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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남호정 |
구월정 |
편장 |
최정보(崔貞甫) |
안근오(安根伍) |
종띠 |
서인석 |
김광성 |
편사원과 정순순서 |
1.서인석(종띠) 2.최정보(편장) 3.한준택, 최윤택, 이용우, 김진호 4.권영화, 이진갑, 공광일, 한이현 5.최광필, 송창영, 천계준, 이수희 6.임상웅, 공학택, 최정헌, 윤 수 7.윤덕용, 공송택, 최용필, 융명철 8.김정한, 김동출, 윤기운, 이윤구 9.이하임, 윤기덕, 박성필, 이지연 10.이한구, 박성태, 김성규, 11.양태헌, 김광태(종띠받침) |
1.김광성(종띠) 2.안근오(편장) 3.한인수, 박노신, 이종수, 현계석 4.이정섭, 김철기, 황정인, 최병순 5.이윤이, 오영석, 공병옥, 최승규 6.김영기, 오 명, 오석우, 장용석 7.김선기, 김영기, 정구청, 황정수 8.한명희, 오순구, 이윤용, 정길영 9.박정선, 김광성, 최승규, 임정호 10.김연수, 김찬영(종띠받침) |
연전 |
최병한 |
김명식 |
대기 |
최병철 |
김종만 |
거기 |
이대용 |
김정호 |
회청 |
최광필, 이지형 외 다수 |
이윤이 외 다수 |
혹지 |
윤덕용, 정해용 |
최병순, 정구청 |
기색깔 |
청색 |
황색 |
편장가족 |
부인 추복희 아들 최민호 며느리 강경민 큰딸 최선화 사위 신영춘 손녀 신지은 작은딸 최선미 사위 이용균 손자 이정연 |
부인 김인자 아들 안선경 며느리 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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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작대 편성이다. 원래 이번 편사에서는 각 정 35띠로 구성하였다. 그런데 막상 당일날이 되자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겼다. 결원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 결원은 명단이 있지 않는 다른 사람이 쏘거나, 아니면 앞서 쏜 사람이 한 순을 더 내는 방식으로 충당했다는 사실이다. 이 결원은 초청 받아서 오는 구월정 쪽이 더 많았다. 그래서 위의 띠별 숫자와 짝이 정확히 맞지 않은 것이다.
팔찌동은 단순하다. 승리 다툼이 심했던 옛날에는 이기기 위한 작전으로 시수 중심으로 편사원을 배정했는데, 요즘은 그냥 나이순으로 띠를 짠다. 종띠와 종띠 받침만 고려하여 배치하고 나머지는 나이 순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를 지워 배치한다.
초순이 끝나고 재순이 시작되면서 운영 방식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초순은 주최정인 남호정이 선사여서 남호정 사원부터 쏘기 시작했는데 재순은 역으로 구월정부터 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좌우발시가 어떤 때는 지켜지고 어떤 때는 지켜지지 않아서 구경꾼으로 간 우리가 아주 헷갈렸다. 그래서 알아보니 원래 구월정이 선사이지만, 2순은 좌궁 선사로 구월정에 좌궁이 없는 띠에서는 발시 순서가 우궁부터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락가락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재순째에는 띠마다 다 쏘고 나서는 한바탕 춤판이 벌어진다는 것이 초순과 또 달랐다. 활쏘기를 마친 활량들은 기공들이 이끄는 대로 사대 앞으로 나와서 한바탕 춤을 추었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서 기공들에게 지폐를 건네주었다. 요즘 속된 말로 말하자면 팁인 셈이다. 기공들의 주 수입은 이것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매 띠마다 반복되었다. 2순과 3순에는 의례히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편장 시사가 끝나면 온 가족이 다 사대 앞으로 올라와서 춤을 추며 놀았다.
