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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禪詩)의 계보(系譜)
균여(均如-923-927)는 사뇌가(詞腦歌)를 심고(深高)라 했지만 선시(禪詩)는 시(詩)에 있어서의 지고(至高)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선(禪) 자체가 워낙 높은 세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시화(詩化) 하였을 때 지고(至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선에는 비논리적이며 동문서답이 허용되고 있어 이 세계가 시화되는 과정은 섬광처럼 빛나는 것이다. 보화사(晋化師)가 시중을 돌아다니며 밝은 곳으로 오면 밝은 곳으로 치며(明頭來 明頭打) 어두운 곳으로 오면 어두운 곳으로 치겠다(暗頭來 暗頭打), 그리고 사방팔방으로 오면 회오리바람으로 치고 허공으로 오면 도리깨로 치겠다고 외우고 돌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임제(臨濟)가 시자(侍者)를 시켜 만일 위에서와 같은 그런 식으로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보화는 태연히「내일 대비원에서 제(齊)가 있다」라며 가 버렸다. 이 대비원에서 제(齊)가 있다는 말과 앞의 명두래(明頭來)명두타(明頭打)등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그러나 이 대화중에서 우리가 상식으로 사량(思量)할 수 없는 깊은 뜻이 통하고 있으며 논리가 정연한 동문서답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禪의 문답 중에서 볼 수 있는 차원이 다른 격구{格句)의 언어들을 선(禪)에서는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시(詩)로서 나타날 경우 그것이 지고(至高)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禪의 언어는 전부가 詩요 詩的이라 해도 좋다. 그것이 동문서답이든 동무동답의 자연 묘사든 그 속에는 다른 뜻의 차원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선(禪)이 불타(佛陀)의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부터 시작해서 達摩가 중국에 건너와 중국에서 크게 성한 것으로 이것은 다분히 중국의 개척적(開拓的) 불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禪)이 중국에서 더욱 서민화하면서 인간성의 본질을 깊이 추구해 가는데 성공했으며 그로 인해 대륙적인 불교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선(禪)이 달마(達摩)이후 육조(六祖) 혜능(慧能)을 거쳐 크게 발전을 한 시기가 당말(唐末)의 국운이 쇠한 시절이었는데 이것도 이 선(禪)의 대륙적이며 서민적 강인성 때문인 것이다. 즉, 정치의 혼란이나 사회의 어지러움 가운데서 오히려 돌출구(突出口)를 찾고 반발적 인간성의 작용을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반의식적 힘의 자의식을 찾는 수행이 곧 선(禪)의 방법이기도하고 탕아처럼 발랄한 기백으로 좌충우돌 자의식을 찾는, 즉 본성을 찾는 일이 선(禪)에 있기 때문에 당말(唐末)과 같은 극히 국가가 혼란하고 약했을 때 중국선(中國禪)의 가장 성대(盛代)인 오종가풍(五宗家風)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사상(禪思想)은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수입 과정을 보면 역시 신라 말의 국운이 쇠했을 때 선(禪)이 들어와 불교계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벌어진 것도 말기의 일이며 고려조에 와서도 보조(普照),
태고(太古), 보우(普雨), 나옹(懶翁) 등 말기에 고승들이 더 배출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조선조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데 서산(西山) 사명(四溟)의 중기 이후 선(禪)이 더욱 발전을 해 온 것이다.
이것은 곧 선(禪)이 더욱 본질적이며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려는 근본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성의 통찰과 그것이 누구나 가능한 대중성의 수용에 잘 영합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신앙성에 있어서는 선(禪)이 대중성을 결여하고 있지만 오도(悟道)상(上)에 있어서는 균등한 향상이 있기 때문에 상하대중(上下大衆)의 많은 환영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선(禪)은 인간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 적나라한 상태에서의 선(禪)의 언어는 그것이 지고(至高)의 수준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대화는 단순한 언어의 순화나 분석의 치밀함으로 이를 대치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럼 다음 선승(禪僧)들의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되 그 범위는 조선조 중기의 서산(西山)을 중심으로 사명(四溟), 편양(鞭羊), 소요(小搖), 진묵(震黙) 등의 고승 몇 분의 문하로 범위를 줄이고 싶다.
