드렸다. 덕망 있는 어른께 ‘당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참을 들으시던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너희 집에 오면 호민이가 이야기를 술술 잘해서 무슨 말을 하나 자세히 들어보니, 또 예수 이야기를 들이미는 기라. 너희 집은 아이들까지 모두 예수 물이 다 들었더라, 허, 참!!” 그랬지만 결국 그날 아버님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죄가 되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합니다. 천국 갈 때까지 나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중학교에 다니던 호민이가 할아버지의 기도를 몰래 녹음했다.
“할아버지, 여기 녹음했으니 이제부터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다고 꼭 말씀하셔야 돼요.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야! 너희들 간첩 포섭 작전보다 더 심하구나! 알았다. 이 할아버지도 너희들처럼 천당 가는 표를 받았으니 이제 할아버지 걱정일랑 하지 마라. 하지만 사람들한테는 소문 내지 마라. 이 나이에 예수 믿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보고 뭐하고 하겠느냐!” 그로부터 몇 달 후 서울에 오신 아버님은 드디어 온누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아버님은 하 목사님께 말씀하셨다.
“각자 본인이 예수를 믿어야 천당 가는 표를 받는다고 해서..., 그래서 왔오.” 아버님 생애에 처음으로 교회에 오신 날이었다. 금요일 오후. 교인들이 없는 텅 빈 교회당에서 여러 목사님들이 단 위에 둘러서서 아버님께 세례식을 베풀었다. 꿇어앉은 아버님을 뵈며 둘째 동서도 남편도 우리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막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둘째 동서가 말했다.
“이 어른이 세례 받으시는 게 우리 집안에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난 것이네.” 세례를 받으신 후, 기분이 좋아지신 아버님은 교회당 안을 휙 둘러보시더니 목사님께 말씀하셨다.
“목사님! 큰 사업하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 목사님은 빙긋이 웃었다. 하 목사님이 안동에 계신 김광현 원로 목사님의 안부를 여쭙자 아버님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예, 그분은 이제 연로하셔서 장로로 물러앉았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목사님이 은퇴하면 장로가 되는 줄 아셨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아버님은 한자로 쓴 ‘사영리’를 비닐에 고이 싸서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며 틈틈이 읽으셨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 다 죽었는데 뭘 믿는단 말이고?
경상북도 성주군 한계 마을 규중 처녀였던 내 어머니는 처녀 시절 집으로 드나들던 방물장수에게 전도를 받으셨다. 비단이며 화장 분이며 바느질거리 따위를 이고 다니던 방물장수 아주머니는 전처 아이들을 학대한다는 소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야소를 믿더니 변해서, 전실 아이들에게 한없이 잘하고 있다는 칭찬이 온동네에 자자했다. 그녀는 집으로 찾아와도 보따리 물건들을 팔 생각보다 ‘야소’라는 분을 이야기하는 데 더 열심이었다. 어쩔 때는 행복한 얼굴로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라는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 야소님이 누구이신지 궁금하여 방물장수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일찍이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신 어머님은 시집 온 후, 친척 아주머님의 전도를 받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셨다. 어머님의 내조의 부덕으로 섬겨 높이며 아버지를 한없이 행복한 가장으로 일으켜 세우셨어도 전도는 못하셨다. 우리 부부는 친정 아버지께 전도를 하기까지 애타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77년 출장길에 친정 아버지가 미국의 우리 집에 처음으로 오셨을 때 우리 부부는 간곡하게 복음을 전했다. 10여 년 만에 만났는데 고작 예수 이야기만 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약간 실망하신 듯했지만 쾌히 대답하셨다.
“젊고 똑똑한 너희가 이리도 예수를 독실하게 믿는데, 까짓것 내 무조건 믿어버리지 뭐!” 귀국한 다음에도, 나는 틈만 나면 아버님께 복음을 전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내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대목에서 그만 방바닥에 벌렁 누우셨다.
“아이구, 야야, 그러니까 내가 못 믿겠다고 했지. 다 죽어 버렸는데 뭘 믿는단 말이고?”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지치지 않고 아버지를 일깨워 고개를 넘어갔다. 아버지 기분을 맞춰 드리려고, 사위는 장인이 좋아하시는 바둑을 몇 판이고 계속 두어야 했다. 옆에서 나는 또 다시 아버지께 조르며 다짐을 받았다.
“아버지, 한 판만 더 두시고 오늘 저녁 교회에 가시는 거예요?” 그렇게 두기 시작한 바둑이 어느 때는 서너 판 이어졌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로 이 일을 위해 귀국하지 않았는가.