기공(妓工)이란, 기생을 포함한 악공을 말한다. 아주 간편한 구성을 보인다. 소리기생 넷에 피리 하나, 장구 하나, 그리고 전자오르간 하나로 구성된 아주 간단한 악단이다. 이들의 활동은 실로 놀라운 것으로, 넷이서 하루 종일 창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 잠시도 쉬지 않고 하루 종일 창을 했다. 그것도넷이서 교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넷이서 한꺼번에 합창으로 하는 것이다. 스스로 흥에 겹지 않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지화자 회청은 회청을 맡은 한량의 '변∼'하는 외침이 끝나자마자 이어진다. 회청한량이 변을 외치면서 손가락으로 몇 시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면 노래를 한참 하던 중간에도 노래를 그치고 기공의 회청이 나온다. '김주사 나리 몇 시에 관중, 지화자∼' 하는 식이다. 여기서 '시'는 몇 시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맞은 발수를 말하는 것이다. 제4시를 쐈는데 이번이 2중째 관중이었다면 '2시에 관중'으로 회청하는 것이다.
1순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젊은 기공 하나가 저쪽 숲쪽으로 간다. 그래서 재빨리 쫓아갔다. 앉아서 잠시 쉬는 모양인데, 그 참을 우총무가 비집고 들어선 셈이다. 편사 취재 온 것과 홈페이지에 올릴 것이라는 양해를 구하고 옆에 앉아서 이런저런 것을 물었다.
이들은 간석동의 오동국악예술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들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창배 명창의 제자들이라고 한다. 이명창은 벌써 작고했다. 원장은 여영애이고, 나머지는 유미영, 조정숙, 공미숙이다. 가장 어린 사람이 공미숙 자신인데 벌써 20년째 하고 있으며, 가장 오랜 사람은 유미영으로 벌써 40년이 넘었다고 한다. 장구는 김국진, 피리는 덜덜이아저씨(이용희), 전자오르간은 양종덕이다. 부르는 곡은 경기민요로 12잡가를 부른다. 12잡가란 유산가, 제비가, 소춘향가, 적벽가, 선유가 같은 경기창을 말하는 것이다. 점심 때를 넘어서면서부터는 12잡가만이 아니라 요즘 유행가부터 시작해서 트롯에 뽕짝까지 거의 다 불렀다.
일당은 어느 정도냐는 고약한 질문을 던졌다.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머뭇대더니 약 50만원 가량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보수는 그렇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벌써 40년 전부터 인천 지역의 활량들과는 계속 교류를 하며 편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 정서로나 관계로나 돈 때문에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활터는 이들의 삶과 예술을 규정하는 곳이 된 것이다. 허긴 이벤트 하나로 몇 백 몇 천 만원쯤 우습게 주무를 수도 있는 것이 요즘 잘 나가는 국악계의 보여주기 행사이다. 그러나 활터의 편사는 이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한 부문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국악인들이 할 수 없는 이들만의 특기이기도 하다.
대회 도중에 특별한 행사가 한 가지 또 열렸다. 그것은 위관패 전달식이다. 인천시궁도협회(협장 박창규)에서 편사를 주최한 편장에게는 국궁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뜻의 담긴 위관패를 준다. 그것은 편장이 되었음을 공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증을 해주는 것이다. 위관은 의관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벼슬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정 편장이 우연하게도 모두 올해가 회갑이어서 열두 시 반부터 시작된 점심 시간에는 최정보 남호정 편장의 회갑잔치가 정 안에서 열렸다. 온 가족이 들어와서 중앙에 앉은 편장 부부에게 꽃다발을 드리고, 창을 곁들인 기공의 안내에 따라 자녀들이 큰 절을 올렸다.
