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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 초청 작품 - 시와 산문 |
돌아오지 않는 바다
황 금 찬
바다는
돌아오지 않고
울고 있었다
제2의 지남호는
남태평양에서
난파되어
돌아오지 않고
달이 뜨면
바다는
고향 언덕의
부엉새가 된다
돌아오지 않는
동진호는
동족에게 끌려가고
소식이 없다
바다는
돌아오지 않는다
수평선 아득히
떠나만 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바다야
돌아오지 않는 바다야 -
고 향
황금찬
8월에
휴가를 얻어
고향 집을 찾았네
몇 년만인가
그러니까 5년하고
3개월
참으로 오래간만이었지
고향은 변하지 않았데
하늘엔 구름이 맑고
앞뜰 감나무 숲에선
매미떼가
8월을 이야기 하고 있데
들릴 듯
흘러가는 은하수와
인정의 등불 하나 켜든
소쩍새가 맞아주었고
고향을 지키는
이웃집 노인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는 표주박으로
구름을 떠
마시고 있었다
약 력
황 금 찬
* 1918년 강원도 속초 출생
* 1953년 <문예> 와 <현대문학>으로 등단
* 시집 : <현장> <오월의나무> <분수>
<나비> 등 다수
* 수필집 : <행복과 불행사이>외 17권
* 시문학상
* 월탄문학상
* 대한민국 문화상
* 한국기도교 문화상
* 서울시 문화상
* 대한민국 보관 훈장
살아가는 일
신봉승
잠들기 전
파도소리는
어수선한 함성이다
그 술렁거림은
환상의 돌문을 열고
잊혀질 일들과
있음직한 일들로 잠못이루게 한다.
그 노여움은
마음 안에까지 들어와 철썩이며
살아온 일과
살아갈 일들로 가득하게 한다.
잠들기 전
파도소리는
아득히 간직되는
뒤척임이다.
초당동 소나무떼
신봉승
그대들은 나이테로
세월을 간직하면서도
아픔도 서러움도 내색하지 않았네.
초당동을 스쳐간
피멍든 가슴앓이
눈물에 젖은 옷자락을
한으로 말릴 때도
의연하였네
봄에는 노란 꽃가루를
안개로 날리고
여름 비바람
가을 무서리
쏟아지는 눈자락으로
드센 가지 꺾이어도
푸르기만 하였네.
초당동 소나무떼는
억센 톱날 도끼날도 받아들이는
이웃을 다독이는 사랑이었네.
세월을 지키는 파수꾼일레.
약 력
신 봉 승
* 1933년 강릉 출생
* 강릉사범, 경희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 <현대문학> 문학평론 추천
* 저서 : <텔레비젼 드라마 시나리오 작법>
<바보상자>, <영상적 사고>, <내 인생 초록물 들이면서>
<연산군시집>, <조선왕조 500백년>
* 한국방송대상, 아시아영화제 각본상, 한국펜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상등 다수
* 현: 한국역사문학연구소 개설
펜 한국본부 이사
동해안 서정
- 부구에서 -
이 성교
늘 흥한다는 부구리
우리 외삼촌 이름도 영흥씨였다
우리 외삼촌은 욕심이 많아
가는 곳마다 근심의 씨를 뿌렸다
그래서 부생쟁이란 별명이 붙었다
하룻밤을 자고나면 달라니는 세상
부구 앞바다도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
봄되면 달맞이꽃이 운연스럽게 피던꽃
지금도 소금 냄새 하나 나지 않고
시퍼런 얼굴을 하고 있다
섣달 대목장날
이성교
그냥 밀려야 했다
좁은 시장에
쏟아지는 사람들로
손돌메기 추위도
열 앞에서는
녹아지는 법
산골 사돈도
바닷가 아재도
다 한 곳으로 만나
서로 안부를 전했다
생젼에 구경 못하던
물건들도 다 나와 있었다
어느 골목에선가
아련히 피우는
국 끓이는 냄새
일년중 마지막 인심은
그리도 푸짐했던가
일본놈들이 악착스레
조선 설을 못 세라지만
조상제사는 알뜰히
지내야 했다.
