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황궁에 유폐돼 있을 당시 푸이가 타던 승용차. 그는 실권은 없었으나 황제가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런 생활은 그대로 유지했다. |
푸이의 신분증. 정원사에서 물러나 58세 때 문사자료연구위원으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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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마지막 황제 |
위황궁 푸이 진열관에 전시된 그의 밀랍인형. 황제의 자리에서 평민으로 격하된 그가 바느질을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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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가 심은 소나무 뒤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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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춘 문화광장 인근에 있는 옛 만주국 국무원 건물이다. 지금은 캐나다 의사 노먼 베쑨(白求恩)의 이름을 딴 백구은 의대 기초의학원으로 돼 있다. 그의 전신상이 건물 앞에 있다. 이곳은 만주국의 최고행정기관이었다. 건물 앞엔 만주국에 복무했던 중국인 한간(漢奸.민족반역자 또는 매국노)들의 사진과 행적이 적나라하게 전시돼 있다.
일본 토쿄의 국회의사당을 본떠 1936년에 완공된 철근콘크리트조 건물이다.. 당시엔 총 연장 6km의 지하통로가 창춘역과 관동군사령부와 연결돼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됐다. 지금은 의과대학 실험실로 이용하고 있다.
국무원 총리가 쓰던 냉장고 등이 전시돼 있고 일제 때 만든 엘리베이터도 있다. 건물 앞 소나무는 마지막 황제 푸이가 심었다고 한다. 푸이는 소나무를 심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곳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자원봉사 가이드는 조선족 동포 어르신이었다. | | |
신경군관학교. 옛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자리다. 이곳은 선양의 봉천군관학교와 함께 만주국 장교를 길러내던 곳이다.
이 학교 출신 중 우수한 조선인 엘리트들은 졸업 후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박정희(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를 비롯해 정일권(봉천5기·일본육사 54기·만주군 헌병 대위), 백선엽(봉천9기·간도특설대 중위), 이한림(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 김석범(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신현준(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등이다. 원용덕(만주군관학교 교의·중령)과 김창룡(관동군 헌병교습소·헌병오장)도 만주 군맥의 일원이다.
한국의 개발독재를 주도한 인물 중에 이곳 출신이 많다. 지금은 중국인민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로 쓰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은 땅크학교라 부른다. 경비가 삼엄해 차 안에서 한 컷만 누르고 자리를 떴다. |
만주국과 위만주국
지린성(吉林省)의 성도(省都) 창춘(長春). 봄이 일찍 온다고 붙인 이름이다. 일설엔 봄과 여름이 겨울에 비해 짧아 봄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창춘으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구는 약 700만. 창춘시내 인구는 약 4백만 정도다. 이곳에 사는 조선족 동포는 약 4~5만 정도. 연변이 지린성내에 있기 때문에 지린성 정부엔 조선족 동포간부가 많이 포진해 있다. 한국인은 약 3000명 가량 살고 있다.
창춘시 차오양(朝陽)구 정부는 2004년 6월부터 계림로와 목단가 일대를 한국인 상업특구로 개발해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특구는 계림로를 중심으로 동쪽은 인민대가에서 서쪽 신민대가까지, 남쪽은 자유대로에서 북쪽 동광로까지로 면적은 1064평방킬로미터다. 현재 차오양구 코리아타운에는 한글간판이 있는 60여개의 한국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창춘은 대구시와 같은 분지이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산은 없다. 이퉁강을 끼고 있지만 백두산에서 발원한 주신의 어머니 강 쑹화강은 이 도시를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녹지비율이 높아 삼림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시내를 관통하는 스탈린대가에는 키 큰 가로수가 8km나 이어져 있다.
대구와 닮은 또 한 가지는 교육 도시로 유명하다는 점. 2007년 전국 순위 8위의 지린대학과 동북 최고의 사범대학인 둥베이사범대, 창춘지질학원 등 40여개의 대학이 있으며, 수 십 개의 자연과학연구소가 밀집해 있다. 이 대학들에서 부교수 이상 되는 조선족 동포 교수만도 300여명이 넘는다.