점심 장면. 옛 말에 잘 차린 잔치상을 보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다는 말이 있다. 주방으로 쓰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보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각종 반찬을 얹은 잔치 상이 4층으로 쌓여있었다. 그리고 점심이 시작되자마자 그 상들이 바깥으로 나가면서 밥과 국을 날라다 놓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나눠앉아서 밥을 먹는 모습은 옛날 온 동네 잔치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이 날 잔치에 온 사람들은 대략 추산해 보면 350명 가량 되었다. 300명이 넘는 사람이 활터 앞 빈 밭에 벌여 앉아서 밥먹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이 즈음에서 최창완 남호정 사범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멀리 울진과 청주에서 편사구경 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우리를 불러다 앉히고는 음식을 권하며 너무 살갑게 대해주셨다. 그러면서 편사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 중에서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몇 가지를 정리해둔다.
옛날에는 편사가 벌어지면 동네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참석했는데, 활량들이 음식 한 가지씩 나눠서 맡아가지고는 그것을 책임지고 해왔다는 것이다. 어떤 집은 떡, 어떤 집은 김치, 어떤 집은 식혜, 어떤 집은 부침개를 맡는 식이다. 그러다가 편사가 잦고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니까 재산이 넉넉한 편장들이 부담을 떠맡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손님을 초청해서 치루는 것이기 때문에 남한테 보이기 위해서 음식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차리려는 경쟁이 야기되고 그것이 서로에게 큰 부담으로 남게 되자, 나중에는 서로 자제하여 상대 측이 차린 것과 비슷하게 차리는 것으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어서 이제 활량들의 부인들도 음식 차리기 힘들다며 업체에게 맡기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과 같이 동네 부녀회에서 음식을 맡는 일은 갈수록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이것은 사회 구조가 변하면서 풍속의 모습이 변해가는 한 징표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인천이 시가 되기 전에는 동두천, 수원과 같이 먼 곳과도 '편사놀이'를 했는데 인천이 시로 묶이고 커지면서 이제는 인천 시내의 9개정끼리만 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여기서 사법에 대해서 슬쩍 여쭈었다. 최사범님의 궁력이 30년이 다 돼간다기(참고로 사범님은 온깍지의 '온'짜도 모르시는 분이다.)에 옛날에도 사법이 지금처럼 깍지손을 똑 떼고 말았느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고 거머리를 떼듯이 뒷손을 세게 뻗도록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뒤손을 연신 뻗는 시늉을 하셨다. 그러면 왜 요즘은 그렇게 바뀌었느냐고 여쭈자, 아무래도 움직임이 크기 때문에 잘 안 맞아서 사람들이 머리를 쓴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사법의 대강을 설명하시는데, 깍지손을 끌어서 어깨 앞쪽에다가 새끼손가락을 갖다 붙이면 아랫시위는 가슴에 걸리고 윗시위는 뺨에 가서 붙는다. 그렇게 세 군데다 붙이고서 깍지를 떼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인, 새끼손가락을 어깨에 붙이지 못하고 허공에 떠있는 모양의 깍지손을 '공깍지'라고 하신 것이다. 결국 이것을 보면 인천 경기 지역에 유행하는 지금의 사법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난다. 시위 위아래 두 군데를 뺨과 가슴에 대고 새끼손가락을 어깨 앞에 대서 고정시킨 다음에 고 자리에서 똑 떼는 사법인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지역의 사법과 많이 다른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 지역에 유행하는 이 사법은 근기(近畿) 사법이라고도 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천 지역의 사세(射勢)와 궁력(弓力)이 전국에서도 최고의 수준에 이르러있다는 점에서 한 번 연구해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 전국대회 단체전에서 인천 지역의 활터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남호정만 해도 오래 벌써 2차례 전국대회 우승기를 가져왔다.
6. 무겁 풍경
이번에는 무겁으로 가봤다. 양정에서 선발한 거기꾼과 고전 한 쌍이 교대로 고전을 보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인천 무겁의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로 놀랍고 섬뜩한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다. 고전은 과녁 근처에서 보는 것으로 알고 있던 우리의 눈에는 실로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관중할 때마다 길이 5미터나 되는 커다란 기(大旗)를 돌리는 사람과 작은 깃발로 맞았음을 알리는 연전이 구월정과 남호정에서 한 명씩 고용해서 자기 편이 쏠 때마다 나서서 교대로 보았다.