이것 저것
눈으로만 사는 물건
그 중에서도 값싸고 푸짐한
장치고기가 어물전에서
제일 잘 팔렸다.
약 력
이 성 교
* 강릉상고졸
*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장
일 차 집
李 仁 秀
한 가락하던 친구가 덜컥 서울을 버렸다.
문패를 떼고 허드레 잡동사니 물리고
조금 괜찮은 마누라 하나 달고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
무릎을 맞대고
왈가알부 마시는 일차집
무어니 무어니 해도
누가 뭐라 해도 오늘 밤은
쐬주가 술이다.
낮게 목소리 깔며 외치는 단골 깔때기도
쐬주 안주 회친 오징어다리 물렁뼈도
흔들리는 상머리에 남아도는 나도
보꾹 아래 자꾸자꾸
조그만 잔을
높이 들어 세우기만 했다.
취한다고 거시기가 한 잔
취한다고 머시기도 한 잔
그런 그런 핑게가 얼큰하게 좋았다.
다 그런거야 뭐 그럴거야
손뼉치며 함께 부르는 노래 끝에
혼자 한 잔 잔뜩 마시는 마지막 잔
낙향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낙향이란 그 말 한 마디가
화살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우당탕 술상을 엎고
옷 벗을 때까지 먹고 또 마시며 챙기자
는 개같은 소리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李 仁 秀
한동안 나는
펄럭이는 그늘에 살았다.
발길이 내닫는
新作路의 막바지
마른 갈기만 날리는 산발치
빛 낡은 葬布
끝동을 풀어 헤친 하늘
멧부리를 치받는
구름은 앞니가 죄다 빠졌다.
자욱하게 어지러운
素材에서
겨우 處理가 끝나가는
아
새로 마련한 벌판에서
떠나간 地平을 보았다. (*)
말을 잃은 나의 죽음
이 영 섭
어느 해 겨울
나는
유폐된지 오랜 내 유해를 안고
헤아려지지 않는
무게에 눌려
폐광 속 깊숙히 손을 묻었다.
바람은 불었지만
그때 나는
칠흑의 벽 앞에
오열할 수도 일어설 수도 없었다.
눈을 들면
지즐히 내리는 먹비가
황량해진 들녘의
끝과 끝에서 들내는데
귀에 부서져 내리는
울음
여린 귓밥을 훑고 있는
이 아픈 울음에
말은 해 무엇하며
소리는 내어
어디에 울림 줄 수 있으랴.
죽음은 화사했다고
네 태어나던 눈빛이 말해 주던걸
그 순수의 벽을 허물순 없지.
이후
희생의 날빛이 밀린다 해도
칠흑의 의지는 깨지 말아야지.
겨울 들에서
이영섭
우리의 겨울은 냉혹한 폭력을 데불고 있었다.
빙점의 한계는 하상에 깔앉아
가끔 그 응얼진 분노의 입김이 강심의
얼음 두께를 깨고 밤을 흔든다.
아침저녘 펄럭이던 빨래줄에는
겨울의 찌든 내의가 걸리고
깨어진 어깨에 얹힌 빛바랜 해는
공포에 밀려 핼쑥한 한낮에 뜬다
.
거리의 모든 눈엔 번져가는
죽음이 해일을 기다리벼 유랑하는데
시푸런 물빛에 꽃을 피울까
식어가는 체온에 투사된 미망을
신정에 편 목차만큼 눈여겨 보아 두자
나의 겨울이 딛고 넘은 문지방에
동전 몇닢 널렸대도
나는 이미 깊은 파도에 침잠하여
턱을 괴고 시름한들
오늘의 슬픈 소망은 나를 부축할 수 없다.
약 력
이 영 섭
* 고대교육대학원 수료
* < 현대문학> 지에등단
* 제3회 한국잡지기자상 수상
* <교육세계신문> 편집국장
강릉세시기
전용찬
1992. 7. 29 나는 강릉 경찰서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전임지 춘천에서 직원들과 송별회를 마치고, 늦은 여름밤을 가르며 강릉으로 떠났다. 자정이 넘어 대관령 구비구비 솔나무에 부딪치는 소슬바람 소리는 나를 환영해 주기에 앞서 무거운 마음을 휘감고 있었다.
