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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전상서..
아버지 .. 아버지 돌아가시고 첫 번째로 맞이하는 생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신다면 아마도 저희 4남매가 지난 주 일요일 엄마 아빠 모시고 남원에서 식사라도 한끼 했을 것 같네요.
아버지 생일이면 아버지께서는 본인의 생일이라고 아무리 바빠도 모든 일을 뒤로 미뤄두고 고기 구워 드시면서 한가롭게 지내셨다고 하시던 오늘이 바로 그 아버지의 생일날 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4남매가 모여 아버지 생일을 제대로 한 번 챙겨드리지 못했네요.
너무도 죄송하고 한스러운 아버지의 생일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약 한달 가량 매주일 마다 수지에 내려가 어머니를 돕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인 저희(희수-39세, 명수-37세 )도 농사일이 이렇게도 힘이 드는데
병들고 쇠약하여 아픈 몸으로 농사일을 하셨던 아버지의 몸이 얼마나 아프고 마음이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다른 집 자식들은 농번기 때면 부모님 힘들지 말라고 내려와서 도와주고 간다는데
왜 저희는 그러지 못했을까 후회가 됩니다.
철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나 살기 바빠서 인지 아니면 생각만 했지 실천하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인지..못난 이 자식들을 원망하며 서운해 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장례식장에서 염할 때 손가락이 제대로 없는 아버지의 거북이등 같은 손과 바싹 말라서 거북이등과 장작개비 같던 아버지의 발을 보았을 때 저희의 불효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올해 초, 아버지 손 발에 바르시라고 보내 드린 암웨이 G&H 핸드크림이 그대로 인 것을 보고 보내기만 해드렸지 바르시라고 제대로 전화 한 번 못해 드렸네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 손 발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하고 아버지 손 발 한 번 씻겨드리지
못하고 아버지 몸 한번 제대로 씻겨드리지 못하고 그냥 이별해 버리고 말았네요.
어버이날 행사로 어느 학교에서는 부모님들을 모셔다가 세숫대야에 발 담궈 부모님
발을 씻겨드리기 행사를 했다고 하는데 … 그 평생 고생하시면서 저희를 키워주고 지탱해
주시던 그 손, 그 발을 저희가 씻겨 드리면서 아버지의 노고, 아버지의 고통, 아버지의
외로움을 알아봤어야 되는 건데.. 아버지.. 너무도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아버지 너무도 원통하고 한스럽습니다.
저희의 무지와 무관심과 저희만 살겠다고 하는 욕심이 아버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인 올해 초 아버지께서 수 차례에 걸쳐서 ‘내가 뇌신경이 가버렸어,
내가 세 번이나 쓰러져서 죽을 뻔 했어’ 라고 아버지 자신이 직접 말씀은 하시지 못하고
내가 아프니 나 병원에 좀 데려다 치료 좀 해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듣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식이 걱정은 되고 몸은 아파서 치료는 해야겠고, 그러니 직접은 말씀하시지 못하고
그렇게 에둘러서 말씀하신 것을…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대로 아버지 입원 한번 시켜드리고 치료받게 해 드리지도 못했네요.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사고 나서 병원이 입원했을 때 잠깐 들러서 들여다 보고 만 것이 전부였던 것 같아요.
저희의 생각은.. 저러다 말겠지.. 저러다 좋아지겠지 아버지가 이제는 스스로 관리하신다고 하시니 이제는 괜찮겠지 내가 멀리서 사는 데 어떻게 매번 들여다 봐..
본인의 건강은 본인이 지켜야지 이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알고 보니 아버지의 병은 아버지의 의지로는, 아버지 스스로는 치료하거나 좋아 질 수 없는 ‘알코올중독’에 ‘우울증’에 ‘당뇨병’이었습니다.
주위 가족들의 인내, 격려, 이해와 돌봄이 없이는 치료하기 힘든 병이라고 하던데.. 그런데
저희의 병에 대한 무지가 그러한 아버지에게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 치료하시도록 기대를 했다니
저희의 무지가 아버지를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했을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매달 용돈 10만원씩 드리다가 아버지가 술을 마실까 봐 그 돈으로 술 마신다는 이유로 그 것도 끊어 버리고 할머니, 어머니에게는 용돈을 드릴지 언정 아버지에게는 인색하게도 용돈 한 번 제대로 드려보지 못했습니다.