거의 매년 대학입시 때 조선족 동포 고등학생들이 지린성의 문과, 이과 수석을 놓치지 않을만큼 조선족 학생들은 똑똑하기로 소문이 나있다. 한국의 유학생도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곳이다.
도시의 역사는 인근 지린시보다 훨씬 짧다. 1954년 9월 중국인민정부는 지린시에서 창춘시로 성도를 옮겼다. 고구려, 부여의 역사유적이 산재한 지린과 달리 이곳엔 고대유적이 거의 없다. 다만 1930년대 일제 때 지은 건축물을 비롯한 근대 유적들이 많다. 약 2천년 전에는 관성자(寬城子)라는 부여의 궁궐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독일의 폭스바겐 자동차공장이 창춘에 있는 등 창춘은 중국 내에서 자동차생산의 5분의 1을 차지 할 만큼 자동차로 유명한 도시다. 1953년 소련의 원조하에 중국 최초로 설립한 창춘제일자동차(一汽)공장은 중국 최초의 국산트럭 <해방>을 만들었다.
공장부지는 관동군수역예방부로 위장했던 관동군 제100부대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의 세균공장이었다. 장쩌민 전 주석은 창춘자동차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적도 있다.
한국의 금호타이어는 지난해 이곳에 타이어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금호그룹은 창춘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창춘은 또 영화의 도시로 유명하다. 1938년 푸이가 위황으로 있던 강덕 5년 만주국은 창춘에 중국 최초로 영화촬영소를 세웠다. 당시 명칭은 만주영화협회다. 1945년 중국 공산당은 이를 접수해 둥베이영화사로 바꿨다. 1955년 둥베이영화촬영소는 창춘영화제작소로 변경되었다.
창춘디엔잉청(電影城)은 영화관련 테마공원인데 2005년 초 창춘디엔잉스지청(長春電影世紀城)이란 이름으로 준공했다. 이 테마공원은 미국의 할리우드를 본떴다. 1992년부터 시작한 창춘영화제는 중국의 대표적인 국제영화제로 2년마다 열린다. 지난 2005년 제7회 영화제엔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출품되기도 했다.
연변 출신의 박준희 감독은 <당시>,<만종>등을 제작한 장률 감독과 함께 중국 내 조선족 동포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한국에도 꽤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인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의 군가를 작곡한 정률성을 기리는 <태양을 향하여>,<꽃 파는 처녀>, 중국과 북한과의 최초합작영화인 <역도산의 비밀>등을 제작해 히트를 쳤다.
지난해 말에는 헤이룽장성 다칭(大慶)유전개발의 일등공신인 왕진희의 일대기를 기린 <철인 왕진희>제작발표회도 가졌다. 그는 창춘에 위치한 동포신문인 길림신문 박문희 부사장의 친동생이기도 한데 창춘영화제작소에서 그의 안내로 영화제작소를 둘러보기도 했다. 박 부사장은 넉넉한 품성과 하회탈같은 미소를 지닌 분이고 박 감독은 예술적인 끼가 넘치는 분이다.