옆자리에 탄 내자는 어린 시절 자기 고향으로 간다고 흥얼거리지만 치악산 산자락에 늙으신 부모님을 옆에 두고 스쳐지나오는 내 마음은 그리 편치만은 않은 것 같다.
어제도 또 오늘도 나의 갈길 멀기만 하다.
이산을 넘고보니 저산이 더 험코나,
언제나 이길 다가고 편히 쉴건가
부임 첫 날 저녁식사 막 끝날 무렵 수사과장이 귓속말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중년 남자가 죽은 채 마대 자루에 넣어져 남대천 다리밑에 마구 버려졌다. ”는 보고다. 부임 신고 치고는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서둘러 관할 파출소에 들러, 수사 본부를 차려 놓고 수사 방향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강릉은 범죄 소굴인가?
작년만 해도 8, 411건의 범죄를 처리했다.
그 중 살인(11건), 강도(19건), 절도(650건), 강간, 폭력 등 소위 5대 범죄만도 1, 600건이나 발생하는 우범지역이다.
포남동 소나무떼가 늘어진 후미진 곳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만도 몇 건이 해결되지 않은 채 시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한다.
경찰관도 잠복 근무 중 범인의 칼에 맞았었다고 한다. 화려한 강릉의 속은 너무 썩어가고 있는데 안타까웠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야무지게 챙기기로 했다.
강릉의 관문 네 곳에 취약시간 근무체제를 확립하고, 최첨단 컴퓨터 C3시스템도 설치하고 경찰관도 100명이나 증원시키고, 중‧고교 퇴학자(599명)를 찾아나서 추적하면서, 직원들의 눈동자를 무리해서라도 굴리기 시작했다.
살아 움직이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때로는 채찍질도 하고 위로도 해주면서 부지런히 뛰었다.
일년간 열심히 일하다보니 살인 강도 사건을 모조리 잡는 등 강력 미제 사건은 없고 절도범만도 69%나 감소하고 “검거가 최선의 예방”이라는 분위기가 점점 잡혀갔다.
신이 나고 재미도 있다.
교통사고, 사망사건도 연중 60명으로 91년에 비해 5명이 줄었지만 ’93 상반기에는 19명으로 작년 동기 41명에 비해 22명이나 줄이는 대성과를 거양했다.
사망 사고가 원주 79명, 춘천 87명이고 보면 훨씬 많이 줄이는 실적을 올렸다.
범죄꾼만 잡는 딱딱한 경찰이 아니라 문향의 도시 강릉에 걸맞게 “문화 경찰이 되자”는 구호를 내걸고 시민에게는 더욱 친절한 경찰, 번죄꾼에게는 무서운 경찰, 하늘을 켜다보눈 여유있는 경찰이 되고자 온갖 정선을 다하면서, 오늘 하루를 열심히 뛰고 있다.
짙은 향기 그윽하니 그 꽃 필시 고으려니
산 넘고 물 건너 천리인들 못갈소냐
꽃 찾아가는 나비보고 어리석다 말어라
머리가 묵직하고 답답할 때 경포대하며, 사근진 멍게 바위, 안목항, 소금강에 안겨보는 기분은 또한, 버릴 수 없는 추억이었다.
10월 초 이튿날 나는 경포대를 찾아 시 한 수를 지어 보았다.
名湖鏡浦今一尋
客人休心轉忘수
滄海洗耳飛?世
明月定座聽佛音
歲月流水景不變
比處江山弟一樓
유명한 경포에 오늘 찾아드니
객이 마음을 놓고 근심을 잊었도다
먼 바다에 귀를 씻고 세상먼지를 하늘에 날리고
달 밝은 밤에 정좌해서 앉으니 부처님 음성이 들리는구나
세월은 유수와 갗은데 경치는 아직도 변치 않고 아름다우니
이 곳이 과연 강산 제일루이구나
강릉에서 가장 큰 보람은 나의 뿌리를 찾게 되었다는 점이다. 경포대 옆 대전동에는 나의 조상 5대조 할아버지가 양지 바른 곳에 누워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곳을 참배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글을 묘소 입구에 각인해 두었다.
