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뫼의 한자명은 애초 설산(雪山). 눈 쌓인 산의 풍광이 좋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눈,그리고 눈 사이의 좁다란 길,소나무 몇 그루. 담백한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설뫼의 지금 한자명은 그러나 설 입(立)을 써서 입산(立山). 수묵화가 연상되는 지명을 버린 데는 내력이 있다.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큰 도랑을 사이에 둔 도랑 저쪽 경산(景山)마을에 그 내력이 걸쳐 있다.
경산 경은 볕 경이라서 볕뫼,볕미로도 불리는 경산. 안씨가 집성을 이룬 설뫼와 달리 이씨와 정씨 집성촌이다. 두 마을은 마을 이름에 자부심이 대단해 자기들 이름이 더 좋다고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눈 쌓인 산이 아무리 좋다 해도 볕이 나면 녹아버리지 않느냐는 볕뫼의 논박에 눈 설을 버리고 꼿꼿이 서겠다,입산이 되었다는 그런 내력이다.
눈 쌓인 산,설뫼. 꼿꼿하게 선 산,설뫼. 한자말이 어떻게 되든 설뫼는 산이다. 당당하다. 마을은 낮고 둥근데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도랑은 느리고 나직한데 설뫼를 감싸는 기운은 높고 날카롭다. 격랑이고 우렁차다. 큰 인물 아니면 큰 역적이 나온다는 풍수의 예언이 다행히 좋은 쪽으로 맞아 떨어져 충절의 고장 의령을 더욱 빛낸 마을,설뫼. 설뫼의 매운 내. 한겨울일수록 돋보이는 설뫼의 파릇파릇한 기운들.
임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와 함께 조선을 지킨 의병장 안기종도 설뫼사람이지만 근현대 설뫼의 매운 내는 단연 안희제다. 눈 쌓인 흰 산,백산(白山)을 호로 썼던 사람. 평생을 파릇하게 산 사람. 독립운동한 죄로 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 출옥한 지 세 시간만에 숨진 사람. 고향 의령 땅에 백산로,부산 동광동에 백산거리,도로에 거리에 호를 붙인 사람. 백산 안희제.
설뫼 최고의 갑부 백산. 갑부지만 삶은 신산하다. 신산하지만 뚜렷하다. 교육자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사업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종교인으로서 짙은 족적을 남긴 백산의 삶. 백산의 다양한 갈래의 삶은 그러나 종착지는 오로지 한 곳이다. 독립. 마음의 안에서 가려고 한 종착지도 마음의 밖에서 가려고 한 종착지도 독립이다. 조선의 안에서 가려고 한 곳도 조선의 밖에서 가려고 한 곳도 독립,독립,독립이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방 사이에 백산은 의령과 구포,대구에 잇달아 학교를 세운다. 일본에 맞서려면 아이들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가 세운 학교 중 입산초등학교 전신인 창남학교는 영남 사학의 시초다. 구포 초등학교 전신인 구명학교도 그가 돈들인 학교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에는 장학회를 만든다. 제헌 국회의원 전진한,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국어학자 이극로가 백산의 대표적인 장학생이다.
백산은 어딜 가도 백산이고 무얼 해도 백산이지만 백산을 가장 백산답게 한 것은 백산상회다. 곡물 해산물 따위를 떼다가 되파는 조그마한 무역상회,백산. 나중에는 경주 최부자 돈을 끌어들여 부산 최대의 무역회사이자 한국 최초의 현대적 주식회사가 된다. 백산상회는 부산 동광동에 본사를 두고 서울 대구 안동 원산 그리고 중국땅 봉천 안동으로 퍼져나간다. 퍼져나가 백산상회 지점이 독립운동 지점이 된다. 백산상회 돈이 곧 독립운동 돈이 된다.
광복 직후에 백범 김구가 밝힌 대로 상해 임정 군자금의 6할을 댄 백산상회. 한편으론 일제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을 자임한 백산상회는 그러나 설립 십 몇 해만에 문을 닫는다. 회삿돈이 독립자금으로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낌새를 챈 일제가 툭 하면 수색하고 압수하고 잡아가고 고문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정리한 백산은 서울로 가서 민족지인 '중외일보'를 인수,총독정치를 비판한다.
그러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악랄해지자 중국 망명길에 나선다. 발해 도읍지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워 막막한 처지의 그곳 동포들을 먹이고 재우고 공부시킨다. 우리는 우리고 일제는 일제라며 독립심을 키운다. 거기서 단군을 숭배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알자며 사비를 들여 포교에 애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본 일제에 잡혀간 백산은 아홉 달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풀려난 지 세 시간만에 운명한다. 1943년 9월 2일 새벽 2시. 백산의 나이 오십구 세. 편하게 살려면 한평생 편하게 살 수도 있었던 설뫼 최고의 갑부가 환갑도 못 채우고 고문당해 못 먹어 병사한 것이다. 독립운동하면 삼대가 굶는다 했던가,백산의 신산한 삶은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백산이 백범 몽양과 각별했단 이유로 좌익으로 오해받은 장남은 갖은 고초를 겪는다. 장남의 2남5녀 자녀 가운데 대학을 나온 이는 큰 아들뿐. 장남의 큰딸은 설뫼 생가 앞에서 망개떡을 팔아 생활하고 있다.
'새는 한가함을 즐기고자 골짝을 찾는데 해는 한가함을 싫어하여 중천에 떠 두루 비춘다.' 백산이 열일곱 때 지은 한시의 일부다. 중천에 떠서 세상을 비추는 해가 되고자 했던 백산. 동지섣달 설뫼의 마늘밭을 비추던 해가 막 넘어간다. 한나절 햇볕을 잘 받은 마늘이 파릇하다. 마늘내가 파릇하다. 햇볕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 마늘밭을 보는 사람 눈매까지 파릇하다. 맵다. dgs1116@p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