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 유자효
오하룡
얼마 전이다. 불쑥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님, 제가 마산 볼일이 있어 가는데 잠시 만납시다. 그는 나를 반드시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내가 나이 몇 살 더하고 그가 학생 일 때 사회에 나와 있었고 그가 등단은 먼저 한 상태였으나 내가 잉여촌 동인 활동을 자신보다 얼마 앞서 하고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나를 그렇게 예우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 3대 방송국의 하나인 거대방송사의 본부장급 임원이다. 그는 차장급 직원 한사람의 부친상 문상을 마산 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할 일이 생겨 겸사겸사 나를 만나 그간의 회포를 풀겠다는 것이다. 마침 나도 고인과 약간의 인연이 있어 문상을 하려던 참이어서 그를 자연스레 만나게 되었다. 그는 항공편으로 내려왔고 상경편도 예약이 된 상태여서 극히 짧은 만남이었으나 그동안 못다 한 안부를 나누는 소중한 막간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이상개를 통해서이다. 그는 군 생활 말기를 부산에서 보내며 이상개를 만났고 그의 권유로 잉여촌 동인이 되어 나 같은 무지랭이 까지 만나는 나로서는 행운이고 그로서는 불운의 동행이 된 셈일까. 그가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면서 우리는 자주 만났고 그를 통해 나는 윤상운 동인을 만나는 겹 행운아가 된 것이다. 이때 가난한 단칸방 살이 내 집이 잉여촌 영양센터라는 애칭 아닌 별칭을 얻게 된 것도 외식비 부담을 줄이려는 내 얍삽한 얕은꾀에서 나온 것으로 결국 그것이 약점이 되어 지금도 아내의 공격을 시나브로 받는 후유증을 겪고 있다. 그는 졸업과 동시 당당히 한국방송공사에 공채로 들어갔고 국내에서 인기 방송기자 노릇을 하는가 싶더니 유럽총국장까지 되고 신설되는 새 방송국으로 옮겨서는 지금 굵직한 임원으로 성장 특별 토론 등에는 사회 아니면 단골논객으로 막강한 역량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하여 많은 시집과 에세이집을 내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내가 물었다. 앞으로 정치계로 빠질 의향이 있느냐고, 그는 단호하게 문학 활동만 열심히 하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피력하였다. 권력 주변에 맴돌며 그 단맛을 잘 아는 그의 이런 태도가 어찌 보통사람에서 나오는 것이랴. 외아들이 지방 언론계에 있다가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한국예술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되어 기대가 된다는 말이 다소 긴 여운을 남긴다. 큰 키에 미남인 그도 이제 회갑을 목전에 두어 얼굴 군데군데 연륜의 잔주름이 두터워 보인다. 그는 문학계에서도 상당한 감투를 쓰고 활동 중이다. 우리 동인의 대들보가 아닐 수 없다. 그와 나의 우정이 사는 날까지 돈독하길 바라노니.
잉여촌 21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