古來初幕?根視
名湖鏡浦今日尋
謂忠孝墓焚香拜
多年官路轉忘棺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면서 조상의 뿌리를 살펴왔는데
유명한 경포를 찾아들어
충字 효字 할아버지의 묘소에서 문향하고 절하니
다년간 관직 생활에서 쌓인 피로를 모두 잊게 되었도다.
나는 또 기회만 있으면 소금강을 자주 찾았다.
一景은 어디메뇨 소금강 만물상이라
총총걸음 멈추고 방울땀 씻는도다.
불뚝 솟은 남근본 아래 선녀탕이 보인다.
억년바위 헤집고 자란 청솔가지에
한가로이 노니는 백학 두어마리
뭉게구름 피어 오른 곳에 구료폭이 숨었도다.
석양에 떠오른 초승달이 가지끝에 걸렸고,
장부의 한많은 사연이
힘찬 물줄기에 씻어진 듯 하여라.
붉은 단풍에 병풍친 기암절벽
율곡이 머물던 학유대여
물소리 요란한데 산천은 말이없네
대관령 옛길 첫머리에 “대관령 박물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홍귀숙 여사가 평생 모은 조상의 얼을 모두 강릉으로 가지고 왔으니, 이 곳에 복덩이가 굴러 들어온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 박물관을 여니 즐거운 마음에서 축시를 남기었다.
東向滄海洗?世
西?關東和氣充
南山七峯園月明
北方普賢來慈毖
松風羊岩虎象守
萬里蒼空点浮雲
仙人好客其情香
比處기武陵桃源
將脫衣冠?絶景
동쪽 넓은 바다에 세상 먼지를 깨끗이 씻어 내고,
서쪽 대관령에는 화기가 충만하며,
남산 일곱 봉우리에는 둥근달이 밝기만 하구나
북쪽 보현사에는 자비심이 몰려 오고,
솔바람, 산양바위, 호랑이 상은 우릴 지키고
만리창공에 한점 구름이 걸려있네.
선인이 객을 좋아하여 그정이 향기로우니
이곳이 곧 무릉도원이여라.
잠시 의관을 벗고 이절경에 쉬어나 가세.
나는 고단지서를 초도순시하기로 하였다.
강릉에서 4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명주군 왕산면 고단지서 계곡을 돌아 그 곳을 처음 찾았다.
고단지서에 업무보고를 듣고 지서 관할 끝이 어디냐고 물었다. 지서에서 두 고개, 세 고개를 넘어 비포장 도로길로 백리를 더 가야 하는데, 그 곳에 순찰을 돌자면 하루종일 겨우 돌 수 있다고 한다.
해방 기념으로 덕우산 기슭 시원한 냇물가에 지어진 칠연정을 찾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외롭게 걸려 있어, 못쓰는 글일망정 동네 유지분들의 뜻에 따라 필연정에서 느낀 소감 한 수를 그 곳에 걸게 되었다.
多年切幕七聯亭
今日得意登高山
山下村村從俗事
深谷靑松同禪我
比水根千里漢江
峰峰皆是仙氣胎
오랫동안 칠연정을 간절히 생각하던 끝에
금일 생각이 있어 높은산에 올랐다
산아래 마을 마다에는 어지러운일들만 줄을 잇고 있는데,
깊은 산 푸른 솔나무는 마치 선경에 들어있는 나와 같고
끝없이 흐르는 이 물은 한강 천리으 근본이요,
산 봉우리 봉우리마다 선기가 잉태하여 있구나
칠연정에서 700여 미터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덕우산 샘터를 보게 된다.
500년 묵은 피나무 뿌리 밑에서 쉼없이 흐르는 이 샘물은 한강천리 발원수이나 한강의 생명수이기도 하다.
이 곳은 군수님과 협조하여 성역화하고 기념비를 세워 고랭지 채소도 팔고 산채나물도 팔아 농가 소득도 올릴겸 정화하기로 했다.