먼저 법명을 휴정(休靜)으로 하고 호를 청허(淸虛)라 부른 서산(西山)은 쇠미했던 조선조 불교를 크게 부흥한 분으로 이 서산의 시에 훌륭한 것들이 많다.
서산은 중종 15년(1520) 3월26일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나 나이 18세에 입산(入山), 21세에 득도(得道)하게 되는데 그 후 남원(南原)의 역성촌(歷星村) 마을을 지나다가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도(道)를 깨닫게 된다.
이때 지은 시가 오도송(悟道頌)으로
머리 세어도 마음 늙지 않는
고인의 말,
닭소리 한번 들으니
장부의 큰 일 해 마쳤네.
(髮白非心曰 古人會漏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
여기서 닭소리가 오도(悟道)의 계기가 되는데 이 닭은 화창한 봄날의 대낮에 우는 소리다. 본래 생멸(生滅)과 증감(增感)이 없는 늙지 않는 마음의 여로를 찾으며 어느 경계를 헤매고 있을 때 멀리 마을에서 들여오는 은은한 닭소리에 정신이 번적 나 어딘가 맺혔던 의문이 확 풀린 것이다. 그러니 이 닭의 울음소리는 다만 은은하고 정겹기만 한 닭소리가 아니고 마음의 최심천(最深泉)을 자극시킨 진리의 소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것은 흔히 일반 시(詩)에서나 선(禪)에서나 똑같이 읊어진다, 그러나 선(禪)에서의 그것과 일반 시(詩)에서의 그것은 너무 차가 많다. 일반 시인(詩人)의 경우 그 자연에 대한 미의식(美意識)과 사량(思量)의 추구에 불과하지만 선승(禪僧)의 경우는 그 자연 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우주의 철학을 찾는다. 때문에 같은 자연에 대한 해석도 선(禪)에서의 해석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장부의 일이란 것도 어떤 출세나 사업적인 일이 아니다. 물론 인간의 가장 큰 일이 장부의 일이긴 하지만 이 일은 어떤 유형적 일이 아니고 보다 큰 생사를 총괄하는 근본적인 일이다.
이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어린 명종(明宗)을 보살피며 불교를 중흥키 위해 승과(僧科) 제도를 부활시키고 명종(明宗) 5년(1550년) 불교 중흥을 선포하였을 때 서산(西山)은 그
이듬해 11월 첫 최고의 득점자로 합격하여 그 후 36세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판서(判書)가 된다. 그리하여 그동안 분규를 일으켜 온 선교 양종을 통합하고 보우(普雨)스님이 맡았던 봉은사(奉恩寺)의 주지까지 했으나 이러한 것들은 세상의 영리(榮利)를 떠난 출가자(出家者)의 일 같지 않아 눈병을 핑계로 모든 직책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이 38세이다. 이후 그는 삼요사(三要詞)도 읊고 향로봉시(香爐峰詩)도 지었는데 여기 향로봉시 같은 것을 보아도 그의 초연한 선경(禪境)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이요
천가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다.
청허한 베갯머리에 흐르는 달빛
끝없는 솔바람 소리 하염없이 들린다.
(萬國都城如蟻垤 天家豪傑若醯鷄
一窓明月淸虛沈 無限松風韻不齊)
영웅호걸과 부귀영화를 헌신짝같이 여기고 오직 자연과 함께 중화되는 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허한 베개다. 그 머리를 베게 한 베개가 청허하다는 것은 곧 실제의 방바닥에 놓여 있는 베개가 아니고 청허의 정신, 그 마음을 베고 있다는 상징적인 말이다. 즉, 모든 명리와 부귀를 떠나 청허(淸虛) 상태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즉 향로봉에 올라 먼 인가를 내려다보며 자기의 심경을 그려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청허(淸虛)상태, 즉 맑고 텅 비어 버린 공적(空寂)의 상태에선 아름다운 솔 소리마저 빛을 잃고 무료하게 들려오는 것이다. 앞의 오도송(悟道頌)에선 자연이 오경(五境)으로 연결되지만 이 향로봉(香爐峰)시(詩)에선 오경(五境)속에 자연이 빛을 잃고 만다. 여기서는 달빛 속의 청허한 상태가 주가 된다.