‘알코올중독’에 ‘우울증’에 ‘당뇨병’은 약값도 많이 든다는데, 돈도 없는 시골에서 얼마나
돈에 궁핍해 하면서 지내셨을까, 게다가 할머니의 약값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을 테고..
본인의 제대로 된 치료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작년 말부터는 용돈을 드리기 시작했는데 몇 번 드리지도 못한 상황에서 제가 드린
용돈을 고스란히 지갑에 넣은 채… 그런 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어요.왜… 그 돈이나 다 쓰시고 ..그러시지 않고요..ㅠ.ㅠ;
아버지..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려 봅니다.
국민하교 들어가시기 전.. 그 때 회생당한약방이 금암동에 있을 때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남원에 나가
장남감을 가지고 좋아하는 저를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지금 제가 혜원이를 쳐다보는 그런 눈 빛 임을
이제 이해합니다.
수지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 노트에 한글을 적게 하시며.. 외워서 스스로 쓸 수 있게 되자
그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며 흐믓해 하시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그러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 여름 방학하는 날
그 때는 너무도 창피해서 종아리가 아픈 것보다 도망치듯 피해오기 바빴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겨울방학,,, 나누기와 분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저를 데리고 겨울 방학 내내
나눗셈을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장남이라고 저는 일도 많이 시키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리어카를 끌고 뒤에서 제대로 밀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시던 모습,, 토요일 텔레비전의 만화만 본다고
혼내시던 모습들..
논에 물 대기 위해 세종때 논 위쪽의 양수기 옆에서 텐트를 쳐놓고 밤새 주무시고.. 그런 아버지를 위해
밥을 이어 나르시던 어머니.. 어머니 앞에 앞서가다가 뱀을 발견하고는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물러나다 어머니와 부딪혀서 아버지 드실 밥을 업질러 버렸던 기억들.. 그래도 아버지는 그 밥을 드셨습니다.
필례 고모와 싸우고 코피를 흘려 옷이 피범벅이 된 채 어린 마음에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면 필례 고모를 혼내 주리라고 생각하고 담뱃잎 역어서 널고 계시는 가운데 다리밑에 갔더니
오히려 무덤덤하게 대하시던 아버지에게 실망했던 기억도 납니다.
또랑가새 유모아저씨(- 아버지 보다 한참 어린 사람, 술로 죽었음 )와 싸우고 들어와서
분을 삭히지 못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아래골목 왕모 아저씨와 싸워서 눈 밑이 찢어져 치료하시던 아버지가 아물지 않은 눈 밑을
손가락으로 벌리며 나에게 보이시며 욕하시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또랑가새 유영열네 아저씨와 싸워서 아버지가 사과하러 가셨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찜해 놓은 나무를 윗 골목 이모 아저씨가 새치기 하듯 먼저 가져가 버린 것에 대해
도둑놈이라고 하며 원망과 욕하시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어느 동네 사람과 싸웠는지 아버지가 종적을 감추어서 할머니와 찾으러 나섰는데..한 밤중인데 세종때 5대조 할아버지 묘 앞에 앉아 계시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결국 오늘날에 와서 그 옆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줄이야…
가운데 논에 모내기하려고 논에 갈개를 치면서 가운데 골목의 왕모아저씨에게 해대는 아버지의 험한
말들도 기억이 나고요..
아버지가 시키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화내시며 라이타 기름통의 기름을 마루 위의
벽아래에 뿌리시며 집에 불이라도 대버려야 속이 시원하겠냐고 역정을 내시던 아버지의 모습.. 부모가 시키면 설사 더그매에 소를 끌고 가라고 하면 끌고 들어가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며 역정을 내시던 아버지…
할머니 회갑 때, 대골 고모가 “우리 오빠, 이거라도 먹어봐” 하며 술과 음식을 권하자
짜증내시던 아버지의 모습들..
견두산에 동네 분들과 놀러 갔다가 와서 찍은 썬글래스 낀 사진을 보여주시던 아버지.
앞 논에 굠나무를 심으시고 가꾸었던 아버지, 누에고치를 하려고 누에고치 씨를 고르고 있는데
세종때 산에서 할아버지 묘를 이장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시던 먼 발치의 아버지의 모습, 젖소를 키우시겠다고 동네 어른 들을 품삯을 주고 벌목하고 나무뿌리 캐내실 때 웃통을 벗어 제 낀
누런 구릿빛의 아버지의 모습…
그 때 물을 너무 많이 마셔 .. 무슨 병이 날 뻔 했다고도 하셨었고요..