강릉 경찰서 관할 구여근 대개 영동 지역인 강릉시, 명주군으로 알고 있는데 실지 다니고 보면, 대관령 넘어 영서에 관할 구역이 더 넓다는 것도 오늘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길 1리, 2리, 3리, 비포장 외길을 짚차로 답사하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오는 자동차를 만나면, 엉거주춤 산 쪽으로 겨우 겨우 비켜가는 길.
중국의 실크로드를 방불케 하는 경치 좋은 신비의 땅이다.
옛 사진에서 보던 태고의 외나무 다리도 건너고, 명경지수 아래 노니는 물고기의 유유자적하는 모습에 먼지 묻은 우리가 숙연해진다.
대길 3리에 있는 분교의 학생 수는 모두 6명이란다.
모처럼, 경찰 서장이 이 곳을 방문한다고 하니 이장댁에서 동네 아낙과 노인이 모두 모였다. 십여 명이 채 안 되는 사람이 들에서 자란 닭과 물고기 조림을 끓여 놓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 이 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72세된 노인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알기로는 경찰 서장이 이 곳을 방문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란다.
하늘에서는 첫 동네, 앞에는 강이 흐르고 산과 산이 좁게 어우러져 뜰이라고는 없다.
화전 밭자락 한떼기와 강가에 장마로 인해 이루어진 비옥한 땅에는 감자꽃이 만발하여, 이념과 사상도 없고 저자거리 계산도 필요없는 산사람이라기 보다, 하늘 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제도와 법률이 필요없는 분들이었다.
경찰 서장이 방문한 것 자체가 계면쩍었는데, 너무 후대해 주어 고마웠다.
날이 저물어 구절리로 향해 정선아리랑이 태어난 애오라지 강가에서 무심한 뱃사공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집에 돌아오니 6시간이나 걸렸지만, 오늘의 초도 순시는 정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뜰의 기도
함종덕
나의 뜰은 낙엽 몇 잎이 뒹구는, 손바닥만한 앞마당이다. 그러나 내겐 가장 편안하고 소중한 공간이다.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계절의 향기가 있는 뜨락에서 나는 하루의 일과를 기도로부터 시작한다.
나무라야 향나무 몇 그루와 라일락, 청단풍, 대추나무, 모과나무 한 그루씩 뿐이지만. 이건 내가 십여년 전에 손수 사다 심은 것들이었다. 정원 가꾸기에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난 정서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담장 밖엔 6미터 도로가 있고 그 건너편 빈터엔 새로 이층집이 들어섰다. 그러니 단층인 우리집은 상대적으로 초라한 오막살이집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마저 격이 하락된 것으로 느껴졌다. 그보다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앞집 이층에서 우리집 안방, 거실 들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아것이 아주 싫은 것이었다. 아내는 더욱 질색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아침만 먹으면 나가 버리고, 아내는 온종일 앞집 이층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우리집 안방을 내려다 보며 없이여기는 듯한 말소리를 혼자서 들으며 지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름철에도 창문을 닫고 들앉아 있어야 하니 미칠 지경이라 했다. 아내의 말에 나도 공감이 갔다.
정원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집에 더 높은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서 우리집 안방과 거실을 가리워 보고 싶었다. 그래서 구파발, 동대문 시장, 안양 석수동까지 돌아다니며 나무를 사다 심게 되었다. 값싸고 키 큰 나무로서 우리집 담장 안에 심으면 앞집 이층 창문까지 어지간히 가리워질 것을 골라 사온 것이었다. 원래 심어져 있던 몇 그루의 나무를 아낌없이 캐버리고 새로 사온 나무로 갈아 심었던 것이다.
옛날 고향집에는 대문도 없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사뭇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살았었다. 오히려 방문을 닫고 사는 집이 이상해 보였다. 지나가던 보부상도 집주인이 있건 없건 처마밑 섬돌에서 쉬어 갔었다. 이웃집에서는 그릇이나 농기구를 주인이 있건 없건 가져다 쓰고 돌려다 놓기도 했다. 뒷간 옆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집을 지켜 주었고, 밭둑이나 밭 귀퉁이에도 감나무, 밤나무가 지천이었다. 그래도 그 나무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었다. 이제 이렇게 자질구레한 나무 몇 그루 심어 놓고 그것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남이 방안을 들여다 보는 것이 싫어서 대낮에 문을 닫아 걸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다. 조금만 더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마음은 항시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그 고향도 이제는 옛고향과 같지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변해도 이만저만 변한 게 아니며, 나를 반겨 줄 사람도 많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 속에는 늘 그 옛고향이 지워지지 않고, 돌아가야지 하는 일념은 변함이 없다.
