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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
기독교인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북 김제
그리고 그곳의 'ㄱ'자교회 금산교회....
전라도 양반이 15살이나 어린
경상도 머슴을 장로님으로 추대하고 목사님으로 섬겼다.
조덕삼(趙德三 1867~1919) 장로와
이자익(李自益 1882-1959) 목사
1. 큰 부자였던 조덕삼 장로
조덕삼(趙德三 1867~1919)장로의 할아버지 조정문(趙政文)은 평양에 살았으며
중국 동북부지방을 무대로 삼고 무역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조덕삼의 아버지 조종인(趙鍾仁)때 금광업을 하기 위해 전라도 땅 김제군,
금광이 많고 사금(沙金)이 많이 나온다는 금산(金山)에 자리를 잡고 이 일대
토지를 매입하고 금광업에 손을 대고 김제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사로 기반을 내렸다.
2.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세우다.
당시 전라도에서 선교한 선교사들은 레이놀즈 선교사와
1894년 2월 그곳에 내려온
테이트(최의덕) 선교사와 매티 테이트(최마태) 선교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해 전주서문교회가 시작된다.
테이트 (Lewis B. Tate)선교사는 전도를 위해 전주(全州)에서 정읍(井邑)으로
말을 타고 왕래하다가 중간지점인 금산리에서 숙식도 하였는데,
그 때 그가 마방(馬房)에 말을 맡기고 묵은 집이 바로 조덕삼 댁이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온 조덕삼은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조사인
김필수씨로부터 복음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된다.
조덕삼이 "그렇게 살기 좋은 당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왜 왔는가?"라고 묻자, 테이트 선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이라고 대답했고 조덕삼은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테이트 선교사의 용기에 감동했고 이후 1905년 봄부터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조덕삼씨 부부를 비롯하여 마부였던 이자익, 같은 마을에 사는
박화서 부부 등이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금산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들에게 선교사는 학습을 실시하고 1905년 10월 11일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로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이들 3인에게 최초로 세례를 주고 성찬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자익(李自益 1882-1959)은
전라도 출신이 아닌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친척집에 들어가 살다가 17살 때 육지로 가는 배에 승선하여
경남 하동 근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후 일자리를 찾아 하동과 전북 남원을 지나 전주에서 김제군 금산까지 오게 되었다.
금산에서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로 채용되어 일하게 되었다.
하루는 조덕삼의 아들인 조영호가 서당 훈장을 모시고 한문을 배우고 있는데
그 곁을 지나던 머슴 이자익이 천자문을 술술 외우는 모습을 본 조덕삼은
그날 이후로 자신의 아들과 동일하게 이자익에게 공부를 시켰다.
금산교회는 조덕삼과 이자익을 중심으로 성장되었고
1906년 5월 30일 조덕삼과 이자익이 함께 세례를 받고,
한 주 후에 함께 집사로 임명을 받았다.
1907년에 둘은 함께 금산교회의 영수로 임명되었고, 그 해에 장로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투표결과 머슴 조덕삼이 장로가 되었다. 당시 장로는 실제적으로 설교도 하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총책임자였다.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상전인 조덕삼이 이자익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함부로 반말도 할 수없고,
오히려 그 머슴을 도와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그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울의 승동교회에는 무어(S. F. Moore) 선교사의 노력에 의해
하층 천민이었던 백정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백정 출신의 박성춘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 신자들이 이에 반발하고 떠나
안국동에 안동교회(홍문석골교회)를 세웠다.
또 서울 연동교회에도 갖바치들이 함께 모였는데,
갖바치 출신인 고찬익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그 교회의 양반 신자들이 이탈하여
종묘 근방에 묘동교회를 설립한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내었다.
금산교회 교인들도 훌륭했고 조덕삼 영수는 더 훌륭했다. 이후 조덕삼은 자신의 약속대로
믿음 안에서 이자익을 장로로 섬겼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할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가 되어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을 다하였던 것이다.
조덕삼 영수는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맛보았기에 성서의 가르침에 순종하였다.
조덕삼은 이자익 장로 보다 반년 뒤인 1908년 가을, 금산교회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은 이해 지금 전라북도 문화재로 등록된 ㄱ자 교회당을 짓기 시작한다.