성원고등학교 시절 학교를 찾아 오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복도에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입으셨던 양복,, 넥타이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 데 최근까지도 그 넥타이, 그 양복을 사용하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성원고등학교 시절 무릎의 류마치스 관절염으로 고생할 때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주시려고
노력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들. 고양이가 무릎에 좋다고 하니까 고양이를 잡아 껍질을 벗기려고 불에 고양이를 그슬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때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이 갑니다.
원광대학교 무역학과에 합격하자.. 대학교 진학보다는 기술을 배워서 빨리 사회에 진출을
원하셨던 아버지와 어린 마음에 대학교라도 가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 대학교 가겠다고
우겼었는데 새벽에 대학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집 재산 1호인 외양간의 소를 새벽에 야시장에 몰고 나가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차라리 그 때 대학교가는 대신 아버지의 말씀대로 기술을 배웠더라면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
지금처럼 제가 재취업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 같네요.
20세에 사회진출을 했다는 저희 회사의 37세 윤모 과장은 벌써 4억짜리 아파트에 3억원의 노후준비까지
마쳤다는데.. 제가 그 때 대학교 가는 대신 기술을 배워 사회에 진출을 했더라면 제 모습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차라리 아버지의 말씀을 따를 것을..
대학교 입학하기 전 이리(익산) 신용동에서 아버지와 함께 방을 구하려 다녔던 기억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 갔을 때 용돈도 주시고 처음으로 막걸리를 권하면서 술을
주시던 아버지.. 그 때야 비로서 어른으로서 대접을 해주는 듯 싶어 내심 기뻣던 기억들..
대학교 등록금과 동생들 학비를 벌기 위해서 아버지는 원광대학교 체육관 막노동 공사를 하시면서
잠시 저의 자취방에서 머무르셨는데 일하고 돌아오시면 매일 밤 불평을 하시던 아버지.
저도 같이 불평을 하다가 문득,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아버지의 마음이라도 알아 드리자고 생각을 고쳐
아버지 말씀에 수긍을 하고 수고하시고 고생하신다고 하자 누그러지시고 그 뒤로는 별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의 모습..
입대하기 전 같이 광주의 귀석이 삼춘집에 들렀던 기억들,,, 남식이 당숙집에 들렀다가 잠바를 받아
입고 왔었던 기억들,,, 오자 마자 영장이 나왔었는데.. 군대 생활하면서.. 훈련병교육 마치고
신병훈련소 출소 시 강원도 양구군 방산 교육장으로 면회를 오셔서 자대에 배치 받기 전 자대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던 기억 들.
161부대 안사과에 배치를 받았다고 좋아하시던 아버지..
군 복무 중에 노량진 창석이 삼춘과 면회를 와주셨던 기억 들. 그 때 훈련 시작할 때였는데 대대장의
특별지시로 면회가 가능했었습니다.
그 뒤 휴가 때 창석이 삼춘이 오토바이 뒤에 태워서 귀대 전송을 해준 뒤로 다시는 창석이 삼춘을 만나 뵐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어야 했던 아버지로서는 동생들을 아버지 역할 하면서 성장시키고 보살펴 왔던 아버지로서는 그러한 정신적 충격이 상당히 컷을 것입니다.
제대 후 아버지와 경기도 의왕시 도로 건설현장에서 돈 벌기 위해 아버지와 성수랑 같이 기차를 타고 갔었
던 기억들. 아버지가 그 때 거기서 입으려고 츄리닝 한 벌 했었는데.. 택시에 놓고 내렸다고
상당히 아쉬워했었는데..
그 때 아버지와 저는 떨어져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때 계속 거기서 일만 했었더라면 상당히 돈을 모을 수 있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아버지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세종때 산을 팔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철이 없어서 거기를 박차고 뛰쳐나와.. 남원에서 다시 막노동으로 푼돈이나 벌었던 기억들.
전주에서 자취방을 구할 때 아버지와 같이 방을 보러 갔던 기억들, 거기서
매월 10만원씩 주는 금암동 월세 방에 들어 갔는데 나중에 옆으로 월 3만원의 월세 방으로 옮겨 갔었
던 기억들..
또 영어공부 한다고 스카이TV를 설치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 때 돈으로 80만원 이였는데.. 너무 제가 철이 없었나 봅니다. 80만원에 스카이TV세트라니..