앞마당에 나무를 심고 십여년이 지나는 동안 이 나무들이 자라서 이제는 앞집 이층도 가리워졌다. 남이 보기에는 대단찮은 나무지만, 이것들은 우리집 담장 안에 심어져서 우리 식구에게는 아주 소중한 나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녘 생각하면 이 나무들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나 주인을 잘못 만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름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벌레도 잡아 주지 안하 무척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에서 흘러 나오는 별의별 소리 다 들으며 ‘인간이 저따위로 살 수도 있는가’하는 실망도 컸었을 것이다. 아무튼 말없는 나무이기에 나는 언제나 이 나무 앞에 나설 수 있었다. 이제는 웬만하게 자라서 잎이 꽉 차고 보니, 작은 집이나마 제법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랐다고 해서 거 값나가는 나무는 하나도 없다. 또 다른 집에 옮겨 심는다면 어울릴 수도 없을 것이다.
여름철 긴 하루 해를 보내자면 혼자 집을 지키는 아내는 몇 번익 이 뜨락에 나와서 나무를 쳐다 보곤 했다. 대추가 열리기 시작하면 그것이 굵어져가는 것을 대견스럽게 바라보 았고, 모과는 꽃도 많이 피웠는데 왜 열매를 맺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정을 주던 한 때, 이런 시간들이 잠시나마 피로해졌던 심신에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나도 아내도 멋이 있다거나 낭만이 있는, 호사스러운 인물은 못된다. 생활에 쪼들리며 환경을 견디어 보자는 발버둥으로, 그냥 세월을 따라가는 초로의 나날이 엮어져 갈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 뜰을 다음 주에는 이별하게 된다. 이 집을 팔고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십오년을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 학교 보내고, 시집 장가 보내고 나도 승진하고‧‧‧‧‧‧. 지나온 자취를 보면 평생의 귀중한 한 때를 이 집에서 보낸 셈이다. 집값은 형편없이 떨어진 곳이다. 십여년 전부터 팔아버리려고 복덕방에 드나들었던 집인데 이제 겨우 떠나게 되었다. 아까울 것은 하나도 없지만 우리 식구의 기억은 영원할 집이다.
오늘은 일요일니까 느즈막히 일어나서 뜰에 나와 쭈그리고 앉았다. 오늘따라 신통찮은 이 뜰에서 나무를 쳐다보는 마음에 새로 와닿는 정이 있다.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다. 조용히 일어서서 대추나무를 어루만져 본다. 아직 덜익은 대추를 만져 본다. 내 손때가 안 묻은 곳이 없는 나뭇가지에 대화가 된다. “잘 자라거라. 그리고 우리집 잘못된 흉일랑 너무 보지 말아라. ” 나무마다 그 앞에 다가서서 중얼대는 기도를 꼭 알아 들어 줄 것만 같다. 미풍이 지나간다. 라일락의 누런 잎이 또 하나 떨어져 서리국화 포기 위에 내려 앉는다. 가정에 등한하다고 항상 아내로부터 핀잔을 받아 왔다. 화단의 꽃포기를 보살피기는커녕, 뜰 안의 비질도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은 아내가 다 했다. 사십년을 같이 살면서 저알 무정한 남편이었다고ㅗ 이제 겨우 그것을 알 것 같다. 다시 한 번 뜰 아늬 나무를 쳐다 본다. 내 옛고향의 나무를 그리면서 애정과 기도가 담긴 시선으로, 탈없이 잘 자라기를 빌며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다.
등뒤에 조용한 인기척을 느낀다. 언제부터 등뒤에 서 있었던지 아내가 다가 서 있는 것이다. 햇볕이 말리울 빨래를 들고, 그도 나무를 쳐다보고 서 있는 것이다.