그동안 임시 교당을 대신하여 조덕삼이 일금 15환을 헌금, 교인들의 헌금과 함께
새 교회당을 지어 1908년 4월 4일에 헌당되었다.
지금은 기역자 교회가 김제 금산교회와 익산의 두동교회 정도가 남아 있지만
한국교회의 초창기 모습은 기역자 교회가 많았다.
이것은 교회에서 남녀를 구분해서 앉히기 위한 것이었다.
기역자 교회가 아닌 곳은 예배당 가운데를 흰색천으로 가려 남녀의 자리를 구분했다
여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를 기역자로 만들고,
불편하지만 천으로 예배당을 구분한 것이다
교회당을 상량하면서 조덕삼 장로의 의견으로
남자석에는 고린도 후서 5장의 말씀을 한문으로,
여자석에는 고린도 전서 3장의 말씀을 한글로 써서 상량문을 지었던 것이다.
보통 상량문은 종보 한 곳에 건축 시기와 건축주 이름을 적는데
여기 상량문은 두 개나 되고 그 내용과 형식이 특이합니다.
남자석에는 ‘一千九百八年戊申陽四月四日陰三月三日’이라는
상량일자와 고후 5:1-6절의 성구가 적혀 있습니다.
“上 我知此身 猶土室唯 幕維壞然有 上帝經營 非人手所作也 悠久於天吾處 此嘆息
自天而降之室 若衣披體槪 其衣體不復 裸吾曺尙處 此幕勞而 嘆息非 去此室乃
其室致 死丁而生存 爲我行此者 上帝也 賜聖神 爲質故心恒安 (후고 五: : 一~六上半)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그리고, 여자석 상량문에는 고후 3:15, 16의 성구가 적혀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쥬여 당신 오실 때까지 늘 거륵하게 하시옵쇼서. 아멘”
상량문에 적힌 성구를 통해서 예배당을 지은 금산교회 초대 교인들의 신앙을 읽을 수 있다.
1950년 6·25 전쟁시 금산리 마을이 다 불바다가 되어 온 마을주택이 다 전소되는 사건 속에서도
금산교회는 불에 타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남았다.
이러한 일은 좌익이나 우익이 한결같이 “저 교회는 우리 교회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교회는 1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게 되었다.
조덕삼은 이처럼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 신학공부를 지원한다.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이자익 장로는 1915년 제8회 졸업하고
동년 8월 전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가 된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고, 1915년부터
금산교회의 2대 목사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한다.
그동안 금산교회는 자립할 수 있을만큼 성장하자
최대진 목사를 초대 목사로 초빙하였다.
그 후 최대진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웃 임실에서 목회하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로 청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이렇게 해서 머슴으로 금산에 왔던 이자익이 목사가 되어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자익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하였고
장로교의 개혁헌법(改革憲法)을 기초하였다.
훌륭한 조덕삼이 훌륭한 이자익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당시 일제지배의 상황 속에서 조덕삼 장로는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금산교회에 유광학교(光學校)를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은 설립자인 조덕삼장로가 취임하였으며,
민족교육이 학교를 설립하게 된 이념이 되었다.
유광학교(후에 東光學校라 불렀음)는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쳤으며,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과 동시에 성경과목을 넣어 가르쳤다.
조덕삼 장로는 사회참여의 일익으로 안양동 용발골 등 금산 일대의 산에
품종 개량을 해야 한다며 삼나무를 대량으로 심는 운동을 일으켰다.
자기 산에만 심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에 심기를 권하였다.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12월 17일 조덕삼 장로는
5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데
그 마지막 유언이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말고 제사는 지내지 말아라.
예수를 잘 믿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서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였습니다.
이때 가장 많이 통곡을 하신 분이 이자익 목사였다.
그리고 숨이 끊기기 직전 까지 찬송가 525장 (주 믿는 형제들)을
4절 마지막 까지 다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 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안에 교통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아멘
이자익 목사는
한국장로교 역사상 유일하게 3번-제13회 총회(1924년)와 33회(1947년) 34회(1948년) 총회 등
세 차례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제22, 23, 24, 25대 경남노회장 역임, 6남2녀를 두었다.
신학을 이수했던 이자익은 1915년 졸업을 하자
전라노회에서 목사를 받고 금산교회 2대 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1924년 9월, 제13회 총회장 선거에서 금산교회에서 시무하는 이자익 목사가 선임됐다.