마침내 아버지는 교회에 이끌려 가셨다. 가까스로 모시고 간 교회에서 마침 부흥회를 열고 있었다. 아버지도, 함께 동행했던 작은아버지도 손들고 찬송을 부르는 분위기에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하지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는 찬송이 시작되자, 아버지는 씩 웃으시면서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나도 이 곡조는 잘 안다. 그런데 네 엄마가 음치인 것 너 아냐? 그렇게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찬송가 첫 장부터 끝장까지 곡조가 다 똑같은 기라.” “형님, 이 노래는 가사만 들리지 우리가 아는 곡인데요.” 회중과 함께 손을 들고 찬송을 따라 부르는 두 분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 앞에 항복한 포로들 같았다. 나는 웃음 반 울음 반,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행복해했다.
공직에서 은퇴하신 다음,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개척 교회를 도우셨다. ‘밝고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는 교회 이름을 ‘명현’으로 지으시고 적극적으로 교회 일을 도우셨다. 얼마 후 아버님은 서울대병원에 갑자기 입원하시게 되었다. 놀랍게도 위암이었다. 나는 틈날 때마다 아버님께 예수님이 누구신지 다시 한 번 간곡히 말씀해 드렸다. 병상에서도 의문나는 것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묻곤 하시던 아버지는 드디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진심 어린 고백을 주님께 드리셨다. 우리가 귀국한 지 꼭 3년 만이었다.
“아버지, 이제 세례를 받으셔야지요.”
“세례는 우리 교회에서 받아야지.” 하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병환이 점점 깊어지자, 나는 하루 속히 세례를 받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대구 명현 교회 목사님이 느닷없이 서울로 심방을 오셨다. 목사님은 아버님께 세례를 베풀 준비를 해 가지고 오셨다.
“목사님,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준비를...?”
“성령님께서 알려 주셨지요.”
세례를 받으신 사흘째 되던 날, 아버지는 참으로 편안하게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아버지 연세 64세였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 얼마 남지 않는 인생의 말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까지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아버님은 니고데모처럼 실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분이였다.
남편과 나, 우리 부부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각자 밭은 일터에서 그리고 가족들에게 전했다.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이렇게 펼쳐지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03 김 느헤미야의 기도
◈ 한동호의 최초 승선자들
“대학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적인 탁월성과 학생들을 섬길 사명감 있는 교수를 찾는 일이라오. 다행이 창조과학회에 신실한 분들이 많으니, 그 분들 중에 한동대에 같이 가실 분들이 나왔으면 좋겠소. 아마 하나님께서 한동대를 위해 예비하신 분들이 있을 거요.” 남편의 말대로 창조과학회의 동역자들이 속속 합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에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나이다(렘 10:23) 건국대학 김종배 교수(면역학)의 결정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 신현길 박사(건국대, 육기공학) 또한 그의 결단을 알려 왔고, 뒤이어 일본 쯔꾸바 연구서에서 연구년가를 보내고 있던 김영인 박사(생산기술연구소, 기계공학)도 결단을 내렸다. 주저함과 망설임도 있었지만, 모두들 새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초청받았다는 자부심으로 정든 곳을 훌훌 떠나왔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7-8)
그때 어느 분이 말했다.
“지금까지 학문과 신앙이 별개인 양 가르쳐 왔는데 한동대에서 학문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주저하지 않고 강의할 수 있으니, 얼마나 보람되고 신가는 일입니까?” 남편은 서울과 대전 카이스트와 포항 등을 바쁘게 오가며 개교 준비에 착수했다. 주말이면 포항에서 신임 교수 요원들과 대학의 청사진을 설계하느라 바쁜 나날들이었지만, 그는 포항에서 형님을 자주 만날 수 있다며 좋아했다. 1994년 3월 <한국일보>는 <한 지역 형제 대학 수장>이라는 제목으로 “형님과 동생이 과학자의 길을 나란히 걷다가 한 지역의 대학 총장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1994년 4월 30일, 포항에서 하루를 보낸 남편이 서울에 막 도착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숨 가쁜 소리였다.
“여기 포항공대입니다. 학장님께 사고가 났습니다. 운동장에서 교직원들과 발야구를 하시다가 넘어지셔서 운동장 옹벽에 머리를 부딪히셨는데... 그만.” “네? 뭐라구요?”
“조금 전에... 병원에서 손 쓸 새도 없이...”