대기는 과녁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기를 흔들었는데, 연전은 달랐다. 연전은 작은 깃발 두 개를 양손에 나눠들고 과녁의 한 복판에 서서 살이 날아들기를 기다린다. 살이 날아들면 살이 가서 맞는 곳에다가 깃발을 갖다 댄다. 그러면 살이 날아들어서 그 깃발을 찍는다. 나중에 그 깃발을 보니 구멍이 송송 뚫려있다. 살이 과녁을 때리기 전에 그 깃발을 갖다댄 것이다. 노란 기를 든 이는 김명식이라는 분인데, 이 분은 과녁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리다가 화살이 날아들면 벌떡 일어나서 깃발을 갖다 댔다. 발가락 앞에 살이 떨어져도 움직이지 않았다. 앉아있던 그의 배꼽으로 화살이 날아들자 벌떡 일어서니 화살은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 박혔다. 우리는 그 장면에서 차라리 눈을 돌렸다. 등골이 서늘해서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결국은 한 5분 가량 구경하다가 돌아오고 말았다. 하도 신기해서 나중에 다시 가 봤지만 역시 한 10분 가량 구경하다가 돌아왔다. 살을 보는 눈이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옛날에 부채로 볼 적에는 빠지는 화살을 슬쩍 쳐서 맞게 하고 맞는 살을 쳐내서 맞지 않게도 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고전 보다가 다친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다고 한다. 일당을 얼마나 받느냐고 물으니 웃으면서 대답을 회피하는데, 거기꾼에게 슬쩍 물으니 정마다 다 다른데 보통 10만원에서 20만원 사이의 금액을 받는다고 한다. 위험에 비해서 싼 것이라고 말하니, 이 역시 돈 때문만이 아니고 자신의 실력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전을 보는 분들이 굉장한 자부심으로 그 일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럴 만한 일이었다.
활량들의 얘기를 들으면 거기도 그렇고 연전도 그렇고 신나게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매번 그런 사람에게 부탁한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가 되자 술기운 탓인지 사대에서 보이는 무겁 쪽의 반응이 한층 흥에 겨웠다. 맞을 때만다 거기 돌아가는 것도 흥겹고 연전꾼은 아예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본다. 오후가 되어 해가 정면으로 들자 연전은 과녁 옆으로 비껴섰다. 날아드는 화살이 햇살 때문에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7.뒷풀이와 후사위, 그리고 뒷수습
정순이 끝나면 뒷풀이가 이어진다. 시수 결과에 따라 시상식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정별로 행하는 것이다. 정별로 장원과 몰기자에게 상을 주는 것인데, 이때 역시 편장이 준다. 옛날에는 보통 화살 1접을 해주는 것이 통례였지만, 요즘은 봉투에 돈을 넣어서 주기도 하고 다른 선물을 사주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장원자가 시지를 가져가는데, 요즘은 작은 책으로 만들어서 주기도 한다.
뒷풀이에서는 그날 수고한 사람들 모두 모여서 말 그대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다. 뒷풀이가 시작된 시각은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6시를 넘겼다. 마냥 구경할 수 없는 것이 멀리서 온 우총무와 이건호 접장이었다. 이런 사정을 말씀드리고 뒷풀이 상이 한창 준비되는 주방으로 가서 저녁을 먼저 먹었다.
이날 고생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끼니를 마련하는 사람들이다. 대개는 사원의 부인들이 동원되는데, 이날은 동네 부녀회에서 맡았다. 그러다 보니 편장은 수고비조로 얼마를 내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동네 운영비로 보통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들에게는 따로 관광을 시켜준다든지 해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후사위라는 것이 있다. 편사 전에 하는 대사위와 짝을 이루는 것인데, 편사가 끝나고 편사원들에게 수고했다고 간단한 주안상을 마련하여 대접하는 것이다. 물론 활쏘기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편사날의 도장원과 부장원에게 상을 주고 그런다.