결국 휴정(休靜)은 이 시로 인해 정여립(鄭汝立)의 역모(逆謀)사건에 협의를 입어 서산은
모향산에서 투옥되고 사명(四溟)은 강릉에서 투옥까지 되었지만 이것은 이 시를 잘못 오해 또는 무고한 데서 온 것이다.
다만 언구(言句)에 얽매인 시의(詩意)만으로 보면 부귀나 영웅을 비방하는 반(反)국가적 해석으로 볼는지 모르지만 그의 청허한 마음속에 솔바람 소리마저도 무료하게 들리는 선경(仙境)을 알면 도저히 그러한 무고(誣告)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선조(宣祖)가 그의 이 시를 보고 충의를 더 살폈으며
이로 인해 선조가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과 많은 예물을 주어 더욱 친하게 되고 이로 인해 휴정(休靜)의 명성도 세상에 더욱 떨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서산(西山)은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삼가귀감(三家龜鑑), 운수단(雲水壇) 청허집(淸虛集)등의 저술을 쌓으며 그의 선(禪)과 시(詩)를 높이고 최후 79세를 일기로 선조 37년 (1604)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했는데 이 마지막 열반시(涅槃詩)도 유명하다.
원적암(圓寂庵)에서 산내(山內) 대중(大衆)을 모아놓고 마지막 설법을 한 뒤 자신의 초상
화를 가져오게 하여 그 뒤에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다.”(八十年前 渠是我. 八十年後 我時渠)라는 두 글귀를
쓰고 마지막 읊은 게송이
천 가지 계략과 만 가지 사량
화롯불에 떨어지는 한 송이 눈일세.
진흙으로 만든 소가 물 위를 가고,
대지와 허공이 깨져 버렸네.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이다. 여기서〈진흙으로 만든 소가 물 위를 가는〉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말이다. 흡사 동화에서 나오는 신비적인 이야기 같지만 선시(禪詩)의 경우는 이것이 적절하게 맞는 것이다. 즉 무생명의 진흙으로 만든 공예품이 산생명인 소도 걸을 수 없는 물 위를 걸어간다는 것, 이것은 선심(禪心)의 신통스러운 경계도 말하고 무생명이 곧 생명이 되는 생사(生死)를 초월한 경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생명과 생사가 자재되는 경계, 이것이 곧 선경(禪境)이기 때문에 그 다음 구절도 대지와 허공이 깨져버렸다는 가장 크고 완전히 존재하는 것의 무너진 상태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이 없기도 하고 없는 것이 있기도 하는 생사거래(生死去來)가 본래 둘이 아닌 경계가 잘 나타나 있다. 더욱 허공과 대지도 깰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또한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자연과 존재를 정복하면서 생사를 자유로이 왕래하고 있으므로 투철한 선경(禪境)에서 나온 선시(禪詩)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禪詩는 그 제자들에게서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대표적인 분이
편양언기(鞭羊彦機), 송운유정(松雲惟政), 소요태능(逍遙太能), 진묵일옥(震黙一玉) 등이다.
금빛의 가을달이여
그 빛은 온 누리 비치고
중생의 마음 물 깊이 고요해지니
곳곳에 푸른 빛이 어린다.
(金色秋天月 光明照十方
衆生水心淨 處處洛淸光)
편양선사(鞭羊禪師)의 시다 맑고 맑은 가을 하늘의 달, 하도 맑기에 금빛처럼
빛나는 달, 그 빛은 온 누리를 다 비추듯 진리의 광명은 사방을 비추고 인간의 마음도 깊이 무념의 적료(寂廖)상태에서 곳곳에 지혜의 광명을 펼 수 있는, 즉 마음의 고요에서 지혜가 나는 경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편양(鞭羊=1581~1644)은 현빈장(玄賓長) 장로(長老)에게 계(戒)를 받고 서산(西山)에게서 인증(印證)을 받은 분으로 그의 법계(法界)는 항상 태고(太古)에게 두었으며 임제(臨濟) 진풍(眞風)을 서산(西山)에게서 바로 받은 적사(嫡嗣)이기도 하다. 그의 다음 시를 보아도 임제의 할(喝)을 잘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서의 저 일갈,
천고의 사람을 귀먹게 했다.
