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동쪽 두뭇개 나루 근처에서 있던 동빙고터다.
빙고(氷庫)는 옛날부터 얼음을 자장하여 두던 얼음창고이다.
고구려 백제,신라의 삼국시대 이후 얼음을 저장하여 두는 얼음저장고 능음(凌陰)이 바로 빙고이다.
능음은 중국에서 유래된다. 중국의 ‘시경’을 보면 빙고를 능음(凌陰)이라 했다.이는 ‘음(陰)을 저장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음기가 가장 강한 12월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것은 한겨울의 동장군을 지하에 잡아 가둔다는 의미를 지닌다.
얼음을 저장해 두고 사용한 우리나라 빙고의 역사는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노례왕(24~57년) 때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신라 22대 지증왕 6년(505년)에 왕이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두 종류의 빙고를 두었다.
창덕궁 안에 있던 내빙고와 사대문 밖의 외빙고가 그것이다.
궁궐 전용의 얼음 창고인 내빙고에는 약 3만여 정의 얼음이 저장되었다.
외빙고는 서빙고와 동빙고의 2개가 있었다.
서빙고는 1396년(태조 5년) 둔지산 아래(지금의 용산구 서빙고동)에 지어졌다.
동빙고는 한강 하류 두모포(지금의 옥수동 한강변)에 위치했다.
서빙고에 보관한 얼음 양은 13만여 정쯤 되고, 동빙고에는 1만여 정쯤 저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13배나 많은 양의 얼음을 저장한 셈이다.
실제로 동빙고의 창고는 1동이었던 것에 비해 서빙고는 8동이나 되었다.
이 적은 동빙고의 얼음은 오직 왕실의 제사를 지낼 때에만 사용했다.
서빙고에 보관한 얼음은 종친이나 당상관 이상의 고급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처럼 얼음을 나누어주는 것을 ‘반빙(頒氷)’ 또는 ‘사빙(賜氷)’이라 했으며,
임금이 내린 나무로 된 빙표(氷票)를 빙고에 가져가 얼음을 받았다.
아무리 더워도 음력 6월 이외에는 빙고(氷庫)에 가득 찬 얼음을 함부로 반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빙고는 예외였다.
왕실의 제사에 공급되는 동빙고의 얼음은 음력 3월 1일부터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조상을 섬기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그만큼 왕실의 제사 음식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선 용감한 사대부가 있었다.
1546년(명종 1년) 8월 2일자의 ‘명종실록’에 의하면 예조참판을 지낸 김광준이 그에 대한 폐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야기인즉슨, 자신이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문소전을 관리할 때 보니
신위 앞의 구리 쟁반에 얼음을 담아 놓는 소위 ‘조빙(照氷)’으로 인해 얼음이 녹아 흘러서
자리가 흥건해지고 진흙이 질척거려 사당이 쉽게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김광준은 겨울에는 추위를 막는 준비가 별로 없으면서 여름에만 그렇게 하는 것은
허례허식에 불과할 뿐더러, 빙고 작업으로 백성에게 끼치는 폐가 적지 않으므로
조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는 취지의 말을 아뢴다.
이에 대해 명종은 대신과 의논해 보라며 심드렁하게 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