그리고 아침부터 사정 건물 옆 벽에는 하얀 종이 깃발이 나부꼈다. 그것은 이 대회에 찬조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 금액을 적은 종이이다. 보통 편사 비용은 편장이 부담하지만, 그것이 적지 않은 돈이기 때문에 편사원들이 일부 부담하는 수도 있고, 또 대회장에 오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찬조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찬조를 한 사람의 향기나는 명단을 내걸어서 기억하는 것이다. 벽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하얀 종이들이 주욱 나붙고 그것도 모자라도 두 번째 줄로 접어들고 있었다. 액수를 보니 개인 당 보통 3∼5만원이 적혀있다. 그런데 쭈욱 훑어가다 보니 어디서 낯익은 이름이 끼여있다. '온깍지궁사회'.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성명무를 돌아보니 웃으면서 우리도 부조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나 원 참! 또 당했군!
찬조금은 접수할 때 둘로 나눈다. 찬조의 성격이 정의 발전에 관련이 있는 것은 정으로, 편장 개인의 축하와 관련있는 것은 편장으로 나누는 것이다. 편장에게 들어온 것은 편장이 잔치 비용으로 보태어 쓴다.
아무래도 관심이 가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편장으로 서려면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 하는 것이다. 운영 방법이나 사정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1000만원 안팎이라고 한다. 여기에 사원 협조와 찬조로 들어오는 것이 편장에게 돌아가니 이것저것 감안한다면 편장이 감당할 편사 비용은 대략 500∼1000만원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적지 않은 돈이다.
8.인천 편사의 함의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이렇게 부담가는 비용을 치루면서까지 굳이 편장을 하려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은 활쏘는 당사자들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고, 그래서 방계 학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분명히 편사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것인데도 학계의 조명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리고 서구 편향이 너무나 뚜렷한 우리 학문의 헛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민속학에서는 수백 년 이어지는 이 풍속의 양상을 그대로 채록하여 정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배후, 즉 인천 지역의 어떤 경제 여건과 문화 여건이 이런 현상을 이토록 오래 지속시켜 왔는가 하는 것을 조사하여 연구해야 한다. 인천 지역 주민들의 의식구조와 경제 형편 그리고 가치관을, 통계학과 현지 조사를 통하여 밝혀야 한다. 당연히 이것은 활량들이 몫이 아니라, 이 사회를 이끄는 학자들의 몫이다. 편사와 관련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학자들은 책임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무리를 해가면서도 편장을 서려고 하는 것은 그 지역사회의 인식 때문이다. 즉 편장을 서야만 어른 대접을 받는 것이다. 대접을 받으려 하는 것은 그 지위에 따르는 정신과 심리 상의 보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두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편장을 거치지 않은 사두는 '애사두'라고 해서 속으로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애사두란 어른이 못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활터라는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받으려면 편장을 해야 하고, 편장을 하려면 그것을 감당할 만한 재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재력이 있다고 해서 편장을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편장을 서려면 활터에서 그만한 덕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강제는 전통 사회에서 재물에 예속되지 않는 인간의 덕성을 찬양함으로써 물질의 재분배를 성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어려운 이웃에게서 명예를 얻는 대신 그들에게 물질로 베푸는 공존의 한 형태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즘은 세금이라든가 하는 강제성을 띠지만, 이러한 곳에서는 순전히 자발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이러한 점은 전통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다.
