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관 (梁 灌) 용성군파 후 10세손이며
증조부 梁權 (용성군 8세)은 문과 급제자이고 손자 梁喜
또한 당대의 명인이다
양
관 선생의 호는 일로당(逸老堂)이며,
생원을 지낸 천지(川至)의 아들로서 1437년(세종 19년)에 태어나 수동면
우명리 지금의 효리마을에서 살았다. 세조조에 진사에 급제한 후,
뜻한 바 있어 무과에 급제하여 왕실의 친척과 왕의 동성 9촌 이내 등이
모여 사는 곳인 돈령(敦寧)의 부사를 지냈다.그 후 세종조 때 덕천군수(덕천군수)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소학(小學) 1질, 두초당(杜草堂) 2권, 거문고
1척, 야학(野學) 한 쌍과 베 이불 한채의 간소한 행장이었다.
선생의 청렴한
관직 생활은 뭇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고, 공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내 마음
맑은 하늘에 비하면 추호도 본연에 가림없고저 함이라, 행장을 점검하니
도리어 부끄러우니 베 이불이 오히려 덕천밭에 났도다." 선생이
청렴한 관직의 길을 걸어온 것을 가상히 여긴 당시의 어사인 이색(李穡)이
이 사실을 왕께 알림으로써 왕은 그의 청렴함을 인정하고 청백리안(淸白吏案)에
등록토록 하고 화공(畵工)을 시켜 그 때의 초라한 행색을 그대로 그려
모든 관리들의 귀감을 삼도록 했다. 선생의 초상화가 조정의 어전
벽에 걸리게 되자 어전을 드나들던 관리들의 눈길을 모았다는 것이다.
1507년(중종 2년)에 별세 하였으며, 1701년(숙종 27년)에 수동면에 있는
구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수동면
효리 현재 용성군파의 종가가 위치하며 90세의 25世손인
斗자 容자를 쓰는 종손이 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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