남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오늘 아침에 뵙고 온 형님인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이런 허무한 이별이 있단 말인가! 80세가 넘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두고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란 말인가! 몸의 한쪽이 떨어져 나간 듯 남편은 통곡했다.
동서양의 해박한 식견과 소탈한 인간미가 넘치던 시숙은 남편에게는 스승이요. 또한 학문의 선배였다. 시숙이 23년 만에 미국에서 영구 귀국하셨을 때, 이역만리 떠나보낸 아들을 조국의 품에 다시 안은 시부모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셨다. 그 10년 후, 이런 참혹한 슬픔이 닥칠 줄 누가 알았으랴! 시숙을 그렇게 어이없이 잃어버린 후, 포항으로 가는 것이 더욱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송 이사장은 남편을 위로했다.
“김호길 박사가 계셨으면, 우리 학교에도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총장님, 하나님의 무슨 뜻이 계실 겁니다. 한 지역에 두 그루의 거목을 동시에 허락하시지 않나 봅니다. 한동대를 통해 김 박사님이 형님의 몫까지 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은 애통해했다.
“형님의 빈자리를 누가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당신 외에는 아무도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이제 철저하게 당신만 의지하라는 뜻입니까?” 실감할 수 없는 비극 가운데도 개교를 준비하는 일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애통하거나 슬픔을 지니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시간을 냉정하게 흘러갔다. 그해 6월, 교수 모집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남편은 예수원의 토레이(대천덕) 신부님을 만났다. 그분은 순수한 기독교 정신의 대학이 한국에 세워지기를 오랫동안 기도해 오셨다며, 한동대는 그의 기도 응답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주 실제적이면서도 귀중한 조언을 해 주셨다.
“한동대가 순수한 기독교 정신의 대학이 되려면 교수의 자질이 제일 중요합니다. 인격, 실력, 신앙 이 세 가지를 고루 갖춘 교수를 모셔야 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입니다. 실력만 중요시한다면 일반 대학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신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교수의 인격이지요. 인격이 결여된 신앙은 바리새인이나 율법주의자와 같은 위선에 빠지기 쉽답니다. 비록 초보 신앙이라도 순수한 인격을 가진 분이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신앙은 평생 자라며 성숙하는 것이니까요.” 남편은 그분의 조언을 늘 잊지 않았다. 사람은 이해관계나 위기에 처할 때 비로소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어서, 그 조언은 시간이 갈수록 실감이 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일곱 사도를 뽑을 때 주위에서 칭찬받는 사람들을 뽑지 않았던가!(행 6:3)
◈ 총장님, 개교가 어렵겠는데요!
꿈이 클수록 그 꿈이 실현되기까지는 숱한 장애가 있는가 보다. 순수한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의 출범에는 아무런 장애 없는 탄탄대로가 펼쳐지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첫 번째 장애는 너무나도 빨리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남편이 한동대 교수 모집을 위해 미국 출장 중이던 1994년 6월 20일경, 조간 신문 사회면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설립자 이사장이 경영하는 낯익은 회사에 큰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순조롭게 개교 준비를 하고 있는 이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훗날 이 사건이 몰고 올 파란만장한 역경들을 그때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나는 미국에 있는 남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남편은 귀국하자 곧장 포항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송 이사장은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의 사업체가 매각된다는 소문과 함께 한동대가 내년에 개교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7월 말 폭염의 무더운 날씨가 계속 되었지만 그래도 남편은 개교 준비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는 아무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오직 개교를 위한 준비에 전신을 던졌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송 이사장은 개교하려는 모든 계획을 백지화해야겠다고 침통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분은 남편에게 한동대가 기독교 정신의 대학이니만큼 한국 기독교계의 도움을 얻던지, 학교를 맡아 줄 기독 실업인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때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타계했다는 뉴스가 대서특필되었지만 내게는 눈앞의 학교 상황이 더 심각하게 여겨졌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상식으로 행할 것인가, 믿음으로 행할 것인가? 하나님께 받아 든 시험지 한 장, 생애를 건 선택 앞에서 우리는 엄청난 고민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찌 보면 이사장이 학교를 포기했는데, 총장 내정자가 더 이상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기독교 정신의 대학이 설 뻔했는데 하나님 뜻이 아니었나 봐요.” 그렇게 말한들, ‘하나님 이름을 마음대로 도용하지 말라’고 항의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 땅에 이런 대학이 생길 뻔했다가 사라졌다는 사실로 통탄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내심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음성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렸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이 땅의 사업이 흥하면 일할 수 있고, 그것이 무너지면 속수무책인 무능한 하나님이더냐? 너는 관념 속에서만 하나님을 믿었느냐? 너희는 지금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고 다녔는데 그것은 네 입술만의 고백이더냐? 삶으로는 고백할 수 없느냐?’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려는 하나님의 시험지. 정답은 너무나 분명했다. 정답을 알고서 틀리게 쓸 수 없지 않은가! ‘하나님! 당신은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릎 끓고 엎드려 기도할 때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고백을 드렸지만, 눈을 뜨면 두려움에서 달아날 구실부터 찾았다. 믿음이란 무서운 위기를 동반하는 것인가. 지금의 결단은 총장직 수락을 놓고 고민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수록 또 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지금부터 너희의 믿음의 고백을 삶으로 보여 다오. 네 두려움과 염려를 알기에 너에게 여러 차례 내 뜻을 전달하지 않았느냐? 선견자를 통해서도 알려 주지 않았느냐? 너희는 아무 염려 말고 이 일을 진행해라. 그리고 나를 신뢰해라!”