차라리 영어통역가이드가 되려는 것보다 더 나은 미래를 설계했어야 했는데 왜 통역가이드가
되려고 했었는지.. 지금은 제가 제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 때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 다니시며 생활비와 학비를 부쳐주시고 가끔은 전주의 자취방에
오셔서 객지에서 겪으셨던 일들을 말씀해 주시곤 했었죠.
아버지의 실수로 사고가 나서 합의하고 수술비 물어주던 기억 들까지…
첫 취직해서, 수유리에 자취방을 얻을 때 아버지와 같이 방 보러 다니고 살림살이 사고 했던 기억들..
졸업하고 취직해서 첫 월급으로 용돈 드리고 옷 사 드렸을 때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그 것도 잠시, 일본에 가겠다고 해서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일본에 가서도 저 때문에 자취방
물건 빼고 전세 받아 내시느라고 고생하신 아버지…
차라리 일본에 가지 말고 취업재수를 해서 한국통신(김재덕고숙 국제부장)이나 공무원 시험을 봤었더라면
나았을 것을..
일본에 가서도 그 때 동경지진이 4.5 강진이 왔을 때 혹시라도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 시간 뒤에 바로 전화하셔서 저의 안부를 묻던 아버지..
언젠가 일본에 모시고 가서 온천욕도 시켜드리고 일본관광 시켜드리면서 일본어 실력도 뽐내고
아버지의 노고에 보답해 드리고 싶었지만 생각만 하는 사이에 어느 새 세월은 가고 아버지도 가버리
셨습니다.
한국이 IMF로 어려울 때 귀국을 적극 말리면서 차라리 일본에서 취업을 하고 일본에서 장가를 가기를
바랬던 아버지..
귀국해서 저의 장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던 아버지.
그 때 당시만 해도 아버지 또래의 어르신들은 이미 아들 딸들이 장가를 가서 손자를 보았을 때라
무척이나 손주가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저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 이후 희숙이 결혼하고..명숙이 결혼하고.. 정작 아버지가 바라던 저의 결혼은 쉽게도 되질 않았어요.
돈도 많이 들어서 아들 장가 어떻게 보낼까 걱정도 많이 하셨을 텐데..
노력하기를 3년, 서울 잠원동에 근무 할 때 아버지 갑계 서울 친구(
에서 아버지를 뵈었는데 곧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하자 매우 기뻐하시던 아버지.
그 때 저는 신숙씨와 당진 서해안의 해 뜨는 마을에 같이 여행을 갔었던 때였습니다.
남원에 예비 며느리를 데리고 내려가서 부영 아파트 명수집에서 인사 시킬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해 계셔서 많은 말을 해대었지만 잘 참아 주었던 신숙씨.. 그 때 많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내 부모는 내 부모요 내가 그 창피한 모습을 억지로 감출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당당히 예비며느리인 신숙씨에게 아버지를 소개해 보여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이미 아버지께서는 알코올중독의 기미가 보였던 것 같아요.
결혼식 당일 아버지의 모습, 나중에 비디오 테잎에서 유심히 보았지만 이미 병색이 완연하신 모습
이였어요.
그리고 그 이후 아버지께서는 계속 망가지기 시작하신 것 같아요.
명수는 아버지의 병(알코올중독, 우울증, 당뇨병)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본심에서 술주정과
다른 사람들이 혐오하는 행동을 하는 줄 알고 발을 끊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아버지가 더더욱
술을 마시게 되었고 병은 더더욱 악화 되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제 살기 바빠.. 모든 일에서 제 자식 챙기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교회 가기 바빠 정작
아버지를 제대로 살펴 드리지 못했어요.
바쁘다는 것은 잡념을 잊게 해서 좋지만, 제 역할을 다하고 사는지 바른 방향을 살고 있는지 가끔은
주위와 나와 관련된 사람들을 돌아볼 멈춤의 시간, 사색의 시간, 인생과 삶을 반추해 볼 시간
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 때 제가 혜원이와 교회에 쏟아 부은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시골에 계신 아버지에게 쏟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명숙이에의해 병원에 강제수용되고 그 이후에 아버지가 졸도하여 예수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오토바이 사고 나서 입원하게 되고 할머니 치질 수술로 아버지가 고생하시면서
낮게 하시고 옆집 아저씨와 싸워서 목 졸려 죽으려다 간신히 살아나 옆집 아저씨에게 입힌
상해에 대해서만 피해보상을 하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고.