(저자 약력)
‧ 강릉농고, 강릉상고, 춘천여고 교사
‧ 일본 도꾜 한국 학교 파견 교사
‧ 선린상고 교감
‧ 영등포 중학교장 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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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담배에 얽힌 잡담
엄기원
종종 신문에서 담배와 술의 해독에 대한 기사를 읽는다. 그런가 하면 TV의 심야 프로에서 술‧담배의 해로움을 다루는 것도 본 일이 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담배의 해독성에 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우리집 아들‧딸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놈들에게 애비가 감사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예나 지금이나 술‧담배가 늙은이들에겐 별 문제가 아닌 듯 싶다. 늙은이들이야 살만큼 살았으니까 술마시다 죽으나 안 마시다 죽으나 안타까울 게 없다. (그렇다고 늙은이는 빨리 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
새파란 청소년들이 무절제하게 그 독한 담배를 피워대고, 독한 술을 죽어라 하고 마셔대다가 이것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아기를 가진 임산부가 담배를 많이 피웠을 때, 뱃속에서 자라는 핏덩이 아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TV 화면에서 보았다. 굳이 TV에서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담배 연기가 체내의 핏덩이 생명에게 좋을 까닭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한평생 담배를 못 피우고, 술 또한 배우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신에게 감사한다.
내가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니까 어떤 사람은 나더러 교회의 장로가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웃으면서 “장로는 커녕 올바른 집사도 못 됩니다. ” 하고 웃음으로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 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 우리집은 담뱃집이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에게 담배를 팔기도 했지만, 이따금 아버지 친구들이 사랑방에 모여 앉아 ‘담배내기’ 하투도 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밖에서 물심부름, 술심부름을 하는 게 즐거웠다.
“기원아, 냉수 한 그릇 떠오너라!”
“네!”
하고 재빨리 물 한 대접을 떠다 올리면서 어른들이 농담을 하며 신나게 화툿장을 두들겨대는 광경을 볼라치면 얼마나 멋지고 재미있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아버지 앞에 권련이 열댓갑씩 쌓인 걸 볼 수 있다. 그럴 땐 괜히 나도 큰 부자가 된 것처럼 신나서 몰래 어머니께 “아버지가 담배를 산더미처럼 땄어요. ” 하고 싱글벙글 좋아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도 빙그레 미소짓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4학년 때 여름 어느 날이었다. 오후 3시쯤 되면 마을의 내 또래 소년들은 소를 먹이러 칠봉산으로 올라가는데, 어떤 형의 꼬임에 집에서 ‘장수연’이란 봉담배 한 봉을 훔쳐 가지고 나왔다. 우리의 아지트인 피나뭇골 중턱의 묘 둥지에서 소를 풀어 놓고 우리는 내가 집에서 훔쳐온 봉담배를 펴 놓았다.
이미 담배를 피울 줄 아는 형의 지시대로 댓 명이 둘러앉아 담배를 신문지 조각에 말았다. 원뿔처럼 말아 뾰족한 쪽을 입에 물고 우리는 어른 흉내를 내며 성냥불을 그어댔다.
나는 그 동안 담뱃연기 자욱한 사랑방은 드나들었지만 담배를 피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른 흉내를 내며 담배를 피워 문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한 절반쯤 피우던 나는 그만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의식을 잃고 잔디밭에 쓰러져 버렸다. 아마도 나의 허파가 몹시 약했던 모양이다.
그날 나는 다른 동무들의 부추김을 받아 집에 돌아오자, 저녁밥도 못 먹고 그냥 쓰러져 혼수 상태로 밤을 지냈다.
아, 그 담배의 독성!
초등 학교 4학년 여름 어느 날의 경험이 일생 동안 내게 담배를 멀리 하게 하였던 좋은 체험이자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담배가 나의 군복무 시절에는 큰 도움을 주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벌써 30년도 넘는 아득한 옛이야기다. 논산 훈련소의 신병 교육을 마치고 배치된 부대는 5사단 36연대 1대대 1중대였다. 최말단 소총 소대에 배치되었는데, 그 때만 해도 소총 소대에는 집에 안부 편지 한 장 쓸 수 없는 무학자들이 많았다.