◈ 네가 만일 돌아오면
큰 고민에 빠진 우리는 무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야 했다. 우리는 새벽마다 교회로 달려가 기도했다. 어느 날 새벽, 잠을 깨니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그날 하루는 쉬고 싶었다. 매일 새벽마다 시계처럼 나를 데리러 오는 이종실 집사(현 온누리교회 부목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주님, 저 오늘 너무 힘들어요. 하루 쉬면 안 될까요?” 나는 속으로 주님께 투정을 부렸다.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다.
“내가 잠을 깨워 주었는데 왜 기도하지 않으려 하느냐?” 집에 나선 나는 차에 앉자마자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집사님, 나 오늘 하루 쉬러 했었어요.”
“어머! 권사님. 저도 몸이 좋지 않아 하루 쉬고 싶었는데, 권사님이 기다리실까 봐 왔어요.”
“우리 두 사람에게 오늘 분명 큰 은혜가 있겠네. 우리 둘 다 가기 싫은 유혹을 받은 것을 보면!” 예배당에 들어서자 나는 늘 앉던 앞자리에 앉아 성경도 펴지 않은 채.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목사님께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15:19-20)
성경 말씀이 내 귀를 때렸다. 순간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급히 성경을 폈다. 네가 만일 돌아오면...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나는 강대상 앞에 엎드려 두려움 없이 순종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남편은 늘 말했다.
“실험실에서는 법칙을 그대로 따라야만 실험 결과가 잘 나오듯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고 하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분이 살아 계신 증거들을 분명히 경험하게 될 거요.” 하지만 나는 그 법칙을 실천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는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이 담긴 성경 구정을 붙들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날 새벽에 나는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학교를 세워 간다면, 나는 너희를 나의 ‘입’으로 사용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남편은 자신의 사명을 늘 외치는 ‘소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 아나돗의 밭을 사라!
조난당해 침몰하고 있는 파선호에서 우리가 들고 있는 가장 중요한 나침반은 오직 성경 말씀이었다. 우리는 회항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혹시 들을 수 있나 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예레미야 32장을 읽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곧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70년 동안 포로로 살 것!”이라고 예언한 죄로 시위대 뜰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 처지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또다시 들렸다. “너는 고향 아나돗에 있는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장차 네게 있느니라.” 나라가 말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마당에,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땅을 사라”고 명령하셨다. 예레미야 자신이 70년 후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는지를 백성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함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순정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다.
우리의 처지가 꼭 예레미야와 같았다. 장차 이 대학이 감당할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소명을 위해 우리가 학교를 세어 간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한동대를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그분이 보고 싶어 하신다는 생각에 더욱 두려워졌다.
한동대의 총장으로 부르시는 순종의 모험 앞에서, 남편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슬픈 마음을 가진 예레미야가 드린 기도는 곧 우리의 기도였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었다.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한동)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학생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교수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3:3-4) 이 성읍(한동대)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한동인)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한동)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다(렘 33:9)
◈ 아빠도 김 박사님도 모두 비정상이에요
뒤로 물러설 수 없이 어느덧 8월이 되었다. 송 이사장은 남편에게 학교를 맡아줄 새 이사장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남편은 학교를 맡을 만한 기독 실업인을 찬아 나섰다. 1994년 여름, 포항의 온 산과 들은 유례없는 오랜 폭염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거의 2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제한 급수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논밭은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다. 학교 사정도 날씨처럼 점점 메말라 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한동행을 결정한 김영섭 박사(미국 헌츠빌인터그라프, 연구개발부장)가 잠시 귀국한다는 연락이 왔다. 이런 상황에 그가 오면 어쩌나... 과년 14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할까...,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학교 문제가 좀 수습된 후에 오시면 좋을 텐데요?”