창춘은 일제 치하 만주국(1932~1945)때 신경(新京)으로 불렸다. 신경(新京)은 만주벌판에 세운 철저한 계획도시로 기본설계부터 조경까지 모두 일제가 구상한 신 수도였다. 원형은 훗카이도 삿포르를 본떴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일제잔재라 뭐다 하면서 거의 다 부셔버렸지만 창춘에선 창춘역(엣 신경역)을 제외하곤 신경(新京)시절 만주국 건물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창춘역은 서울에 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시기와 같이 파괴시켰다고 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만주국 건물들은 현 창춘시의 관공서, 대학, 병원 등의 건물로 쓰고 있다. 상하이 와이탄 공원에 있는 유럽식 건물들, 다롄의 수 많은 일본 적산가옥, 하얼빈의 러시아 건물 등을 보라. 중국인은 부끄러운 과거의 유적을 모조리 파괴시킨 한국인과는 분명 다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한민족에게 이상주의자가 많다면 한족들은 현실주의자가 많다. 이상주의자에게 역사의 과오는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다. 그러나 한족들은 대개 아니꼬와도 잘 참는다. 참는 것이 이긴다는 진리를 이미 터득했기 때문일 게다
특히 남방 한족들은 더 그러하다. 중국 한족은 북방이민족에게 항상 시달렸다.근세엔 서구열강과 일본에 당했다. 그러나 역사의 치욕을 인정하는 대신 잊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한다. 일본에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한반도의 동해를 일본해라고 공식적으로 쓰는 그들을 보면 비굴함마저 든다. 그러나 일본해라고 쓰는 이면엔 일본이 한국보다 강하고 잘 사는 것을 인정한다는 현실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배알이 있고 없음을 중요시하는 한민족과 달리 중국인은 실속을 더 챙긴다. 겉으론 패한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승리하는 것. 비굴함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 와신상담의 한족 역사를 보라. 창춘은 만주국의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노 일본인 관광객이 유달리 많다. 그 건물들은 그들을 유혹하기 위한 관광상품 일뿐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을 본 딴 옛 일본 관동군사령부(현 지린성 공산당위원회), 만주국 국무원(캐나다 의사 노먼. 베쑨(白求恩)의 이름을 딴 현 백구은 의대 기초의학원), 검찰청(현 인민해방군 제461의원), 교통부(현 백구은 의대 예방의학원), 사법부(현 지린대 신민학교), 경제부(현 지린대 의대 제3임상학원), 군사부(현 백구은 의대 제1임상학원), 외교부(태양회 레스토랑), 중앙은행(현 인민은행 지린성 본사), 전신전화국(현 지린성 전신공사 본사)등이다.
이 밖에도 창춘엔 일제 만주국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2기)과 이한림 전 건설부장관(2기)등이 다녔던 만주 군관학교는 창춘시 라라툰(蘿蘿屯)에 있는데 현재 인민해방군 탱크학교(장갑병기술학교)로 돼 있다. 그 외 동양척식회사, 만선척식회사, 위만 건국대학교, 등 백여 개가 넘는 만주국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일제의 만주국을 만주국으로 쓰지 않고 빠짐없이 가짜라는 의미의 ‘위(僞)’자를 붙여 위만주국으로 일컫는다. 즉 ‘만주국은 없고 거짓’이라는 의미다. 또 그들은 공식적으로 만주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동북3성으로 부른다.
중국인에게 만주는 청나라의 중원 정복을 떠오르게 한다. 만주라는 지명을 사용하면 청나라와 현재의 중국을 동일시해 국가정체성이 모호해질 수 있다. 가깝게는 만주국을 앞세운 일본의 침략을 연상케하기 때문에 만주라는 말을 쓰는 것을 극구 꺼려한다.
중국인의 민족분류에도 '주'자를 빼고 만주족이 아닌 만족(滿族)으로 기재돼 있다. 한국인들이 무심코 쓰는 만주벌판은 중국인들 사이엔 동북평원일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라는 명칭을 고수한다.
만주라는 명칭은 원래 청 태조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을 세우면서 자신을 만주 칸(Khan)이라 한데서 유래한다.1635년 청 태종 홍타이지는 여진인을 만주인으로 개칭한 뒤, 만주는 점차 부족명칭에서 지역 명칭으로 바뀌어 전해 내려왔다.
홍타이지는 북방에 살던 여진족과 오르천족, 허저족, 어웬커족, 따우르족, 몽골족 등 북방민족과 조선족 등을 복속해 만주족으로 통일했다. 여기서 조선족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들이다.
유럽은 만주를 지명으로 쓰지 않고 족 명으로만 썼다. 즉 유럽인은 만주의 본래 용례대로 만주족을 ‘만주(Manju 혹은 Manchu)’라고 칭하고, 만주지역은 ‘만주족의 땅’이라는 의미로 만추리아(Manchuria)라고 칭해왔다. 아직 웹스터 영어사전엔 만주가 'Manchuria'로 돼 있다.