이것은 옛날 지배자가 피지배층의 고통을 분담하는 한 형태도 된다. 그러한 형태는 관료제도로도 나타나는데, 옛날 사람들의 목적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서 자아실현을 이루었다. 그것이 편사에는 그대로 남아있다. 위관, 또는 의관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신분과 위상을 상징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을 기억한다면 위관이란 죽은 뒤에도 자신의 덕을 이웃이 기억해주는 것은 물질조건이 충족된 그 다음 단계의 자연스런 욕망이다. 그러한 욕망을 이웃에게 베풂으로써 성취하는 방법이 편사의 편장인 것이다. 편장을 지내면 편사 때의 기생회청에서 의관영감이라는 창이 나온다. 그리고 이웃에서는 누구누구 편장댁으로 호칭이 바뀐다. 나아가 죽어서 지방에도 편장이라는 명칭이 쓰인다. 이것은 위관을 제수하는 국가가 사라졌지만, 그것을 궁도협회가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에서 편장이 이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천 지역의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해준 사항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대는 변했지만, 아직도 인천에서는 편장이 그럴 만한 대접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천 지역의 주민들이 활쏘기를 보는 시각이 다른 지역과 다르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관심도로 나타나는데, 이 날도 많은 정치인들이 발걸음을 해서 그러한 일면을 보여주었다. 한 구석에 가만히 앉아있던 우리에게 명함을 주고 간 사람만도 셋이나 되었다. 안상수(한나라당 계양구 지구당 위원장), 신영은(인천광역시 의원), 윤태진(남동구청장)이 그 명함의 주인공들이다. 6월 지방선거 때문에 많은 출마자들이 발걸음을 하지 못 했다. 그것은 정치인들은 찬조금을 할 수 없도록 법에 규정되었기 때문인데, 그럴 경우 오히려 이곳에서는 악재로 작용하기 때문에 발길을 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국회의원·시장을 비롯하여 모든 정치인들이 오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인천 지역 지배구조의 한 면을 활터가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결국 이러한 분석은 막연한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인천이라는 지역사회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를 수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민속학자와 사회학자들의 관심과 분발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풍속은 아무리 하찮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9. 전통과 풍속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대동세상의 현장, 편사놀이
오늘날 우리는 전통을 많이 말한다. 하지만 진정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전통이라는 말을 붙일 만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면 답은 아주 찾기 힘들다. 우리가 접하는 전통은 이미 전문가들의 소유로 넘어가 버려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전통은 없다. 국악 공연을 보려면 극장으로 가서 무대 위의 공연을 보아야 하고, 마당극 역시 한 공간에서 하더라도 관객과 공연자는 어느 덧 확연히 나뉘어 버렸다. 춤 역시 마찬가지이다. 춤꾼들만의 춤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전통 문화의 모습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접하는 전통이란 무대용이거나 박물관 전시용이다.
그런데 이곳 인천 편사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 오면 생활 속에 우리의 춤이 살아있고, 우리의 창이 살아있다. 소리기생들의 소리를 삶 속에서 직접 부딪치며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은 이곳 인천뿐이다. 인천의 편사 현장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춤을 잘 추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전문 춤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다들 어깨춤을 추면서 흉내를 낸다. 외국에서 들어온 춤동작도 많이 섞여 있지만, 하나같이 어깨와 팔, 그리고 다리를 들추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어설프더라도 생활 속에 살아있는 우리의 춤이다. 이것이야말로 벌써 30년 전에 우리가 잃어버린, 이제는 갈래야 갈 수 없는 그런 마음의 고향이다. 그런 꿈같은 대동세상이 아직도 인천에는 남아있다. 어설프지만 춤과 소리와 소리기생과 주인들이 한 덩어리로 어울려 한 치 어색함도 없는 완벽한 전통 풍속의 현장이 인천에 살아있다. 우리는 200년 전의 평화가 그대로 보존된 아늑한 한 잔치 마당을 다녀온 것이다.
이쯤에서 어제 본 꽃다지의 광장 공연이 떠오른 것은 어쩐 까닭일까? 이 시대 모순의 첨단에서 자본의 전횡에 당당히 맞서고자 일어선 저들의 모습과, 이미 지난 세월의 한 끝에서 실낱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원시종합예술인 편사 기공의 모습이 왜 갑자가 오버랩 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그들이 지향하는 것이 어떤 한 지점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그 지점이란 무엇인가? 대동세상이다.