할머니와 불화하여 할머니가 몸에 멍이 들고 제가 서울로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게 되었고..
그 뒤 혜원이 첫돌잔치라고 해서 아버지를 부천에서 뵐 수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말로만 효도 어쩌고 저쩌고 했었습니다.
금강산 여행 보내드리겠다고 예약까지 다 알아봐 놓고 여쭤보니 한사코 만류하셔서 다음해로
연기 했습니다.
한살이라도 빠른 나이에 거동이 가능할 때 여행을 시켜드려야 했는데.. 아버지의 그 안 가겠다고 하는 것은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했는데..
부모님의 “아니다”라는 거절은 거절이 아니요 생선의 머리와 꼬리가 맛있다고 말하며 몸통의 살코기는
자식들에게 주는 그런 심정으로 말하는 위선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젠 작 깨달았어야 하는데..
이제 아버지가 안 계시니 보내드리고 싶어도 금강산여행은 물론,, 일본 여행도 보내 드릴 수 가 없어요.
주원이와 혜원이의 작명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지을 것을 하고 후회도 했습니다.
순례와 춘식이.. 괜찮은 이름인데 왜 촌스럽다고 마다 했는지..
그러니 아버지의 존재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혜원이와 주원이가 태어나서 호적에 실린 것을 떼어 놓은 아버지의 서류들을 보니 아버지께서는
항상 호적에 실려있는 저와 손자들을 보면서 우리 문화류씨 충의공파의 앞날에 희망을 걸고 계셨던
것 같아요.
주원이가 태어났을 때, 차라리 병원에 와 보시라고 했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네요.
07년 4/2일 산후 조리원에서 퇴원하여 수지 집에 갔을 때 아버지께서 그렇게도 바라고 원하셨던
아들손주가 왔는데도 아버지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으셨어요.
내심 저는 서운했습니다.
그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도 깊게 상처를 받고 힘들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우울증의 깊은 나락에 빠져 있었음을..
그 뒤 주원이 출산 때문에 4주 떨어져 있던 혜원이가 심리적 불안상태가 심해서 매주 혜원이를 보러 오
겠다고 다짐하고 4/7~8일날 남원 사매에 왔었습니다.
그 때 사매에만 가지말고 수지에도 방문해 아버지 상태를 살폈어야 했습니다.
4/14~15일날 축구만 안하고 남원에 다시 가기로 했던 대로 갔었더라면 그리고 사매에만 가지 말고
수지에고 갔었더라면 4/15일 아버지께서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 날 명수도 수지에 들러 보려고 했었다는데 그 4/15일 일요일에만 집에 들렀었더라도 아버지가
봉지를 들고 나가기 전에 극적으로 명수와 만나기만 했었어도..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저희 4남매의 인생 뒤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아버지가 게시었어요.
좋으나 싫으나 아버지 없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지지와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제대로 성장을 해서 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아버지께서 사라지리라고는 언젠가는 돌아가시더라고 이렇게 비참하게 그리고 이렇게 빨리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프고 한스럽게 돌아가셔서는 안되었어요.
이제.. 남들처럼 보란 듯이 살아볼 일만 남았는데…아~~~..
아버지가 계실 때는 비닐하우스의 보호아래 있는 것과 같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이 세상은 마치
세상에 내버려진 묘목처럼 세상이 너무 힘들고 험하기만 합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할아버지)를 여의고 오랫동안 이 힘든 세상을 헤쳐 나오셨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그 힘든 세상에 혼자 내버려졌습니다.
아버지라는 큰 심리적, 물질적 지지기반을 잃었으니 상심이 어찌 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안 계시니 너무도 힘들고 할 일이 많네요.
세종때 웃바지기 논 길에 편입된 보상 건 확인, 면세유 사용 가능여부 농협에 알아보아야지..
남창정미소에 창고의 나락 판매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 하고..
종중 명의의 땅 중에서 되찾을 수 있는 땅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며, 구례 산동에 있는 7~8대조
할아버지들의 산소를 이장해 올지 결정해야 하고..
앞 논 하천수제공사에 편입된 논의 보상 건 처리해야 하고, 앞 논 옆에 서 있는 열녀비문을 옮겨야 할지
파손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고, 어머니의 생활보호대상자 자격이 되려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봐야 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어느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그 많은 제사는 다 어떻게 하고 종중 일은 어떻게 하며 수세는 어떻게 관리한단 말입니까.