“하나님의 사람은 상황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요. 내가 만난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두고 봅시다.” 포항을 다녀온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김 박사님께 모든 상황을 설명하셨어요?”
“물론, 말했지.”
“뭐라고 하시던가요?”
“궁금하면 당신이 직접 물어보구려.”
나는 거실에 있는 그에게 말했다.
“김 박사님! 그래도 귀국하시는 건가요?
“사모님! 하나님의 일이 어찌 기도 없이 순탄하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모든 게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이지요! 저는 옵니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열심히 학교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남편이나 그래도 귀국하겠다는 교수나 모두 정상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딸 종민이 내 손을 끌고 안방으로 갔다. 종민이는 손가락을 머리 위로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김 박사님도 아빠도 비정상이세요. 하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아,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증거를 가진 듯이, 믿는바를 본 듯이, 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다. 앞으로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못한다면? 그 주일 하 목사님은 설교 중에 ‘두려움은 미래를 닫는 셔터’라고 했다. 우리의 두려움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그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은 불신앙이었다.
국내에서 합류할 교수들도 흔들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도구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등을 밀면서 한 걸음씩 떼어 놓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앞날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미리, 그리고 멀리 볼 수 없도록 만드셨다.(우리 앞에 닥칠 수많은 고난과 핍박들, 결국 감옥까지 가야할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때 우리는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시 119:05)
그래서 주의 말씀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하이 빔이 아니라, 겨우 몇 발짝만 볼 수 있는 방의 등이라 했는가.
◈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듯
개교를 위해서는 늦어도 8월부터 학교 홍보를 시작해야 했지만, 한동대는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8월초. 뜻하지 않은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남편이 나사에서 이룩한 연구 업적으로, 미국의 과학학술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 & Engineering)이 선정하는 1994년도 미국 과학인명사전(AMNW : American Men and Women Of Science)에 수록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슬슬 사라지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만 도망가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주요 일간지에서는 그를 ‘한동대 총장 내정자’라고 소개했다. 이 기사를 보는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에게 족쇄를 채워 버린 느낌이었다. 흔들리지 말고 학교 일을 진행하라고 하나님께서 들을 밀어내시는 것 같았다.
월간지, 주간지의 인터뷰 요청이 잇달았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학교 형편과는 무관하게 학교 홍보 기회가 저절로 주어졌다. 고맙게도 기자들은 과학자 김영길 박사가 총장으로 내정된 지방 신설 대학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가지고 취재해 주었다. 우리 나라 대학 교육의 현실이 그만큼 새로운 대안 교육에 목말라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나라 대부분의 대학 커리큘럼은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한동대는 특성화,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으로 재교육이 필요 없는 기업이 선호하는 산업체 엘리트, 재교육이 필요 없는 실무형 인재를 위한 교육을 할 것입니다. 21세기 세계화 시대를 위해 외국인 교수들을 채용, 듣고 말할 수 있는 생활 영어 교육을 강화할 것입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전공과 관계없이 컴퓨터 교육을 부전공으로 할 것이며, 학과 간의 벽을 허물고 인접 학문을 연계하도록 학부제를 실시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동대는 기독 신앙을 바탕으로 인성을 교육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성, 인성, 영성 교육의 전인적인 교육을 목표로 할 것입니다.” 신문 기자들은 한동대의 비전을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남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나는 불안했다.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다니..., 어쩌려고? 무슨 돈으로 영어 교수를 초빙하고 컴퓨터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우물쭈물 하지 말고 너희는 전진만 해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의식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 한동대 첫 기증품, 486컴퓨터
1994년 7월, 남편은 친척 아저씨이자 우리 나라 정보 통신 분야의 개척자인 삼보 컴퓨터 회장, 이용태 박사를 찾아가 한동대 비전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영어, 전산, 한자 교육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칠 계획입니다.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될 텐데요. 일본하고 일을 하려고 해도 한자를 알아야만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부전공으로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 회장님은 남편을 크게 격려했다.