해는 저물어 흰 눈이 내리는 데
옛처럼 춘풍이 일어나누나.
원숭이와 학의 마음 벗으로
옛처럼 춘풍이 일어나누나.
원숭이와 학의 마음 벗으로
홀로 고봉에 앉은 늙은이
나도 잊고 세상도 잊으니
영고성쇠가 한 가지 꿈이다.
(江西這一喝 千古使一聲
歲寒飛白雪 依舊起春風
猿學同心友 孤峰獨宿翁
忘我兼忘世 榮枯一夢中)
천고의 사람을 다 귀먹게 하는 일갈의 소리, 이 법(法)과 진리의 진동 소리에 겨울 찬 눈이 오지만 봄바람은 여전히 훈훈하게 불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천고만어(千言萬語)의 이론이나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法門)도 이 한번 고함치는 일갈(一喝)의 소리 속에 다 묻혀 버리고 이 법의 경계 속에는 찬 겨울도 춘풍으로 화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 속에 원숭이와 학과 벗하며 자신도 잊고 세상도 잊는 물아양망(物我兩忘)의 경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원래 할(喝)은 임제(臨濟)가 법의 진수를 나타내는 표현이었고 덕산(德山)은 방망이로 법을 표현했었다. 이 깊고 깊은 법의 진수는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고함이나 방망이로 그 경계를 전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로 임제할(臨濟喝) 덕산방(德山棒)으로 써 오고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선(禪)은 임제선(臨濟禪)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조(朝鮮朝) 불교(佛敎)의 중흥조(中興祖)라 할 수 있는 서산(西山)과 그 제자들이 임제할(臨濟喝)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음 유정(惟政(1544~1610)은 중종(中宗) 39년 10월에 밀양(密陽)에서 태어나 16세경
황악산(黃岳山)직지사(直指寺)에 출가한 분으로 18세에 선과(禪科)에 급제, 32세에 묘향산의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뵙고 사법(嗣法),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승(義兵僧)을 통솔해 많은 전과를 세웠다. 다시 일본에 건너가 강화(講和)를 성립하고 돌아온 그의
시(詩)에는 이러한 전국의 배경에 얽힌 것이 많다.
사명당(四溟堂)의 시는 사명집(四溟集) 권오(卷五)에 선시(禪詩) 25수, 권육(卷六)의 잡문(雜文) 중에 몇 수, 남아 있지만 그의 선경(禪境)은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다.
공겁 이전에 풍월이 밝았으니
소리 없고 냄새 없고 모습도 없다.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고 하늘을 덮어 가지만
공왕의 옛 성엔 떨어지지 마라
(空劫前時風月淸 無聲無臭又無形
興雲作雨傾天去 莫隨空王故國城)
이 수법사(琇法師)에게 주는 시는 그 소재 자체가 공겁(空却), 공왕(空王) 등으로 차원이
다르다. 공겁(空劫)이라 해도 시간의 최초를 넘어설 수 없는 다시 공겁(空劫) 이전으로 올라가니 그 시기가 어느 때라는 것은 도저히 분별로 추측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태초 이전에 풍월이 밝으니 이 자연은 언어도단의 경계며 그곳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모든 현상 분별의 것은 다 붙들 수없는 것이다.