만주는 요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로 나눠졌지만 곧 동북3성이 만주로 돼 갔다. 만주는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자 우리 선조들의 발상지였으므로 우리는 만주도, 동북3성도 아닌 ‘북방’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
일본은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로부터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남만(南滿) 철도를 양도받았다. 그 후 창춘 지린 등 16개 도시를 개방시켜 일본인의 통상과 거주를 자유롭게 하면서 만주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등 야금야금 만주의 지배권을 넓혀갔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집어삼킨 뒤 1932년 3월 1일 일제의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그들은 만주지역에 먼저 만주친일괴뢰정권을 세우고 만주국을 독립시킨 후 결국 일본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일본, 만주족, 한족, 조선족, 몽골족 등 다섯 민족이 화합하는 ‘오족협화 왕도낙토건설’이란 미명아래 북방지역을 마구 수탈했다. 일제는 3살 때 서태후에 의해 황제에 올랐으나, 1912년 신해혁명 때 쫓겨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국의 초대 황제로 삼았다. 그리고 중국인을 국무총리 및 각 부 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사령관이 태상황으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주국은 13년째 되던 1945년 멸망했다. 위만주국 위황궁의 주인이었던 위황 푸이도 일본이 망한 뒤 중국을 접수한 공산당의 인민재판을 받고 10년간 랴오닝성 푸순전범관리소에서 복역하던 중 석방되었다.
그 후 잠시 정원사로 일하다가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역사 집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67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1987년 아카데미상 9개 부문을 석권한 베르나르도 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창춘 위황궁 동덕전에서도 촬영됐다.
창춘시내에서 동북쪽 변두리 광푸베이(光復北)로에 있는 위황궁은 12만평 정도의 위만주국 궁궐이다. 위만주국의 얼굴마담격인 푸이 황제는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 궁궐은 푸이가 어릴 때 살았던 베이징의 자금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청나라의 시조인 누르하치와 2대 황제 홍타이지가 머물렀던 선양의 고궁에 비할 바도 못 된다. 그러나 위황궁은 창춘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됐으며 현재 지린성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위황궁은 근민루, 집희루와 동덕전 등으로 구성돼 있다. 2층 목조건물이 대부분이다. 이 건물들은 중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결합했다. 위황궁은 정사를 돌보는 외정과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각각 위만황궁 진열관과 위만제궁 진열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근민루, 회원루, 가락전 등은 외정이며 화원, 수영장, 골프장, 승마장 등이 딸려 있다. 내정은 푸이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구역으로 집희루는 그의 황후 완롱의 처소였고, 동덕전은 푸이의 첩 리위진, 즉 복귀인의 처소다.
위황궁에 도착하려면 주차장에서부터 약 200여 미터의 길을 따라 황실근위병의 숙소를 지나가야한다. 이곳에는 2004년부터 기념품가게와 노점상이 들어섰다.
창춘문이란 입구를 지나면 위황궁의 모습이 보인다. 위황궁 입구엔 장쩌민이 쓴 ‘勿忘九一八’이란 한자가 보인다.(사진) 글자 그대로 ‘잊지 말자 9.18사변’이다. 중국은 위황궁을 그대로 보존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각각의 작은 궁궐은 네모지게 지었다. 중간엔 정원이 있다. 카펫으로 깐 방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 2층의 복도와 방은 서로 연결돼 있다. 푸이의 도서실, 집무실, 침실, 회의실, 연회장, 욕실주방 등이 있고 부인과 첩의 방도 있다. 푸이와 그의 부인 등이 입던 황실의 옷과 사진 등도 전시돼 있으며 그가 타던 자동차도 있다.
그가 처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생을 기록한 전시관도 있다. 이곳엔 그가 쓰던 숟가락, 안경 등의 유품과 외교기록문서, 일기, 각 종 사진을 비롯해 그의 밀랍인형도 있다. 특히 평민이 돼 바느질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위황궁을 관람하는데 1시간이면 빠듯하고 2시간이면 충분하다.