총회장 임기가 끝나자 장로교 선교부 요청에 의해
1925년 이명서 없이 파견하는 형식으로 가족을 이끌고
경상남도 거창 선교부 선교사로 활동하게 됐다.
전국에 2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이자익 목사는 순회 목사로 활동하던 중 1927년 6월 제22회 경남노회에서는
그를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됐다.
1927년 9월 함남 원산시 광석교회에서 모이는 제16회 총회 총대로 노회장 자격으로
이자익 목사와 서기인 최상림 목사, 총대 김길창 목사, 주기철 목사 이렇게 4명이 참석했다.
이때 이자익 목사는 총회 신학교육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마산 문창교회 사건은 총회적으로 이름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는 이자익 목사밖에 없다하여
거창 선교부에서는 순회 목사라는 직책을 갖고 어려운 교회만 찾아다니는 일을 맡아 왔다.
그의 수고를 계속할 수 있도록 다음 해에도 경남노회장을 연속적으로 맡았다.
이러한 관계로 경남노회 내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 둘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극심한 분규로 어지러웠던 마산 문창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총회장을 역임했던 함태영 목사가 부임해 잘 해결됐으며,
주기철 목사의 모 교회인 웅천교회는 6년 간이나 분규되어 따로 예배를 드렸던 사건이
이자익 목사의 중재로 잘 해결을 보게됐다.
신사참배 하는 총대로 나가지 않았다.
이자익 목사는 거창 선교부의 사역을 마감하고
1936년 9월에 전북노회로 원대 복귀를 하였다.
금산교회와 원평교회에서는 대 환영을 하였다.
그동안 금산교회와 원평교회는 곽진근 목사가 시무했다.
입각을 권유한 함태영 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고
‘장관보다 목회자’로 종신할 뜻을 밝힌 일화도 유명하다.
해방 후1947년 제33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총회장 배은희 목사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이때 임원을 선거하는 데 그동안 일본제국주의에 물들지 않고
참신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면서 모든 총대원들이 금산읍교회 동사 목사로
재직 중인 이자익 목사를 제33회 총회의 수장으로 선출했다.
이자익 목사는 대전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면서
1954년 8월 25일 이사회에서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1954년 12월 취임한지 얼마 안돼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낙향하여 김제 원평에 있는 셋째 아들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곧은 의지로 일제 신사참배의 회유 앞에 굴하지 않았고
일평생 농촌목회를 고집했던 청렴한 목회자,
마부출신으로 목회자가 되어 유일무이한 삼선 총회장이 되었던 사람.
항상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그의 신실한 동역자였던 조덕삼장로의 후손 조세형장로(금산교회)는
이자익목사를 "설교를 참 잘했던 목회자"로 회고했다.
경상도 사투리로 쉽고 재미있게 설교할 때면 모두 졸고 있다가도
눈을 반짝뜨곤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대대로 불교가문이었던 할머니 집안에서는
할아버지가 교회에 열심인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셨었죠."
당시 형편이 넉넉치 않았던 이자익목사에게 장인은
"먹고 살게 해줄테니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사위의 대답에 장인은
"그럼 목사만은 되지 말라"고 회유했지만 그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3개월간 학교에서 공부하고
9개월간 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
대전신학대학교의 역사는 1954년 8월 25일 이자익목사가 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을 역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2005년 4월 19일, 대전신학대학교는
교내에 초대학장을 지낸 ‘이자익 목사 기념관’을 개관하고
<이자익 이야기> 출판 기념예배를 드렸다.
조덕삼 장로님의 손자 조세형(전 국회의원, 주일대사 역임) 장로님이 축사를,
이자익 목사님의 손자 이규완(대덕 연구원 공학박사,
중국 연변과기대 교수) 장로님이 인사말을 맡았다.
이규완 장로님은 그 많은 사람 있는데서 조세형 장로님에게 가서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만약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다면 오늘날 우리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 계십니다.”라고 조덕삼 장로님에 대한 존경을 표한 뒤
끝에 가서 “우리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업적만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할아버지 못지않게 신앙생활을 잘해서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 가리고 할아버지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100년 전 선조의 신앙을 후손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앙의 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현재 대전제일교회에 출석하는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 장로는
연변과학기술대학의 교수로 헌신하고 있고,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 장로(전 주일대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금산교회의 9대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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