이 붙들 수 없다는 생각, 그 생각까지도 온통 그저 없는 상태, 이 경계를 유정(惟政)은 읊고 있다. 이 경계는 공겁(空劫) 이전의 옛 성터, 즉 공왕(空王)의 옛 성터로 원래가 없는 곳의 옛 성터이기 때문에 여기엔 아무리 위대하고 모진 자연의 힘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유정(惟政)이 살기등등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앞에 나아가서도 조금도 두려워 하
는 빛이 없이 오히려 국가 안의 모물을 물었을 때 당신의 머리라고 했을 정도의 간담, 그의 이러한 자연 불도처(不到處)의 경계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리도 냄새도 모습마저 없는 유정(惟政)의 마음에 청정(淸正)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그의 법력(法力)과 선경(禪境)의 마음으로 왜적을 무찔렀을 때 승리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특사로서의 강화(講和)가 성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도 원광노형(圓光老兄)과 서소장노(西笑長老), 선송선사(仙宋禪師), 만공(萬空), 오산제덕(五山諸德)들과 종지(宗旨)를 담론(談論)하며 증시(贈詩)한 시도 많았는데 다음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장자가 부탁해 시교(示敎)한 시를 보아도 그의 튀어난 선취(禪趣)를 엿볼 수 있다.
대공간의 무진장한 것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음을
듣는 것 말한 것 없는데 무슨 번거로운 물음이,
구름은 청천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
(大空間法無盡藏 寂知無臭又無聲
只今聽設何煩間 雲在靑天水在甁)
대공간의 무진장한 법속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말한 것 듣는 것도 없는데 무슨 물을 것이 있느냐고 방망이를 단단히 놓는 것이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고 병 속에는 물이 들어 있는 이 자연의 현상 그대로가 듣는 것이요 말하는 무취무성(無臭無聲)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말이면서 말이 아니요 들으면서 들음이 없는, 또한 물으면서 물음이 없는 말하기 어려운 경계인 것이다. 유정(惟政)의 경쾌하고 높은 경계가 잘 나타나 보인다.
소요선사(逍遙禪師=1562~1649)는 담양인(潭陽人)으로 15세에 백양산(白羊山)에서 진대사(眞大師)에게 승려가 되어 부휴(浮休)에게 장경을 배우고 서산(西山)에게 법게法偈)를 받은 분이다. 그의 시에도 불교의 초연한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한 그루의 그림자 없는 나무
불 가운데 옮겨 심으니
삼춘의 비를 맞지 않아도
붉은 꽃 난만하게 피네
(一株無影林 移就火中裁
不假三春雨 紅花爛漫開)
불 가운데 나무를 심는다는 것도 이상한데 그 나무마저 또 그림자 없는 나무니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말들뿐이다. 만일 이것이 선(禪)에서가 아니면 미친 자의 말이요 동화 속의 말일 것이다. 물체에는 당연히 그림자가 있어야 되는데 이 나무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곧 실체가 아닌 것이다. 즉, 가체(暇體)인 그림자가 없는 진실상(眞實像), 이것은 본래의 청정자성(淸淨自性)을 말하는 것으로 이 자성(自性)의 나무는 불 속에 옮겨 심든 봄비를 맞지 않든 자유자재로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일찍이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갈파한 것처럼 자성(自性)의 나무가 있을 리 없지만 여
기에는 그림자 없는 나무기 때문에 그 존재가 가능하며 이것은 그의 법사(法師) 서산(西山)에게서부터 영향 받았던 구절이다.
운곡충미(雲谷冲徵), 송월응상(松月應祥)등과 함께 부휴문(浮休門)의 삼걸(三傑)로 있다가 뒤 묘향산 서산(西山)의 도성(道聲)을 듣고 찾아가 조사(祖師)의 서쪽에서 온 뜻을 묻고 법(法)을 받았는데 이때 서산은“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 물 위에 거품을 태워라. 우습다 소를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작來無影樹 燋盡水中漚(작 자(字)가 인터넷 옥편에 안 나온다.)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라는 법게를 주고 삼년 뒤에 개당(開堂)하도록 명한 것이다.
여기 그림자 없는 나무가 능히 물거품도 태우는 힘을 갖는 자성(自性)인데 이 자성을 말을 타고 다시 말을 찾는 것처럼 모르고 헤매고 있는 중생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 의하여 소요(逍遙) 자신도 구(句}를 바꾸어“우습다 소를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 바다의 거품을 다 태울 것이다.”(可笑騎牛子 騎牛更覓牛 작來無影樹 銷盡海中漚)라고 읊고 있지만 이 그림자 없는 나무는 이러한 연유 속에
서 더욱 애용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逍遙는 이 그림자 없는 자취를 타파하기에 주력한 것을 알 수 있다.