근세에 창춘은 1족(일본족)으로 인해 4족(조선족, 한족, 몽골족, 만주족)의 슬픈 역사가 짙게 베여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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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시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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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의 한 호텔에서 바라본 하얼빈 시가지 모습. 러시아풍 건물이 많은 매력적인 도시다. 하얼빈은 만주어로'그물을 말리는 곳'이다. |
조선인 마루타와 요코 이야기
십여 년 넘게 미국의 일부 중학교 영어 교재로 사용하는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자전적 소설 <대나무 숲 저 멀리>(So far from the bamboo grove)의 한국어 번역판 <요코 이야기>가 화제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선 출판이 금지되었지만 2005년 4월 한국에서는 별 문제 없이 출간되었다. 언론의 반응도 대체로 괜찮았다. 지금과 같이 이 책에 대한 여론의 뭇매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계 학생과 학부모를 중심으로 이 책이 ‘착한 일본인 나쁜 한국인’ 이란 인식을 심어준다며 등교거부와 교재채택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자 이제야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에선 그냥 지나갔는데 미국의 동포들이 나서서 이와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고 행동에 나섰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이 책의 저자인 요코의 아버지가 일제 당시 만주국 하얼빈에 있는 731부대의 고위 관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이 불거짐에 따라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였던 ‘731마루타 부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731부대는 이미 <마루타>란 제목의 소설과 영화로도 소개되고 언론에도 여러 번 보도가 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하얼빈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20km쯤 떨어진 핑팡(平房)구 신장다제(新疆大街)21호에 자리잡고 있는 ‘침화일군(侵華日軍)731부대 죄증 진열관’은 빙등제가 열리는 태양도와 더불어 현재 하얼빈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다. 이곳은 시내에서 자동차로 40분가량 걸린다. 이곳은 나치독일이 저질렀던 벨센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이 일제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전시해 놓은 역사박물관이다.(사진) 2006년 당시 입장료는 어른 20위엔, 학생 10위엔, 어린이는 무료였다.
중국에서는 2006년 이곳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2005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 신청을 했다. 아우슈비츠수용소가 이미 1979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에 비하면 늦은 감이 없진 않다.
이 진열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의 붉은 색 벽돌로 된 건물이다. 건립 당시엔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 항복 직후 20여개가 넘는 인체 실험실과 각종 건물을 폭파해 증거가 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소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본부동과 부서진 시체소각로 건물 등만이 남아 당시의 참상을 묵묵히 전해주고 있다.
본부 건물은 2차 대전 당시 731부대의 본청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본부 건물에는 작은 방으로 구성된 15개의 전시실이 있다. 이곳에는 수 천 점의 관련 자료와 일제가 저질렀던 주요 31가지의 생체실험 과정을 모형으로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희미한 조명의 작은 방마다 당시 사용했던 수술용 기구와 집기, 세균포탄 조각, 방독면, 각종 사진자료가 있다. 731부대와 관련한 영상물을 볼 수 있는 영상자료관도 있다. 설명이 중국어로만 되어 있어 불편한 감이 없지 않다. 매년 수 만 명의 한국인과 일본인이 다녀가는 곳인데 외국 관광객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이곳은 1935년에 세웠다. 1945년 폐쇄될 때까지 이곳에서 희생당한 중국, 한국, 몽골 소련, 미국, 영국인 등의 수는 공식적으로 3천 여 명 정도다. 그러나 일설에는 1만 5천명이 넘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추가로 시신이 발굴되고 증언이 이어져 나오기 때문에 사망자의 수는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한 전문가에 의하면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세균전에 희생된 주검은 확인된 것만 58만 명이며, 최소한 100만 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태인의 주검이 120만명이라고 하니 그 숫자에 버금간다.
731부대는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일본 육군 군의중장의 이름을 따 ‘이시이 부대’라 불리기도 한다. 교토대 의대 출신인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총장의 딸과 결혼하고 군 장학금으로 유럽의 생물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그의 건의에 따라 1935~1936년 히로히토 일왕의 칙령으로 창설된 세균부대는 모두 4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얼빈 인근의 731부대, 현 창춘자동차 공장부지인 100부대, 난징의 1644부대, 광둥의 8605부대가 그것이다. 그의 밑에는 3천명이 넘는 일본인 직원이 있었다. 그의 행적에 관한 각종자료가 사진과 함께 죄증 진열관에 자세히 전시되어 있다.
731부대는 인체실험실에서 희생된 ‘마루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루타는 일본말로 ‘통나무(丸太)'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산 사람을 통나무처럼 취급해 의학실험을 하던 곳이었다. 731부대가 생겨난 뒤 이곳에서 살아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할만치 철저히 외부와 격리된 채 인체실험이 자행됐다.