아버지 말씀대로 세상을 많이 끄슬려야 하다고 하셨는데.. 그런 예기 들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알아도 아버지 보다는 많이 알고 더 현대적이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처럼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처럼,, 제가 아는 것은 아주 일부분이요 아버지의 경륜에
비하면 모르는 것과 경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 살아보니 아버지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표현과 전달방식이 거칠고 저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뿐이지 가슴에 새길 많은 교훈과
경륜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아버지…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어린 시절 교복을 입고 찍은 반명함판 만한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희망을 속삭이며”라고 적혀 있는 글씨를 보면서, 그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떤 희망을 품었고
어떤 꿈을 이루고자 세상을 살아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속삭였던 희망을 이젠 다 이루었는지요?.
세파에 시달려 고해 속에서 고생만 하다고 어느새 뒤돌아 보니 육순황혼이라고 한 “한 많은 소암의 유파”의 자서전에 적은 것처럼 주어진 세파를 헤쳐만 나오신 것인지요?
기행문(중국여행 기행문)에서 적은 것처럼 “훗날을 기약하세”라고 적었던 말처럼 아버지께서 기약하던
훗날은 이미 지나갔는지 아니면 기약한 훗날이 오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먼저 가신 것인지요?
훗날을 기약한 많은 갑계의 동창들도 아버지처럼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한 순간이요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인생이 고해일진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행복하게 살았노라고 언제 죽어도 좋을 만큼 마음의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수록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입술로 고백하여 믿고 말씀을 읽어 영혼을 살찌우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생활 속에서 성령의 지혜로 판단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실천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아버지의 유서에는 특별한 내용보다는 지금까지의 신념이 적혀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모든 저술작품과 평소의 말씀을 토대로 저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참고로
삼고 어두운 바다에 등불로 삼고자 합니다.
아버지가 품었던 문화류씨 충의공파 가문의 부흥이라는 희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이후부터
최선을 다해 최선의 판단과 결단력으로 행동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살아서 못다한, 못다 이룬 희망과 꿈을 저희가 이루고자 합니다.
저희가 이루지 못한다면 손자 대에서, 손자 대에서 이루지 못한다면 그 아들과 손자 대에서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하고 기원합니다.
아버지께서 돌아 가시기가 얼마나 두렵고 외롭고 무서웠으면 어머니에게 한 날 한시에 같이 가자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으면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뒤돌아보고 하셨겠습니까.
얼마나 자식들의 무관심과 외로움 속에서 사랑과 관심이 그리웠으면 “나 같은 것 살아서 뭐해,
나 같은 것 살아서 뭐해”라고 비관을 하시었겠읍니까.
아버지 이제 그 무거운 육신의 고통, 마음의 짐 다 내려 놓으시고 하늘에서 하나님 곁에서 편히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애통해서 때때로 눈물이 납니다.
가장 허름한 바지에, 고무신을 신으시고 가장 허름한 우와기를 입으신 채 손목에는 환갑선물 때 드렸던
손목시계와 닮은 시계를 차시고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지갑 속에는 젖은 돈 30만원과 장애자용 복지카드, 저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큰 아들 하나는 잘 두었다고 칭찬하셨다고 했다는데.. 그 큰 아들 이렇게 애통해하며
고백합니다.
정말로 죄송하고 미안하고 가슴이 저리도록 불쌍하신 아버지, 아버지로 인하여 저희는 생명을 받았고
그 은혜가 크고 깊음을 고백합니다.
그 은혜 갚을 길 없음을 한탄하며 아버지.. 사랑합니다. 생전에 이 한 마디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빈 자리는 돌아가신 이제서야 그 큼을 알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겪으신 가난은 죄가 아니요,,, 저희들이 새롭게 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가난을 거름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자식들이 되고자 합니다.
하늘에서도 지켜봐 주시고, 고향 수지를 방문할 때마다 찾아 뵙고 아버지 좋아하시는 소주라도
실컷 드리겠습니다.
가난이 아버지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갔습니다.
가난이 저희를 저희의 일과 가족에게만 신경을 쓰도록 몰고 갔습니다.
가난과 무지와 무관심… 이 것들을 몰아내고 반드시 부자 되어 보이겠습니다.
반드시 바르고 올바르게 세상을 살도록 유언을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편히 쉬소서..
큰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