낱낱의 얼굴에 명월은 희고
모든 사람의 다리 아래 청풍이 분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 없는 자취를 타파하니
한 새의 울음소리 꽃가지 위에 아름답다
(箇箇面前明月白 人人劫下淸風吹
打破鏡來無影跡 一聲啼鳥上花枝)
모든 사람의 얼굴에 비친 밝은 달,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맑은 바람, 이것이 바로 거울에 비췬 그림자 없는 자취다. 비춰야 비췰 것도 없는 진실한 모양이 그대로 나타나면 이것이 바로 그림자 없는 자취를 타파하는 것이며 이때 새는 꽃가지 위에서 화창하게 지저귀고 있을 뿐이다.
끝으로 진묵(震黙)스님은 문헌보다 야사에 더욱 빛나는 분이다. 진묵(震黙=1562~1633)은 김제(金堤) 만경면(萬頃面) 불거촌(拂居村) 대률리(大律里) 사람으로 7세에 전주(全州) 봉루사(鳳樓寺)에 출가해 특별한 스승이 없는 분이었으나 뒤에 명리승(名利僧)이지만 법게를 서산(西山)에게 붙이라는 유지에 의해 서산(西山)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사(師)의 몰후(歿後) 약 200년 김기종거사(金箕鍾居士)가 그의 일화를 수집해 초의선사(草衣禪師)가 편찬한 얼마 되지 않는 유적고(遺蹟攷)上下 1冊에 의해서 이다. 전주 지방에는 지금도 구전(口傳)되어 오는 일화가 많은데 진묵(震黙)은 당시 왜인을 물리친 신비적 전설과 함께 안으로 힘 있는 생생한 전설들을 만들어 준 희대의 고승이었음임엔 틀림없다.
불거촌(佛居村)에서 부처가 난, 또한 본인도 자신과 나옹(懶翁)을 본사(本師)의 화방(化方)이라했고 또 시자(侍者)에게도 자기의 그림자를 부처의 그림자라 할 정도의 성승(聖僧)이었으며 이에 따른 이적(異蹟)도 많았다. 그의 이러한 도력(道力)과 함께 그의 시에 있어서도 호연한 대기의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하늘 이불 땅 자리 산 베개로
달 촛불 구름 병풍 바다로 술잔하며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문득 긴 소매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이다.
(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槫
大醉居然仍起舞 却嫌長柚掛崑崙)
그야말로 천지가 침실이 되고 우주가 마루가 되는 대국적인 기백, 천지를 주름하며 천지를 다시 토해내는 빼어난 웅자를 찾아볼 수 있다.
나한(羅漢)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신통은 너에 못 따르지만 대도(大道)는 나에게 물으라는 대도인의 법력과 그가 월명암(月明菴)에서 능엄경(楞嚴經)을 보다 일주야(一晝夜)를 선정(禪定)에 든 경우, 또한 상운암(上雲庵)에 있을 때 1개월 이상을 선정(禪定)에 들어 얼굴에 거미줄이 치고 무릎에 먼지가 쌓였을 정도의 경계 속에서 능히 곡차도 마음껏 마시고 소녀의 욕정에도 응해 주려 했던 호탕한 기백들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선(禪)에는 분별이 없고 경계가 없으며 그것이 천지와 우주에로도 통한다. 여기엔 거리낌이 없는 완전무애(完全無碍)다. 그저 앞뒤 없는 생각으로 순간순간이 움직일 뿐이다. 아무런 티끌 없는 마음 때문에 흡사 빈 그릇처럼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또 어디나 통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禪의 경계며 禪의 마음인 것이다.
때문에 禪과 詩는 일치점을 찾을 수 있으며 떠날 수 없는 숙명을 갖고 있기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높은 수준의 詩를 위해선 깊은 세계의 禪을 바탕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 역대 고승들의 선시(禪詩)를 감상할 가치도 있는 것이다. *
불교문학의 이론 김운학 일지사 1981.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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