이곳에 수용된 인간은 실험실 흰쥐와 같은 처지였다. 페스트, 장티푸스, 콜레라, 결핵, 매독 등 수십 가지 세균을 배양해 마루타들에게 직접 실험했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도 마루타에게 투여된 세균주사를 맞았다고 알려져 있다. 영상자료관에서는 마루타들에게 자행된 갖가지 생체실험들을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생사람을 마취없이 해부하는 것은 기본이다. 극저온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손을 얼린 후 부러트리고, 극고온에서 피부를 익혀 껍질을 벗겨내며, 독 가스실에 가둬 죽이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실험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됐다. 이 밖에 사람 몸에 전류를 통해 감전사 시키고 밀폐된 유리 상자에 사람을 넣고 공기를 빼 질식사 시키는 장면도 나온다.
작은 방들을 지나면 긴 복도를 따라 밖으로 이어진다. 어두컴컴한 복도 옆에는 이곳에서 희생된 마루타들의 인적사항과 체포날짜가 적힌 대리석 명판이 줄지어 있다. 이 중 심득룡과 이청천 등 조선인 명패도 있다.
여기서 숨져간 이들은 주로 독립투사나 전쟁포로 등이었지만 아무 죄 없는 민간인도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지하 복도를 지날 때면 죽은 자들의 원혼이 느껴지면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갔을까?
2차 대전 종전 후 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 중장의 도쿄 국제군사법정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 희생된 마루타는 총 3850명이었다고 밝혔다. 이 중 러시아인이 562명, 조선인은 254명, 나머지는 모두 중국인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중국은 3천여 명의 희생자 가운데 2005년까지 1463명의 신원을 밝혔다고 한다. 2005년엔 조선인 4명의 인적사항이 추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나머지 248명의 조선인과 수 천 명의 중국인들은 이름도 없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었다.
평정심을 가지고 이곳을 둘러보기는 매우 힘들다. 이곳을 찾은 당일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워 더욱 음산한 기분이 들었다. 2000년 난징대도살 기념관을 둘러볼 때도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난징대도살 기념관에는 희생된 주검들의 유골과 뼈 등을 유리관 속에 넣어 흙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난징이나 하얼빈이나 두 곳 다 ‘생지옥 관광’이다. 둘 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731부대가 이와 같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부대의 연구결과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인간백정’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만행의 주인공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은 뉴딜정책과 노변정담으로 유명한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미국은 이시이 시로에 대한 처벌은커녕 그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고 고급주택에 살게 했다고 한다.
이시이 시로는 말년에 토쿄대 학장까지 역임했다. 진열관에는 미국의 이중적인 행위를 비난하는 중국의 외침을 느낄 수 있다. 중국 동북인들은 미국에 대해 한국과 같은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만주국 시절 일본의 야수적인 행위를 눈감아준 것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그들의 혈육 때문일 것이다.
같은 대국이면서도 문화적으로 미국을 얕잡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 스스로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 중에 중국과 미국의 격차가100년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치경제적, 문화적 제반 지표들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세계 경찰이라고 하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은 채 국가적 양심마저 버린 일은 용서받을 수 없다. 지금 미국이 세계에서 저지르는 여러 침략전쟁도 별반 다르지 않다.
731부대에 관한 한 미국도 약소국의 권리와 인본주의를 무시하고 이시이를 용서한 과거 전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진주만 공습이후 일본이 미국 본토에 상륙, 미국인을 중국인이나 조선인처럼 도륙했다면 미국이 일본을 지금과 같이 후하게 대접할까?
2002년 일본 법원은 731부대의 행위 자체는 인정했지만 피해자들의 배상요구는 기각했다. 중국인 희생자들은 731부대 및 난징대학살에 대한 배상금을 일본 정부에 청구한 상태로 항소를 계획하고 있다.
일제 침략으로 희생된 중국인은 모두 3천5백만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이 근세 역사교과서를 왜곡할 때 중국도 우리만치 분개한다. 그래서 요코 이야기 같은 책은 중국에서 결코 출간 될 수 없다.
