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과연 그녀의 정체는 누구인가?
1989년 <화랑세기>필사본이 처음 공개됐을 때 위작 논쟁이 벌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는 난잡한(?) 남녀관계였다. 그러나 ‘화랑세기’는 이런 근친혼을 ‘신국(神國)의 도(道)’라는 고유한 개념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22세 풍월주 양도는 이복누이와의 결혼을 권유하는 어머니 양명공주에게 “중국 풍습이 아니라 신라의 풍습을 따르겠다”며 수락하는데 이에 대해 양명공주는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어찌 중국의 도로써 하겠느냐 ”라고 칭찬한다.
진흥왕은 미실의 군주(君主·일종의 후궁)임명을 기념해 큰 잔치를 베풀고, 이를 기념해 연호를 대창(大昌)이라고 고쳤다. 당시 신라인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이 아니라 신라 고유의 ‘신국의 도’ 를 신봉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신국의 도’ 라는 프리즘을 통해야 미실과 신라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사학계는
미실(美室)의 존재를 부정하여 철저히 은폐·말살해왔다.
미실이라는 인물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동방예의지국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한국은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세우는 데 역사를 동원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그 나름의 법률과 도덕이 존재했으나 민족사는 단군 이래 한국사의 무대에 등장한 모든 사람들에게 현대의 윤리, 도덕의 옷을 입혀버렸다. 현대 한국사학은《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몰아붙임으로써 미실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부정하였다.
진흥제가 부인 사도왕후에게 말하기를
“너의 조카 미실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 하였다.
사도왕후는 이에 미실을 진흥제에게 추천하였다.
진흥제가 한 번 사랑하고 두 번 사랑하고는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화랑세기》 11세 하종 조.
※주 : 잉첩이란 왕족의 시중을 드는 궁중나인 직급의 하나.
미실은 대를 이어 색공을 바치던 대원신통(왕비 또는 궁녀 후보 양성 및 공급책) 출신으로서
왕들에게 색공할 운명을 타고 났다.
오도~옥진~묘도·사도·흥도~미실로 이어지는 색공지신 계열답게 색사(色事)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인통(姻統)에 속한 여자라도 왕의 총애가 있어야 왕비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인통출신의 여자들은 한 줌에 불과한 신라의 최고위 지배층과 근친혼을 할 수 있는 특권집단
이었다. 미실은 선대가 가진 아름다움의 정수만 뽑아 빚은 듯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인데다가
일찍이 교태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익혀 왕에게 색공하여 왕궁으로 진출할 야망을 품었다.
미실의 색공 일생을 통해 신라의 왕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왕-태자-왕자-전군-왕비-후궁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이 근친혼을 통하여 혈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왕위계승·골품·인통·화랑 등 여러 요소들도 어느 하나 동떨어져 개별적으로 움직인 것이 없었다.
말하자면 신라는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움직이던 복합 사회였다. 미실의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신라사회를 움직이던 요소들과 다 맞닥뜨리게 되어 신라 사회의 본질을 샅샅이 파헤치게
되어 있다.
미실의 色供一生 (그 로맨스 상대 짝꿍들)
1) 세종전군
미실이 가장 처음 색공한 첫남자. 미실이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종과 상통하여 정분이
깊어졌다. 세종의 모친인 지소부인과 미실의 이모인 사도부인 사이의 마찰로 미실은 강제 출궁을
당하나, 세종이 미실을 그리워한 나머지 병이 나자 미실은 다시 궁으로 불려 들어간다.
《화랑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세종은 미실을 자기 목숨처럼 여겼다 한다. 세종과 미실 사이에
태어난 이가 11세 풍월주 하종이다.
2) 사다함
5세 풍월주(화랑 지휘관) 사다함은, 세종을 섬겨 짧은 부귀를 맛보았으나 궁 밖으로 내쳐진
미실을 위로하여 부부의 연을 맺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야 정벌에 나선 사이 미실은
다시 세종의 부름을 받아 입궁한다.《화랑세기》에는 사다함이 친구를 잃고 상심한 나머지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고 하나, 실제는 미실을 잃은 슬픔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3) 진흥왕 (540~576: 색공시기 565~576년경)
진흥왕은 왕후인 사도의 조카 미실을 잉첩으로 삼아 색공하게 하였고, 미실에게 황후의 지위와 같은 황후궁 전주의 자리를 주었다.《화랑세기》에 진흥왕이 미실을 총애함이 4해를 뒤집을 만하였으며,
진흥제가 출입할 때 반드시 미실을 동행시켰다 한다. 미실이 동륜태자가 죽는 사건에 휘말려 출궁당한 후에도 차마 잊지 못해 세종의 아이를 임신한 미실을 다시 불러 곁에 두었으며, 아이가 태어나자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4) 동륜태자
미실은 왕위계승 제1순위인 동륜과 상통하여 애송공주를 임신한 상황에서도 그 사실을 숨기고 진흥왕에게 색공하였다. 동륜은 진흥왕의 후궁 중 한 명이었던 보명궁주와 관계를 맺어오다 572년 3월 보명궁의 큰 개에 물려 죽었다. 이 사건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미실이 동륜을 비롯한 설원랑, 미실의 동생 미생 등과 상통한 사실 등이 백일 하에 드러나 출궁 당하였다.
5) 설원랑
7세 풍월주. 죽기까지 미실에게 충성과 사랑을 아낌없이 바쳤던 인물이다. 설원랑은 미실의 애인이자 후견인이 되고, 설원랑 그는 미실의 심복 역할을 함으로써 미실의 정치적 세력이 구축되었다. 설원랑과 미실 사이에 태어난 이가 후에 16세 풍월주가 된 보종이다.
6) 진지왕 (576~579: 색공시기 576~579년경)
형인 동륜태자가 일찍이 개에 물려 죽고 진흥왕이 세상을 뜨자 제25대 왕으로 등극했다. 미실은 계획적으로 그가 태자였을 때 미리 남녀관계를 맺어놓고 왕이 된 후에 왕비 또는 후궁자리를 약속받았다. 미실과 사도태후의 치밀한 공작으로 왕위에 올려놓으나, 정작 여론이 미실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진지왕은 재임 기간을 3년도 못 채우고 사도와 미실에 의해
폐위되었다.
7) 진평왕 (579~632: 색공시기 579~595년경)
미실은 진평왕이 13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색을 가르치고 그 대가로 후궁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덕에 미실과 사도태후는 내정을, 그 심복인 세종과 설원랑, 미생 등은 외정을 손에 넣고 마음대로 하였다.
미실의 최후는 그녀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진흥·진지·진평의 세 왕을 모신 그녀가 진평왕
28년(서기 606년) 병에 걸리자 설원랑은 자신이 병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설원랑이 대신 죽자 미실은 자기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로 갈 것이다”라며 슬퍼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58세였다. 우리 역사에서 다수의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아도 다수의 남성들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미실 그녀가 유일하다.
그것도 절대적인 권력 속에서 자발적으로….
※참고도서 : 여인열전 (이 덕일) / 김영사
색공지신 미실 (이 종욱) /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