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 번째 학교 : 사천 서포 국민학교 자혜분교장(1980. 3. 1∼1981. 2. 28)
◎ 고향으로 돌아오다.
초임지인 남해에서도 내 고향 사천 행을 꿈꾸어 왔었다. 그러나 번번이 허사가 되고 말았었다. 그 이유는 사천이란 곳이 경합 지구인 데다가 나는 당시 초임교사로서 근무성적을 좋게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런 사실들을 창원에 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 그 존경하는 배영기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근무성적을 잘 받음으로써 당당히 사천에 입성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천하를 얻은 기분으로 삼천포 시 교육청(지금은 사천교육청)에 갔더니 '서포(자혜)국민학교 근무를 명함'이라고 적힌 사령장을 건네주었다.
지금도 거진 그렇지만 당시 타 시 군에서 전입한 교사가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을 부탁하거나 밝히지 않은 사람은 서포 초등학교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명색이 사천 출생이면서 객지에 있는 동안에 자혜분교가 생긴 줄은 모르고 있었다가 자혜분교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자혜분교는 내가 1년을 근무하고 옮긴 뒤부터 1999년 2월말로 폐교가 될 때까지는 소위 육지 벽지 학교로 교사들에게는 근무조건이 상당히 좋은 편으로 각광 받는 학교였다. 내게만 해당되겠지만 역사적인 사천(고향) 근무는 이렇게 시작이 된 것이다. -
◎ 첫날부터 일가족 몰살의 위기를 넘기다.
부임하고 이삿짐을 정리하고는 늦은 시각에 잠을 청했다. 3월초의 날씨는 아직 추운데다가 학교와 사택이 모두 산 정상 부분에 자리잡고 있음으로써 바람이 세게 부는 탓으로 문이란 문은 꼭꼭 닫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와 집사람 해서 네 명이 잠을 잤는데 새벽 5시 경 우리 아이들이 모두 일어날 시각에 아이들이 모두 일어나기는 했는데 둘 다 방바닥을 기어다니면서 구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도 머리가 띵함을 느꼈고, 집사람도 기운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원인을 전혀 모르고 아이들을 돌보다가 부엌과 통한 문을 여는 순간 연탄 가스 냄새를 맡고는 가스 사고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즉시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이웃에 살던 분들이 동치미 국물을 들고 와서는 나누어 마시고 법석을 떨기를 한시간 남짓, 그리고는 모두 무사했다.
부엌과 바깥으로 난 창문은 열어 놓고 잤어야 하는데 처음 와서 보안과 보온에만 신경을 쓰면서 문이란 문은 꼭꼭 닫았던 것이 주원인이었음은 나중에 안 일이다. 그것도 주윗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스스로 많이 모자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스를 마신 상태가 경미했던 것이 첫 째 이유일 것이고, 무엇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새 나라의 어린이였음이 큰 이유일 것이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던 탓이라는 이야기다.
요즈음도 그런 이야기를 하면 집사람은 진저리를 치게 되고, 나 또한 정말로 아찔함을 느낀다.
◎ 가장 열성적인 교사
자혜분교 근무 1년 동안 나는 학부모나 마을 주민들에게 가장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오인(?)을 받았다. 운이 따랐는지 1학년에서 4학년까지만 있는 분교에서 나는 가장 젊은 교사였고, 자연적으로 4학년을 담임하게 되었다.
4학년은 자혜분교 최고 학년으로 자율적인 아침자습이 가능했다. 요일별로 아침자습 당번을 정해 주었고, 배정 받은 어린이들은 교사보다는 훨씬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자습문제들을 제시했다.
본교와의 거리 3∼4Km 남짓한 곳이지만 전화도 없고, 도로 사정도 매우 열악하여 본교에서 교장, 교감 선생님들이 분교를 방문하는 일은 행사 때를 제하고는 거의 없었다. 어른들이 출타한 집안의 분위기는 자연 자유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로 분교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자유스럽다 못해 약간은 난장판이었다.
아침 일과의 시작은 9시 20분의 첫 째 시간 수업 시작이 그 것이었다. 교실, 복도는 아침부터 소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쯤 이면 아침 식사를 하고 일터(논, 밭)에 나가던 학부모들이 이맛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온 학교가 난장판이 되어도 내가 담임한 4학년 교실만은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저절로 나는 돋보이게 되어 있었다.
그런 일은 또 있다. 학부모들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일터로 나가다 보면 다른 교실은 모두 비어 있고 4학년 교실에서만 수업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고, 그렇게 필연적으로 짜여지다시피 한 일인데도 학부모들은 그런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니까 이구동성으로,
"자혜 핵교넌 4학년 선생만 아아덜로 열심히 가르치고 나무치넌 전부 농띠덜이다."
"다린 선생덜언 아척애도 그렇고, 정심 묵고도 들앉아서 머하넝고 몰라."
젊기 때문에 수업시간이 많은 4학년이 내 차지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어 유능하고 열성적인 교사로 인정을 받게된 것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나 5,6학년이 없는 4학년은 그게 바로 6학년이었다.