인간의 이상에는 보편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고,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리이스 신화가 보여주는 세상이 그런 것이며, 예수나 석가의 종교현상도 그런 것이고, 성리학에서 추구한 이상세계가 역시 그런 것이며, 가까이는 평등을 꿈꾼 공산주의가 그런 것이다. 방법과 차원을 달리하더라도 이런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한 영원을 향한 동경이 만들어낸 세계이다. 누구한테나 인류 보편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런 잠재의식이 있고, 그것이 시대를 넘어서 역사의 전면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그러한 이상을 짓뭉개고 자본이 홀로 우뚝 서서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20세기 인류의 거대한 꿈을 실험하던 공산주의는 개인의 마음 속에 깃든 이기심을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졌다. 결국 자본으로 표현된 욕망의 무한 분출만이 이 시대를 규정하는 유일한 잣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의 이상은 이렇게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이라도 있는 것,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이 너무 황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차선이란 옹색하긴 하지만 서유럽이 지향하는 조세평등주의일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지만, 인류의 영원한 꿈을 한 수 접은 마당에서 이마저도 없다면 인간은 짐승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조세평등주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결국 가진 자의 몫을 강제로 빼앗아서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주겠다는 것이다. 그 형식이 세금이고, 그것을 집행하는 자는 국가이다.
이것을 인천의 편사에서 벌어지는 경제현상과 비교해본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둘 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재산을 분배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조세평등주의가 가진 자에게 강제성을 띠고 행해지는 것이라면 인천의 편사는 편장으로 나서는 사람 스스로 베푸는 자발성에서 비롯한다는 점이 다르다. 같은 강제를 행하되 한쪽은 외부에서 강제된 형식에 굴복하는 것이며, 한쪽은 덕을 찬양하는 댓가를 주어서 스스로 주머니를 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인류의 삶을 선도하는 서구 선진국의 사회 구조와 이미 낡은 세대의 지나간 풍속으로 내몰리는 인천의 편사가 보여주는 구조는 완전히 똑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의 뒷꽁무니를 쫓아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남들이 가고자 하는 그곳에 우리 조상들은 아득한 옛날에 벌써 도착했던 것을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조세평등주의가 지닌 무표정한 냉혹성과 달리 인천 편사에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우리가 눈을 내부로 돌리지 않는 한 이러한 전통의 미덕은 끝내 버림받거나 영원한 미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가 아무리 논리의 비약이라고 하더라도 활터가 우리 문화의 훌륭한 거울이자 지표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토를 달 수 없다. 그러므로 인천 편사는 말없이 수백 년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인류의 영원한 꿈 대동세상 만세! 인천 편사여, 영원하라!
10. 마무리
저녁을 먹고 여러 어른들께 작별인사를 인사를 드린 다음, 우리는 이건호 접장 처남의 차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막 도착할 즈음에 우총무의 핸드폰이 울었다. 받아보니 성명무였다. 점심 먹고 약속이 있어서 먼저 떠난 성명무는 못내 미안했는지 여러 가지 일을 물었다. 그러잖아도 전화를 해서 경과보고를 할 참이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먼저 전화한 것이다. 이건호 접장에게 핸드폰을 넘겼는데, 네네 하고 몇 차례 호출 끝에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이접장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면서 집으로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아내의 핸드폰을 빌려서 들고 온 우총무, 지나가는 젊은것을 불러서 봐달라고 하자 그 젊은것이 몇 번 어떻게 눌러보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마침 광장에서 핸드폰을 파는 사람들이 있길래, 그들에게 보였다. 그랬더니 역시 젊은것이 밧데리를 몇 차례 떼었다 붙이며 작동을 해보더니, 안 된다며 서비스 센터에 보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핸드폰 다루는 데 나보다 특별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서비스 운운 하길래 그냥 받아들고 돌아서면서, 온깍지 제주 버전으로 "어머나! 게새기"라고 남몰래 욕하지는 않았다. 이건 진짜다.