“그런 대학이 절실히 필요한 이때, 선경지명이 있는 참 좋은 생각을 했구나. 너도 형 못지 않구나!” 이 회장님과 시숙 김호길 박사는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 동창으로 두 분의 우정은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했다. 피난지 부산에서의 대학 시절, 그들은 조국의 과학 기술 발전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난한 두 대학생은 부산의 판자촌 언덕 위에서 탁 트인 바다와 전생으로 찌든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크게 소리쳤다.
“대한민국 동포들 조금만 참으시오. 우리가 장차 살기 좋은 나라, 자랑스러운 나라, 편리한 세상에서 살게 해 드리겠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온 그들은 굶기도 하고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 다닌 적도 많았지만, 자신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은 그 무렵 서울사대 부속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안동에서 상경해 그들과 함께 자취하던 때를 가끔 회상하며, 조금만 힘들어도 견디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나약함을 한탄하곤 했다.
이 박사님은 그 자리에서 486컴퓨터 80대를 흔쾌히 기증해 주시기로 약속했다. 1994년 9월, 최신 기종 486컴퓨터를 실은 트럭이 학교에 도착했다. 개교 인가 심사에 때맞추어 기증된 것은 포기하지 말고 개교를 진행하라는 하나님만의 또 하나의 신호였다. 전산실에 가득 풀어 놓은 컴퓨터를 보면서 우리는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학생들을 상상하면서 마음이 설레었다. 이 컴퓨터는 한동대 역사상 첫 기증품으로 기록되었다. 486컴퓨터가 도입되던 시기, 한동대는 교육용으로 최신 486컴퓨터를 사용하는 첫 대학이 되었다.
남편은 갓 태어난 심청에게 물려줄 유모를 찾는 심 봉사의 심정으로 학교를 맡아 줄 기독 실업인을 애타게 찾아다녔다. 그러던 8월 중순, 기독 인재 양성에 관심을 가진 S기업의 L회장 일행이 학교를 다녀갔다. 그 후로 그들이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는 큰 기대를 가졌다. 시간은 뭉텅뭉텅 지나갔다. 훌쩍 10월이 되었으나 한동호의 출범 준비는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었다. 두 달째 확답을 미루고 있는 L회장에게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나는 또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학교는 짙은 안개 속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깊은 잠을 이를 수 없었다.
◈ 경황 중에 어머니마저 여의고
그때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6개월 전에 셋째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님이 기어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한량없이 따뜻한 위로의 품이 되어 주시던 어머님마저 막내아들이 이렇게 숨차고 절박한 형편에 놓여 있을 때 떠나시다니! 상복을 입은 남편의 등이 한없이 슬프고 외로워 보였다.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을 한사람씩 떼 내어 데려가심은 ‘혈육이나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며 따르라’는 것인가. 상중에 안동 본가로 L회장 측이 속히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칠일장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다. 학교 형편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가눌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이튿날, L회장을 만나고 나온 남편이 저만치 주차장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남편은 나를 보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바바리코트가 외로운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였다. 그 순간 내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석 달을 버텨 온 희망의 줄이 뚝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L회장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나이가 80이 넘어서 대학을 하기엔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10년만 젊었어도....” 남편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겠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는가 보오. 다른 분을 또 찾아봐야지.”‘그렇다면 진작 알려 주시지! 시간을 이렇게 끌다가 이제 와서야 못하시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했다. 그가 그토록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우리도 진작 포기했을 텐데.... 하지만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는가. 우리가 물러서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를 붙잡아 두셨다는 생각에 원망하는 마음이 가셨다. 그렇더라도 이 엄연한 현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언론 매체의 지속적이고 호의적인 보도 덕택에 한동대가 내년에 개교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고 있었으니.... 해외에 있는 신임 교수들도 귀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이제는 포기할 수도 없었다.
◈ 드디어 대학 호적에 오른 한동
무엇보다 개교 인가에 필요한 교육부 예치금 30억 원이 시급했다. 그 만기일이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 돈이 마련된다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첫발을 떼지도 못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1-8)
그 즈음 온누리교회 새벽 기도회에서는 온 성도들이 한동대 탄생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우리 형편을 애타게 지켜보단 하용조 목사님이 우리를 격려했다.
“온누리교회에서 한동대에 9억 원을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동대를 시작하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씨앗 헌금을 하면, 다른 교회들도 차차 참여하리라 생각합니다.” 김삼환 목사님(명성교회)도 무의자로 5억 원을 흔쾌히 융통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예치금이 마련되었다. 1994년 12월 4일, 드디어 교육부 최종 개교 인가가 났다. 한동대가 비로소 대한민국 호적에 오르게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사 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