이런 소대에 처음 가서는 가장 계급이 낮은 쫄병이니 밤으로 불침번 서는 것이 일과가 아닌가!
그 때 나는 지급되는 담배가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비위가 없어서 담배를 상급자에게 주지도 못하고 받는 대로 관물함 구석에다 자꾸 쌓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쯤 되니 담배와 건빵이 한 동안 지급이 안 되었다. 그러자 담배 골초들은 돌아다니며 꽁초까지 찾아 피우느라 야단이 아닌가.
나는 관물함 안쪽 깊숙이에 모아 두었던 담배를 꺼내 상급자들에게 몇 갑씩 나누어 주었더니 그들은 십년 대한에 소낙비 만난 듯이 담배를 피우면서, 그 다음부터는 일등병인 나를 불침번에서 해방시켜 주는가 하면 어떤 전우는 내 식사 당번까지 대신 해 주는 것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나는 지금 시중에 어떤 이름의 담배가 있는지, 값은 얼마인지 전혀 모른다. 혹시 검문에서 담배 이름이나 값을 묻는다면 나는 꼼짝없이 간첩으로 몰릴 것만 같았다.
작년 여름, 중국 연변에 갔다 돌아올 때 그 곳 문인 한 분이 담배를 두 갑 주었는데, 그 담배가 아직도 집안 어느 곳에 잠들고 있다.
이젠 술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술은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고 해서 ‘술’이라는데, 나의 목구멍(食道)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가는 모양이다. 도무지 술이 넘어가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맥주는 음료수라 한다. 그런데 내겐 가장 쓴 술이다. 내겐 무슨 술이든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어던 술이든 한 잔에 온몸이 붉어진다. 좀 붉어진다 하더라도 기분이 좋다든지, 힘이 난다든지 하면 그런 멋으로라도 마시겠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술자리에 가면 나는 안주만 축내게 된다.
사실 고급 술자리에 갈수록 안주는 값만 비싸고 먹을 게 별로 없다. 그럴 땐 옆에 앉은 색시라도 잘 데리고 놀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런 위인이 못 된다.
기껏 폼을 잡고 상대방에게 얕보이지 않으려고 입을 여는 게 “아가씨 이름이 뭐야?” 이런 말이다.
“네, 진이라고 해요. ” 그들의 이름은 ‘진’ 아니면 ‘현’이다. 그 다음에 내가 할 말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그 다음부터는 난감해진다. 담배도 못 피우지, 술도 못 마시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면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고역을 치루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술 때문에 가장 고역을 치룬 것은 연변에 갔을 때다. 작년 여름 방학 때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 도시인 연길에서 연변 조선족 군중 예술관과 한국 웅변협회 서울시 본부 공동 주최로 ‘제2회 한국어 웅변 대회’가 개최되었다. 나는 웅변인협회 서울시 본부 이사장 감투를 쓰고 있기에 우리측 웅변 연사 및 학부모들을 데리고 중국에 건너 갔던 것이다. 엄청난 환영을 받으면서 행사를 잘 치루었는데, 한 일 주일을 체류하는 동안 날마다 술자리에 초대되었다.
맥주 한 컵에 취하는 내가 중국의 독한 술을 감당하기란 실로 역부족이 아닐 수 없었다. 함께 간 K회장은 술을 곧잘 하는 편인데도 나중엔 술병이 날 정도였다.
그 곳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독한 고량주 종류의 술을 한 잔 받으면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단숨에 마시고 빈 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술 한 잔 받으면 질금질금 쥐소금 녹듯이 마시는 내가 그 광경을 보니 놀랄 수밖에‧‧‧‧‧‧.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은, 사람은 한국인이지만 생활 방식이나 풍습은 중국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식사 때마다 술을 곁들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아마도 나같은 술 못 마시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일 주일 동안의 연변 나들이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면서 술은 끝내 못 배우고 큰 고역만 치루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집에는 중국에서 선물로 받아온 독한 웅담주가 그대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