이 고장의 원인은 이건호 접장이 분명했다. 이접장의 손으로 건너가기 전만 해도 내가 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접장 욕을 안 할 수가 있나? 물론 속으로.(젊은것에 대한 욕은 나중에 한 번 더 하게 된다. 청주에 나중에 도착했을 때 서비스 받아야 한다던 젊은것의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가방 속에 처박은 핸드폰이 울린 것이다.)
그건 그렇고, 터미널 매표소 앞에 줄을 섰을 때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매표소 유리창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은 것이었다.
"청주 표 당일 분 매진"
앞이 캄캄한데 전화는 고장났고, 기가 찼다. 비는 오는데, 소는 도망가지요, 깔짐은 쓰러지지요, 설사는 나지요, 바지는 내려가지요, 상투는 나무에 걸렸지요... 이런 구절이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갔다. 망연자실 서 있는데 어디서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주 가실 분, 합승이요.'
돌아보니 택시 기사 관상을 한 사람이 호객을 하고 있다. 가서 물으니 넷 합승에 4만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얼른 탔다. 이른바 나라시 택시. 뒷좌석에 타면서 4만원이면 꼭 모텔비네, 이거 모텔비를 성명무한테 미뤄서 그 대가를 치루나 보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노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한 시간쯤 잤을까 눈을 떠보니, 세상에! 차가 고속도로 위를 날고 있었다. 인천에서 청주를 1시간 30분에 날아온 것이다. 차들이 붐비는 일요일 오후의 지상비행!
11. 뒷얘기
편사는 두 편이 한 번 초청하고 한 번 초청 받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일주일 뒤인 11일(토), 지난 번 초청받은 구월정에서 이번에는 남호정을 초청하여 편사를 치루었다. 편장은 전과 같다. 그런데 남호정의 종띠가 바뀌는 바람에 반종띠로 하게 되었다. 즉 남호정에서 편사를 할 때 남호정 종띠는 김광성이었는데, 구월정 편사에서는 김접장이 개인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명희가 종띠로 나선 것이다. 그러니까 양쪽 편사에 같은 사람이 종띠로 서야 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한 번밖에 종띠를 서지 못하는 경우를 '반종띠'라고 한다. 반종띠란 말이 생기고 보니 저절로 온종띠라는 말도 생겼으니, 온종띠란 두 번 다 편장을 서는 경우를 말한다.
또 이날은 기의 색깔이 바뀌었다. 이것은 편사를 신청한 쪽이 청색을 쓰고 신청을 받은 쪽이 황색을 쓰는 관습 때문이다. 그래서 남호정 대회 때에는 남호정이 청색이고, 구월정 대회 때에는 구월정이 청색을 썼다.
또 한 가지는, 편장을 서고 나서 사두를 해야 어른사두 대접을 받는 것처럼, 신사 역시 편사를 한 번 치루어야 신사를 면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신사인가 하는 것이 어느 정이든 애매한데 인천에서는 바로 이 편사가 그 기준이 되어준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런 인식은, 편사가 활량의 자격 조건을 강하게 규정하는 것으로 작용한다는 뜻이고, 이것은 활쏘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편사에서 찾는다는 뜻이 된다. 전투를 한 번 치루어야 진정한 무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편사에 대해 인천 지역의 구사들이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면 답이 드러난다. 인천의 구사들은 편사를 전쟁의 유산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종띠를 상장군에 해당하는 편장을 모시는 길잡이이나 척후병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편사의 기원을 전쟁 훈련이라고 여기고, 종띠 역시 그러한 기능을 맡은 직책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들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편사는 이와 같은 전쟁의 유산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오락 기능으로 전환된 그런 풍속이 분명한 것임을 보여준다.
정리 : 우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