<요코 이야기>는 유럽판 ‘안네의 일기’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안네는 피해자인 유태인 소녀였고 요코는 가해자의 딸이다. 더욱이 이 픽션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잘 모르는 미국인들에겐 가해자인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문학작품이 현실을 반영한다면 <요코 이야기>는 실화에 가까운 자전적 소설이라 더 그러하다. 미국에서도 이 교재를 사용하지 않는 학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편, J일보의 L언론인은 이 소설에 대해 분노하는 국민들에게 '가해자= 일본, 피해자=한국'이라는 등식의 민족주주적 집단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는 또 세계시민의 시대에 19세기에 등장한 민족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즉 <요코 이야기>를 문학작품으로만 평가하자는 이야기다. 그는 그게 성숙한 사회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케케묵은 것이 아니다. 19세기에 등장하긴 했지만 단지 그 정의가 등장했을 뿐 민족은 가족과 같은 핏줄로 형성된 개념이다. 가족이란 개념이 시대가 바뀌었다고 바뀌지 않는다.
동북공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국과 틈만 나면 독도가 자기 땅으로 우기고 있는 일본이 버젓이 있음에도, 또 정신대 할머니가 아직 일본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시퍼렇게 살아있음에도 그의 "세계시민 운운"은 지나치다. 동북아가 유럽과 같은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그의 표현대로 우리가 북한처럼 집단적 민족주의 주술에 사로잡혀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늘 이야기하듯 우리 민족이 동북아에서 쓸개같이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중국과 일본과 다르다는 강한 민족심'이다. 동북아에서 사라진 수 많은 소수민족을 봐도 그렇다. 이렇게 분노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는 없다.
내선일체에 동조하거나 중화민족에 흡수돼도 괜찮단 말인가? 세계시민이 된다고 핏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한국인이 한국축구를 응원하는 것이 고리타분한 것인가? 월드컵에 열광했던 수 많은 국민들은 그럼 무엇인가?
팔순이 다 되어가는 우리 아버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일본인 교사가 한 명 있다. 그는 곧 구순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에도 그 일본 선생님으로부터 아버지께 편지가 왔다. 그 일본 선생님은 아버지께 보낸 오래 전 편지에 ‘한국인에 고통을 준 일본의 과거’에 대해 개인적으로 용서를 빌었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도 아버지는 늘 자신이 존경하는 일본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해 주셨다. 그 일본인 선생님은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 하는 아버지를 편애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아버지 또한 그 일본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게 너무 많다고 했다. 사제 간 정을 나누는 서신왕래를 70년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 선생님은 제국주의 시대에 사랑하는 조선의 한 제자가 커서 자신 같이 선생님이 된 사실을 알고 기뻤을 게다. 두 분이 한국에서 재회한 적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본에 대한 극일정신이 그 누구보다 단호하다. 아버지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 선생님에 대한 이중적인 평가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역사는 그 사회와 국가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요코 이야기>를 한번 읽어봐야겠다. |
1948년 당시 731부대 모습.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보존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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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실험 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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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의사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생사람을 해부하고 있는 모습이다. 731부대 죄증 진열관에 전시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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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의 본부 행정동이다. 1945년 파괴되었지만 다시 원형으로 복원해 지금은 역사 전시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
731부대의 보일러실. 건물은 파괴되었지만 굴뚝은 그대로 있다. 마루타로 희생된 주검들은 이곳에서 재가 돼 사라졌다. |
731부대 세균실험 기지가 있던 자리. 건물이 'ㅁ'자 모양으로 되어있어 사방루라고도 부른다. 현재 2,3,4,6호 등의 건물터가 남아있다. 뒷편은 아파트 단지다.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매일 731부대를 보며 산다. 한국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
731부대 남문이 있던 자리. 바로 뒷 편에 731부대 본부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매표소 입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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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3년전 갔다 왔다 사진을 못찍게 하는곳도 있는데 용케 찍었네 난몇군데 밖에 못찍어 왔는데 ...재마니 언제 갔다 왔어?
집접,갓어???좀끔찍해..,731부대가생채실험,마루타,,
퍼 왔다 아이가 대조영 드라마 땜에