그만큼 아이들의 사고 자체가 성숙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운이 따랐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 오후는 늘 체육 시간
4학년의 교육과정은 6교시까지 수업이 있는 날은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7교시까지 수업을 했다. 5교시가 체육인 월, 화, 목요일은 물론이고 다른 날도 시간표에 적힌 수업이 끝나면 비가 오지 않는 한 체육이었다. 교과서 내용을 다루고 나면 곧바로 피구, 축구, 발야구로 레파토리를 바꾸어 가면서 교사도 함께 어우러져 정말로 열심히 했다.
마치는 시각은 주로 교사가 너무 늦는다 싶은 시각에 끊다시피 했고, 아이들은 한결같이 아쉬워서 발을 구르면서 마치곤 했다.
1년이 거의 다 흘러갔을 즈음에는 내 판단으로 아이들의 체력이 참으로 많이 향상되어 있었고, 공을 다루는 기능 역시 많이 발전해 있었다. 구체적으로 처음에는 피구 시합에서 날아오는 공을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는데 이제는 기를 쓰고 받아버리는 바람에 던지는데도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공을 던지는 능력도 크게 신장이 되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체육활동을 많이 한 덕으로 가을 소풍 때 꽤 먼 거리를 걷고도 지치는 아동이 없었다는 점과 체육 이외의 다른 교과 활동도 진지해지고 학력까지도 향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 1년만에 옮기게 된 사연
<그 하나 : 교통의 열악함>
자혜분교가 자리 잡은 서포면 자혜리 중촌 부락 산××번지는 참으로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도로 사정은 서포의 여러 지선들 가운데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만 문제는 차가 자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버스가 고작 3회였고, 택시가 있기는 하지만 요금이 큰 부담이 되게 비쌌다.
교육을 하는 사람이 환경의 열악함을 탓해서 떠난대서야 올바른 자세일 수 없겠지만 그런 가운데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오고싶어 하는 교사가 있으니 조금은 덜 미안한 마음으로 떠날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본교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직원체육 시간에 합류하기 위해서 겪는 불편은 상당히 큰 것이었다. 계절에 따라 걷는 것이 고역일 때는 하루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 둘 : 자성의 차원에서>
자혜분교에서는 전기한대로 아침 9시 20분이 일과의 시작이었고, 수업이 끝나고 귀가시킨 후가 바로 일과의 끝이었다. 간혹 공문서 처리 때문에 좀 시간이 걸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니 눈치 볼 일이 전혀 없었다. 한 학기가 지날 무렵쯤에는 어느새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란 적이 있었다. 67Kg의 날렵하던 내 체중이 나도 모르는 새에 73,4Kg을 오르내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놈이 이래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일종의 지극히 미화된 이야기로 하자면 자성과 채찍의 의미로 이동을 결심하게된 것이었다. 어쩌면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는 것이 교육하는 사람의 도리임을 깨닫지 못한 지극히 경솔한 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 셋 : 직원 체육 연수 때마다>
매주 수요일이면 본교로 직원체육 연수회 참가를 위해 가야 했다.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걷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가기도 하고……….
힘 들여 본교까지 갔다가 직원체육을 하고 회식을 하고 공식적인 일과가 끝이 나고 나면 내 또래의 나머지 직원들은 저녁을 먹으러 간다, 2차를 간다 하고 스케쥴을 잡을 때쯤 늘 나는 혼자서 걷든지 택시를 타든지 자혜까지 돌아가야만 했다.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말 좋은 분위기를 두고 그냥 돌아서야 하는 것이 너무너무 싫었다. 더구나 그 당시 함께 어울리는 축들을 보면 선배도, 친구도, 후배도 모두들 인간성이 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어서 더욱 빠지기가 싫었었다.
그래서 1년만의 이동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 넷 : 교장선생님의 권유>
땅을 찧고 후회할 일이란 건 다음에 안 일이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당시의 본교(서포국민학교) 이×× 교장선생님이 10월중의 어느 직원 체육 날 체육행사를 마치고 교무실에서 회식을 하고 있던 중에 교장실로 나를 부르셨다.
"김 선생, 내년에 본교에 와서 근무할 생각은 없는가?"
사실 안 그래도 자혜는 벗어나야겠고, 갈 곳은 마땅치 않아 고민 중이었는데 교장선생님의 그런 제안에는 검토를 한다거나 토를 달 일이 아닌 듯 싶어서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교장선생님께서 불러 주신다면 와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국 이것도 내가 1년만에 학교를 옮긴 큰 원인 중의 하나라는 얘기다. 그런데 뒤에 안 일이지만 그 교장선생님은 내 능력을 높이 사서 오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는 심한 자괴감과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함께 했던 직원들>
1980.03.01
강기병(분교장 주임), 김영곤, 황현수, 이인구(기능), 박재권(진흥회장)
이기정(본교 교장선생님), 이인태(본교 교감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